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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42화 (42/314)

환관의 요리사 42화

배부른 고양이처럼 늘어진 태감에게 후식을 가져다주며 소년은 무심코 그 백자 같은 볼을 찔러보고 싶기도 생각했다.

얼음을 깎아 조각한 것처럼 생긴 인간이 저렇게 푸근한 표정으로 늘어져 있는 게 신기했다. 아마 소수의 측근만이 볼 수 있는 표정이겠지.

평소 반 가면을 쓰고 다니니 자연스레 햇볕에 노출된 아래쪽이 더 그을려야 할 텐데도 태감은 위나 아래나 다를 바 없이 하얬다.

“참나, 여름이 되면 아래쪽만 그 올려서 얼굴색이 반반으로 나눠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군요.”

“허, 그렇게 되면 꽤 재밌겠구나. 대웅묘(大熊描, 판다) 같겠는걸?”

후식은 목청을 뿌린 녹차 양갱과 한천으로 만든 과일 젤리. 과일은 싱싱한 여지를 살짝 졸여 사용했다.

젤라틴을 구하기 어려워 궁여지책으로 한천으로 만든 것인데 그 탄탄한 감촉은 젤라틴 젤리의 탱글탱글한 감촉을 기억하는 소년에게는 조금 미묘하게 느껴졌지만, 태감에게는 입에 맞는지 자주 간식으로 내게 되었다.

젤리는 설탕에 졸인 새콤달콤 신선한 여지가 듬뿍 들어가 향이 무척향긋했다.

“그 젤라틴이라는 건 한마디로 효육(肴肉) 같은 것의 말랑말랑하게 육수가 굳은 것을 말하는 거란 말이지? 그 육수에 과일을 굳힌 게 그렇게 맛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다과에 사용하는 것은 최대한 잡맛을 걸러야 하지요. 돼지 냄새나는 다과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들 수 있을지…….”

잠깐 고민하던 태감은 양갱을 한입 떠먹고는 선뜻 대답했다.

“그렇게 맛있다면 한번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겠군. 한번 알아보마.”

공장에서 만들 때는 강한 산으로 한번 처리를 한 다음 추출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과연 중 근대의 유럽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젤라틴을 추출한 걸까?

그걸 고민하는 것은 이제 태감이 고용한 다른 이들이 고민할 일이었다.

빨갛게 잘 익은 앵두보다도 더 새빨간 태감의 혀 위에서 탁한 유백색 여지가 데굴데굴 굴렀다.

금방이라도 단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달콤하고 껍질이 터져 그 다디단 향기를 흘릴 것처럼 농밀한 빨간색. 새하얀 여지는 옥구슬처럼 붉은 살점 위에서 구른다.

“아 거 후딱 먹어요. 뭘 그렇게 신줏단지 아끼듯이…….”

“그래도 금방 삼키기는 아깝잖아?”

소년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한참 동안 여지를 혀 위에서 굴리던 태감은 아쉽다는 듯이 여지를 꿀꺽 삼키고 늘어져 있던 몸을 세웠다.

마치 알을 삼킨 뱀이 몸을 일으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 먹은 새끼비둘기는 황궁에서도 귀하게 대접받는 고급스러운 식재료였지, 보통 특별한 연회에서나 나올 만한 음식인데 말이야.”

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조리법을 알고 있는 거냐?

후궁에서 평생을 살았을 소년이 그런 고급 식재료의 조리법을 알고 있는 것은 확실히 위화감이 든다.

하지만 소년은 굳이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로 태감과 마주했다.

“제가 원체 천재적이어서요.”

“하여간…….”

말할 수 없을 비밀을 품고 있기에, 상대방이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언젠가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는 그 날이 올 때까지 그들의 아슬아슬한 주종관계는 유지 될 것이다.

그 날이 올까?

정말로?

소년이 태감에게 바라는 것은 의미있는 죽음이다. 후궁의 한구석에서 남길 이름도 없이, 찾아줄 이도 없이 죽어가는 것이 두려워 소년은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 줄 거라는 희망과 기록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세상 일부를 바꾸었을 거라는 성취감을 위하여 소년은 비참하지만 그만큼 안온했을 구더기 생활을 청산했다.

