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7화
그 대담하고 무례한 제안에 홍엽비의 시녀들은 크게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전에 언질을 듣지 못한 태감 또한 제정신이냐는 눈빛으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소년에 아랑곳하지 않고 홍엽비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아기자기한 귀여운 외모는 혈색을 잃어 창백했고 눈에는 진한 피로감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엔 서서히 흐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재밌겠네요. 기미가 끝난 미지근한 음식만을 먹어온 터라, 가끔은 방금 만든 뜨거운 음식을 먹어보는것도 괜찮겠어요.”
평생을 식은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제아무리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홍엽비는 다른 시녀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굽고 어린 소년보다 조금큰 키. 하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는 피로에 젖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소년 같은 천한 것들이 어찌 못할 비범함이 엿보였다.
그 고결한 광채야말로 고귀한 혈통이 타고난 기세라는 것이겠지.
그녀는 느리고 작은 보폭이지만 결코 발걸음을 멈추는 법이 없었고 허리를 수그리는 법 없이 곧게 허리를 세워 걸었다.
걷는 도중에 시녀들의 도움을 빌리는 일 또한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 자존심은 과연 보통이 아니었다. 감탄할 만하다.
여인이 아니라 내로라하는 장사라하더라도 기력이 쇠하면 대쪽같은 마음도 문드러지는 법이다.
하물며 그녀는 새끼손톱만 한 작은 과질에 깜짝 놀라 식음을 전폐할 만큼 유약한 여인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이렇게 극한 상황에 몰렸기 때문일까?’
몸이 쇠하면 마음도 나약해진다.
강철같은 정신력이라 할지라도 몸이 흔들면 녹슬고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그 극한의 상황에서 오히려 대쪽같이 고개를 들고 일어선 것이라면.
태감은 그녀가 황후의 자질이 없다는 말을 번복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과연 대장군의 여식이었다.
소년이 주방에 들어서자 그에게 자신의 탕을 권했던 키 작은 나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아직까지 증오와 탐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홍엽비의 얼굴이 보이자 그녀는 기겁하며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평소엔 아무리 마음 약한 주인이라도 그녀의 말 한마디에 목이 잘린 이가 몇 명인가. 몇이나 되는 이가 고신 끝에 목숨을 잃었는가. 홍엽비의 존재는 주방의 나인들에게 두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홍엽비는 그녀들을 향해 한차례 눈길을 주었지만 이내 그녀의 시선은 소년의 등으로 향했다.
나른한 시선 속에는 작은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나인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소년은 요리를 시작했다. 홍엽비와 태감이 주방 한견에 미리 옮겨온 탁자와 의자에 앉는 동안 소년의 나무 도마위에는 콩팥과 새우가 올라왔다.
초하요(秒蝦腰) 새우와 돼지 콩팥볶음.
콩팥은 우선 칼을 눕혀 반으로 갈라 내부의 하얀 조직을 깨끗하게 떼어낸다.
이 하얀 조직은 오줌을 거르는 기관이기 때문에 떼어내지 않고 조리하면 지릿한 암모니아 냄새가 난다.
조직을 떼어낸 다음 격자 모양으로 칼집을 넣어 한입 크기로 썰고 찬물에 깨끗하게 씻어낸다.
손가락만 한 통통한 민물새우는 머리와 껍질을 제거하고 등을 갈라 내장을 꺼낸다.
대파는 어슷 썰고 파와 마늘은 얇게 썬다. 포랄초는 갈라서 씨를 빼내고 마름모꼴로 썬다.
계란 흰자로 녹말을 개어 술과 소금, 후추로 밑간한 새우에 잘 묻힌다.
돼지 콩팥 역시 밑간하여 술에 갠녹말을 가라앉혀 윗물은 따라내고 가라앉은 앙금을 버무려 다시 녹말가루 한 큰술을 뿌린다.
그릇에 완두콩와 향채소를 넣고 한쪽으로 소금과 후추, 설탕과 술, 간장을 녹말 앙금과 청탕을 섞은 양념을 넣는다.
