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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0화 (20/314)

환관의 요리사 20화

서난궁, 동각궁에 이어 세 번째로 가게 된 궁은 홍엽비가 기거하는 남양궁(南陽宮).

방위마다 지어진 오상비들의 궁은 각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정원에 둘러싸여 있지만 키 작은 나무들과 야생초들로 따뜻한 느낌을 주어 편안하고 아늑한 서난궁.

크고 작은 연못이 많고 탁 트여 있어 시원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주는 동각궁.

남양궁은 마치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정원에 숨어들어온 것처럼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야생화들과 크고 작은 동물의 조각이 있고 폭이 좁은 수로가 기하학적인 형태를 그리며 궁 전체에 퍼져 있어 남양궁은 마치 기이한 신전과도 같았다.

키 큰 나무 사이로 드는 볕은 수로들이 모이는 수원지 위로 드리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건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매일 수많은 나인이 드나드는 장소인데도 마치 오랜 시간 비밀리에 감춰져 있었던 장소를 방문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은 분명히 이 궁을 설계한 사람의 실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증거일 테지.

그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말을 잃은 소년은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오상비(五祥妃)의 수는 다섯.

하지만 전통적으로 황후 후보를 모시는 궁은 네 방위에 건설된 사방궁. 그렇다면 한 명의 비는 어디에 사는 걸까?

소년의 궁금증은 간단하게 해소되었다.

“아아. 원래 황후 후보는 네 명인 것이 전통이었다. 북림궁(北林宮)의 안양비까지 해서. 근데 오랜만에 찬드라 왕국에서 볼모 겸해서 공주 한 명이 시집을 왔거든.”

분명 위문회에서 본 갈색 피부의 이국적인 소녀. 라하비의 이야기일 것이다. 긴 흑갈색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화려한 장신구 대신 풍성한 흰 꽃 한 송이를 장식하고 나온 그 모습은 안양비의 기세에 질린 소년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라하비의 갈색 피부를 떠올리는 소년에게 태감이 설명을 이었다.

본래 전통적으로 황후 후보는 넷이어야 했다. 하지만 시집온 라하비를 홀대할 수도 없으니 제국은 오랜 시간 전통으로 내려온 사상비(四祥妃)의 전통을 깨고 오상비(五祥妃)라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사방궁을 오방궁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라하비 님은 사방궁 바깥의 월향궁(月向宮)에 계시지. 마침 찬드라 왕국은 달의 여신을 국교로 모시고 있어서 그런지 좋아하시더군.”

태감은 이미 몇 번이나 오간 장소여서인지 아니면 그냥 관심이 없는 건지 심드렁한 태도였다.

오히려 태감의 관심은 오직 소년이 들고 있는 함에 쏠려 있었다.

질 좋은 흑단으로 만들었으며 모서리는 놋쇠 장식을 댄 좋은 물건으로 안감은 비단을 대었고 뚜껑은 은으로 봉황과 그 뒤로 봉황을 따르는 새무리를 조각해 붙인 훌륭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태감의 관심사는 아마 이 안쪽에 고이 잠든 케이크임이 틀림없었다.

버터를 사용해 저번보다 풍미가 한층 올랐을 케이크는 새하얀 당의를 입고 함 안에 잠들어 있었다.

이날을 위해 차는 쌉쌀하지만, 꽃향기가 향긋한 재스민차를 준비했다. 함에 비단으로 둘러싸여 엄중하게 봉해져 있지만 그런데도 그윽한 단내가 비강 내부에 감도는 듯했다.

케이크를 진저리나도록 구우면서 달콤한 향기 분자가 코점막에 들러붙어 버렸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웃는 소년과는 다르게 잠시 멈춰서 가면을 벗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는 태감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그 결연한 표정은 순교를 앞둔 교인의 고결한 슬픔마저 배어 나와 소년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과연, 겉으로는 홍엽비가 황후감이 아니다 뭐다 하더라도 그 배경은 황제 아래 최고 군수권자가 아닌가.

