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34화 (34/314)

환관의 요리사 34화

신앙이 도를 넘어서 인지부조화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암과 광신의 유사성을 말해보라면 소년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둘다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며 한번 뿌리내리면 완벽하게 제거하기 극도로 어렵다.

하지만 암과 광신의 차이점은, 암과는 달리 광신은 주변 사람들마저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심지어 전염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상관을 논리로 이겨 먹으려 하면 큰 화를 당하는 법이다. 거기에 소년은 논리적으로 태감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 편도 아니었다.

어린놈 같으면 줘 패서 정신 차리게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정신병원이라도 처넣으련만, 애석하게도 이놈은 상관이다.

떪은 감이라도 베어 문 것 같은 표정의 소년을 보며 태감도 마주 한숨을 쉬었다. 남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한참을 고뇌하던 태감은 이내 가장 직설적인 화법으로 소년을 이해시켰다.

“지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지? 구제 불능의 광신도라던가.”

“예. 솔직히 가까이하고 싶지 않네요. 집안 내력으로 광신도한테 두드러기가 일어나서.”

직설적인 질문에 소년은 지극히 솔직히 대답하여 태감의 분노에 장작을 더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어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볼썽사나울 정도로 마른 소년의 외견을 보면 아무리 살살때려도 큰 사달이 날 것 같아 억지로 그러쥔 주먹을 펴야 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세상에 자기 입으로 아편 중독자라고 시인하는 중독자 있습니까?”

이 정도쯤 되면 한 대쯤 쥐어박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도 태감은 한 번 더 참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스러운 자제력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폐하의 신하일뿐 그분을 신격화해서 매년 제사를 지내지도 않고 산 제물을 바치지도 않는다. 내가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역사적으로 수십 차례 입증된 사실이야.”

태감이 아무리 간곡한 표정으로 설득해도 소년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미신이 영향력 강한 중세시대라고 해도 사람이 기우제를 지내서 비가 내린다고 하면 마녀로 몰려화형이나 당할 것이다.

“아니 X발, 그럼 옆 나라 놈들은 뭐 없습니까? 황제 폐하가 비를 내리시니 그쪽은 뭐, 동물이랑 의사소통이라도 돼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지? 동식물과 말이 통하는 힘은 동방의 청해국 정씨 왕가의 혈통에 전해지는 능력인데.”

태연한 태감의 말에 소년은 말을 잃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황제란 인간은 정말하늘이 낸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비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니? 그야말로 하늘이 낸 신인이 아닌가.

쭈뻣거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비웃음을 흘렸다.

“아니면 도대체 왜 제국의 백성이 황제 폐하를 추종하겠느냐? 백성이란 우둔해 보여도 자신들의 이해득실에는 민감한 법이다. 추종할 가치가 없다면 황제로 모실 필요가 없지. 알량한 혈통하나로 수많은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 아니겠죠?”

특별한 능력 없이 혈통하나로 왕이 되던 시대의 역사를 배워온 소년은 다른 대답을 짜내지 못하고 조용히 패배를 시인했다.

비슷비슷해 보여도 다른 세계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종할 가치가 있고 실질적인 이득이 있기에 믿고 따른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똑똑하구나.

대단히 합리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조금 냉정해 보이기도 했지만, 소년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해 더 마음에 들었다.

어쭙잖은 충성심을 고조시켜 세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깔끔하지 않은가?

“아무튼, 궁금증은 해소되었나?”

“예, 그럼 이제 점심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묵례를 하고 집무실을 나서려는 소년에게 태감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 그리고 사흘 후에 황제 폐하께 개구리 요리를 진상해야 하니 미리 준비해 두도록.”

“아 개구리요, 예…… 예?”

제 할 말을 다 끝냈다는 투로 상큼하게 ‘수고!’라고 인사를 건넨 태감은 이내 더없이 성실한 태도로 쌓인 목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업무에 대한 열정에 불타오르는 신입사원 같은 표정에 기가 질린 소년은 다른 반문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역시 저 양반의 점심은 채소가 좋겠다.

* * *

얼얼한 매운 향기가 후궁의 공기로 물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코를 톡치고 지나가는 후끈한 고추를 볶는 향기, 화과(火鍋)의 양념을 만드는 향기였다.

중경에서 재배되는 맵기로 유명한 고추 초천홍(朝天紅)과 하남성의 색이 곱기로 유명한 고추 신일대(新─代)를 섞어 유채 기름을 넣어 볶는다.

불이 세면 타고 약하면 제대로 볶아지지 않아, 불 조절이 중요하며 주걱을 냄비 밑바닥까지 넣어 힘있게 뒤집어줘야 하므로 온몸이 땀으로 젖어 드는 고된 노동이었다.

