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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37화 (37/314)

환관의 요리사 37화

즐거운 환담, 온화한 치하의 시간이 끝나고 충실한 예스맨으로서 재롱을 떨던 소년은 마지막으로 붉은 두루마리를 황제에게 바치고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황제를 향한 충심을 광고하는 듯한 그 모습은 완벽한 아첨꾼이었으며 입안의 혀요 달콤한 꿀이었다.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살짝 늘어지는 자세로 몸을 푼 황제가 태감과 시선을 마주했다.

“재미있는 아이군.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어.”

“예, 그렇지요.”

소년은 상상 이상으로 폭넓은 식견과 황제에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남의 흥미를 유발하는 형태로 풀어내는 것에 익숙했다.

말을 들을 때는 바위처럼 과묵하면서도 반응해야 할 때는 들불 번지듯이 일어나고 대꾸해야 할 때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나긋나긋하며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과하여 상대를 빈정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남의 아래에서 살아온 환관들이나 저럴 수 있을까?

“네 말처럼 혀가 맵고 독한 놈은 아닌 모양이야.”

씁쓰름한 것을 베어 문 것처럼, 황제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 표정에서 태감도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존의 자리는 고독한 법이다. 너무나도 고독하여 자신의 정면에서 독을 품고 달려드는 적을 원할 정도로 소년은 황제에게 좋은 자극제가 될 수도 있었다.

너무 과한 것을 바란 것일까? 아직 이립도 넘기지 못한 소년에게 기대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 혀가 독살스럽다 한들 무거운 추를 달고서도 평소처럼 날카롭게 움직일 수 있을까?

황제를 눈앞에 둔 부담감이 소년의 날개를 짓누른 것이라면 어찌하겠는가.

황제는 입에 문 소태를 삼키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애써 미소 지었다.

황제에게도 사람을 사귀고 친분을 나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황제라는 신분이라면 더더욱.

세상 누구에게 자신의 복심을 털어놓아야 할까. 고달픈 시대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것이 눈에 보이는듯해 태감은 애써 분위기를 환기할 겸 소년이 가져온 두루마리를 끌러보자 하였다.

소년이 받고 싶은 포상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 곱게 붉은 끈으로 봉해진 진한 붉은색의 두루마리는 태감도 그 내용물을 몰랐다.

그 녀석은 무엇을 원했을까? 저번에는 훈제 실을 달라 했으니 이번에는 화퇴라도 직접 만들겠다고 건조실이라도 달라고 할까?

그것은 너무 안온한 생각일 것이다. 황제는 소년의 굽실거리는 태도에 실망했지만, 태감은 안도 했다.

소년의 눈은 오늘 무언가를 반드시 터뜨리겠다고 작정한 것만 같은 눈이었다.

하지만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시종일관 참된 간신배의 자세로 황제에게 간과 쓸개를 빼준 소년의 태도에 태감은 시름을 내려놓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태감이 확인하기 전에 황제가 먼저 두루마리를 펼쳤다. 가로로 펼쳐 든두루마리가 황제의 표정을 가려 태감은 소년의 소박한 바람과 황제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두루마리를 상에 내린 황제의 표정은 참으로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벗어난 제3의 수. 소년의 답은 황제에게도 태감에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참주패.

“……이거, 아무래도 한 방 먹은 거 같은데.”

허탈한 듯 흘러나온 황제의 목소리는, 그리 싫지만은 않은듯했다.

* * *

황실에는, 정확히 황제의 직속으로 참주라는 지위가 있다. 오직 황제의 명으로만 움직이며 한 자루 참수도를 들고 제아무리 먼 길도 단숨에 달려가 온갖 만난을 헤치고 죄인의 목을 베는 처형인.

그들은 황제를 대리하는 심판자이 자 참수도를 들고 죄인의 죄를 사하는 그 순간만큼은 황제와 다름이 없었다.

참수도는 황제가 내리는 신물이며 참수도의 권위는 곳 황제의 권위.

그리고 참주의 출정은 곧 죄를 사하는 황제의 자비였다. 본디 삼족을 멸해야 하는 죄도 황제의 성은을 입으면 주모자 한 명으로 참작할 수있다.