미지근한 기름에 새우를 넣어 데쳐 내고 온도를 조금 올린 다음 콩팥을 데쳐낸다.
밑준비를 모두 끝내자 소년이 큰철과를 불 위에 올리고 기름칠을 했다. 그리곤 아궁이 옆의 풍로로 힘껏 바람을 불어 넣자 삽시간에 불기 둥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홍엽비 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리라. 아니, 그 정도 불을 다루는것은 주방에서 일하는 나인들조차 처음이었다.
수십 년간 수련한 전문 요리사가 아닌 나인들이 다루기엔 너무 강한 화력이었다.
철과가 달아오르면 콩팥과 새우를 넣고 채소와 양념을 끼얹어 강불에 재빠르게 볶아낸다.
소년의 손목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불기둥 속으로 재료들이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홍엽비의 병을 고칠 마지막 비밀병기.
퍼포먼스였다.
현대의 요리사는 단순히 요리를 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수타면을 뽑는 장면, 철과를 돌리며 재료를 볶아내는 장면, 철판요리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불쇼나 칼솜씨.
손님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쇼 또한 식사의 일부인 것이다.
화려한 불 쇼에 양념이 그을리며 풍기는 강렬한 향기, 재료들이 볶아지며 내는 소음, 평생기미가 끝난 안전하고 미지근한 음식만을 먹어온 홍엽비에겐 더없이 자극적인 풍경이었다.
뜨거운 열기는 그 열기에 상 위에서 피부까지 전달될 정도였다.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방금 만든 뜨거운 음식이 상 위에서 보여주는 존재감은 그야말로 묵직하기 그지없다.
기미를 볼 시녀조차 물리고 홍엽비는 손수 음식을 자신의 앞접시에 덜어 입으로 가져갔다.
기름기가 조금도 없는 단단하고 탄력적인, 고기와는 다른 독특한 식감의 콩팥은 쫄깃쫄깃한 강한 탄력으로 이를 튕기듯이 밀어냈고 부드러운 새우는 앞니로 툭 잘리면 톡 터지는 듯한 식감이 콩팥과는 대비되었다.
고추의 향기는 있지만 맵지는 않으며 향신채소의 강렬한 향과 짭짤한 간은 강렬하게 흰쌀밥을 부른다.
홍엽비의 시선에 소년은 두말하지 않고 봉긋하게 흰 쌀밥을 퍼 건넸다.
물론 가면을 뚫어 버릴 듯 사자 같은 안광을 쏘아내는 태감에겐 아주 푸짐하게 머슴 밥을 퍼 올렸다.
특별히 더 귀한 식재료도 아니었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것도 아닌 평범한 요리한 접시를 사이에 두고 대장군의 여식과 동창의 제독은 마치 서로 음식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그 광경에 시녀들은 수군거림조차 잊었다. 늘 식욕이 없어 보이고 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던 홍엽비가 마치 농촌의 여느 소녀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늘 아파 보이는 주인, 늘 인형처럼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주인이 지금은 마치 사람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
그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는 시녀들 사이에서 소년은 마지막 디저트를 준비했다. 미리 준비해 온 것을 데우기만 하면 된다.
설탕과 꿀, 대추와 연밥에 뽕나무겨우살이와 백목이버섯이 들어간 따스한 당수(糖水) 한 잔.
약효가 너무 강하여 성하지 않은 홍엽비의 몸에 부담이 되지도 않고 따스한 온기와 은근한 단맛으로 식후에도 부담이 덜하다.
식후에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한 후련한 표정의 홍엽비는 피로감이 짙어진 나른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당수를 떠 마셨다.
식사가 끝났다.
더없이 성공적이었다고 소년은 자부했다. 결과적으로 홍엽비는 식사를 하였고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식욕을 완전히 되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금 황제께서도 홍엽비를 찾으실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제가 해결된 것이 아닌가.
홍엽비와 태감의 사이에서 의례적인 말 몇 마디가 오갔다. 대부분이 심심한 감사의 인사였기에 소년은 그 대화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찌 되었든 임무가 성공했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안도감에 소년은 맥이 탁 풀려 버렸다.
