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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31화 (31/314)
  • 환관의 요리사 31화

    드디어 도래한 약속의 날. 가벼운 죽으로 아침을 먹은 홍엽비는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는 그 꼴이 꼭 어린아이 같아 속으로 웃음을 삼킨 소년은 목청을 가다듬고 엄숙한 표정으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아, 드디어!”

    오늘은 그녀와 약속한 대로 매운 음식을 차리기로 한 날이었다.

    그와 동시에 오늘을 마지막으로 소년은 연좌궁으로 복귀하는 날이기도하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근심, 걱정에 그것을 즐기지 못하는것은 바보 같은 일이 아닌가. 걱정도 근심도 우선은 먹고 나서.

    그늘 한점 없는 화사한 홍엽비의 미소에 경도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소년은 다시금 엄숙한 표정으로 홍엽비에게 진언했다.

    “약속하신 바는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기껏 건강이 좋아졌는데 그 수고를 허사로 만들 수는 없지요.”

    홍엽비는 소년과 몇 가지를 약속했다…… 첫 번째는 매운 음식을 너무 과하게 먹지 않을 것.

    두 번째는 매운 음식을 먹기 전에 맵지 않은 음식을 충분히 먹을 것.

    마지막은 매운 음식을 먹다가 속이 안 좋아지면 즉시 식사를 중지할것.

    몇 번이나 더 다짐을 받고 나서야 안심이 되는지 소년은 홍엽비가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야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어머나, 이건?”

    “오랜만에 드시지요? 도전라(稲田螺)입니다.”

    밭에서 나는 소라. 바로 논우렁이였다. 쌀보다 밀 농사를 짓는 이가 많은 북방 근처인 경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렁이는 쌀농사가 주류인 강남지방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미였다.

    호남지방에서는 녕원(寧速)이 우렁이 요리로 유명한데 그중에서 가을은 우렁이가 진흙 속으로 숨어 냄새가 나고 봄 여름에 잡은 것을 최고로 친다.

    황궁에 어울리는 식재료가 아니어선지 시녀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졌지만, 호남지방출신인 홍엽비에게는 친숙하고 그리운 음식인지 기쁜 얼굴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우렁이는 껍데기의 뾰족한 끄트머리 부분을 가위로 자르고 물기가 날아갈 만큼 볶다가 유채 기름 약간을 넣어 껍질이 열릴 때까지 익혀주다가 생강과 마늘, 술과 간장으로 간을 해주면 된다.

    양념이 배어들면 좋은 향기가 나는데 여기서 다진 파를 약간 넣어 상에 내면 된다.

    우렁이는 먹을 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먹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닌데 먼저 잘라둔 끄트머리 부분으로 껍질 안에 찬 국물을 빨아들이고 그다음에 머리 부분을 빨면 쫄깃한 살이 쏙 빠져나온다.

    먹는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아 잘못하면 천박하다고 빈축을 살 수도 있었지만, 세상일이 으레 그렇듯이 아름다운 용모의 홍엽비가 하면 천박함도 아름다운 선녀의 식사가 되는 법이다.

    오히려 우렁이를 빨기 위해 내민 입술이 마치 입맞춤을 조르는 것만 같아 사람을 설레게 하는 야릇한 마저 연출되니 역시 사람은 잘 생기게 태어나 볼 가치가 있다.

    이번 생은 틀렸으니 다음 생에는 부디 미남으로 태어나길 기도해 보자.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싱싱한 우렁이네요.”

    “밀 농사가 주류인 강북에서는 먹기 어려운 맛이지요. 이제 슬슬 요리를 내오겠습니다.”

    홍엽비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만큼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그녀에게는 몇 년이나 입에 대지 못한 고향의 맛 이리라.

    “자, 호남의 명물 요리입니다.”

    얄팍하게 씬 삼겹살을 푸른 고추와 함께 달달 볶아 장으로 맛을 낸 농가소초육(農家小炒肉)에 큼지막하고 기름진 농어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 빨간 고추를 넉넉하게 올려 쪄진 타초어두(剁椒魚頭), 튀긴 닭고기를 매콤하게 볶아낸 마랄자계(麻辣子鷄)는 실로 압권이었다.

    호남의 맵고 새큼한 음식만 있는것이 아니었다. 호남과는 다른 얼얼하고 맵고 얼얼한 사천요리도 넘치도록 있었다.

    어장으로 맛을 낸 가늘게 채를 썬고기볶음 어향육사(鱼香肉丝)에 소내장을 매콤하게 무쳐낸 부처폐편(夫妻肺片).

    민물새우를 바삭하게 튀겨 매콤하게 볶아낸 향랄하(香辣蝦)와 오향분으로 향을 낸 매콤한 토끼찜 이저토정(二姐兎丁)까지.

