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2화
태감의 그런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혼란과 의심으로 일그러진 표정은 무척이나 볼만한 것이었기에 소년은 오늘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런 소년의 뒤를 복잡한 눈으로 응시하며 한참을 망설이던 위정은 소년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를 불러세웠다.
삐딱한 태도로 소년이 고개를 돌렸지만 위정은 그런 태도에 개의치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네가 어떤 이유로 태감님께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그런다.”
“예? 이야긴 다 해서 더는 할 게 없는데 말입니다?”
소년은 유들유들한 태도로 자리를 넘기려 했지만 위정은 한발 앞서가 소년의 앞을 막으며 소년을 채근했다.
“네가 진정 태감님을 따르는 것을 신념으로 삼는다면, 그분의 말씀을 이상으로 삼아 나아갈 각오가 있다면. 그분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위정의 눈동자는 음울하고 위험한 빛을 내고 있었다. 막다른 길까지 몰려본 사람의 필사적인 기세에 소년은 혐오감을 느꼈다.
“난, 아니, 우리는 너에게 공유해야 할 비밀이 생기겠지.”
바닥의 바닥, 끝의 끝에서 가까스로 동아줄을 잡고 기어 올라오게 되면 사람은 이런 형태로 망가지는가.
평범한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위정의 눈동자에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걸 팔아버린 광신자의 광기가 있었다.
분명 그라면 잘못된 명령 일지라도 웃으며 죽으러 갈 수 있겠지. 가장 소중한 단 한 가지가 타인의 명령이라는 형태로 일그러져 버린 사람의 말로다.
그것은 태감의 짐을 무겁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소년은 웃었다. 피식 삐져나온 웃음소리가 어느새 대들보를 타고 올라 천장을 울리는 홍소로 변했다. 비웃음이었고, 자조적이었으며, 사뭇 유쾌했다.
소년의 웃음을 위정은 처음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소년은 위정에게 되물었다.
“신념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신념이라. 듣기에는 이보다 더 멋진 단어도 없다. 실제로 신념을 논하는 위정의 모습은 더없이 비장하고 숭고한 맛이 배어 나오니까.
어설픈 몽상가의 논리로는 맛볼 수 없는 사나이의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소년은 웃었다.
자신이 태감을 위해 죽기로 한 것은, 신념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예. 역시 위정 나리와 비밀을 공유하는 날은 없을 것 같군요.”
그것은 삶의 문제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죽을 이유를 찾지 않기 위해서 소년은 스스로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죽는다면 그걸로도 좋고, 산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 자신의 인생의 종지부를 그날의 기분과 그날의 운에 내맡겨 버렸다.
그것은 신념이 아니다.
소년의 이유는 그저 필요와 목적이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위정의 말을 비웃으면서 그를 앞질러 걸었다.
꺼져가는 등불의 그림자 아래로. 일그러져 가는 위정의 얼굴을 돌아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춘 소년은 나지막하게 위정에게 말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걸 수 있는 신념 따위는 없지만, 언젠가 태감님을 위해 죽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소년의 입꼬리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어슴푸레한 빛을 받아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지는 그림자와 음산한 음영은 소년의 얼굴을 극적으로 꾸몄다.
초승달처럼 서슬 퍼런 미소에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자부하는 역전의 병사였던 위정 조차 소름이 쭈뼛 돋을 정도였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강하다. 하지만, 잃을 게 없는 미친놈은 위험하다. 소년은 더없이 위험한 놈이었다.
* * *
오늘 태감의 아침은 뜨끈뜨끈한 순두부 한 그릇(豆花)에 초어살로 만든 경단이 들어간 어구죽(魚球粥)에 녹두를 갈아 묽게 만든 반죽을 번철에 얇게 펴 굽고 계란과 튀긴 만두피를 올려 짭짤한 소스를 발라 접은 전병(煎餠) 등이 올라왔다.
중국 사람들의 두부 사랑은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야들야들하니 푸딩처럼 부드러운 두화는 짭짤하게 먹는 것만 아는 한국 사람들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온갖 달콤한 시럽과 견과류를 얹어 달콤한 간식으로 먹는 것이 유명하다.