혈족 대대로 짊어져야 하는 대죄일지라 할지라도 참주의 심판 이후로는 그 누구도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출정은 가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평상시 황제의 최측근 호위인 그들이 참수도를 패용할 때면 팔군의 이름난 명장들도 물러서서 고개를 조아릴 정도다.

참주패란 오직 황제의 명으로만 발급되는 참주들의 신물이자 신패. 그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곧 앞으로 저지를 죄를 자신의 목 하나로 면피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태감의 머릿속에선 소년이 약조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치 농담하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던 그 말들.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라 하지 않습니까.

약속은, 지켜 주실 거라 믿습니다.

독살(毒殺).

야차의 미소를 지으며 수라의 길을 걷겠노라 말하던 소년의 모습이 눈에서 떠나질 않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태감과는 달리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던 황제는 이내 평정을 찾고 깊게 허리를 의자에 파묻고 입을 열었다.

“뭐야, 앞에서 한 말들은 다 연기였나?”

대담하다 못해 무례한 소년의 뻔뻔함에 황제는 씁쓸해하면서도 어딘가 기꺼워 보였다.

예상 밖의 일격을 얻어맞은 것이 사뭇 유쾌했는지 풍성한 수염 아래로 굳게 다문 입술은 우아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마음속에서 뭉클뭉클 올라오는 말을 차마 표현하진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린 황제는 숨을 꺽꺽 몰아쉬며 간신히 숨을 골랐다.

암살의 위협을 느끼는 것보다도, 제 잇속을 챙기려는 신하들을 앞에 두고 국사를 보는 것보다도 짜릿하게 뒷골을 땅기는 감각, 그것은 일방적이지 않은, 쌍방향으로 오갈 수 있는 대등하게 물어뜯을 수 있는 존재를 만난 쾌감이었다.

그 사실이 황제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모두가 한 줌 권력에 기대어 제잇속을 챙기려 권력투쟁에 허우적거리고 있거늘, 소년은 겉으론 입에 흘러넘치는 꿀처럼 달콤하게 황제를 속였지만, 그 밑바탕으로는 황제에게 쓸데없이 특별한 모습을 보여 정을 맞고 싶지 않다는 무관심이 깔렸었다.

그 무관심에 오히려 소년은 황제의 관심을 샀다.

이번에는 내가 한번 당했구나, 이걸 어떻게 되돌려 줘야 할까?

즐거운 상상과 고민이 이어지자 그제야 황제는 자신들의 상에 크고 깊은 화과 냄비가 올라온 것을 알았다.

달군 숯이 타오르는 화로 위에 올라간 화과 냄비가 부르르 끓어오르자 자연스럽게 황제가 고기가 담긴 접시를 들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일단은 먹고 나서.

“일단은 개구리 다리부터 넣을까?”

“제가 찍어 먹을 양념을 만들지요.”

평생 손에 물 한 방을 대본 적 없을 황제가 시녀들이나 할 일을 자연스럽게 했다.

긴 은젓가락으로 개구리 다리를 마라탕과 백탕에 반반씩 밀어 넣고 잘익게 휘젓는 동안 태감은 땅콩장과 깨장에 고추기름, 취두부를 으깬 것, 소년이 만든 폰스 소스 등을 작은 종지에 따랐다. 훌륭한 업무분배였다.

검지보다 조금 큰 개구리 다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둥둥 떠올랐다.

그 모습이 퍽 우스운지 황제가 피식웃었다.

“이거 괜찮군, 작은 닭봉 같아서 생각보다 거북하지는 않아.”

“맛도 괜찮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먹어볼까.”

우윳빛 백탕에서 건져낸 작달막한 개구리 다리는 뽀얀 살코기가 부드러워 보였다.

달큰하고 고소한 향기, 자극적이지 않아 살짝 냄새를 확인해본 황제는 안심한 표정으로 개구리 다리를 입에 넣었다.

훌륭한 건치, 특히 날카롭게 발달한 어금니에 우아한 칠흑의 젓가락으로 집은 새하얀 개구리 다리는 너무나 작아 보였다.

도톰한 입술 안쪽으로 개구리 다리를 쪽 빨아들이자 이쑤시개처럼 가느다란 다리뼈만이 깔끔하게 빠져나왔다.

“……괜찮은데!”

백탕은 고소하고 감칠맛이 나지만 어딘가 심심하다. 백탕으로 맛을 본황제는 거침없이 마라탕에 잠긴 개구리 다리를 들었다.

