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1화 (21/314)

환관의 요리사 21화

장고에 빠진 소년을 무시한 채 태감은 가벼운 얼굴로 식사를 즐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앞날의 예견된 고난과 역경도, 불안한 미래도, 두 어깨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짐에서조차 자유로웠다.

사람에게 내려준 신의 선물이 망각이라면 그 촉진제는 바로 미식이 틀림없다.

모든 인간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내일을 잊고 오늘을 즐길 수 있다면.

분명 그리 하지 못하기 때문에 속세는 여전히 불화가 들끓어 오르고 욕망이 불타는 것이리라.

바삭하게 튀겨진 병어를 젓가락으로 집자 결대로 찢어지며 그 안쪽의 희고 보드라운 살결이 어렵지 않게 뼈에서 떨어졌다.

살이 차지고 기름진 병어는 오늘 새벽 복건성에서 이 먼 황궁까지 천리를 달려 도착한 일등품이었다.

일품병어(一品鲳鱼).

튀겨낸 병어를 마늘과 간장, 소흥주, 그리고 약간의 참기름으로 조려 매콤달콤한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고작 병어 한 마리를 위해 천릿길을 새벽에 출발했을 수많은 인부와 말들을 생각하면 황궁으로 들어오는 바다 생선 한 마리 한 마리마다 그에 따른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뒤따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바다 생선요리가 병어 말고도 갈치를 튀긴 초염대어(椒鹽帶魚)에 굵기가 어른 중지만 한 통통한 보리새우를 볶은 청초하(淸炒蝦)까지 올라와 있으니 태감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이미 식탁에서 증명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탁에 올라온 생선은 바다 생선일 뿐만 아니라 장기간 보존을 위해 말리거나 염장하지 않은 생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도 태감은 생선요리가 많다고 투덜거렸다. 단것 좋아하고. 고기 좋아하고. 참으로 어린애 입맛인 사람이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땐 싫어하는 음식이 있었지. 파라던가. 가지라던가.’

하지만 사람의 입맛은 변하는 법이다. 파와 가지가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소년에게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스승. 처음으로 요리를 알려주신 분.

사람은 변하는 법이다. 태생과 혈통과는 상관없이, 그를 믿고 이끌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소년의 뇌리에 작은 광명이 찾아왔다. 우중충한 얼굴에 찾아온 환희에 병어 뼈를 발라내던 태감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기가 막히는 야식이 생각난 건가?”

“기가 막히는 야식은 아니지만, 기가 막히는 묘수는 생각해 냈습니다.”

“호오 앵속을 쓰지 않고도 기발한 묘수를 생각해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걸?”

태감의 비웃음에도 소년은 거리낌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비꼼을 무시당한 태감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 녀석 정말 많이 크기는 했군.’

“어차피 홍엽비 님의 소심한 성격을 대번에 바꿀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홍엽비 님이 의지할 사람으로 난화비 님을 옆에 붙이는 겁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홍엽비 님은 난화비 님의 파벌로 들어가실 테니 후궁내 난화비 님의 세력이 커질 것이고 안양비 님의 세력은 줄어들겠지요.”

세상에 오직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투로 진지하게 설명하는 소년의 얼굴과는 다르게 태감은 그리 신통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야식으로 국수를 준비했다고 해도 이보다는 더 놀라웠을 거라는 듯한 얼굴.

하지만 소년은 목소리의 열기를 더해가며 더욱 열정적으로 태감을 몰아붙였다.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않느냐. 애초에 네 말대로 하려면 우선 난화비와 사전에 밀약이 있어야 하는데 우린 아직 그 정도로 난화비를 신뢰하지 않아.”

“그럼 까짓거 신뢰를 쌓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한번 직접 트고 말해보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황제 폐하께 직접 상소 한번 올려보겠습니다. 난화비 님과 부부 상담 한번 받아 보시라고.”

“네가 어지간히도 미쳤구나. 왜? 한번 죽을 뻔하니까 죽는 게 아무렇지도 않더냐?”

태감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위정이 헛기침했다. 소년의 시선이 잠시 그림자에 반쯤 몸을 숨긴 위정에게로 향했지만, 소년은 마치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하듯이 시선을 돌려 태감과 눈을 마주쳤다.

“예. 한번 죽을 뻔하니까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더 힘들다는 건 알겠더군요. 그리고, 전 태감님을 믿습니다.”

그 말에 태감은 입에 있던 갈치 뼈를 뱉어내며 되물었다. 자못 놀랐다는 태도였다.

“우리 사이에 벌써 그 정도 신뢰 관계가 쌓였는지는 몰랐구나. 네 솜씨가 중하긴 하나 네 미친 짓에 한도 끝도 없이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느냐?”

