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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40화 (40/314)

환관의 요리사 40화

태감의 아침식사가 끝나고, 아침과 점심사이에 소년들은 가볍게 식사를 했다.

우아하게 말하자면 브런치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는 일이 힘드니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 해서 반쯤은 억지로 먹는 거지만, 장소와 이삼은 역시 나이가 나이인지 언제 어디서 뭘 주더라도 싹싹 비우고 한 그릇을 더 달라 할 정도로 식성이 좋았다.

“역시 나이가 깡패야 깡패.”

정작 그러는 자신이 셋 중 제일 젊다는 것은 까맣게 잊은 채 소년은 요리를 준비했다.

별것은 아니었다. 미리 해둔 밀가루면 쓱쓱 밀어 썰어 절면을 만들고 삶아 미리 뽑아둔 고기 육수에 편육몇 장 올려 다진 파 한 움큼 올려주면 가벼운 아침 국수 완성.

그리고 여기에-

“어? 그거 량피(凉皮)예요?”

장소보다 조금 일찍 들어온 이삼이 우묵한 접시에 담긴 투명하고 찰랑찰랑한 쌀묵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소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이삼을 본 소년은 이삼에게 차 한잔을 내주었다.

“예, 소소 애가 영 기운이 없어서…… 고향 음식이라도 해주면 기운 좀 내지 않을까 해서요.”

“확실히, 량피는 섬서성이 명물이죠.”

너무 되어도 맛이 안 나고 너무 물어도 흐물흐물해지는, 량피는 비율의 마법이다.

밀가루로 한 것도 나름 맛이 좋아찾는 사람이 있지만, 색이 누래 하늘하늘 투명한 쌀 량피에 비해서 보기에 좋지 않다.

이 량피를 서늘한 곳에 두었다가 얄팍하게 잘라 매운 양념에 무쳐 먹으면 여름철 입맛 없을 때 이만한것이 없다.

끼얹을 양념장은 참깨장에 간장 약간과 고추기름, 생강과 마늘은 가장 신선한 것을 골라 다진다.

여기에 포인트를 주는 것은 박하잎으로 양념장에 상쾌한 맛을 더해 더운 날에 딱 어울리는 음식이 된다.

넓적한 칼 옆면으로 마늘과 생강을 눌러 쪼개고 굵직굵직하게 다져 양념장에 넣는 모습은 경쾌한 리듬감이 느껴졌다. 마늘을 눌러 깨는 소리, 생강을 다지는 소리. 기분 좋은 박자에 이삼이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부드러운 허밍과 경쾌한 칼의 박자, 주방안은 사뭇 유쾌한 음으로 채워졌다.

이삼은 소년에게, 소년은 이삼에게 점점 음을 맞춰나가며 각자의 소리를 부드럽게 뒤섞였다.

날카로웠던 칼의 박자는 부드러워지고 낮게 깔리던 허밍은 점점 높아진다.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불이 타는 소리. 주방의 온갖 소리가 이삼의 목소리에 어울리며 소음에서 음악으로 변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부드러운 운율에 어깨에 임이 빠지며 손목이 나긋나긋 부드럽게 움직였다.

자신만의 박자를 가지고 있던 칼질이 흐트러졌지만 새로 탄 리듬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가끔은 노래 들으면서 요리하는 것도 괜찮네요. 재미도 있고.”

“저도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다시 부탁해도 될까요?”

“뭐, 괜찮으시다면야.”

상에 국수와 량피가 차려졌을 때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장소와 소소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소소의 손에는 소년이 맡긴 빨래가 들려 있었다.

“빨래는 밥 먹고 널어라.”

“그럼 구겨질 텐데…….”

“어차피 걸레나 수건 정돈데 좀 구겨지면 어때.”

국수 한 그릇에 량피 한 그릇. 단출한 상이지만 장소와 이삼은 보물처럼 그릇을 받들었다.

구수한 닭 육수의 향기가 코를 타고 넘어가 위 점막에 스며드는듯했다.

“웬일로 량피를 하셨어요? 저 량피 엄청 좋아하는데.”

“소소가 섬서 출신이라 한번 해봤습니다. 혹시 량피 싫어하나?”