만약 태감과 술잔을 기울이며 수줍게 서로의 비밀을 교환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즉 소년의 비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더 이야기해 봐야 서로 득이 될것이 없으니 소년은 얌전히 화제를 돌렸다. 난화비 일을 마무리 지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홍엽비에 대한 일이었다. 마침 소년에게는 홍엽비의 건강을 확인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어 굳이 태감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홍엽비를 만나 건강을 확인하고 난화비와의 식사에서 낼 음식을 물어보는 것이 주된 임무였지만 그 속으로는 소소의 존재를 떡밥 삼아 남양중에서 불순분자들을 솎아낼 밑 작업을 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요리 솜씨만큼이나 말솜씨 또한 중요한 임무였기에 소년을 혼자 보내는 것이 조금 꺼려졌지만, 태감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가 직접 나서기에는 너무 사소한 일이고, 그렇다고 이런 일을 할 만한 이중 소년만큼 홍엽비와 안면이 있는 이가 없었다.

장소와 이삼이 열심히 나인들에게 소문을 퍼뜨리고 있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홍엽비의 인식에 변화를 주지 못하면 일은 실패하는 셈이니 소년의 임무가 막중했다.

“일단 장소를 내줄 테니 내일은 호위 겸해서 데려가거라. 그 녀석은 다리가 빠르니 여차하면 너 하다 업고 뛰는 건 일도 아닐 테지.”

“아니, 설마 남양궁에 사특한 무리가 침입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거 말고. 너에게 원한을 품은 나인이 네게 해코지할 수도 있으니까.”

태감의 말에 소년은 무척 아니꼽다는 눈으로 태감을 흘겨보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도 남자인데 설마!

소년의 자신만만함에 태감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을 눈으로 표현하는 진기명기를 보여주었다.

세상에 사람을 이런 형태로 업신여길 수 있다니! 이렇게 참신한 엿 먹이기는 처음이야!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비웃음에 굴복한 소년은 고개를 떨구고 접시를 치워 주방으로 향했다. 유난히 가슴이 쓰린 날이었다.

나서는 길, 소년이 문을 닫기 전 태감이 넌지시 물어왔다.

“내일 아침은?”

“적당히 있는 거 내겠습니다.”

소년의 적당한 대답에 피식 코웃음친 태감은 이내 쌓아둔 죽편과 서류 더미에 시선을 돌렸다.

태감이 서류 업무에 열중하는 동안 소년은 주방에서 장소들을 먹일 야식을 준비했다.

달그락거리며 양념장을 섞는 소년의 옆에선 소소가 서툰 솜씨로 채소를 다지고 있었다.

초보자가 다루기 어려운 단단한 당근에 애를 먹는 모습에 무어라 할까하면서도 소년은 입을 꾹 눌러 닫았다.

그래, 처음 할 땐 다 실수하면서 크는 거지. 혹시나 무거운 칼에 손이라도 베일까 힐끔힐끔 그녀를 보던 소년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지친 눈으로 당근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 밑. 뺨.

소소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번의 반대편 뺨이었다.

선명한 자국을 사라졌지만, 주근깨가 살짝 뜬 뺨은 붉게 달아올라 다른 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러나 소년은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달콤한 위로의 감언이설도 소소를 치료해 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확실한 대안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최대한 빠르게 그녀의 현 상황을 좋게 바꿔줄 대안이 필요했다. 선임들을 치우던, 궁 밖으로 나가게 하던. 그리고 소년에겐 그것들을 이루어줄 방법이 있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신중하게 그녀의 의중을 떠보듯이 물었다.

“궁 밖으로 나가고 싶으냐.”

너무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머리로는 실컷 생각했으나 입으로는 그런 섬세한 배려가 조금도 녹아들지 않은 투박한 말이 튀어나왔다.

“예?”

“……궁 밖으로 가고 싶다면, 내보내 줄 수도 있다. 아니면 네 선배를 치워도 좋고.”

머릿속으로 충분히 계산했기에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소년은 거침이 없었다.

평소 자신이상으로 뇌 성능이 뛰어난 태감과의 대화로 다져진 중간 과정이 없는 기이한 화법에 소소는 적응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소년이 자신에게 이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했다.

“궁 밖이라고 하시면…….”

“네 고향 말이다. 내려가서 뭐 작게 장사라도 할 만한 지원금은 들려줄 테니.”

왜 그러는지, 그래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소년의 말에는 많은 정보가 빠져 있었지만 피로에 전 소소는 그저 귀에 들리는 말이 자신에게 좋은 말인 것 같으니 무조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좋은 거…… 같아요.”

“그래, 좀 더 생각해 봐.”

내리 갈굼과 걱정, 불안에 젖어 취침시간을 가지지 못한 소소는 피로에 뇌가 찌들어 제대로 된 생각이 완성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자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거릴 뿐, 그 모습을 보고 소년은 대충 알았다는 듯이 소소를 자리로 밀어내고 풍로로 아궁이에 불을 피웠다.

