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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38화 (38/314)

환관의 요리사 38화

밤에 기름진 오리를 야식으로 먹었으니 오늘 점심은 신선하고 부드러우며 산뜻한 요리가 잘 어울릴 것이다.

어제의 약속대로 아침상에 급제죽을 내었던 소년은 식재료 창고를 둘러보며 그중 가장 신선한 것을 찾았다.

구이나 볶음, 조림은 너무 부담스럽고 피로감으로 예민해진 태감에게 생선찜 요리는 발라 먹는 것이 귀찮을 테니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다.

튀김은 애초에 논외고…….

완자 요리. 돼지기름을 약간 넣고 부드럽고 촉촉하게, 맑은 청탕에 녹황색 채소와 함께하면 산뜻하고 부드러워 위장을 은근하게 적셔줄 것이다.

초어도 좋고 향어도 좋고 묵어도 좋지만, 오늘은 펄떡펄떡 살아 있는 잉어가 제일 좋겠다.

“팽성어환(彭城魚丸)이 좋겠다.”

다른 이름으로는 완자가 은으로 빛은 것처럼 곱다 하여 은주어(銀珠魚).

서주의 명물 완자 요리로 근대중국의 정치가, 사상가, 사회개혁가, 서예가, 유교학자인 강유위(康有爲)가 서주를 지나다가 극찬을 하였다 한다.

강유위는 은주어를 맛보고 ‘널리 알려진 팽성의 완자, 그 이름 남북을 넘나드네’라는 글을 남겼다.

서주는 과거에 팽성으로 불렸으므로 강유위는 팽성의 완자라 이름 지었고 그로부터 은주어는 팽성어환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전파되게 되었다.

태감은 이런 토막지식을 좋아하니 식사를 낼 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팔뚝만 한 크고 싱싱한 잉어 몇 마리를 골랐다.

잉어는 쇠한 기력을 회복시켜 주어 노약자와 특히 산모들에게 이로운 생선인데 그 살뿐만 아니라 눈, 껍질, 이빨, 쓸개, 창자, 피까지도 각기 다른 효능이 있다 하여 귀한 약재로 사용되었다.

이빨은 방광에 좋아 소변을 잘 나오게 하고 피는 해독작용이 있으며 창자는 근육통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잉어는 주방에서도 약방에서도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재료다.

살이 희고 달지만 잘못 조리하면 흙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이를 잡기 위해 선 다른 무엇보다도 신선하고 좋은 잉어를 골라야 한다.

“가능하면 강바닥이 진흙인 곳보다는 모래인 쪽이 냄새가 적지.”

소년은 느긋하게 잉어의 비늘 색과 크기 등을 보며 그중 가장 상품인 것들을 골랐다.

신선하고 바위틈에 자란 물이끼 등을 갉아먹으며 자란 것, 흙냄새가 나지 않고 살이 달콤하고 기름진 녀석.

틀림없이 최상품으로 끓이든 굽든 튀기든 찌든 뭘 해도 맛있을 것이 틀림없는 놈이다.

수조를 보고 있던 소년의 등을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얼굴을 돌려보니 장소가 고양이처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게 웃고 있었다.

“손님 오셨어요.”

“……예? 저한테요? 올 사람 없을 텐데…….”

마치 초등학생이 얼레리 꼴레리 하고 놀리는 듯한 장소의 눈에 빈정이 상한 소년은 마음속으로 오늘 그의 간식에 돌이라도 섞어줄까 생각하며 소년은 어두침침한 창고를 나섰다.

새파란 하늘, 유난히 햇볕이 뜨거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날이다.

눈앞의 우물쭈물하는 주근깨 소녀를 보며 소년은 희미한 피로함을 느꼈다.

어디서 본 것 같지만, 기억에는 남지 않는, 영화를 볼 때 주연에게 초점이 쏠린 장면에서 흐릿하게 서 있는 엑스트라를 기억해내야 하는 것 같은, 하지만 굳이 소년이 기억해낼 필요는 없었다.

지위가 낮은 나인을 뜻하는 의복과 손에 들린 작은 함이 들어 있을 보자기를 보면 소녀의 신분을 추론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년의 얼굴이 장소나 이삼 정도만 되었어도 혹시 첫눈에 반한 궁녀가 떡이라도 싸 온 게 아닐까 하는 희망적인 관측을 할 수 있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년에겐 해당 사항없는 이야기였다. 걸어 다니는 꽃들사이의 갯민숭달팽이의 심정을 느끼며 소년은 예의상 먼저 인사를 건넸다.

소년의 인사에 장소의 얼굴을 힐끔거리던 어린 나인이 화들짝 놀라 깊게 허리를 숙이고 조심스레 손에 들고 있던 보자기를 내밀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손끝으로 살짝 두드려보자 얇은 비단 아래로 둔탁한 목재의 느낌이 난다.

