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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32화 (32/314)

환관의 요리사 32화

피곤함에 짓눌려 꿈조차 꾸지 않고 잠들었던 소년이 눈을 떴을 때는 어슴푸레한 불빛이 동녘 하늘을 밝히는 시간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태양을 동에서 떠 서쪽으로 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모처럼 이 세계인데 태양이 서쪽에서 동으로 지면 어떻고 남에서 북으로 져도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면 달이 꼭 하나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자신의 뇌에 전류를 흘리는 미친 과학자는 분명 아주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이 틀림없다.

거기에 틀림없이 여드름투성이에 배가 축 늘어진 돼지 같은 놈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지, 반사회적 성격장애 새끼.

투덜거리며 몸을 완전히 일으킨 소년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스트레칭을 했다.

허리가 굽고 왼쪽 다리가 펴지지 않아 무척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조금씩, 너무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펴서 근육을 부드럽게 하고 손발 말단 부분까지 피가 돌아 몸이 따뜻해지자 닭울음 소리가 들릴 시간이 되었다.

후궁에도 닭이나 돼지를 기르는 축사가 있기야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외곽부에 있으니 새벽닭 대신 사람이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린다.

늘 일정한 시간에 종을 쳐야 하니 여간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종을 지는 환관들은 직급도 낮아 제때 잠도 자지 못하는 형편에 다른 특별 대우도 없어 다들 기피하는 보직이다.

군대에서도 일찍 일어나는 취사병은 오침이라도 재워줬는데 여긴 그런 것도 없으니 생지옥이 아닐 수 없다.

종지기의 노고에 동정심을 느끼며 소년은 슬그미니 일어나 주방으로 갈 채비를 했다.

틀림없이 태감이 지난날의 식사를 만회하려 이를 갈고 있을 테니 오늘 하루는 바짝 긴장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설마 아침부터 고기를 먹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죽으로는 부족할 테니 밥에 아침식사로 먹기 좋은 요리를 차려 낼 계획이었다.

계란을 풀어 다진 파를 넣고 간장과 소흥주 약간으로 간을 해 중국식 오물렛도 만들고……

탕은 닭 육수로 만든 청탕에 파를 약간 뿌려서…… 가벼운 채소볶음도 하나 내면 아침식사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 완연한 여름이 되어가는 계절이지만 강북지방에서도 북쪽에 있는 편인 경사의 새벽은 서늘한 편이었다.

얇은 여름옷을 파고드는 한기에 가뜩이나 왜소한 몸을 더 웅크리며 서둘러 불씨를 지키는 화섭방에서 벌건 숯을 얻어온 소년은 그 열기에 몸을 녹일 새도 없이 불이 꺼질라.

서둘러 연좌궁 주방으로 향했다.

일주일간 불을 쓰지 않아 차가울 아궁이에 불을 때야 하고 검댕도 긁어내야 하니 자연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가스로 쓰는 레인지도 한 달에 한 번은 청소하는데 장작을 쓰는 아궁이는 얼마나 더러워지겠는가.

한두 번 하면야 이것도 시골의 풍취라고 웃겠지만 일상생활이 돼버리면 그 불편함에 몸이 저릴 지경이다.

당연하게 누려왔던 일상은 얼마나 편리하고 안온했는가.

한여름에 차가운 물 한잔을 먹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들여야 하는가? 뜨거운 물에 몸 한번 담그기 위해 품을 들여야 할 것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새삼 살기 좋았던 전생을 생각하니 차가운 콜라 한잔이 간절해졌다.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액체가 톡톡튀며 목구멍을 긁어 내리는 쾌감을 이제 다시는 맛볼 수 없겠지.

한여름, 침 한 방울까지 메마르게 하는 불 앞에서 조리하다 보면 미친듯이 갈증이 날 때가 있다.

입안에선 단내가 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뜨거운 열기 앞에서.

냉장고에서 꺼낸 콜라를 들이켜는 그 순간은 불 앞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이들의 특권일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같은 부피의 황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생명수.

뒷골이 저릴 만큼 차가운 쾌감은 평생을 불과 다투며 살아오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특별한 선물이리라.

콜라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한순간 재기발랄한 생각이 떠오르자 소년은 발걸음을 끌며 생각에 잠겼다.

제아무리 대단한 명 주방장이라도 레시피도 모르는 콜라를 만들 방법이야 있겠느냐마는 탄산수 정도라도 구할 수 있다면 요리의 폭은 물론 청량한 음료로 피로한 인생의 큰 위안거리가 되어주리라.