“아뇨…… 좋아해요.”

입으로는 좋아한다고 하지만 소소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슬픔과 회한의 그림자가 떠올라 있었다.

고향을 떠나온 이래 단 한 번도 입에 대본 적 없는 가족과의 추억이 그녀의 목을 메이게 했다.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아비가 딱 한 번, 장터에 나왔을 때 딱한 번 사줬던 음식이 량피였다고.

주머니 탈탈 털어 겨우 꺼낸 한 푼으로 산 작은 량피 한 그릇을 나누어 먹은 게 그렇게 맛있었다고 어찌말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먹고 싶었다고, 궁에 오기 전까지도 털어놓지 못한 말을 소소는 목구멍 안쪽에 꾹꾹 눌러 담았다.

부끄럽고 서글픈 추억담 대신 소소는 후루룩 량피를 삼키고 애써 웃음지었다.

“정말 맛있네요. 정말…… 정말 맛있어요.”

낭창낭창 하늘하늘한 량피는 매끄럽게 혀 위에 미끄러지며 사람을 희통했다.

서늘하고 매끈매끈한 식감에 매콤고소한 양념장은 더운 여름철 사찰처마에서 울리는 풍경 소리 같은 향이 난다. 코끝을 치고올라 막힌 울화를 탁 터뜨리는 시원한 향.

추억보다 더 좋은 향신료는 없더라. 소매 끝으로 눈물샘을 누르며 달려나가는 소소의 등을 보며 소년은 국수를 들이켰다.

그 우묵한 눈에는 희미한 분노가 물밑에서 일렁거리는 수초처럼 일렁거렸다.

물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고 어리석게 잠수한 사람이 수초에 팔다리가 감겨 익사하듯이, 차갑고 조용한 분노는 치밀한 방법으로 악의를 꾸며 낸다.

소년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뺨 보셨지요.”

“맞은 것 같더군요.”

“아까 남양궁 쪽을 돌면서 소문을 조금 들었는데 유난히 소소를 괴롭히는 파벌이 있다고 하던데요.”

눈 속에 차가운 불을 품은 것은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삼엄한 후궁에서 태감의 호위를 해오며 수라장을 헤쳐온 둘은 소년 이상으로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서리를 깎아 만든 송곳처럼 빛나는 둘을 보며 소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두 분 모두 아시겠지만, 저희의 목표는 남양궁에서 홍엽비 님을 업신여기며 강상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적폐세력의 척결입니다. 홍엽비 님의 은혜를 입은 것들이 감히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 권위를 빌어 호가호위(狐假虎威) 함은 물론 이거니와 이제는 홍엽비 님을 업신여기려 하니 본래대로라면 단칼에 목을 베어야 마땅하겠지요.”

위정자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느냐면 소년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정치학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전생에서도 그저 뉴스에 정치 소식이 들리면 무식하게 욕이나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나이를 먹고, 한번 죽고 나서야 소년은 간신히 정치란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게 된 듯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홍엽비 님께선 심약하신 분이시니 그리 쉽게 측근들을 쳐낼 수는 없습니다. 특히, 가뜩이나 중병을 앓고 일어나신 지금은요. 혹시라도 또 충격을 받아 자리를 보전하실지도 모르니.”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소소가 뛰쳐나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혹시 모르지요. 자기보다도 어린 소녀가 집단으로 괴롭힘을 받고, 따돌림당하는 모습을 본다면, 홍엽비님처럼 착하고 현명하신 분은 당연히 분노하시겠지요.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 하는 측은지심은 본디 모든 이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대상이 어린 소녀라면…….”

성인보다는 어린아이인 것이 동정을 사기 쉽다. 소년의 답을 들은 장소와 이삼은 소년의 말에서 척추를 타고 기어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소년의 음산한 웃음 때문이었을까.

매부리코 아래로 가늘게 찢어진 그몸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소년은 두사람에게 가벼운 부탁을 했다.

“두 분은 모두 후궁에서 인맥이 꽤 있으시지요?”

그 귀여운 외모와 활달한 성격 덕분에 둘은 상당히 발이 넓은 편이었다. 평소에 나인들에게 간식거리를 받아먹기도 하고, 그렇게 나인들에게 들은 소문을 취합해 태감에게 전달하고 태감이 퍼드리고자 하는 소문을 은밀하게 푸는 것 또한 그들의 일이었다.