무게를 생각하면 은이나 금원보는 아닐 것이고 아마 현물로 바꾸기 좋은 장신구 류가 아닐까?

“홍엽비 님께 잘 받았다고 전해주시오. 아, 그리고 이걸 좀 전해드리고.”

소년은 찬장에서 기름종이에 쌓인 과자를 꺼내 목함에 넣어 나인에게 건넸다. 얼마 전 새로 들어온 버터로 만든 간단한 사블레 반죽에 호두와 건과일을 넣어 구운 것으로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찾는 태감을 위해 대량으로 만들어둔 것이었다.

윗사람의 포상에 답례품을 보내는것은 현시대에 조금 무례한 일이었지만 황제를 만나며 상당히 판타지 한 경험을 한 소년은 간덩이가 커져 사소한 무례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만한 배짱이 생겼다.

어차피 쟁여두면 태감이 다 먹어치울 테니 홍엽비에게 좀 나눠준다 한들 어떠하리.

후궁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행동, 작은 선의에도 정치적 의도가 실린다. 그 때문에 소년은 홍엽비의 거식증을 치료하고 난 후 단 한 차례도 홍엽비를 만나 그녀의 식사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한 적이 없었다. 입도 짧으신 분이 식사는 잘하고 계시는지, 혹시 불경한 시녀들이 불편하게 해드리는 건 아닌지.

그녀에게 품었던 살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유독 홍엽비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지곤 했다. 어쩐지 평생 그녀의 가문에 봉사해 온 노복이 된 기분이다.

아, 이왕 모신 상관이 미녀였으면 어땠을까? 보람차고 행복한 이세계생활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 다더니.

뭘 기대한 것인지 나무 뒤에 숨어서 훔쳐보고 있던 장소가 한숨을 내쉬며 걸어나왔다.

유감스럽게도 장소가 기대한 풋풋한 고백 이벤트는 소년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손에 넣기 전에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장소에게 이런 이벤트가 일어나면 실컷 놀려주자.

“아무튼, 이만 가보시오. 수고하시구려.”

자신이 뭘 잘못했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소의 모습이 고양이 같아 귀엽기도하여, 독기가 빠진 소년의 나른한 축객령에도 나인 소녀는 발걸음을 떼질 못했다. 오히려 소녀는 매달리듯이 소년의 소매를 잡았다.

밀려드는 귀찮음과 고단한 미래를 내다본 듯이 소년의 눈 밑 그늘로 짙은 피로감이 깔렸다.

언제쯤 돼서야 대궐 같은 집에서 처첩을 거느리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최소한 그런 미래를 기대하기 위해 선 우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젠 눈초리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며 소년은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았다.

* * *

“뭐, 네가 괜찮다면 상관이야 없다만.”

소녀가 소년을 잡은 이유는 고압적인 표면상의 이유론 입맛이 없으신 홍엽비 님을 위해서 소년에게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가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겁에 질린 듯, 무리한 중압감에 시달리는 소녀의 표정에서 소년은 깊은 분노를 느꼈다.

분명 소년과 다툼이 있었던 시녀들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총대를 멘것이리라.

사실은 홍엽비 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그저 소년의 기술을 탐낸 나인들이 억지로 소녀에게 무리한 명령을 한 것이 아닐까?

소년의 눈동자에 피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읽었음에도 태감은 모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분명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더 재미있을지 재보고 있는 것이리라.

태감은 고민 끝에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쪽으로 오지만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녀의 체류를 허가했다.

집무실 밖에서는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하니 태감으로서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텐데도.

소년은 남양궁의 나인들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결국 소녀를 내치지는 못했다. 그래, 어린것이 뭔 죄가 있겠어.

“내 주방에서 뭘 건드리거나 하지마라. 그냥 여기 앉아 있기만 해.”

“그럼 설거지는…….”

“내가 한다.”

“껍질 벗기기는…….”

“내가 한다.”

“무…… 물 떠오기는…….”

“내가 한다.”

소년은 아주 주방에선 아주 병적일만큼 신경질적인 결벽증 환자였다.

모든 게 완벽해야 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불같이 화를 냈다. 결코, 좋은 상사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 결벽증 덕분에 정상급 요리사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방은 그의 전장이었으며 그의 성이었다. 양념, 재료, 모든 것이 그가 가장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계산되어 진열되어 있었다.

괜히 초짜 계집아이 하나 데려다 놓아봤자 도움이 되기는 커녕 걸리적거리기만 했다.

첫날 소녀가 부여받은 임무는 소년의 일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소년이 준 간식을 먹는 것이었다.

때아닌 월병, 달콤한 호박 소에 소금에 절인 오리 노른자가 들어간 호사스러운 월병이었다.