새하얀 살에 배어든 알싸한 매운맛. 고소하고 야들야들한 살점, 그 살점!

이 감질나는 살점을 하나하나 빨아먹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굶주림을 더해만 가는 아귀도 밑바닥이 이런 느낌일까?

개구리 중 큰 것은 다리가 거의 닭 날개만 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소년이 사용한 것은 검지보다 조금 큰 것들, 물론 큰 것보단 작은것이 더 맛이 좋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것이 자신을 귀찮게 한 황제와 태감에게 소년이 수줍게 선물한, 두번째 ‘엿’이었다.

화과 냄비 밑바닥에 깔린 소년의 심중을 알듯 모를 듯하면서도 황제와 태감은 한마디 말없이 개구리 다리를 탐닉했다.

탐닉이라는 표현은, 조금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둘의 얼굴에선 음식을 맛 좋은 음식을 양껏 먹는 것에 대한 기쁨이 없었다.

검지만 한 개구리 다리를 필사적으로 먹는 모습은 아귀도에 빠진 중생과도 같았다.

젓가락으로 발목을 잡고 도톰한 허벅지 부분을 앞뒤로 한 번씩 물어뜯고 통째로 입에 넣어 쪽, 빨아들이면 끝.

한 줌도 되지 않는 야들야들한 살점은 몇 번 씹기도 전에 녹아내려 목구멍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혀끝에 미련만을 남겼다.

“부족해…… 다른 재료를 조금 더 넣어 보자.”

“고기를 더 넣지요. 당면도 넣을까요?”

“다 넣어버리자. 아, 채소는 조금 나중에 넣어야 하나?”

얄팍한 양고기에 오리고기, 각종 내장에 갑오징어, 새우, 숙주와 배추같은 각종 채소에 넓적한 당면까지.

화과 냄비는 꼭 잡탕 전골 같은 꼴로 변했다. 그리고 여기에 고봉으로 뜬 흰밥까지. 용이 내려앉은 궁. 반룡궁에서의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금 젓가락에 옥을 깎아 만든 탁자, 은 주전자는 없었지만, 후궁 한쪽의 주방에서도 어린 소년들의 소박한 연회가 있었다. 단출한 야식 시간.

메뉴는 선지에 고추를 넉넉하게 넣어 볶은 초우혈(炒牛血), 그리고 밤에 부담스럽지 않은 돼지 내장 죽 요리. 그 이름도 유명한 급제죽이었다.

팬에 기름을 조금 넣고 달구며 반대편에선 죽에 넣을 돼지 혀와 내장, 간을 손질하던 소년은 쪼그려앉아 기대감에 벅찬 눈동자로 소년을 보던 장소와 이삼에게 씩 웃어주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던 어린아이들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이 급제죽이 왜 급제죽인지 아십니까?”

“어…… 혹시 장원급제한 고명한 문사께서 죽을 즐겨 드셔서?”

지극히 보편타당한 이삼의 대답에 소년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게 보편적인 대답이겠지.

“이 죽에는 재미있는 민담이 얽혀있지요. 옛날 광동 지방에 돼지고기를 파는 까막눈 행상에 있었는데 하도 무식해서 아는 게 없다 보니 근처 훈장에게 돼지고기, 돼지 내장, 돼지 간 석 자를 배웠다 합니다. 이 세자를 배워서 장사에 요긴하게 써먹었다지요.”

나무통 안에서 푸들푸들 떨리는 푸딩 같은 붉은 선지를 달군 철과에 밀어 넣으며 소년이 운을 띄웠다.

피비린내라기보다는 육즙 같은 고소한 향기가 나자 앉아 있던 장소와 이삼이 움찔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져지는 선지에 신선한 들기름을 넉넉하게 넣으면 폭발적으로 고소한 향기가 피어난다. 둘의 반응이 퍽 재밌는지 소년은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이야기를 길게 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의 꼬임에 빠져서 행상이 과거시험에 보러 간 겁니다. 아는 문자라곤 돼지 내장, 돼지 간, 돼지고기뿐인 사람이 동네 유명한 명사들은 다 달려드는 과거시험의 답은 커녕 문제를 제대로 해석이 될 리가 없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는 석자를 적고 나왔다합니다. 그런데 마침 시험관이 그석자를 알려준 훈장님인 겁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훈장님이 문제를 바꿔치기해서 행상이 시험에 합격했지요.”