    물론 사천과 호남 요리라 한들 매운 요리만 먹을 리가 없다.

    홍엽비가 속을 버릴까 일부러 사천과 호남의 맵지 않고 오히려 매운맛을 달래줄 수 있는 요리도 다채롭게 차려 내기는 했지만 홍엽비의 시선은 넉넉하게 흐르는 고추기름과 버얼건 고추, 후추 알 같은 산초 사이를 헤엄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저번 생에서도 남자 보단 여자들이 더 매운 걸 좋아하는 거 같아.’

    가게에서 매운 요리 페스티벌을 할 때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의 대부분은 여성 손님이었다.

    그런 여자친구들에게 잡혀 혼이 빠질 것 같은 얼굴로 억지로 마파두부와 수자어(매운 생선전골)을 먹는 남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연민의 감정에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 작은 입으로 맵지도 않은지 연신 고추기름 둥둥 뜬 국물을 마시고 볶음 요리의 피망처럼 썰어 넣은 청고추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모습을 보면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다.

    폭포수처럼 땀을 흘리면서도 오히려 혀에 탄력이 붙는다는 듯 젓가락놀림이 빨라지는 그녀를 위해 소년은 차가운 물수건을 준비해 주었다.

    온몸의 진액을 쥐어짜는 것처럼 흘러내리는 땀이 쇄골에 고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홍엽비는 오히려 기분 좋게 사우나를 하고 나온 것처럼 산뜻한 미소를 띄웠다.

    음식물 섭취를 끊으며 둔해진 체액의 흐름에 몸에 축적되었을 노폐물이 대량의 땀과 함께 배출되며 몸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라.

    그리고 고추의 캡사이신과 산초의 산쇼을, 마늘의 알리신 따위가 혀를 자극하며 만들어낸 강렬한 통증이 뇌를 자극하며 카테콜아민의 일종인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비되고 있을 것이다.

    후궁에서 쌓이고 또 쌓인 억눌린 욕구가 아드레날린의 투쟁 욕구에 의해 폭주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고 혀를 찌르는 통증에도 홍엽비는 번들거리는 입술의 고추기름을 닦을 새도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억눌린 욕망의 폭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었다는 쾌감. 항상 조심해왔던 남들의 시선과 규율을 무시하며 가져다주는 해방감. 그 저열하고 말초적인 욕구들.

    그 원초적인 매운맛은 그 파괴적인 통증으로 모든 불안과 억압된 감정을 풀어헤치며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었다.

    늘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이 후궁에서 환관들과 나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욕구를 해소한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술과 담배, 그리고 아편 따위의 것들이다.

    거세해도 사라지지 않는 성욕을 메꾸기 위해 나인들과 때로는 환관 자신들 끼리 난교를 벌이기도 한다.

    후궁의 아랫것들은 그런 식으로 욕구를 해소한다.

    그렇다면 윗사람들은 어떠한가?

    성욕을 수그러들고 좋은 술 아편 따위는 이미 질렸다. 그들은 이제 다른 형태로 카타르시스를 추구하게 되었다.

    정적을 낙마시켰다는 정복욕, 자신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턱 끝으로 사람을 부리고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지배욕.

    한번 그것을 맛본 자는 다시는 아랫것들이 즐기는 유치한 쾌락에 눈을 돌릴 수 없게 됐다.

    그렇게 서로를 물어뜯는 구조를 만든 것이 바로 황제와 동창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끝없이 견제하고 물어뜯으며 권력욕을 중족시키는 동안 그들은 그 뒤에서 실익을 챙겼다.

    하지만 그런 정치의 파워 게임도 아편과 술도 비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쾌락이었다.

    언제나 정숙하고 고결해야 하는 비들에게 그런 질척한 유희는 허락되지 않았다.

    허락되는 것이라면 아름다운 정원을 거니는 산책, 질 좋은 비단으로 지은 의복과 정갈하고 담백한 요리들, 훌륭한 차와 달콤한 간식들. 우아한 정원에서 열리는 다과회 따위.

    어느 누가 그런 것들로 쾌락을 느끼겠는가. 도대체 어디서 그 말초적인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가?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을 늘 심리적으로 공격성을 억누르고 있으며 이를 해방하는 과정에서 분노의 감정을 감소시키고 심리적 안정과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도대체 위의 여가활동 중에서 어느부분이 억눌린 공격성을 표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한단말인가?

    이것이 홍엽비가 찾아낸 답이었다.

    매운 음식이 가져다주는 통증, 자신을 자극하고 공격하는 것들을 오히려 위장에 밀어 넣으며 그녀는 폭발적인 해방감을 맛보았다.