“이런 걸 제가 먹어도 될까요?”

“어? 어차피 태감 나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명절도 아닌데 만든 거다. 태감께서 충분히 드시고 남은 거니 우리라도 먹어치워야지.”

녹두나 팥, 각종 견과류에 건과일이 들어간 것은 흔하지만 계란 노른자나 오리알 노른자가 들어간 것은 시중에서도 맛보기 힘든 귀한 것이었다.

가난한 농가의 딸로 황궁에 팔려오다시피 온 소녀에게는 계란은 커녕 가장 싼 팥소 월병도 먹기 어려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소년이 솜씨를 부려온갖 문양이 들어간 월병을 소녀는 마치 보물처럼 들고 앞니로 조금씩 갉아먹었다.

저렇게 먹으면 온종일 먹어도 다 못먹겠군.

본인이 못 먹고 자라서인지 저렇게 궁상을 떠는 모습을 보면 신경질이난다.

오후 점심에 쓸 당근을 조각하고 있던 소년은 한참이 지났는데도 월병의 껍질 부분을 갉아먹고 있던 소녀의 앞에 산더미 같은 월병이 담긴접시를 쌓아 올렸다.

“이거 할당량이다. 오늘 안에 다 먹어치워.”

“예?”

“그리고 점심 먹을 배는 남겨둬라.”

퉁명스럽게 말을 마친 소년은 기웃기웃 구경 온 장소에게도 월병을 한가득 안겨주었다.

어차피 태감은 이제 질려서 더는 안 먹을 테니.

한동안 소년과 함께 지내서인지 장소와 이삼은 전보다 조금 더 살이 오르고 키도 조금 더 컸다.

애들은 무조건 잘 먹어야 한다. 자신의 사람이 아닌 소녀에게도 그 잣대는 공평하게 적용되었다.

어린아이가 남의 눈치를 보며 깨작깨작 먹는 것을 보는 것은 딱 질색이다.

눈앞의 월병 무더기를 멍하니 보던 소녀는 손에 들고 있던 월병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소년은 측은한 눈빛을 숨기며 월병옆에 미지근한 차 한잔을 올려두었다.

차로 막힌 목을 죽이며 두 번째 월병에 손을 뻗는 소녀를 보며 소년은 큰 잉어를 손질해 껍질을 벗겨내고 잔뼈를 발라 흰 살만을 취해 잘게 다졌다.

여기에 생강즙과 술, 소금과 후추에 계란 흰자를 넣고 곱게 다진 돼지기름을 넣어 끈기가 생기도록 절구에 으깬다.

부드럽고 매끈하면서도 반죽에 찰기가 생길 때까지 반죽해 준다.

소녀는 월병을 먹으면서도 틈틈이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소년 역시 못 이기는 척 맑게 우려낸 청탕 약간을 떠 소녀 앞으로 밀어주기도 했다.

상을 다 차린 소년은 태감의 상에 올릴 음식을 조금씩 덜어 흰 쌀밥과 함께 주방 한쪽에 따로 상을 차려주고 나서며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좋은 요리를 배우고 싶다면 좋은 요리를 많이 먹는 게 가장 큰 공부다. 배가 불러도 맛은 봐둬.”

평생 입에 댈 일 없을 고급요리의 향연에 얼이 빠진 소녀에게 친절하게 면죄부까지 알려준 소년은 혹시나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라도 떨어질라.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우는 아이는 질색이다.

차라리 배고프고 성미 까다로운 손님이 편하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기 전 소란스러움이 느껴져 소년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귀를 기울였다.

“배고파…… 너무 배가 고파서 이삼이라도 먹어치워 버리고 싶다.”

“먹지 마세요. 지금 태감님이 하시는 말은 다 진담처럼 들린다고요.”

“농담일 거라고 생각하나? 앞으로 오운이 일다경 안에 식사를 내오지 않으면 넌 끝이야.”

집무실에서 들려오는 은밀한 대화에 소년은 갑자기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조금만 더 늦게올까? 왠지 지난날 이삼과 노래를 불렀던 날이 떠올라 소년은 잠시 시간을 끌고 싶어졌다.

“아! 오셨죠! 지금 오셨죠!”

“아이고, 귀신같네. 어째 아셨데?”

사람은 숨겨도 음식의 냄새는 숨길수 없는 법. 생존본능으로 감각이 극대화된 이삼은 소년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안으로 잡아끌었다.

“오, 생선 완자인가?”

“잉어입니다. 뜨거울 때 드시지요.”

엄지와 중지를 붙인 것만 한 크기의 완자들과 데친 청경채, 맑은 탕육수는 보기만 해도 깨끗하고 시원해 보였다.

순하면서도 닭의 감칠맛이 잘 녹아든 구수한 탕을 떠먹으며 태감은 넌지시 소년에게 물었다.