은밀한 대화가 끝나고 소소가 벌건 눈가를 비비며 돌아왔을 때 음모와 모략의 표정을 지은 그들은 평소처럼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환영했다.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소년은 멈칫할 것이다.

소년은 이런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장이 굳어버린 냉철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에 서린 연민과 자책의 빛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면이 좀 불었네. 다시 만들어줄게.”

“네? 괜찮은데…….”

남은 면을 삶은 소년의 얼굴에는 가식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아직은 서늘한 기운이 남아 떠나는 봄을 애석히 여기는 것만 같은 초여름의 서난궁.

궁의 정원에는 이제 막 꽃망울을 퇴우려 하는 야생화들이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풍성한 장미, 기운찬 해바라기도 아름답지만 난화비는 늘 이런 무릎을 굽히고 앉아 이런 키 작은 꽃들을 찾았다.

올망졸망 핀 꽃들은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 난화비는 같은 여인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틀어 올린 머리, 온화하고 따사로운 그녀는 겉보기에는 청초하고 여려 보였지만 오랜 승마와 궁술 수련으로 탄탄하게 근육이 다져져 있어자세가 곧고 걸음걸이에 힘이 있었다.

그 힘, 그 강렬함이 황제를 매혹한 것이리라. 대등한 적에 목마른 황제는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을 물어뜯을 수 있는 상대를 병적일 만큼 좋아했다.

난화비는 잠시 자신과는 다른 형태로 폐하와 대등한 존재로서 자리매김한 안양비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지. 아니고 말고.’

자신과 폐하의 대결이 장난이라면, 그쪽은 정말 피 말리는 생사투였다.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인 상대인지는 폐하가 결정하실 일이다.

평소에는 근엄하기 그지없는 황제가 안양비와 죽자 살자 설전을 벌이는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 우아한 눈웃음이 매력적이라는 평을 받는 그녀는 사실 이렇게 남모르게, 자신의 측근인 시녀들 앞에서는 조금 더 풀어진 미소로 헤실헤실 웃었다.

입꼬리가 사르르 녹아내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가고 난초처럼 우아하게 뻗어야 할 눈초리도 보름달처럼 휘어지는 푼수 같은 웃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황제와 동침을 할 때도 이런 웃음을 지은 적은 없었다. 오직 자신의 가장 친한 지인들만이 볼 수 있는…….

“……아니지, 한번은 있구나.”

그날, 양 태감이 다과를 가져왔을때. 그날 난화비는 후궁에 들어와 처음으로 친하지 않은 이 앞에서 그런 웃음을 지었다.

세상 이런 맛이 또 있을까 싶은 환희의 맛. 혀끝에 농밀하게 퍼지는 행복에 철두철미하게 연습한 우아한 미소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행복한 패배였다.

그리고 오늘은, 양 태감이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 소년은 올까? 오겠지? 그럼 어떤 과자를 들고 올까?

난화비는 이미 그 과자가 양 태감이 구해온 것이 아닌 소년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남모르게 지켜보던 사이 소년은 어느새 굵직한 사건을 해결하며 후궁의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해 그녀를 놀라게 했다.

언젠가는 두각을 드러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치고 나올 줄이야.

“난화비 님~ 양 태감님이 오셨어요!”

“응, 갈 테니 손님은 미리 다실로 안내해 드리렴.”

손님 앞에서기 전 그녀는 궁으로 돌아가 동경 앞에서 화장을 고쳤다.

흐트러진 머리도 다시 틀어 올리고, 비녀는 순금 봉황 장식이 달린 옥비녀.

칠보 팔찌에 목걸이는 진주, 다과가 딸린 약속이니 반지는 착용하지 않았다.

제국의 예법상 음식을 먹는 자리에서는 식기나 젓가락에 흠이 가지 않도록 반지를 빼는 것이 예의였다.

시녀들이 분주하게 그녀를 다듬는 동안 난화비는 무심코 창 너머에서 풍겨오는 좋은 향기를 맡았다.