오랜 경험으로 소년은 고추가 바사삭 부스러지는 그 느낌으로 고추가 잘 볶아졌음을 알았다.

이젠 다른 냄비에 우지(牛脂, 정제한 소 기름)를 넣고 양념이 타지 않을 정도로 달궈 두반장과 두시(豆鼓, 콩을 발효시켜 만드는 말린 청국장과 흡사한 조미료)를 넣고 다진 생강을 넉넉하게 넣는다.

두반장과 두시는 육수의 텁텁한 맛과 걸쭉함을, 생강은 알싸한 매운맛과 청량한 향을 내고 매운맛에 복잡한 깊이를 더해준다.

진양의 명물 산초인 금양청화초(金陽淸花椒)를 비롯한 다양한 산초는 각각의 얼얼한 맛과 향기가 달라 그맛이 적절해지도록 배합해 줘야 하는데 이는 소년만의 황금 레시피로 이루어졌다.

소기름은 고추와 산초의 매운맛과 향을 효과적으로 추줄하기 좋은 재료로 오늘은 그중에서도 두태 기름이라고 하는 콩팥을 감싼 기름을 사용했다.

유난히 고소한 맛이 강하고 향이 진해 한국에서도 육개장을 끓이거나 전골 육수를 낼 때 사용되는데 유통량이 많지는 않아 일반인들은 구하기 어려운 재료다.

끓어오르는 기름에 다양한 향신료가 들어갈수록 맵싸한 향기는 풍성하게 변해갔다.

매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귀주지방 출신인 장소는 그 향기에 넋이 나가 본연의 임무마저 잊고 주방안을 들락날락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이야말로 두말할 것 없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검붉은 색으로 끓어오르는 양념을 약간 덜어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본 소년은 폭발적으로 식도를 타고올라 코로 빠져나오는 매운 향기와 혀를 찌르는 맛에 혀를 내둘렀다.

이번 생에는 처음 만들어본 양념인데 역대 어떤 양념보다도 완벽하게 잘 나왔다.

역시 재료의 단가를 생각하지 않고 최고의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한 덕분일까?

요리사는 늘 시간과 돈에 쫓기는 존재였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더라도 원가라는 현실은 늘 요리사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런 의미에서 돈을 신경 쓰지 않고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현실 도피적인 쾌감을 부여했다.

“어때요? 맛있어요? 얼마나 매워요?”

“예, 이 정도면 폐하께 내도 되겠습니다.”

아마 장소가 발을 동동 구르며 안달복달하는 이유는 황제께 음식을 내야 하는 소년이 걱정되어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좋게 생각하기로하며 주방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샤브샤브와 유사한 요리답게 화과에는 온갖 재료를 다 사용할 수 있었다.

당면에 갑오징어, 신선한 천엽에 오리의 창자와 오리위장, 심지어는 스팸에 껍질 벗긴 소나 돼지의 주동맥까지도.

동맥은 무척이나 질깃질깃해 꼭 고무 같은 식감인데 그 고무 같은 식감에 중독되면 다른 식재료는 쳐다도 보지 않고 그것만 찾을 정도로 마니아가 많은 식재료다.

물론 고기와 채소 같은 보편적인 재료도 빼놓을 수 없다. 고기라면 소나 돼지, 양에 조금 특이한 걸 찾는 사람이라면 염소고기도 좋은 선택지가 된다.

염소는 조금 풀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기름기가 적고 쫄깃하며 보양 효과가 있어 찾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오늘의 메인식재료를 개구리. 개구리 뒷다리를 매운 육수에 살짝 데쳐 먹는 마라전계퇴화과(麻辣田鷄腿火鍋)가 그 주인공이었고 그것을 위해 어른 손바닥보다 큰 싱싱한 개구리들이 광주리에 한가득 담겨 주방 한쪽을 메우고 있었다.

“우우…….”

“이번엔 좀 먹어볼래요? 싱싱한 거로 두어 놈 잡아줄 테니까.”

“아…… 아뇨, 괜찮아요.”

지난날 주방 한쪽에 가득 쌓였던 해체된 개구리들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장소는 사색이된 얼굴로 주방을 뛰쳐나갔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소년은 능숙하게 개구리의 대가리를 내려쳐 기절시키고 뱃가죽에 칼금을 내 껍질을 벗겨내 다리만을 잘라내고 내장을 빼낸 몸통은 육수를 내는 통에 넣었다.

기본적으로 소 사골과 닭 육수로 육수를 내는 화과 육수에 넣을 생각이었다.

개구리 육수는 잘못 우려내면 비리지만 약 불에서 서서히 우려내면 감칠맛 나는 맑은 육수가 우러나온다.