흑설탕이나 종려당(야자나무 설탕)에 꿀 등으로 만든 달콤한 시럽(糖水)에 물렁물렁해지게 삶은 땅콩, 달콤한 팥이나 녹두, 드물게는 흰 목이버섯(白木耳)과 연밥(蓮子)이 들어가는 일도 있다.
뜨겁게 먹어도 좋고 더운 날에 차게 먹어도 좋은데 그 달콤한 시럽에 적셔진 보들보들한 연두부가 혀끝을 희롱할 때면 제아무리 기세 좋은 천하장사라 한들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개인적으로 소년 역시 전생에서부터 상당히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오늘의 두화는 어디까지나 아침 식사이기 때문에 실처럼 가늘게 채 썬 생강과 고추기름을 넉넉하게 얹어 내었다.
소년의 중얼거림을 듣던 태감은 먹던 두부를 내려놓고 물었다.
“이걸 달게도 먹나?”
“제도 부근에선 그렇게 안 먹나 봅니다?”
“그래. 애초에 이 북방에선 단단한 두부를 주로 먹지 이렇게 연한 연두부는 먹지 않아. 저기 동남부에선 먹는다고 듣기는 했지만…… 솔직히 난 네가 해줘서 먹어본 게 첫 연두부였다.”
아무래도 현 제국은 전생의 중국과 지리적인 위치나 문화는 비슷해도 요리에 관해선 관점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제국민들은 잘 차려 먹는 걸 선호하는 중국인들과는 다르게 간소하면서 든든하고 맛보다는 양을 우선시하는 실리적인 면이 강했다.
그래서 보존식품 같은 경우가 상당히 발달했지만, 오히려 연두부처럼 즉석에서 바로 먹어야 하는 음식은 잘 발달하지 않은 모양이다.
당연한 순서로 태감의 오늘 간식은 달콤한 시럽을 끼얹는 두화가 되었다.
위에 올릴 재료로는 땅콩과 연밥을 얹고 여기에 시원한 차 한 잔을 더 하면 슬슬 더워지는 날씨에 훌륭한 간식이 될 것이다.
‘아니지, 연두부 남은 게 얼마나 있더라?’
생각해 보니 남은 연두부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세 그릇 정도 분량이나 나올까?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하고도 남겠지만 태감에게는 분명 부족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다시 만들기는 공이 너무 많이 들어 귀찮고, 역시 간식은 다른 거로 하고 남은 연두부는 장소를 불러 먹어치워야겠다.
태감의 간식은 뭐…… 떡이라도 찔까. 불려둔 찹쌀이 있으니까…….
쑥이 좋은 게 있으니 쑥떡을 만들어서 달콤한 콩고물을 묻혀 인절미라도 만들면 되겠지.
느긋한 생각을 하며 멀거니 창밖을 보고 있는 소년에게 태감이 뜬금없이 말문을 열었다.
“네게도 이름이 필요하겠구나.”
“예? 잘 못들었슴다?”
“이름 말이다, 이름. 너도 이제 이 후궁에서 정식 환관으로 살려면 부를 만한 이름이 필요하겠지.”
이름이라. 또다시 도망쳤던 과거가 소년의 등 허리를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늦은 해후를 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었다.
소년은 꾸며낸 미소를 지으며 태감에게 말했다.
“구더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콧방귀를 끼며 비웃었다.
태감의 태도에 빈정 상한 소년은 다시금 자신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이름을 한 번 더 권해 보았다.
“나름대로 초심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네 초심이 뭔데? 노예처럼 살자?”
“아 거…… 겸손하게 살자 정도로 순화하면 나름 괜찮은…….”
“겸손은 무슨 놈의,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른 이름 생각해 둔 게 있으면 이야기해 봐라.”
쓸데없는 소리로 빈축을 산 소년은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란 것이 그렇게 쉬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십여 년, 길면 한평생을 써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 이름인데 조금은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소년의 불평보다도 먼저 태감이 소년에게 제안했다.
“만약 별다른 생각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하나 주고 싶구나. 오운(梧雲)이 어떠냐?”
“오동나무에 구름입니까? 특이한 이름이군요.”
소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조금 특이하기는 하지만 최소한 구더기보다는 나은 이름이니 별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태감의 말은 전혀 다른 곳에서 반응을 끌어냈다.
위정이었다. 소년이 위정이란 사람을 알고 지낸 이래 이렇게까지 그가 놀라는 것을 소년은 본 적이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목도한 것처럼, 들어서는 안 될 사실을 들은 이처럼 위정은 식은땀을 흘리며 태감에게 되물었다.