그럼 탄산수는 어떻게 구해야 할까?

광천수로 구할 수야 있다지만 탄산도 약하고 무엇보다 광물 특유의 비릿한 맛 때문에 설탕이나 꿀을 아무리 넣어도 음료로 이용할 것은 못된다.

그렇다면 직접 만들 수는 없을까?

“전에 드라이아이스로 탄산수를 만들 수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럼 드라이아이스는 어디서 구해야 할까? 과연 드라이아이스를 구하는 게 쉬울까?

아니면 드라이아이스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탄산수를 만드는 게 빠를까?

소년은 길고 긴 사유의 모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족히 수십 년은 되는 지난 삶의 기억 밑바닥 속으로 침잠하며 소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길고 길었던 삶의 기억에서 무가치한 것들을 걸러내고 필요한 기억만을 걸러내는 것은 모래 바다에서 바늘을 걸러내는 것만큼이나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소년은 정신의 나이만큼이나 인내심이 깊었고 때때로 걸러져나오는 유쾌했던 기억들은 소년을 미소 짓게 했다.

그의 기억이 고등학교를 타고 넘어중학교 시절의 과학 수업 너머로 파고들었을 무렵 의문의 충격이 소년의 측두부를 가격했다. 가벼운 충격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뭐하냐?”

눈앞에 찡그린 미의 화신이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에 소년의 눈썹이 와락 일그러졌다.

“새벽부터 웬일이십니까 태감님? 참고로 오늘 아침은 밥에 오믈렛입니다.”

“그게 뭐지?”

“서양식 계란 요리요.”

흑단처럼 검고 학의 날개처럼 우아한 눈썹을 찡그린 태감은 부드러운 운율감 마저 느껴지는 동작으로 고개를 저었다.

왠지 저 턱에 붓을 대기만 해도 세기의 명화가 탄생할 것만 같아 소년은 속으로 짧은 육두문자를 토했다.

짧은 침묵 끝에 태감은 수줍게 입을 열었다.

“고기가 먹고 싶다.”

“아침입니다. 태감님.”

“나도 안다.”

“……꼭두새벽부터 고기를 드신다고요?”

자신보다 후궁 생활을 오래 한 태감에게 지적할 만큼 소년이 황실 예법에 해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소년은 한마디를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식재료마저 등급을 나누고 조리법마저 차이를 두는 황궁의 지엄한 예법에서 아침부터 고기 요리를 찾는것은 나태하고 천박한 이들의 식습관이라 멸시했다.

물론 소년은 태감의 고기사랑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슬만 마시며 살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태감은 세끼 밥을 고기로 먹어도 부족하다 할 만큼 열렬한 육식주의자였다.

어찌 예와 덕을 아는 지자(知者)가 천박하게 손으로 고기를 뜯느냐하며 멸시할 만한 뼈가 붙은 고기 요리도 달려들어 양손으로 뜯어먹고 접시를 들어 국물을 마실 만큼 자유분방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고기라, 괜찮을까?

영양학적으로는 오히려 아침을 가장 든든하게 먹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요리사인 그는 위장의 운동이 가장 활발한 점심이야말로 기름진 고기 요리를 먹기 가장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맛있는 점심이야말로 직장인들의 삶의 활력소가 아니었던가?

소년은 부드럽게 거절의 의사를 띄우려 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제 목숨이 아까워 직언을 올리지 못한다면 어찌 충신이라 하겠는가?

진정한 충신이라면 제아무리 아픈말이라도 목숨을 걸고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태감이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미쳐 대응하기도 전에 벽으로 밀어붙여진 소년의 얼굴에 태감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일 촌의 거리, 소년의 시야엔 태감의 거칠어진 숨소리와 가슴의 기복, 또렷한 홍채안의 핏줄마저 선명하게 보였다.

그 두근거리는 심장박동마저 들리는 듯했다. 보통 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는 심장이 태감이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대신 알려주었다.

충혈된 눈동자, 일주일이라는 시간동안 금단증상에 시달려온 태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고기가, 먹고 싶다.”

아, 어찌 이런 열렬한 구애를 모른척 할 수 있을까. 소년은 기쁘게 화답했다.

“홍엽비 님이 못 드신 독약 대신 드시렵니까?”

이 X발 새끼가 진짜 뒈지려고.