    거기에 이 행위는 적절하게만 한다면 오히려 건강에 이롭기까지 하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먹을 수 있을까.

    어쩌면 영영 맛볼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 또한 홍엽비의 젓가락질에 박차를 가했다.

    강렬한 자극이 미친 듯이 신경계를 내달리며 홍엽비의 정신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승화되었다.

    강렬한 해방감과 함께 육신의 통증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이 괴리되어 느껴졌다.

    기묘한 형태의 전능감과 지금 이순간 죽어도 좋다는 충족감.

    차라리 지금 이 음식을 먹으며 죽으면 그것이야말로 지복(至福)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홍엽비의 바람을 절대로 이루어 줄 수 없는 소년은 이쯤에서 홍엽비를 멈추어야겠다고 판단했다.

    “홍엽비 님. 이제 슬슬 후식을 대령할까요? 홍엽비 님? 듣고 계시는지요?”

    “네…… 네? 아, 예…… 후식이요…….”

    “더 드시면 내일 장이 편치 않으실것 같으니 슬슬 달콤한 후식으로 마무리하시지요.”

    아쉬움에 눈초리를 떠는 홍엽비의 모습은 애처로웠으나 소년은 단호하게 후식을 내왔다.

    달콤한 연밥탕 빙당상연(氷糖湘蓮).

    현대에서는 파인애플을 넣어 끓이기도 하지만 이 경사에선 파인애플 구하기 쉽지 않으니 그 대신 여지와 용안, 대추, 앵두를 넣고 끓였는데 이때 물과 설탕의 비율은 10대 6으로 잡는다.

    본래는 그 약용을 위해 따뜻하게 먹는 것이 보통이지만 오늘은 벌겋게 달아오른 입을 식히려고 일부러 차가운 상태로 내었다.

    단물을 몇 술 떠먹으며 진정이 되었는지 스스로의 추태가 부끄러워진 홍엽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면서도 홍엽비는 숨죽이듯 작은 목소리로 소년에게 말했다.

    “언젠가 다시, 요리를 먹을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소년의 얼굴에 악마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원치 않은 이득이 굴러들어왔음을 깨달은 그 순간. 소년의 얼굴엔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그 미소에 홍엽비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올라간 입꼬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다분히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어떻게 해야 최고로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그 심성이 나약하여 가진 바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더라도 홍엽비는 후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세력을 만드는 안양비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대장군의 여식인 홍엽비가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끼어들어 세력을 움직이려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자신만의 파벌을 만들어 정치판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저 태감과의 관계를 조금 더 개선하고 작은 부탁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선을 만드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늘 그러하듯이, 작은 부탁이 큰 부탁이 되는 건 쉬운 일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소년이 전과는 다른 산뜻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대답했다.

    “전 태감님의 요리사이니, 태감님께 말씀드리면 언제든 달려오겠나이다.”

    가식적인 미소로 본심을 숨기며 소년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 후로 짧은 환담을 나누고 아쉬운 인사로 작별을 고한 다음 남양궁을 나서자 벌써 하늘에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후궁의 쓸데없이 복잡하고 긴 예법에 짜증을 느끼며 소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이한 형태로 늘어선 석주와 수로의 경계를 벗어나 연좌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자 막혀 있던 긴장감이 풀리며 심신이 물에 젖은 솜처럼 가라앉는듯했다.

    태연한 척 얼마나 애를 썼던가. 책잡히지 않기 위해 곤두세운 신경이 녹아내리며 소년은 후궁의 담벼락에 주저앉았다.

    “오늘은 돌아가면 술이라도 한잔해야겠다…….”

    뜨거운 물로 씻고 술 한잔하고 일찍 자자. 어차피 내일부터는 다시 태감의 아침상을 차려야 하니 일찍자야 한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을 태감과 언제나 의혹의 눈길로 소년을 노려보는 위정이 있는, 일단은 그의 집으로.

    연좌궁을 자신의 집이라고 부르는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소년으로서는 다른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돌아갈 수도 떠날 수도 없으니 결국은 정붙이면 고향이라는 말을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을린 하늘 위로 소년을 내려다보는 오렌지 색 태양은 소년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소년의 왜소한 모습도 그림자 속에서는 크고 당당했다. 소년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기에 괴로운 추억이 되어버린 옛날을 회상하며 소년은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다른 대체할 말한 단어를 찾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명칭을 부여해 버린 그의 집으로.

    * * *

    훌륭한 오동나무 책상 위에 드러누워 있는 태감은 묘한 색기가 흘렀다.