죽이 푹 퍼져 끈끈해지자 소년은 서둘러 손질해 둔 내장을 죽에 넣었다.

“그런데 두 번째 시험에서도 아는 석자를 적어내었는데 두 번째 시험관이 답이 퍽 해괴하지만 통과한 걸 보면 분명 훈장님과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구나 해서 어거지로 두 번째 시험도 통과시킵니다. 까막눈 무지렁이가 경사에서 열리는 삼차시험까지 가게 된 거지요.”

죽 위로 서서히 내장이 떠오르자 소년은 바늘처럼 가느다랗게 생강을 채 치고 그 위에 간장을 따라 죽을 간할 것을 준비했다.

서둘러 선지를 볶아내고 죽을 떠서 염수 발효시킨 포채 약간을 꺼내 상을 차리자 득달같이 장소와 이삼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경사에서 황족의 행차를 구경하다 가마에서 떨어진 등을 주운 겁니다. 그 등을 들고 시험장에 가니 시험관들이 답이 기이 막측한데도 황실의 등을 걸고 있으니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을 것이라 하며 결국 장원에 급제한 겁니다.

그 후 행상이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자랑할 만한 이야깃거리와 함께 돼지 내장으로 끓인 죽을 급제죽이라하며 파니 문사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학문을 공부하며 그 죽으로 원기를 보충했다 하여…… 아니, 배가 많이 고프신 것 같으니 이쯤 하지요. 드십시다.”

소년이 서둘러 말을 끝내자 장소와 이삼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젓가락을 돌려 부드러운 선지를 집어 들었다.

불에 재빠르게 익혀내 퍽퍽하게 익지도 않고 부드럽게 혀 안에서 풀어지는 것이 꼭 잘 익힌 간을 먹는 것만 같다.

매콤 짭짤한 양념에 피비린내 없이 고소한 선지는 먹을수록 입맛을 당기는 마성의 반찬이었다.

어이구 잘 먹네, 양껏 자시오.

소년도 죽을 한술 떴다. 혀 안에서 미끄러지며 목구멍 안쪽으로 스르르 녹아드는 죽과 서로 다른 오도독 쫄깃한 내장들이 기분이 좋았다.

손질을 잘해 돼지누린내도 나지 않았고 먹고 나면 든든해 긴 밤이 두렵지 않다.

여기에 생강채를 간장에 적셔 얹으면 검은 간장이 흰 죽을 물들이며 오묘한 프랙털 문양으로 퍼졌다.

뜨거운 죽의 김에 생강이 숨이 죽으며 수증기를 타고 알싸한 생강 향이 올라와 입안에 침이 고이게 했다.

아직 혈기왕성한 나이, 이 정도 야식이 위에 부담되지는 않겠지만 늘 고혈압을 조심하며 살아온 지난날에 소년은 두 번째 수저를 뜨기 무서워졌다.

아직 스물도 안 넘었는데, 술도 많이 안 먹고 아직 혈압은…….

건강은 늘 어려서부터 챙겨야 하는법. 하지만 가금씩의 일탈은 인간의 감성을 풍요롭게 하는 법이니 소년은 애써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러고 보니 오운 님은 어떤 포상을 비셨어요?”

“……예? 아 저요. 그게…….”

아직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소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도 좋을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대충 둘러대는게 좋겠지만…….

“음…… 그게요.”

소년의 고민은 짧게 끝났다. 달음박질 소리와 함께 거칠게 주방문을 열고 들어온 태감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비단궁장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 머리를 틀어 올린 청옥 비녀를 아무렇지 않게 빼내 바닥에 내버렸다.

땀에 젖어 든 사슴 같은 긴 목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었다.

혹시, 쫓기고 있는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평생 궁중 예법을 배워온 태감님이 저렇게 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만약 진정 정적이 보낸 암살자가 후궁에 잠입한 거라면.

소년은 슬그미니 도마에 올려둔 칼을 쥐었다. 허리는 굽고 다리를 절어 도저히 숙련된 암살자에게 한칼 먹일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부하 된 도리로서 최소한 태감의 칼받이 노릇이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결연한 의지와 목숨을 불태울 각오라는 이름의 광기가 들어찬 소년의 눈동자를 보며 태감은 긍정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종 간의 이해가 일치하자 소년이 말했다.