소년의 수줍은 대답에 정신이 든 태감은 마치 벌레라도 만지고 있었던 것처럼 손을 털고 떨어졌다.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를 견디지 못한 태감이 먼저 사과했다.

“……미안.”

“아침부터 아편이라도 태우셨습니까?”

“그건 아닌데.”

“아니면 갑자기 채식이 하고 싶으신데 말로 하기가 부끄러우셔서요?”

“아니 설마.”

그럼 X발 아침부터 왜 지랄인데.

극한의 자제력으로 소년은 그 한마디를 삼켜 위장 가장 밑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하지만 그 표정이 이미 수백 마디 욕설을 대신해 주었다.

태감은 처음으로 자신이 소년의 상관이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분명 부하였거나 직급이 같기만 했어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날아왔을 것이다.

‘하여간, 보통 다혈질이 아니라니까.’

목소리를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세워 기백을 정돈하여 태감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사자인 것처럼 신성함 마저 느껴지는 태도로 부드립게 소년에게 의견을 타진했다.

“그저 기념할 만한 재회에 가장 좋아하는 요리로 축하하고 싶었을 뿐이다. 설마 내가 단순히 고기가 먹고 싶어 그런 말을 했겠느냐?”

“헛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는 것은 정치가의 덕목이라 하시더니 과연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어쩌지요? 제가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품이 많이 드는 요리가 어려울 것 같은데.”

상냥한 태도로 신랄한 비판을 하는 소년의 모습에 태감은 식은 땀을 흘리며 궁리했다.

기묘하게도 소년은 틀림없이 그의 하급자임에도 때때로 상대할 때 나이 많은 윗사람을 상대하는 것만 같은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것은 소년의 말투나 표정 따위가 특별해서가 아닌 소년 고유의 분위기에서 우러나오는 압박감 때문이리라.

오랜만에 우물쭈물하는 태감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소년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럭저럭 재미있었으니 슬슬 달래줘야 할 타이밍이다.

“예, 농담이었습니다. 고기 요리가 드시고 싶으시다고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훗날, 태감의 고백에 의하면 그 순간 소년의 뒤로 떠오른 태양의 역광에 감 쌓인 소년은 황당할 만큼 신성해 보였다 한다.

* * *

탕 타당 타당-

규칙적으로 나무 도마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린다. 소년은 육중한 칼로 고기를 곱게 다지고 있었다.

지방이 많은 고기를 사용하되 지방의 함량이 부족하다면 지방을 추가 해 다진다.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곱게 다져지면 생강과 파를 다져 넣어 소금과 후추, 설탕과 소흥주로 간을 한다.

계란물을 만들어 여기에 전분을 풀어 고기반죽에 넣고 아이 주먹만하게 뭉친다.

이것이 사자 머리를 닮은 완자 요리, 사자두의 기본 반죽이 된다.

사자두는 다른 완자 요리 중에서도 유독 기름이 많이 들어가 식감이 부드립고 촉촉하다.

조려도 좋고 쪄도 좋으며 탕에 넣어 끓여도 좋은데 말린 새우 알을 넣거나 기름진 게 알로 향과 맛을 더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년이 만드는 것은 그런 독특한 일품요리가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달콤짭짤한 간장소스의 홍소사자두(紅燒獅子頭)였을 뿐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최소한 동양권에 사는 사람에게는 보편타당한 맛이었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만인에게 친숙한 맛은 모난 부분이 없다.

누군가가 죽기 직전,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에서 찾아볼 수 있을법한 영혼에 새겨지는 맛.

이 짭짤한 간장소스의 맛은 황인종의 영혼에 새겨진 맛일 것이다.

달군 냄비에 기름을 붓고 가열하여 완자를 넣고 노릇해지도록 굽는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면 다른 팬에 육수를 네 컵, 간장과 설탕을 끓여거기에 튀겨진 완자를 넣고 소흥주로 맛을 내 걸쭉해지도록 끓인다.

걸쭉해지면서 소스가 사자두에 엉기기 시작하면 부드러운 윤기가 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기름이 끓는 달큰한 향기가 주방안을 가득 채워 후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여기에 다른 반찬으론 사천 지방에서 공수해 온 무와 오이를 산초를 넣어 유산균 발효시킨 포채(泡菜) 약간, 채 썬 배추를 생강, 고추, 설탕, 식초에 산초와 기름 약간 넣어 무쳐 낸 랄백채(辣白菜) 한 그릇, 마른 새우와 무로 끓여 구수한 해미몽복사탕(海米夢卜絲湯) 정도였다.