그 기세가 마치 그 전날 자신의 목을 조르던 그 날의 것과도 같아 소년은 무심코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죽음을 각오하였다고 스스로 자신했지만, 막상 죽음 그 자체가 목전에 들어오면 태연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소년은 그 일이 있고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굵고 거친 손아귀가 자신의 목덜미를 잡은 꿈을 꾸고는 했다.
“말도 안 됩니다! 그 이름이,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인데!!”
위정은 마치 상관의 명령에 항명하는 피 끓는 젊은 장수 같았다.
핏발선 두 눈으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고 수염 가닥이 솟구친 그 모습은 야차 같았는데도 그런 위정을 눈앞에 둔 태감은 태연한 태도로 식사를 계속했다.
아무리 자신의 부하라지만 사람 마음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이지?”
오히려 태감은 위정을 떠보는 듯한 태도였다. 소년은 태감의 담이 보통이 아님을 다시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기 목을 꺾어버릴 수 있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어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그 이름의 무게는 태감님이 가장 잘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까 그 이름을 준거야. 저 녀석이 날 신뢰한다면, 나 역시 그 신뢰에 보답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신뢰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합니다!”
‘시발, 고작 이름 쪼가리에 금칠이라도 해놨나 과하긴 뭘 과해.’
그렇게 귀한 이름이면 이름보다는 그 가치를 환산한 돈으로 줬으면 하는 게 소년의 바람이었다.
까놓고 말해 알지도 못하는 이름 (그렇다고 멋진 이름도 아닌데) 받는다고 기쁠 일도 없거니와 그것 때문에 상관에게 미움까지 산다면 더 최악이었다.
자신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조금의 배려도 없이 설전을 반복하는 둘을 보며 소년은 마침내 이 일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래 까짓거 죽일 거면 죽이고 아주 맘대로 해라. 난 내 할 일이나 하련다.’
자신의 역량과 지위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전전긍긍해 봤자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에 한눈을 파는 것보다 당장 지금 해야 할 일에 포도당을 투자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소년이 그 설전을 흥미롭게 관찰할 만큼 시간이 넉넉한 사람도 아니었다.
태감의 점심과 간식도 준비해야 했고 그 틈에 자신의 주린 배도 대충이나마 채워야 했다.
연두부를 만드느라 새벽같이 일어난 소년은 속 빈 만두에 소금 탄 콩물 한잔으로 아침을 때워야 했다.
그 설전이 한 다경 안에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자 소년은 아예 주방에서 마늘 한 바구니를 가져다 까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감의 집무실에는 알싸한 마늘 향기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식욕을 당기는 향기였으리라. 하지만 식후의 마늘 냄새는 그저 악취에 불과했다.
서로 독살스러운 혀와 꺾을 수 없는 주장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둘도 매콤한 마늘 향기에 정신이 들었는지 구석에 주저앉아 마늘을 까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왔다.
빠르고 숙련된 손동작으로 마늘 까는 기계처럼 마늘을 까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던 태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뭐하냐?”
“마늘 깝니다. 태감님.”
“그러니까 왜 내 집무실에서 마늘을 까냐고 물어보는 거다.”
“이야기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심심해서요.”
오히려 기다리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듯이, 소년은 당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마늘을 깠다.
그 모습이 황당했는지 분노에 불타오르는 것 같았던 위정의 일그러진 표정도 독기가 꺾여 풀려 있었다.
“지금 네 미래를 두고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 건 알고 있었나?”
“그게 제가 이야기를 들어서 뭐가 바뀔만한 이야깁니까?”
소년의 맹랑하기까지 한 질문에 태감은 잠깐 할 말을 잊었다. 분명 두 사람의 대화에 소년이 끼인다 한들 그것이 소년의 처우에 변화가 생길만한 일은 아니었다.
당사자는 소년이었지만 그의 운명은 태감과 위정의 혀에 달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운명이 아닌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운명이 남의 손에 달려 있는데도 이렇게 태연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태감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미래의 일인데도 관심이 없느냐?”
“그래 봐야 이름 아닙니까. 뭐 죽는 문제도 아니고…….”
“그래 봐야 이름이라고!”