말 한마디로 나라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을 구슬리는 일이라면 제아무리 태감이라 할지라도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소년은 태감의 사람이다. 태감의 비호를 받아 소년은 후궁에서 사람 노릇을 하게 되었다.

비천한 구더기를 믿고 주방을 맡긴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노라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내려온 임무를 실망시키는 일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 언제나 최고로 맛있는 음식으로 식탁을 채워주는 것.

그것은 소년의 충심이요, 소년의 보은이었다.

“이번에는, 틀림없겠지?”

“예. 저번보다 더 맛있게 구워졌으니 홍엽비 님도 만족하실 겁니다.”

“아니. 그거 말고.”

“예?”

그게 아님 뭐?

소년의 멍한 태도에 태감이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다그쳤다.

“몇 개나 남았냔 말이다.”

“……아아…….”

참 신기해 이 사람. 세상 좋다는 건 다 먹어 봤을 텐데 이렇게 먹는 걸 좋아하는 거 보면. 그런 인간이 허리는 또 개미허리인 걸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한 거야.

하지만 소년은 지난 경험을 통해 학습하는 인물이었다. 그 전날 국물을 남기지 못해 죽을 만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갈굼받았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홍엽비 님께 한 개, 태감님께 세 개, 정 마담…… 아니, 내 거 하나.’

“총 네 개를 만들었으니 세 개가 남았군요.”

미성숙한 몸이 마르고 닳도록 아침도 밤도 없이 화덕 앞에서 땀을 흘리는데 이 정도 보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 남긴 케이크는 나중에 몰래 장소와 이삼과 함께 티타임을 가지려 남겨둔 것이었다.

이렇게 독살스러운 어른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면 가끔씩 순수한 어린 친구들로부터 마음의 평온과 안정을 찾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심리 아닐까.

“세 개? 흠, 좀 부족하지만 뭐. 한동안은 즐겁게 보낼 수 있겠군.”

“그 한동안이 혹시 하루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반나절이야.”

저러고도 세끼 밥을 다 먹고 심심하면 야식까지 찾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앞으로 태감의 별명을 미제차로 하기로 했다.

‘보기엔 예쁜데 연비가 꽝이야.’

소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한눈파는 일 없이 정면 만을 보고 걸었었다.

너무 봐서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

아름다움 이란 익숙해지면 그 한때의 감동도 퇴색하게 마련이니.

누군가에겐 그 한때가 추억으로 남으련만 태감에겐 그런 기색도 없어 보였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가는 심드렁하게 처져 있었다.

어쩌면 아직 젊으므로 추억보다도 눈앞의 미래에 더 눈길이 가는 걸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직진은 젊은이들의 특권이니까.

그 말은 스스로 생각하고 나서도 웃음이 나왔다.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도착했다.”

태감의 말에 소년은 품에 안은 함을 더욱 힘주어 안으며 궁 안으로 들어섰다.

* * *

태감의 시종으로서 다과회에 동석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소년은 자리를 피해 남양궁의 한적한 곳을 걸어야 했다.

낯선 이와의 만남을 꺼린다 하시니 소년은 태감의 면담이 끝날 때까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덕분에 소년은 나인의 안내를 받으며 남양궁을 산책할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사무적인 태도의 시녀는 퉁명스러웠지만 설명하는 솜씨는 퍽 괜찮았다.

유난히 비밀스럽게 꾸며진 남양궁은 누구도 발 디딘 적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끼가 낀 석등롱 아래에 개구리 조각상. 그 옆쪽으로 작게 파인 연못의 수면으로 비쳐 보이는 황금색 잉어.

그 연못을 건너는 우아한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수양버들 아래로 꽃잎이 살짝 벌어진 연꽃 조각상과 그 연꽃을 가려주는 우산 장식이 있었다.

섬세한 조형이었지만 어딘가 어린아이의 장난기가 스며있어 보는 사람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다음에는 무엇이 나올까, 이 조각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그림은 석채화(石彩畫)의 대가이신 운향산 어도 대사께서 그리신 봉황도(鳳凰圖)로 단순히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학적인 가치 역시…….”