메인이 되는 사자두를 제외하면 고기가 들어가는 반찬이 없었다.

참으로 악랄하고 교묘한 술수였다.

가뜩이나 아이 주먹만 한 완자가 소담하게 담겨 있는 모습이 시선을 잡아끄는데 여기에 다른 재료들을 전부 조연으로 배치하여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사악한 공간배치가 엿보였다.

요리를 냈을 때 이미 태감은 간질 환자처럼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두 팔이 들썩거리는 몸을 막기 위채 팔걸이를 잡아 누르고 있었고 희번득거리는 두 눈은 맹수처럼 빛났다. 참으로 아름다운 짐승이었다.

고상한 젓가락을 꺼내고 훌륭한 봉황새 무늬 찻잔에 차갑게 우린 용정차를 따르자 태감의 입에선 억눌린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말단 부분을 간지럽게 하는 쾌감이 등허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듯했다.

소년은 아슬아슬하게 태감이 자신의 목을 조르기 전까지 그 쾌감을 즐기다 마지못해 하는 척 흰 쌀밥을 고봉으로 가득 펐다.

태감의 취향에 맞게 고슬고슬하게 지은 쌀밥은 진주 알처럼 빛났다.

그 고상한 유백색 알갱이들이 보석처럼 빛날 때마다 우아한 향기는 한 여름밤의 은하수처럼 태감의 신경에 아로새겨졌다.

소년의 손이 밥공기를 떠날 때까지, 그 찰나의 순간 태감은 마치 사막을 헤매는 물 없는 나그네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그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도 했다.

밥공기가 태감의 앞에 놓이는 순간. 여행자의 말라붙은 눈꺼풀 위로 감로수가 떨어지는 순간.

태감은 다시 없을 경건함으로 사자두를 집어 들었다. 참으로 묵직했다.

기름이 넉넉하게 들어간 만큼, 업보의 천칭이 내려갈 만큼 무거웠다.

그 무게는 틀림없이 방금 전 휘발된 죄책감의 무게보다 훨씬 더 무거우리라.

이제 먹기만 하면 되는데도 시선을 사자두에 고정시킨 태감은 움직일줄을 몰랐다.

이것을 어떻게 먹어야 할까?

다시없을 난제가 태감을 망설이게했다.

보통의, 평범한 방법이라면 사자두를 먹기 좋게 잘라 먹을 것이다. 틀림없이 젓가락으로 부드럽게 잘릴것이고 한입 크기로 잘라낸 뒤 양념을 듬뿍 묻혀 먹으면 맛도 좋고 입가를 더럽힐 일도 없다.

분명 뜨거울 것이다. 사 등분 하면 딱 먹기 좋게 식을 것이고 그대로 먹으면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태감은 그 순간 때로는 멍청한 짓임을 알면서도 사자두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베어 물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훌륭한 건치를 이용할 것도 없이 입술만으로도 부드럽게 갈라지며 쏟아진 육즙이 태감의 턱을 타고 흘러내려 옷섶을 적셨다.

옷이 좀 더러워진다 한들 뭐 어떠한가. 태감은 어린 시절 옷이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동심 속 추억으로 돌아간듯한 기분을 느꼈다.

공들여 쌓아 올린 교양과 예절이라는 탑을 흙발로 더럽히는 쾌감.

부드러운 고기에 스며든 기름이 달큰한 양념에 녹아내리며 목 안을 감로수처럼 적셨다.

씹으면 씹을수록 육즙이 배어나와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영원히 씹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기름이 배어든 혀에 투명한 쌀밥이 알알이 흩어지며 기름을 빨아들이고 그 위로 새콤하게 발효된 포채의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섬유질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어금니를 희롱한다.

아삭, 아삭.

조금도 질긴 부분 없는 상쾌한 식감에 연수에서 발효되며 자연스레 배어든 새큼한 맛은 흰밥을 씹으며 메마른 혀 안에 새로운 타액을 공급했다.

신맛은 반칙 적이다.

새콤한 즙이 입안을 감싸고 지나가면 남은 혀는 미친 듯이 기름기를 갈구하게 된다. 조금 전 공복 상태이상의 목마름이 그의 식도 깊은 곳에 자리함을 느끼자 태감은 이성이라고 하는 가날픈 최후의 보루를 놓아버렸다.

먹기엔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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