소년의 말에 반쯤 얼이 빠져 있던 위정의 얼굴에 다시금 야차가 도래했다. 하지만 소년은 위정의 역정을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오히려 소년은 과민반응하는 위정이 귀찮다는 듯이 흘겨봤다.
잠깐 사이에 소년의 간덩이는 본래의 나이에 어울릴 만큼 비대해져 있었다.
“그래 봐야 이름이지요. 도대체 누구 이름인데 그렇게 흥분하십니까? 뭐 위정 나리 아내분 성함이라도 됩니까? 황제 폐하의 황명(皇名)이랍디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가지고 두 분이 싸우는데 저보고 어느 장단에서 춤을 추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소년의 말에 태감과 위정은 소년의 짜증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천금 같은 이름일지 모르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단어 두 개를 짜 맞춘 것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태감은 소년에게 물어야 할 것이 더 남아 있었다.
“그래서 넌 아무 상관 없느냐?”
“예?”
“이름 말이다. 마음에 드느냐?”
소년은 일사불란하게 마늘을 까던 손을 멈추고 태감을 올려다보았다.
태감의 얼굴은 희미한 기대감이 엿보여 환하게 빛나 소년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했다.
확실한 것은 어떤 대답을 하던 소년에게는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거라는 점이었다.
한참 고민하는 척을 한끝에 소년은 간신히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고 눈동자가 피로감에 짓눌려 있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명랑했다.
“예. 아~주 마음에 듭니다.”
억지로 쥐어 짜낸 대답에 태감이 폭소를 터뜨렸다.
만약 그 이름의 유래를 들려주어도 이리 시건방진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이 녀석이라면 부정 탄다며 다른 이름으로 바꿔 달라고 떼를 쓸지도 모르지.
어찌 되었든 소년의 이름 문제가 일단락되었으니 다음 문제가 남아 있었다.
“너도 내 직속 부하가 되었으니 뭔가 담당할 일이 있어야지.”
“에? 요리 아니었습니까?”
“그것 말고. 대외적으로 네 신분을 광고할 만한 일 말이다.”
소년은 겉으로 보기에 썩 우수한 인재는 아니었다.
물론 그 요리 솜씨야 천하에 비할 자가 많지 않은 달인의 영역이긴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자랑할 수는 없었다.
이 후궁이란 장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실력의 삼 할을 숨기는 것으론 부족해, 오히려 삼 할 만을 내놓고 칠 할을 숨겨 비수로 삼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은 태감이 짜낸 판에서 어떤 형태로든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비수 이자 장기 말이었다.
요리란, 사람의 입에 들어가는 것이란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전까지 이 후궁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으면서도 실력을 숨길만 한 다른 신분이 필요했다.
문제는 소년이 어딜 봐도 후궁에 어울릴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용모가 수려하여 하인으로 부리기 좋은 것도 아니었고 다리를 절고 허리가 굽었으니 일을 시키기 좋은 것도 아니다.
지식이 뛰어나나 대부분 서방의 것이고 오히려 제국의 학문과 사정에는 문외한에 가까우니 행정업무를 시키기에도 힘들고 그렇다고 춤을 잘 추어 무용을 시키기도 어렵다.
그러면서 태감의 기억 너머에서 문득 지난날 맛보았던 자라탕의 맛과 함께 소년이 들려준 영웅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운, 혹시 네가 저번에 들려준 영웅담, 다시 할 수 있느냐?”
익숙하지 않은 이름 이어서인지 소년의 반응은 평소보다 한발 늦었다.
새 이름이 영 익숙하지 않은지 어정쩡한 태도로 소년이 대답했지만, 태감은 소년의 대답이 기꺼웠는지 소년의 태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태감의 관심은 오직 소년의 말재주에 쏠려 있었다.
“그래 그거야. 넌 오늘부로 내 직속 만담가다!”
사람 인생이란 것이 어떻게 풀릴지는 아무도 모른 일이다.
사람이 제 배운 대로 직업 찾는 것이 순리 건만, 현실은 대부분이 제 전공과는 무관한 일에 종사한다 들었을 때 소년은 대학에서 허송세월한 거 아니냐 비웃었건만.
사람 인생, 정말로 알 수 없구나.
한평생 중화요리에 몸 바친 내가 첫 정규직이 요리사도 아니고 만담가로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