“태감님, 제가 막는 동안 자리를……”

“배가 고프다.”

“예, 배가 고프실 테니 서둘러 자리를 피하시고 후일을 도모 예 시발뭐요?”

소년의 매우 급한 육두문자에도 태감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소년에게 맞추며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배고파, 죽겠다.”

“지금 식사하고 오시는 길 아닙니까?”

“젠장, 혼자 먹어도 모자란 걸 나눠 먹었는데 간에 기별이나 갈 것 같으냐? 나만큼이나 황제 폐하도 대식가라는 걸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아차 싶어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의 몫으로는 이인분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상을 차린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자신의 실수는 자신이 봉합해야 하는 법. 소년은 선선히 태감에게 뭐가 먹고 싶은지를 물었다.

“내일 쓸 집오리를 미리 손질해 둔게 있으니 오리요리라면 바로 가능합니다. 뭐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신가요? 아니면 뭐, 제가 알아서 준비할까요?”

“오리, 집오리라.”

태감은 다른 것은 몰라도 소년의 솜씨 하나는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분명 뭘 먹어도 맛있으리라.

하지만 어중간한 식사로 극에 달한 공복에 뇌리가 잠식당하자 무의식에서 뭉클뭉클 음식에 관한 기억이 스며 나와 무심코 혀에 배었다.

“성도장암…….”

“저번에 드셨던 게 입에 맞으신 모양이군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성도장압(成都醬鴨).

소년은 서둘러 밑간해둔 오리를 꺼내 왔다. 밑간은 오리를 물에 씻어 소금과 술을 고루 바르고 다진 파와 생강, 산초로 버무려 2시간 이상 단지에 절여두면 된다.

‘오늘은 시간상 미리 준비해 둔 걸 쓰겠습니다.’

어쩐지 요리 프로 멘트 같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기력이 다한 듯한 태감에게 음식을 먹여주기 위해 손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아궁이에 불을 가득 때 밑간이 밴 오리를 찐다.

“그동안 이 죽이라도 드십쇼. 제가 먹던 거라 죄송하지만…….”

“호오…… 내장 죽이구나…… 이거 괜찮은데. 내일 아침도 이게 먹고 싶구나.”

“내일 아침에도 이게 드시고 싶으시다면야 해드리죠.”

쪄낸 요리는 한 김 식혀 노르스름해지도록 튀긴다. 오리가 튀겨지는 동안 냄비에 소량의 기름을 넣고 첨면장(甛麵醬, 이것에 MSG 같은 조미료와 캐러멜을 넣은 것이 한국의 춘장이다)을 볶는다. 향기가 나면 청탕과 당밀, 소금 후추와 술을 넣고 조리다 오리를 넣고 끓인다.

오리에 고루 맛이 배면 건져내 톡막을 치고 접시에 올린다. 냄비에 남은 즙을 팔팔 끓여 졸이고 참기름 약간을 떨어뜨려 향을 더한 다음 오리 위에 끼얹는다.

“원래대로 라면 장식을 더 해야겠지만 바쁘니 생략합시다. 여기 밥도 있고 포채도 좀 꺼내올 테니 식기 전에 드시지요.”

윤기가 흐르는 오리는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보다도 부드럽고 달콤해보였다. 코를 찌르는 그윽한 향기, 야들야들한 살점은 젓가락을 대면 녹아내릴 듯 부드러워 보였다.

어쩌면 음식을 먹을 때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이 아니라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술로 가져가는 순간일 것이다.

기다린 시간에 대한 성취감마저 드는 그 기분. 입에 들어가면 사라질 오리가 안타까워 쉬이 입에 넣지 못하던 태감은 뱃속의 아귀가 비명을 지르자 감성을 이성으로 억누르며 살점을 씹었다.

중후한 오리의 기름이 혀 안에 배어들고 짭짜름한 첨면장의 풍미가 코점막을 타고 뇌수를 침범한다.

한번 입에 대면 더는 멈출 수 없다.

늦은 밤. 태감의 야수와 같은 식사에 바싹 얼어붙은 장소와 이삼은 그 기백에 질려 벽에 바싹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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