“아니요. 태감님이 제 목숨을 붙여주실 거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걸 바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목소리는 힘 있고 기개가 살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태감과 위정, 그리고 다른 환관들은 소년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태감님이라면, 제가 고문당해 헛소리하기 전에 제 목을 깨끗하게 쳐 주실 거라 믿습니다.”

태감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비웃음이 아니었다. 옥구슬이 은쟁반을 구르는 것처럼 높고 낭랑한 소리였다.

한참을 웃던 태감은 진정하기 위해 차갑게 우린 용정차 넉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야 간신히 가슴 기복을 고르게 할 수 있었다.

가늘고 맵시 있는 눈꼬리에 걸린 눈물을 훔치고 너댓 번 숨을 몰아쉰 다음, 태감은 소년에게 물었다.

“내가 그리할 것 같으냐? 네가 고문당하는 게 가여워서?”

그에 대단 소년의 대답은 확고했다.

“예. 제가 태감님께 봉사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 정도 보수는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태감은 아직 소년에게 직접적인 보수를 지불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의 거처를 옮겨주고 다양한 도구를 갖추어 주었지만, 당장 주머니에 떨어지는 은전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제아무리 권세 드높은 권력자라 한들 남자의 가치란 자고로 묵직한 돈에서 나오는 법 아닌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소년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음을 태감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들어줄 수밖에.

“그래. 네가 원하는 보수가 그거라면. 반드시 들어주마.”

소년은 대답 대신 지금까지 해온 어떤 인사보다도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단순히 부탁을 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소년은 태감을 자신의 상관으로 모실 것을 맹세했다.

단순히 고용주가 아닌, 그저 자신의 목줄을 쥔 주인이 아니라 진심으로 따르고 성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는 부하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 진심을 알고 받아들였기에 태감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인사를 받았다.

나이와 시대를 뛰어넘어서, 소년과 태감은 서로에 대한 확고한 신뢰 한 가닥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황제 폐하께 네가 직접 직언하는 건 말도 안 돼.”

“역시 그렇지요?”

태감의 단호한 말에도 소년은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한 태도였기에 태감은 그가 소년에게 수 싸움에서 한번 졌음을 깨닫고 침음을 흘렸다.

태감의 찡그린 표정에서 소년은 작게 승리를 자축할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당해오기만 해온 시간이었나.

소년이 이렇게 태감과 농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큼 태감과 신뢰관계가 생겼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얼굴에 신체의 나이와 어울리는 개구진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스스로도 제법 우스웠는지 작게 미소 지은 태감이 소년에게 말했다.

“네가 보기엔 역시 난화비더냐? 역시 그러하더냐?”

어쩐지 그답지 않은 물음이었다. 소년이 판단한 양단이라는 사람은 저렇게 몇 번이나 물으며 자신을 납득시키려 애쓰는 소인배는 아니었다.

어째서?

태감의 거듭되는 물음에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장고에 빠졌다. 그와 동시에 소년은 태감이 얼마나 위험하고 외로운 자리에 있었는지, 긴 시간 그가 얼마나 고독했는지를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두 손에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이토록 무섭고, 사무치도록 두려운 일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태감의 말에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냥함으로 답해 주었다.

상냥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볼썽사나운 외모에 어린아이인데도 날카롭고 투박한 목소리인 지라 다한 마음만큼의 상냥함이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누가 알고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위대하신 용의 아드님처럼 제국을 가호하시는 용께서 점지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리 못하니 결국 판단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일엔 당연히 실수가 따르는 법이지요.”

사람은 신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일엔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태감이 평범한 청년이었다면, 후궁을 감시하는 동창의 제독이자 사례감의 태감이 아니었다면. 그의 머리 위로 오직 단 한 사람.

용의 아들만 있는 게 아니었더라면. 아마 태감은 소년의 말이 제법 위로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동창제독 이었기에. 오직 황제 폐하만을 머리 위에 두고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기에.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그의 말 한마디를 목숨 걸고 이루려 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소년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그 대책 역시 가지고 있었다.

“예, 그러니 만약 일이 잘못된 거라면, 제가 이 나라의 중추에 독부를 들인 거라면. 제가 책임을 지지요.”

제가 난화비 님을 독살하겠습니다.

위정의 턱이 벌어지고 태감이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다른 환관들마저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미끄러졌다.

그럼에도 소년은 밝게 웃으며 태감에게 말했다.

“맨 처음의 약속은,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모두가 얼이 빠져 있는 가운데. 소년은 제법 그럴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이번엔 태감이 장고에 빠질 시간이었다.

태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소년에게 그리 많은 것을 쥐여주지 못했었다.

그것은 그의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소년의 처지에 대해 그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소년에게 이런 형태의 충절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태감은 오늘 소년의 말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실은 조금 더 시간을 들여 그를 길들일 생각이었다. 달콤한 미래를 보여주고, 작은 보상을 점차 큰 것으로 더해 주며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을 각오한 충성심을 원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태감이 아는 한 소년은 그런 형태의 충성을 바칠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받은 만큼은 해주는, 충성심보다는 의리와 정으로 붙어 있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태감은 굴러 들어온 것 같은 복을 눈앞에 두고서도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 없었다.