적막한 주방, 이따금 개구리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줄행랑을 치는 장소의 모습에서 소년은 해묵은 추억을 상기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뱀이든 개구리든 도롱뇽까지도 익숙하게 다루곤 하지만 그도 어린 시절에는 곤충을 징그러워하고 개구리 만지는 것도 무서워하던 평범한 도시 소년이었다.

하지만 스승님 아래에서 요리를 배우며 점차 혐오스러운 감정이 잊혔고 이제는 그저 식재료로 보일 뿐이었다.

혐오감이란 결국 먹을 수 있게 되면 없어지는 법이다. 식욕은 혐오를 이긴다.

예를 들자면 새우가 그렇다.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새우를 싫어하겠는가?

굽고 삶고 찌고 튀기는 것으로 모자라 생으로 먹고 간장에 절여서까지 먹는다.

그 탱글탱글하고 즙이 많은 살은 달큰하며 해물 특유의 짭조름한 맛이 입에 감돌아 사람을 미치게 한다.

껍질을 까는데 공을 들여야 하는것도 귀찮지만 깨끗하게 껍질이 까진 오동통한 새우살을 보면 성취감과 만족감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솔직히 새우는 징그립게 생겼다. 바퀴벌레와 뿌리를 같이 하는 그 녀석.

마디가 확실하게 나누어진 몸통의 갑각과 벌레를 연상시키는 다리들은 어떤가?

심지어 다리가 긴 녀석들은 그 가늘고 긴다리가 꼭 거미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하지만 새우가 징그럽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 거미가 아주 대중적인 식재료였다면 어땠을까? 전갈은? 실제로 두 가지 모두 중국 야시장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식재료들이다.

물론 그곳에서도 기피 하는 사람은 기피했지만.

언젠가 날을 잡아서 장소와 이삼에게 반드시 개구리 요리 풀코스를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개구리 가죽을 벗겨 냈다.

손질이 끝나자 다리는 으슥한 곳으로 밀어 넣고 내장을 제거한 몸통부분을 삶아 육수를 내기 시작했다.

소 사골을 메인으로 하고 닭 육수대신 개구리 육수를 사용한 백탕, 여기에 구기자와 대추, 팔각 등의 이십 여가지 한약재를 넣고 푹 우려낸 진국은 그냥 마셔도 약이 될 만큼 진할 것이다.

본디 계획대로 라면 하룻밤 내내불 앞에서 만든 얼큰한 마라홍탕 만을 낼 생각이었지만 중간에 계획을 변경하여 홍백쌍탕을 내기로 했다.

“혹시라도 황제 폐하가 매운맛을 싫어하실 수도 있으니 말이지.”

그렇기에 일부러 서로 다른 육수를 담을 수 있도록 반으로 갈라진 냄비를 준비했다.

이제 여기에 백탕과 홍탕을 내고 재료를 풍당 담가 끓여 다양한 양념장을 곁들여 먹으면 화과 냄비 완성.

식재료로는 개구리 다리 말고도 오리고기와 오리 내장, 얇게 썬 양고기와 포를 뜬 민물 농어살 등을 준비해 두었다.

호기심에 한두 번 맛을 보고선 치우라 하실 수 있으니.

유비무환, 만사 불여튼튼이다.

“여전히 엄청난 광경이군. 꼭 이교도의 제사를 보는 기분이다.”

언제 들어온 건지 냄비 안을 들여보던 태감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그 모습이 우스워 소년은 가죽만 벗긴 개구리 몇 마리를 집어 들어 태감에게 권했다.

“몇 마리 빌려 드릴까요? 비가 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글쎄다, 가죽 벗겨진 것도 받으실지 모르겠구나.”

저번에 꽤 맛있게 먹었음에도 역시 요리과정은 상당히 버거운지 태감은 냄비 안에서 시선을 떼고 될 수 있는 대로 멀직이 물러섰다.

‘일단 좀 치워둘까.’

자르던 개구리 머리를 주방 으슥한 곳으로 밀어 넣고 소년은 태감에게 차를 권했다.

으슥한 그늘로 개구리가 엿보여 태감은 썩 내켜 하지 않았지만 달콤한 떡을 준비했다는 말에 넘어갔는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우려내는 차는 백호은침(白毫銀針).

복건성의 명차로 길고 뾰족하게 말려 바늘 같은 모양에 어린잎만을 따솜털이 은빛으로 빛나 아름답다.

어린 찻잎이 으레 그러하듯이 너무 뜨거우면 떫은맛만 우러나고 제맛이 우러나지 않아 찻물의 온도조절이 중요하여 오랜 경험이 필요한 차다.

다과회에서 비들이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 끓이는 차이기도 한데 소년은 전문 다도인에게 솜씨를 배운 비들보다도 더 우아한 자태로 차를 우려 냈다.