다진 당근에 가늘게 썰어서 한번 튀겨낸 돼지고기, 완두콩에 붉은 고추와 표고버섯. 설탕과 간장, 식초에 후추로 간을 해 살짝 새콤달콤한 맛을 내고 소량의 육수와 녹말로 끈기를 내 밥 위에 올려 먹는다.

특별한 이름은 없다. 주방에서 직원들 식사로 만들던 것이라…….

한번 튀겨낸 고기를 다시 볶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미리 양념을 완성한 다음 맨 마지막에, 크고 센 불로 단숨에 볶아내야 제맛이 나는 요리다.

너무 오래 익히면 질겨지고 튀겨낸 고기의 바삭한 맛이 죽어버려 무엇보다도 속도가 중요하다.

이삼과 장소가 오기까지의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소년은 돼지고기를 넣을 시간을 재고 있었다.

굽은 소년의 등 뒤에서 비틀거리던 소소는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어린 나이, 변변치 않은 것을 먹으며 자라 체력이 약한 그녀에게 이 며칠간은 가혹한 시간이었다.

낮 동안의 행복으로 도피하더라도 남양궁으로 돌아가면 선배들의 질책과 폭력, 잠 못 드는 시간이 이어지며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도달했으리라.

어린아이에겐 가혹한 시대다. 소년은 그 무심한 말이 싫었다.

비틀거리는 소소를 이부자리에 데려다 눕히는 소년의 눈동자는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에겐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뿐이다.

덕분에 각오를 다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야식거릴 찾아온 장소와 이삼은 쇠를 비틀어 깎은것 같은 소년의 표정을 보고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코에 진동하는 맛있는 음식의 냄새와 주린 배의 본능을 능가하는 살기 어린 귀신의 홍상이 있었다.

뒷걸음질 치는 둘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걸치며 소년이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웃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굶주린 이리가 거친 숨을 내쉬는 듯했다.

“내일, 잘 부탁합니다.”

“예…….”

“열심히…… 할게요…….”

“그럼 잘 먹어야죠. 소소는 피곤하다고 먼저 자러 갔으니, 우리끼리 먹읍시다. 식기 전에.”

가늘게 썬 돼지고기가 듬뿍올라간 덮밥을 받아들며 둘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 * *

풀을 빳빳하게 먹인 환관 관복에 대모갑을 댄 허리띠, 사슴 가죽신을 신자 오늘도 여지없이 훌륭한 간신배 그 자체가 된 소년은 동경을 들여다보며 쓰게 웃었다.

이 정도로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명품이 잘 어울리는 남자라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이런 페이스면 충무로에서 악역 한자리 내달라고 해도 되겠는데?”

연기력만 받쳐주면 나름…….

목소리도 카랑카랑하니 날카롭고 눈매도 날카로우니 연기발만 좀 되면 나름 먹힐 것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소년은 장소가 올 때까지 부드럽게 스트레칭을 했다.

굳은 어깨를 풀어주고 미리 할 말들을 예습하여 실전에서 꼬이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를 다 했다.

“오운 님, 이제 가셔야 해요.”

“예, 가십시다. 사전 준비는요?”

“미리 남양궁에 가서 준비해 두었어요. 재료는 따로 챙겨서 갈 거고요.”

홍엽비의 마음을 사기 위해 소년은 일부러 특별한 무언가를 준비해 두었다. 언변은 자신이 없지만, 요리라면 자신 있다.

결국 그의 직업은 요리사이고 가장 자신 있는 것도 요리. 자신 없는 언변으로 주절주절 떠들어 봤자 어차피 의미 없는 짓.

결국 그의 재주는 혀가 아니라 손에 달린 것이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

“네?”

“아, 이제 갑시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남양궁은 이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중간의 풋풋한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다.

키 큰 나무 아래 긴 시간을 나무와 함께했을 조각들을 기어오르는 덩굴에도 노란색이 섞인 듯한 연두색 새싹들이 올라와 있었다.

폭이 좁은 수로에 낀 이끼에도 꽃이 피는 시간.

부드러운 향기에 잠긴 남양궁은 잠시 발걸음을 멈춰 그 시간을 잠시만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을 만큼 아쉬웠다.

아침에 새소리와 함께 일어나 태양이 정오에 뜨면 변화하는 그림자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저녁노을이 하늘에 번질 시간에 온화한 색들이 겹겹이 하늘을 감싸 안을 시간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밤이 되어 달콤한 어둠이 내려앉을 시간이 되면 태양과는 다른 수줍은 달빛에 둘러싸인 남양궁은 정말 아름다우리라.

그러나 잠시 쉬어갈 깜도 없이 바쁘게 발을 놀려 남양궁에 들어선 이들은 떨떠름한 표정의 시녀 안내에 따라 홍엽비를 만나기 전 대기할 다실에 앉았다.