바람결에 실려온 꽃향기 따위가 아닌, 조금 더 본능에 호소하는 듯 한 달콤한 향기. 그 진한 향기에 난화비는 무심코 입맛을 다셨다.

오늘도 기대해도 되려나?

난화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서난궁의 주방에서 소년은 바쁘게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다행히 남양궁에서의 패기 넘치는 일화 덕분에 소년에게 뭐라 하는 나인은 없었다. 다들 멀찍이 서서 소년의 행동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일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그 정도는 용인할만했다.

달콤한 설탕과 과즙이 졸아드는 향기, 옆에서는 장소가 하룻밤 전에 분리해둔 크림을 열심히 휘저어 휘핑크림으로 만들고 있었다.

야리야리한 가는 팔이지만 태감의 호위무사답게 장소는 힘든 기색도 없이 금세 크림을 쳐냈다.

어지간한 전동 휘핑기보다도 뛰어난 성능에 감탄한 소년은 얼른 생크림을 살짝 떠보아 단단한 정도를 확인했다.

“야, 역시 힘 좋은 사람이 하니까 다르네.”

생크림을 살짝 찍어 먹어보고 당도를 확인한 소녀는 콤포트를 만들고 있는 두 개의 냄비에 설탕을 조금씩 더 넣었다.

달콤한 여름의 향기를 뿜어내는 복숭아와 자두, 강렬한 향기가 사람을 취하게 할 듯 아른거렸다.

그 향기에 멀찍이서 지켜만 보고 있던 나인들도 자신도 모르게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꼭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은데.’

젊은 시절에는 좀비 영화에 빠진 적도 있었다.

불 앞에서 한창 씨름하고 녹초가 되어서는, 한적하고 서늘한 심야영화관으로 달려가 콜라를 큰 컵으로 시켜서 쪽쪽 빨며 여름밤의 피서를 즐기곤 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팔려 비칠거리는 걸음걸이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인들을 보며 소년은 빛바랜 추억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행복한 기억이지만 눈앞의 상황은 달콤 쌉싸름한 가을 낙엽 빛 추억에 잠길 여유를 주지 않았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이렇게 스릴넘치게 요리를 한 적이 또 있을까?

오래전 시칠리아에서 마피아 보스의 만찬을 요리할 때도 이 정도로 스릴있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내장을 뽑아 먹히는 살벌한 풍경이 흘러갔다.

아등바등 버텨왔던 후궁에서의 삶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짓기는 싫은데. 소년은 재빨리 냄비를 휘젓던 주걱을 들어 소량의 과육을 떠냈다.

“양이 적어서 모든 분께 드리지는 못하고! 딱 한 분! 딱 한 분께 시식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이제이(以夷伐夷).

오랑캐를 오랑캐로 치듯이 좀비를 좀비로 제압한다. 난장판이 벌어지는 동안 소년은 빠르게 요리를 마무리하고 접시에 올렸다. 요리의 완성을 플레이팅.

소년 부디 난화비가 태감처럼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길 빌었다.

태감은 기껏 장식을 해내면 장식할 공간에 요리를 더 담아내라고 하는 인간이었다.

진짜 조금만, 조금만 못생겼어도 뚝배기로 머리를 깨버렸을 텐데…….

흐드러진 야생화에 향이 좋은 허브, 그리고 약간의 생크림으로 장식하고 디저트를 올린 다음 은제 뚜껑을 덮은 소년은 혈투를 끝내고 최후의 승자가 된 나인에게 콤포트 약간 물려주고 주방을 나섰다.

총탄이 오가는 전쟁터를 빠져나온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원에서 가는 길목부터 향긋한 꽃향기가 높새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밀려오는 것만 같다.

소년이 다가오자 난화비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소년을 환영했다. 그 미소만으로도 온갖 만난을 해치고 음식을 조리해온 보람이 있었다.

“저번 케이크도 정말 맛있었어요. 당신의 작품이죠?”

“오늘 요리도 기대해 주십시오.”

요리를 내기 전 소년은 먼저 준비해온 차를 내었다. 손잡이가 달린 잔에 우아한 연갈색 액체가 그윽한 향기와 함께 난화비와 태감의 앞에 놓였다.