“어디…… 떡은 삼대포(三大炮)라고 찰떡인데 괜찮으십니까?”

“찰떡은 오랜만인데. 어서 다오.”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게, 입술에 머금으면 기분 좋은 온도로 우러난 차는 향기 그윽하게 잘 우러나 코끝을 가까이하기만 해도 향긋한 향기가 물썬 피어오를 정도였다.

높은 관직에 올라 좋은 차를 늘 가까이하는 태감도 쉬이 마셔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차였지만 태감은 제사보다는 제삿밥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부드럽게 찐 반죽을 철과에 탕탕소리가 나게 반죽을 해 기름을 바른손으로 뚝뚝 떼서 세 덩어리를 내는것이 보통인데 고소한 콩가루에 굴려 달콤한 붉은 설탕 시럽을 듬뿍끼얹어 먹는다.

“이렇게 반죽을 탕탕 소리가 나게 내려치고 그릇에 세 덩어리를 담으니 큰 소리가 세 번 난다고 해서 삼대포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사천지방의 명물입니다.”

“호오…… 어째서지?”

“그야 이렇게 소리를 내서 손님을 끌기 위해 서지요.”

쫄깃쫄깃한 떡에 고소한 콩가루, 달콤한 시럽의 조합이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양껏 떡을 먹은 태감은 목이 메는지 고상하게 우려낸 차를 품위 없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평소에도 그리 드시는 건 아니죠?”

“네가 걱정 안 해도 평소에는 고상한 자세로 찔끔찔끔 먹으니 걱정마라.”

“거 참, 귀찮으시겠습니다.”

“귀찮다마다.”

그러니 소년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일 것이다. 알고 지낸 시간은 짧아도 소년 앞에선 가식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 없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해방할 수 있으니까.

떡을 다 먹어 치우고 차로 입가심한 태감은 두툼한 책 한 권을 소년에게 내밀었다.

귀중하게 보관되는 것인지 겉은 기름을 먹인 소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표지엔 용사비등한 필체로 하사품 기록지라 쓰여 있었다.

“홍엽비의 병을 완쾌시켰으니 너에게도 뭔가 포상이 있을 거다. 이건 그동안 용의 아드님께서 신하들에게 하사하셨던 물건들을 기록한 일지인데 온갖 특이한 물건들도 있으니 한 번 취향껏 보고 결정해라.”

일지에는 대략 삼백 년간의 인명과 관직, 그리고 물품들의 목록이 아주 가는 세필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평범한 것은 좋은 명마나 이름난 보검 따위, 내력이 깊은 도자기나 그림 같은 예술품, 학자 중에는 서원을 요구한 자도 있었고 개중에는 황실 비고에 보관된 천하에 이름난 명주를 요구한 주당도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이러했지만 개중에는 서역으로 가기 위한 여비와 은퇴허가를 요구한 체제공이라는 관인이나 황제의 거처인 반룡궁에서 기르는 황금 잉어를 요구한 막료라는 관인, 무례하다고 해야 할지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황제 폐하와의 비무를 요구한 배율이라는 무인도 눈에 띄었다.

나라가 크면 그만큼 기인도 많은 법이구나. 거기에 그런 요구를 들어준 황제의 배포 또한 대단했다.

보통 권력자라면 직접 칼을 들기 전에 이미 다른 신하들이 역적이라고 참수하지 않았을까?

그 내막이 궁금했지만, 먹물 한 방울로 기록된 문자에서 알 수 있는것은 한계가 있으니 소년은 별수 없이 다음 장으로 넘겼다.

한장 두장, 엄지손톱만 한 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 한 장을 넘기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어느새 후궁의 담 너머로 노을이 걸릴 시간이었다.

명부의 기록을 읽다 눈이 침침해진 소년은 아궁이의 불씨를 긁어 등잔에 불을 밝히었다.

심지에 작은 불꽃이 매달려 한 평만큼 어슴푸레한 어둠을 걷어내었다.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딱히 이거다 싶은 포상이 없다.

궁에 매인 신분에 땅이 무슨 소용이며 돈도 그리 매력을 못 느끼겠다.

정 필요하다면 잘 드는 좋은 칼이나 몇 자루 정도 가지고 싶은데 이건 굳이 포상으로 요구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고 정 필요하면 이제 직접 내관감에 주문해도 되니 이 또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말이야 탈 줄도 모르고 예술품은 봐도 좋은 줄을 모르겠다. 정 원한다면 휴가겠지만 이건 황제에게 요구할 만한 것이 아니니…….

이내 흥미를 읽어 파라락 종이를 대충 넘기던 소년의 시선이 일순간 한곳으로 지정되었다.

세상에 이런 걸 요구한 또라이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놀랍게도 자신이 무척이나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소년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질 듯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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