피로감에 온몸이 나른했다. 어젯밤부터 요리 준비하랴 이래저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어린 몸을 혹사한 끝에 사지육신이 비명을 질렀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기는 했지만 이래 보여도 아직 열다섯도 넘지 않은 어린 몸인 것이다.
피로감에 젖은 몸은 자신도 모르게 선채로 졸음이 밀려올 정도로 나른했다.
마치 몸이 뜨거운 물을 적신 솜처럼 무겁고 나른했다. 전부터 무리를 해오긴 했지만, 이번 일이 결정타가 된 듯 혀를 지긋이 깨물어도 졸음이 도통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생이었다면 이 정도는 웃으면서 했을 텐데, 자꾸 그 전생 만을 생각하며 낙관적으로 생각한 대가였다.
소년의 몸이 보통 몸인가? 다리는 절고 허리는 굽었는데 잘 먹지도 못해 비쩍 끓은 몸이 아닌가.
전생의 운동 열심히 하고 규칙적으로 밥 잘 먹고. 영양제 종합 비타민 꼬박꼬박 챙겨 먹은 시절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정말 하루 정도는 잘 먹고 푹 쉬어야지. 나도 가끔은 남이 해주는 밥도 먹고 싶다.
“오운, 오운!”
그런 탓에 태감과 홍엽비의 대화를 거의 듣지 못한 소년은 태감이 다그치듯이 소년을 부르고 나서야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 소년의 상태를 대강은 짐작했는지 태감은 그 이상 소년을 질책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태감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운, 앞으로 홍엽비 님께서 건강을 회복하실 때까지 남양궁으로 출퇴근하도록 해라.”
“예…… 예?”
태감의 대답 대신 홍엽비가 소년에게 상냥한 인사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환관 나부랭이에게 보내기에는 과한 예에 소년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한동안, 잘 부탁드려요.”
“에…… 예,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가면 너머로도 확연히 들어나는 태감의 표정을 보며 소년은 황급히 허리를 깊이 숙여 대답했다.
어찌 되었든 이젠 그만 가서 쉬고 싶다고 생각하며.
* * *
소년과 태감이 떠나고 홍엽비가 피로를 호소하며 침실로 간 시각. 소년이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간 접시를 한 여인이 설거지통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유난히 키가 작고 눈매가 사나운 여인. 주방의 다른 나인들보다 품계가 높은 정식 궁인인 그녀는 자신이 하겠다 나서는 나인들을 만류하며 자신이 직접 접시를 치웠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접시에 남은 양념을 찍어 맛보고 있었다. 이제 막 주방에 들어온 신입이 선배들의 맛을 배우는 전통적인 과정.
하지만 혀에 맛을 새기면 새길수록 그녀의 눈동자에는 증오와 분노가 깊어졌다.
맛있었다. 지독할 만큼. 저주스러울 만큼.
맛있었다.
자신의 역량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상대의 실력은 주방관(㕑房官) 소묘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본래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자신의 선배를 처리하기 위해 그녀는 독살스러운 수를 써야 했다.
그것이 제 주인을 물어뜯는 일이라 할 지라도.
품계를 받아 정식 관인이 되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감행했다. 이 자리는 그렇게 올라온 자리였다.
아직 권력을 누려보기도 전에, 자신의 자리를 굳히기도 전에 나타난 소년이라는 적은 그녀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요리 솜씨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 그 솜씨에 나인들 중 몇 명이 감탄사를 흘리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봤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년이 그녀의 자리를 밀어내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소묘의 머릿속에 떠오른것은 끌려가던 자신의 선배, 선대 주방관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삼 일 밤낮으로 고문을 당하고 끝내 넋을 잃어버린 그 모습. 그리고 그걸 비웃었던 자신.
소름 끼치는 미래가 예정되었음을 느낀 그녀는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았다.
“아냐…… 이대로, 이렇게 밀려날수는 없지…….”