“찬드라 왕국에서 온 찻잎으로 우려낸 내차(奶茶, 밀크티)입니다. 향이 진하고 떫은맛이 은은해 오늘 다과와 잘 어울리지요.”

“향이 정말 좋네요, 우유와 차라니. 정말 재밌는 발상이에요.”

“이 외에도 서역으로 가는 교역로 중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장족(藏族)은 수유차(酥油茶)라 하여 수유차(酥油)라 부르는 우유 응고물을 넣은 차를 마시고는 하지요. 혹시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소년의 말에 난화비는 잊은 추억이 떠올랐는지 희미한 웃음을 입에 걸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름을 들어본 적 있어요. 어린 시절, 어머니는 때때로 높은 산에서 살며 털이 많은 소와 산양을 기르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었지요. 그들은 신기한 방법으로 짐승의 젖을 뭉쳐서 그것을 차에 넣어 마신다고요. 어릴 때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그 차가 천상의 음식처럼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소년이 실제로 맛본 바로는 소금을 넣어 짭짤하고 고소한, 어딘가 묘한 맛이었지만 굳이 그것을 말해 난화비의 추억을 망가트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이야기했다가는 굶주린 태감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봉황 장식 손잡이가 달린 덮개를 열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시선이 손에 들린 요리에 집중되자 저열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기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소년은 자신 있는 어조로 요리를 소개했다.

“제철 복숭아와 자두콤포트를 넣은 크레이프 포켓입니다. 크레이프란 서양의 밀전병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달게 조린 복숭아와 자두, 생크림을 감싸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어 설탕에 절인 여름 감귤의 껍질로 묶었습니다.”

한입에 넣기엔 살짝 큰 크기의 우아한 주머니들을 보며 넋을 잃은 난화비와는 다르게 가면으로 표정을 숨긴 태감은 즉시 젓가락을 들어 올려 주머니를 집었다.

들어 있는 것은 자두일까? 복숭아일까? 제아무리 코가 예리한 태감이라도 크레이프에 엄중하게 봉해진 내용물을 알 수는 없었다.

확인할 방법은 오직, 베어 물어보는 것뿐.

한입에 먹기에는 조금 큰 크기 임에도 태감은 기세 좋게 한입에 넣었다. 쫄깃한 크레이프 반죽이 찢어지며 그 내용물이 왈칵 입 안쪽으로 밀려나왔다.

풍성한 생크림의 고소하고 은근한 달콤함이 먼저 입안을 한번 감싸고 그 위로 침샘을 자극하는 새큼한 자두의 신맛이 퍼졌다.

여름 과일 중 향기로는 최고라는 자두의 향기. 그 달콤한 향기는 한 여름의 백일몽이 되어 태감을 사로 잡았다.

몽롱하게 풀려 버린 태감을 보며 난화비 역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예의 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단숨에 주머니를 들어 올려 한입에 밀어 넣었다.

터져 나오는 시녀들의 한탄도 지금이 순간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이런 음식이라면 설령 품위 없다 뒷담화를 들어도 귀가 가렵지 않을 것이다.

자두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덧없이 사그라지는 향기, 눈앞에선 선계의 도화원이 아른거렸다.

복숭아, 달콤하고 즙 많은 복숭아조림이었다.

봉황이 날개를 펴듯 입안에서 퍼지는 복숭아 향기가 콧속으로 빨려들어 오자 머릿속의 도화원에선 꽃이 만발한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팔선이 둘러앉아 그녀에게 손짓하는듯했다.

신맛이 적고 달콤한 복숭아 조림은 몇 번 씹어보기도 전에 생크림과 함께 녹아내렸다.

혀 위의 음식은 금세 사라졌지만, 향기는 남아 비강을 가득 채웠다.

향기에 취해 낙원을 거닐기도 잠시, 난화비와 태감의 눈동자에 탐욕이 서렸다.

다른 주머니는 어떤 맛일까?

제아무리 표정 관리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여기까지 밀려 버리면 표정을 숨길 수 없다. 난화비의 표정에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진실함이 밀려나왔다.

다행이다. 난화비가 그 정도로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머릿속으로 이득을 계산할 만큼 냉철한 인간은 아니라서. 소년은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일은 조금 쉽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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