어쩌면 넝쿨째 들어온 호박을 걷어차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신 없는 최선보다는 확신을 가진 차선이 낫다는 심정으로 태감은 소년에게 물었다.

“어째서지?”

분명 많은 고민 끝에 한 말일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하고 고심한 끝에 뱉어낸 한마디였을 것이다.

그에 소년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라 하지 않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예양(禮讓)이 한 말이다.

소년은 그 말을 빗대어 자신의 복심을 보이려 했으나 그 말이 태감에게 진실성 있게 들릴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말하는 소년의 입에는 태감과 농을 할 때처럼 웃음이 걸려 있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다라. 겉으로는 좋은 말이로구나. 범속한 인간이 보고 선망하기에 좋은 절개 높은 문인의 모습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이미 가질 만큼 가지고도 제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들이 아랫것들을 부리기 위해 꾸며낸 보기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지 않느냐?”

신랄하다 못해 통렬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하지만 태감은 뭇 성현들이 후대에 전해지길 간절히 원했던 절개와 충의 덕을 가차 없이 깔아뭉갰음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죽으면 전부 끝인 게지. 후대에 어떠한 평가로 전해지든, 그것이 죽은 자에게 무슨 상관이며 끌어모은 재산과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난 스스로 얼굴에 금칠을 하여 군자라 하는 것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충심을 지금 이 나라에서 진심으로 지키고 따르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충도 살아야 충이고 절개도 살아서 지켜야 절개인 것이지, 죽은 자를 협객이라 칭송하고 살아남은 자를 범부라 헐뜯는 이들 중 진정한 충신이 어디 있고 그 누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참뜻을 알겠느냐.”

그렇기에 난 네가 말하는 충심을 믿을 수 없다. 태감의 말은 다른 이였다면 좋았던 기분도 사그라들고 고개를 돌려 버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모욕적인 말에도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웃었다.

귀밑까지 찢어진 웃음은 태감조차 무심코 다시 돌아볼 만큼 비열하고도 사악하기 그지없어 귀기마저 느껴졌다.

모욕을 들은 이가 지을 만한 표정이 아니다.

소년의 표정에 놀란 태감은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소년에게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 세상 모든 일이 이득으로만 굴러가진 않는다는 좋은 말은 하지 말아라. 그런 입에 발린 말들은 이미 질리도록 들었으니. 최소한 너와는 이것저것 재지 않고 탁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다.”

소년은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는 딱히 태감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뿐이다. 그 역시 전생에는 그런 줄 알고 살았다. 젊은 시절 미친 듯이 노력했고 기회가 없어질까 두려워 남들보다 더 앞서 나갔다.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면허 딸 시간도 아까워 아끼고 아낀 돈으로 차 한번 뽑아보지 못했지만.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온종일 불 앞에서 팬을 흔들고 저무는 달을 보며 침대에 쓰러지는 피로한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없을 한 번뿐인 인생이었기에 그의 삶은 괜찮았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아름다운, 살아볼 만한 삶이었노라 말할 수 있었다.

소년에겐 삶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중화요리를 배워 세계 각지의 최고급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장으로 일했고 한국인 요리사가 주석궁의 주방까지 들어가 봤으니 요리사로서 누릴만한 명예는 다 누렸고 비록 오픈 첫날 죽어 버렸지만 자신만의 가게도 오픈했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할 만큼 쌓았다.

비록 두 번째 삶의 시작은 외롭고 고통스러웠으나 이젠 태감의 사람으로서 충분히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에겐 가족도 없고 그를 기억해 줬으면 하는 사람도 없으니 빈손으로 온몸, 빈손으로 가도 한 줌 아쉬운 일이 없었다.

그러니 언제 내버려도 좋을 목숨.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 준 사람을 위해 쓰는 데 아까울 리가 있나.

하지만 소년은 그런 속내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나이를 먹고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은 태감과 나눈 케케묵은 약속을 다시 꺼내 들었다.

“언젠가 약속하셨지요. 은퇴하게 되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삼처사첩을 끼고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게 해주신다고요.”

믿지도 않았고, 설령 준다 한들 거절할 보상을 들먹이며 소년은 웃었다.

그걸로 좋다. 올지 알 수 없는 아득한 미래를 확실치 않은 감언이설로 속여도 좋다.

독이 담긴 술잔을 건네도 웃으며 마셔줄 테니.

그대.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시구려.

입꼬리를 귀밑까지 찢으며.

각오를 다지고. 광기의 밑바닥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은 소년은 후궁에서 살아온 이래 가장 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지옥유부 가장 밑바닥의 귀신과도 같은 미소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