희번덕 구르던 눈은 어느새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잠들어 있을 침실 방향을 돌아보며 소묘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악의를 띄었다.
* * *
연좌궁으로 도착하자마자 소년은 태감의 말을 들을 새도 없이 쓰러지 듯 잠이 들었다.
어린 몸에 과한 혹사로 부담이 되었는지 저녁도 거르고 한밤중이 될 때까지 잠에서 깨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한밤중이 되어 깬 소년이 태감의 집무실에 가보자 영 저녁이 시원치 않았는지 태감의 표정은 찌뿌둥하기 그지없었다.
“……몸은 좀 괜찮으냐.”
“뭐, 여기저기 쑤시긴 하는데……. 버틸 만합니다. 태감님은 영 별로이신 모양입니다?”
“저녁이 영……. 예전엔 그럭저럭 먹을 만했는데, 숙수가 바뀐 건지 맛이 좀 떨어진 것 같더구나.”
아니면 요즘 들어 소년의 훌륭한 식사만 대접받아서 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급스러워졌기 때문이겠지.
앞으로 한동안 기다릴 태감의 고난의 행군에 소년은 남모르게 미소 지었다.
입가가 뒤틀리는 기이한 미소였다.
“앞으로 한동안은 고생이시겠군요. 홍엽비 님이 건강해지실 때까진 그분의 요리사가 되어야 하니 말입니다.”
태감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것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자 쾌감이었다.
꼬리뼈 끝을 타고 간질거리며 기어오르는 듯한 충족감에 소년은 피로 감도 조금은 날아가는 듯했다.
“어쩔 수 없지. 한동안은 참아보는 수밖에…….”
검미를 파르르 떠는 태감의 얼굴에 달빛이 드리워 고대 그리스의 석고상 같은 우아한 슬픔이 드리웠다.
어리석은 하계의 인간들의 행위에 슬퍼하는 미의 신과도 같은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 서라면 기꺼이 가시밭길에 몸을 던질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지.
하지만 그 미모에도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소년의 눈에는 그저 맛없는 식사에 괴로워 하는 태감의 모습일 뿐이었다.
‘거 양반 참, 밥 한 끼 좀 맛없다고 죽나. 대충 때우면 그만이지.’
달은 머지않아 구름에 가려졌다.
태감의 책상 위의 촛불은 서늘한 밤공기에 흔들거리며 그림자를 춤추게했다.
음모와 모략을 꾸미기에 좋은 시간. 소년은 작은 의자를 끌어와 태감과 마주 앉았다.
“사실 이번엔 조금 놀랐습니다.”
“뭐가 말이냐.”
“태감님이라면 분명, 이번 일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실 줄 알았거든요.”
구름이 조금 걷어지며 달빛이 당 한구석을 내리찍자 소년의 얼굴 아래론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음모와 모략이 어울리는, 정치가의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소년이 웃었다.
태감은 그런 소년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는 듯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이었지만 소년은 그 뒤에 드리운 짙은 무언가를 엿보았다.
“예, 그렇겠지요. 이번 일이 사실은 안양비 님의 음모이며 이것을 이용해 안양비 님을 실각시킨다는 것은, 너무 쉬워서 삼척동자도 다 간파하겠지요.”
정치모략에 익숙하지 않은 소년도 대번에 떠올릴 정도였으니 태감의 의중을 다시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 일에 연관되어 열이 넘는 나인들의 목이 장대에 걸렸고 그녀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의 봉비는 목이 잘려 소금에 절여지고 그 일가족 또한 참수되어 마무리되었다. 그것이 과연 그녀들의 잘못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태감님. 저와 하신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왜, 네가 은퇴할 때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삼처사첩을 안겨주고 평생 부족함 없이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말이냐?”
“그게 아니라는 건 태감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소년은 너스레를 떨면서도 웃지 않는 눈은 태감의 눈을 응시한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감은 소년의 목을 베어주기로 했다.
그가 고통스러운 고문 끝에 숨이 넘어가기 전에. 가혹한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진실을 모조리 토해내기전에.