“흠, 좋은 차군요.”

“그런가요? 잘 모르겠는데…….”

“찻잎은 좋은 겁니다. 찻잎은.”

같은 무게의 은으로 거래한다는 서호의 용정차이니 귀하지 않을 리가 없다.

솜씨 좋게 우려낸다면 한 모금에 선계의 구름을 밟는다는 명차인데도 장소는 이것이 진정 용정차가 맞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 수밖에. 제아무리 좋은 차를 가져다 놓아도 우려낸 이의 솜씨가 거칠면 제맛이 우러나지 않는 법이다.

좋은 찻잎에 좋은 다과를 준비하라한 것은 홍엽비가 그만큼 그를 신경쓰고 있다는 방증이요 그런데도 차의 맛이 거친 것은 이 차를 우려낸 시녀의 품성을 말하는 것이니.

소년은 장소에게 속삭임으로 이 차를 우려낸 시녀를 조사하라 말했다.

또 다시 살생부에 이름 석 자가 올라갔다.

그리고 홍엽비와 대면하는 순간에 소년의 표정은 일체의 스산함도 없이 맑고 푸근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수년간 후궁의 정치판에서 그림자를 자처해온 장소조차 소름 끼치는 표정 변화였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기대하고 있답니다.”

“오늘보다는 다음 난화비 님과의 연회를 기대해 주십시오. 그래도 오늘은 소인이 미천한 솜씨로나마 즐겁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녔다. 홍엽비에 대한 부채감만큼, 소년은 홍엽비에게 충실했다.

그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홍엽비는 소년이 대접한 매운 음식에 대한 공상에 빠져 입매가 녹아내릴 만큼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과회는 몇 번 있었지만…… 연회에서 단둘이 마주하는 건 처음이네요.”

“예, 그래서 연회에 낼 요리로 무엇이 좋을지 여쭈어보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건강이 괜찮으신지도요.”

“건강은 괜찮아요. 식사량도 조금 늘렸고, 꾸준히 산책도 하고 있어요.”

홍엽비는 자신만만하게 소매를 살짝 걷어 팔목을 보여 줬지만, 대나무처럼 가는 팔목은 조금 강하게 쥐기만 해도 멍이 올라올 것 같았다.

전보다는 조금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창백한 피부에는 혈색이 미미했다.

여린 팔목이 안쓰러워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도 소년은 그 말을 꾹눌러 담고 대신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 점심은 조금 매콤한 것을 먹어도 좋겠군요.”

“네! 괜찮을 것 같아요!”

심심하고 담백한 황궁 음식만을 먹다 보면 제아무리 자극적인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자신도 모르게 맵고 짜고 기름진 것이 끌리는 법.

맵싸하고 화끈한 맛을 사랑하는 호남 지방의 음식에 길든 홍엽비에게 황궁의 음식은 무미(無味)하게 느껴질 것이다.

다행이다. 그녀가 그토록 갈구하는것을 이렇게 쉽게 내줄 수 있어서.

그녀를 움직일 훌륭한 수단을 손에 쥔 것을 즐거워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부채감에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자신의 위선적인 태도에 실소하면서 소년은 가식적인 미소로 홍엽비를 안심시키며 주방 쪽으로 이끌었다.

“어머!”

주방에는 마치 야시장의 즉석 요리점처럼 온갖 식재료들이 늘어서 있었다.

물에 불린 두부피에 부죽(腐竹), 한 번 얼렸다 말려 마치 스펀지 같은 구조로 국물을 빨아들이는 동두부(凍豆腐)에 민물새우와 바다 새우, 소의 천엽에 간과 내장, 손질한 장어에 복건성에서 막 들여온 알이 꽉찬 신선한 꽃게, 채소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거기에 주방 안쪽으로는 붉은 등을 내걸어 마치 경사의 명물이라는 홍화 야시장을 연상시켰다.

후궁을 벗어난 적 없는 홍엽비는 평생 보지 못할 풍경, 그 소란스러움과 북적거림은 재현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그 분위기라도 느껴보라는 소년의 작은 배려였다.

“요즘 시장 거리에서 유행한다는 마라향과(麻辣香鍋)입니다. 원하시는 재료를 고르시면 즉석에서 볶아드리지요.”

본토 발음으로는 마라샹궈.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사천의 명물이 유명해진 이유는 단순히 맛이 뛰어나서는 아니었다.

직접 눈으로 신선한 재료를 고르고 조합하는 재미.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음식을 만든 다는 과정 일부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즐길 거리를 원하는 현대의 트랜드에 걸맞은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처럼 신나는 홍엽비 뒤로 분하다는 표정을 짓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소년은 비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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