“어떠냐?”

“그 계집아이요? 뭐, 어디서 써먹을 정도는 못되고 일단은 그냥 두고 볼 생각입니다. 만약 재주가 있다면 눈으로 보고 배우겠지요.”

원래 요리는 그렇게 어깨너머로 배우는 겁니다.

주방에서 설거지나 하던 시다바리 인생으로 시작하여 정상의 자리에 오른 소년에게 기술의 전수란 그런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설거지를 하며 남은 소스 맛을 봐혀에 기억하고 남모르게 연습해서 기량을 쌓아가는 것. 소년은 구시대적인 인간이었다.

보드라운 완자를 혀 위에서 굴리며 소년의 말을 듣던 태감이 다시 물었다.

“어떠냐?”

똑같은 질문, 하지만 품고 있는 뜻은 달랐다. 이번 질문은 그 소녀를 보낸 남양궁의 나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심전심의 경지였다. 남자와 이렇게 마음을 트게 된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나름미운 정이 들었다는 증거이리라.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지극히 객관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목을 쳐야지요. 감히 시녀라는 것들이 주인의 이름을 팔아 나인을 제멋대로 부리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려 하니 이는 강상의 법도를 능멸하는 천인공로할 짓 아니겠습니까.”

“허허, 너도 후궁 밥 좀 먹었더니 남의 목숨을 이제 쉽게 말하는구나.”

능숙한 소년의 태도에 태감은 마치 장성한 아들을 보는 눈으로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끌려가는 나인들을 보며 밤잠을 설치던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한 성장이었다.

괄목상대라 하더니, 소년의 진보는 태감에게도 기꺼운 일이었다. 이제 소년과 공유할 비밀이 더 늘어났다는 뜻이니, 소년을 내려다보는 태감의 입에 입술이 얄팍하게 갈라지는 미소가 걸렸다.

그 음험한 미소를 눈앞에 두고서도 소년은 오히려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후궁에서 살아남기로 한 이상 어쩔수 없는 필연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니 주도적으로 자리를 잡고 행동하는 것이 차라리 자신의 성미에 맞았다.

‘언제까지 손을 더럽히기 싫어 멀찍이 물러서서 빼고만 있을 수는 없지.’

도덕관념, 양심 따위의 말은 전부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 시대를 뒤집을 수 없다면 그 시대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수렁에 발을 담근 이상 빠져나갈수 없다면 턱밑까지 빠지겠다는 각오를 다진 소년에게 더는 사람의 목숨은 무겁지 않았다.

비로소 정치판에 발을 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굳어져 있던 후궁의 정치판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며 누구보다도 먼저 앞을 내다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태감에게 쓸 수 있는 말이 늘어난다는 것은 안심되는 일이었다.

북림궁에서 자신의 세력을 관리만 하던 안양비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그에 발맞춰 다른 비들도 뿔뿔이 흩어져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홍엽비의 병을 고치며 소년의 존재는 후궁의 수면 위로 부상하였고 많은 이들의 시선이 소년에게 쏠리고 있었다.

소년의 요리는 강력한 선물이자 회유의 수단이다.

비록 소년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힐일이야 없겠지만, 정치판의 힘 싸움에서 떨어질 목들에 전처럼 흔들리면 곤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멋대로 칼을 대려 하면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결정은 내가 내리는 것이지, 넌 네 본분인 요리에 충실하면 된다.”

“예, 주제 넘었습니다.”

소년에게 강단이 생긴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칼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소년의 역할은 잘 드는 칼일 뿐. 칼을 휘두르는 것도, 휘두를 장소와 방법을 고르는 것도 태감이여야 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소년 역시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태감의 말은 자신의 방약무인한 행동에 제동을 거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을 더럽히지 않게 하겠다는 배려이기도 했다.

그 배려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최소한 오늘 저녁은 태감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번에 말했던 동파육도 되겠느냐?”

“어려울 것 없지요.”

“좋다, 좋구나. 아, 그리고 간식

“예, 노란 완두콩으로 양갱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좋아, 마음에 든다.”

그 말을 끝으로 앞으로의 예정을 일단락 지은 태감은 본격적으로 음식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보드랍고 매끄러운 잉어 경단이 부드립게 뭉그러진다.

곱게 다진 돼지비계의 기름진 맛과 흙내가 나지 않은 잉어살의 달콤함, 진하게 우려낸 육수의 풍성한 감칠맛이 혀에 스며든다.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듯한 맛에 감탄한 태감이 미식의 저편으로 침잠하자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을 나섰다.

앞으로 남양궁의 인사에 대대적인 개편이 있을 것이다. 태감이 손을 쓰기로 한 이상 남양궁에 고여 썩어가는 대다수 나인이 물갈이될테니 홍엽비 님의 안위엔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저 소녀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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