그 목을 베어주기로 했다. 고통스러운 삶에서 깨끗하게 해방시켜 주기로 했다.
어찌 그 약속을 잊을까.
소년은 문득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아십니까? 기회의 여신은 앞머리만 있고 뒷머리가 없다 하더군요. 그래서 미리 준비한 사람은 기회의 여신을 잡을 수 있지만, 준비없이 허둥지둥하는 자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요.”
“네가 보기엔 이번이 그 기회이더냐?”
소년은 빙그레 웃음 지어 대답했다.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진 그미소는 얄팍한 입술 위로 드리워진 달빛이 기묘한 각도로 번들거려 소름 끼치고 괴이했다.
“홍엽비를 독살하시지요.”
태감은 문득 고개를 들어 불빛 일렁거리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찌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옳고 그름은 후궁에서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이, 그릇된 일은 그만한 위험과 대가를 동반하는 법이다.
소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냉혹한 귀기로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가 하지요. 어차피 저에 관련된 기록이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멋대로 지어내도 후환 두려울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네가 안양비의 수하였다고 멋대로 떠든 뒤 네 목을 자르란 말이냐? 난 그저 네 솜씨에 반해 속아 넘어간 것이고, 사실은 안양비가 어린 시절부터 훈련 시킨 수하였다?”
“제 말을 이해하신 것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군요.”
상관과 부하간의 소통이 이토록 원활하다니, 참으로 홍복입니다.
소년은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제 죽을 이야기를 논하는데 어찌 긴장되지 않을까.
소년의 손은 긴장감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자신의 죽음마저 패로 삼고 승부에 뛰어든 수라의 얼굴이었다.
지어낼 죄도 만들 만한 명분도 꾸며내면 얼마든지 있었다. 죽어서 천하의 대 악당 살인귀가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일까.
“예, 어차피 이 후궁은 없던 죄도 만들어지고 있는 죄도 감추는 곳 아닙니까. 하지만 그 크기가 크면 제아무리 이부상서의 딸이라고 해도 그냥 덮을 수는 없겠지요.
무엇보다 그렇게 딸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대장군이 그냥 있지 않겠지요. 제 자식을 잃었으니 분명 제 목숨을 걸고 상서의 집안을 통째로 불태우려 할 겁니다.
이부상서의 목이 떨어지면 제아무리 기고만장한 육부의 문사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큰 죄를 범했으니 군부의 무사들도 멀쩡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중에 황제 폐하께서 적절하게 상황을 중재하시고 가장 큰 이득을 챙기시면 되겠습니다.”
참, 쉬운 일이지요?
소년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었다.
과연, 가능성 없는 허황된 이야기일까?
그리 일축하고 싶으면서도 정치가의 피에 흐르는 이득을 논하는 저울이 멋대로 움직여 소년이 말한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했다.
불가능.
하지 않다.
동창의 주인인 태감은 그런 증거를 꾸밀 만한 힘과 능력이 있었다. 늘황권 강화에 목메는 황제 폐하를 움직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애초에 둘은 같은 목적지를 보고 있으니 오히려 황제 폐하는 태감의 말에 기꺼워할 공산이 크다.
대장군 당량은 어떤가?
겉으로는 세상 다시 없을 호호탕탕한 군자인척하지만 태감은 대장군의 타고난 승부사이자 피에 굶주린 짐승을 알고 있었다.
제 목숨처럼 아끼던 딸이 독살당한것을 알면 그는 대장군 직을 내려놓은 한이 있더라도 상서의 목을 물어뜯으려 할 것이다.
이부상서는 현재 문사들의 이권을 대표하는 황제 폐하의 정적 중 한명.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축을 담당하는 인물이니 그 목을 숙청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도 없다.
거기에 큰 죄를 지었으니 대장군 또한 제 지위를 보전하기 어려울터.
“네가, 하겠다고?”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리오.
소년은 굳은 다짐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마침 구름이 달빛을 가려 결심을 다 한 소년의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 태감은 그 표정을 면밀하게 볼 수 없었다.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