    흑단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은 진주같은 윤기가 흘렀고 머리카락이 책상 위에 흐트러진 모습은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여린 숨을 내뱉을 때마다 가슴 기복에 벌어진 옷섶 사이로 슬며시 보이는 백자 같은 쇄골과 그 안쪽의 비밀스러운 그림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고름을 풀러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에 불을 지폈다.

    …… 아마 여자였으면 그랬을 것이다. 소년은 남자였고, 여자를 사랑하는 이성애자였다. 그러니 남자가 드러누워 있는 모습은 짜증을 유발할 뿐이었다.

    ‘상관만 아니었으면 밀어버렸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경망스러운 자세로 상 위에 드러누운 것은 소년의 상관이었으며 물리적인 의미로 소년의 목을 날릴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내였다.

    그리고 마침 소년은 나름 공을 세우고 오지 않았는가. 뭔가 원하는 포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휴가를 달라고 하자.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방에서 온종일 뒹굴뒹굴 놀아보자. 밥도 후궁 나인들과 환관들이 먹는 식당에서 타 먹고 종일 먹고 자고 쉬어야지.

    아니면 잠깐 후궁 밖으로 나가보는것도 좋겠다. 이 시대의 식당이 어느 정도 퀄리티 인지도 궁금하고 가끔은 남이 해주는 맛있는 밥도 먹고싶다.

    행복한 상상이 부풀어 오르자 입꼬리가 풀리려 했다. 소년은 입꼬리를 가다듬고 더없이 엄숙한 표정으로 태감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밥.”

    감은 눈이 떠지고 허릿심만으로 몸을 일으킨 태감이 소년을 보자마자 한 말끼었다.

    “예?”

    “밥. 배가 고프다.”

    “……다 늦은 시간에 뭔 밥입니까. 그보다 제가 홍엽비 님께…….”

    “뭘 차렸지?”

    “예?”

    다짜고짜 질문하는 태감의 말에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소년은 순순히 홍엽비의 상에 올랐던 음식들을 나열했다.

    단순히 맛만을 우선시한 게 아닌 몸에 약이 되고 살이 붙을 수 있도록 적절한 한약재를 사용하고 소화가 잘되면서도 단백질과 무기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도록 고심 끝에 짜낸 식단과 레시피였기에 소년은 내심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태감은 홍엽비를 건강하게하기 위해 장고를 거듭한 소년의 피와 눈물의 결과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맛있었나?”

    “예 뭐…… 홍엽비 님은 아주 맛있게 드셨습니다.”

    몸에 좋으나 입에 쓰다면 그것은 약이다. 몸에 좋으며 맛 또한 좋아야 요리. 그것이야말로 의식동원(轉食同源)의 진의가 아닌가.

    소년의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 태감은 탄식하며 무너져 내렸다. 마치 비련의 여인 같은 자세에 소년은 실소를 흘렸다.

    “그랬군, 내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맛없는 식사로 굶주림을 겨우 면하는 동안 넌 홍엽비와 함께 유유자적 미식을 즐겼단 말이지?”

    “제가 즐긴 건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고 후궁 나인들의 식사는 그 정도로 거친 겁니까?”

    만약 그 정도로 후궁의 식사가 거칠어 태감이 기력을 잃었다면 그것은 그의 요리사인 자신의 책임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귀찮아서 하지 않았을 뿐 장소나 이삼에게 요리를 가져가게 하는 등 신경을 쓰려면 쓸수도 있었을 것을.

    태감은 소년의 다시 없을 큰 은인이 아닌가. 그는 이런 무관심함 속에 방치되어도 좋을 사람이 아니었다.

    왜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자신의 상관이 거친 식사를 하며 입에 맞지 않는 음식에 고생했다는것은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야기였다.

    소년의 얼굴에 짙은 후회와 자책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표정에서 괜스레 죄책감이라도 느꼈는지 창가 쪽에서 태감의 추태에 고뇌하고 있던 위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

    “태감님께 나오는 식사가 질이 나쁠 리가 없지 않으냐. 오히려 밖에서는 맛보기 힘든 산해진미가 모이는 곳이 이 후궁이다. 그리고 태감님은 네가 없는 사이 출장을 명목삼아 경사의 유명한 맛집을 순회하고 다니셨다.”

    “그럼…….”

    태감의 꼴은 도저히 돈을 펑펑 쓰며 주지육림을 즐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의 요리를 이 정도로 좋아해 주는 것이니 기뻐해야 하는걸까? 솔직한 심정으론 굉장히 귀찮았다.

    “태감님, 태감님, 일어나시지요. 일단 보고는 들으셔야 할 거 아닙니까.”

    “보고? 그래…… 들어야지. 일단상에 올린 음식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봐. 하나도 빼놓지 말고.”

    ‘설마 내가 말한 요리를 전부 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조금 전보다도 농밀한 피로감이 소년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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