말하는 중간중간 머리칼을 뒤로 넘기는 시녀의 손목에선 화려한 팔찌가 찰랑거렸다.

놋쇠나 구리가 아닌, 문외한인 소년이 보기에도 확실히 순금으로 이루어진 팔찌는 도저히 시녀의 신분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팔찌만이 아니었다. 좋은 비단으로 안감을 댄 시녀복과 큰 진주알이 박힌 귀고리, 산호로 끝을 장식한 머리 장식.

과연 저 장신구 하나를 마련하는데 시녀의 봉급 몇 년 치가 필요할까?

소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장신구나 옷차림에 별 관심 없었던 소년도 태감의 엄격한 교육에 의해 어느 정도는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보아하니 아직 정식 궁인으로서의 품계를 허락받지 못한 나인의 신분으로 보이고,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장신구와 의복을 착용했다는 것은…….

소년의 시선을 느꼈는지 앞서 걸으며 안내를 하던 시녀가 옷깃을 여미며 물었다.

“무언가, 신경 쓰이시는 점이라도?”

“아, 아닙니다. 석채화가 퍽 훌륭한 그림이다 보니, 대사께서 생전 남기신 다른 그림은 어떨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대사께선 많은 작품을 남기셨지요. 이 남양궁에도 몇 점 소장된 작품이 있으니, 보러 가실까요?”

한참을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녀의 의심을 푼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가볍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홍엽비 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예? 홍엽비 님이요?”

“예. 오늘 처음 뵙는데 만나 뵌 시간이 짧아서…….”

멈춰선 시녀는 턱 끝에 손가락을 대고 고민에 잠겼다. 무의식인지 유난히도 팔찌를 찰그락 소리를 내며 쓰다듬던 시녀는 이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무척 후덕한 분이시죠. 실수에도 관대하시고요.”

“허어, 그렇군요.”

“네. 정말 다정하시고, 좋은 분이시죠.”

시녀는 홍엽비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소년은 그녀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칭찬을 입에 담기 전 시녀의 입꼬리가 그린 것은 명백한 조소였다. 모시는 주인을 조롱하는 시녀, 몸에 걸친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

소년은 시녀가 떠벌리는 말을 들으며 태감에게 전해야 할 정보를 걸러냈다.

홍엽비와의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연좌궁의 저녁. 태감은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낸 저녁을 앞에 두고서도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소심한 것도 그 정도면 병이다, 병.”

“움직이기 쉽지 않으신가 봅니다.”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인지 고운 머릿결을 꼬았다 폈다 하며 한숨을 내쉬는 태감을 위해 소년은 저녁 반주 한 병을 가져왔다.

달콤한 술 한잔이 고민을 날려주지는 못해도 당장의 식사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술 한 잔을 걸친 태감은 흰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더냐? 홍엽비는.”

“어떻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얼굴만 보고 끝이었는데.”

그냥 생긴 게 귀엽고 소심해 보인다. 자존감이 낮아 보인다 정도?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이 기세등등한 걸 보니 궁에선 시녀들에게 눌려 기를 못 펴고 사는 것 같고 시녀들을 휘어잡을 힘은 없어 보인다.

“시녀들의 복장이 화려하고 재질이 좋아 보이며 주인을 공경하는 자세가 보이질 않으니 홍엽비 님이 고심이 크시겠더군요.”

“그래, 홍엽비는 대가 약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오랫동안 궁의 기강을 잡지 못했지. 그 때문에 권력을 잡은 선임 나인들과 정식 품계를 받은 궁인들이 멋대로 전횡을 일삼는 것이다. 그녀들이 걸친 장신구를 보았겠지?”

“화려하더군요. 지나칠 만큼.”

시녀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그것은 곧 남양궁의 시녀들이 홍엽비를 위해 책정된 예산에 손을 댔다는 이야기였다.

본래대로 라면 당장 꼬투리를 잡아 주모자들을 잡아넣고 지지고 볶아 관련자들을 모조리 추포해야 할 것이다.

강상의 법도를 어지르고 모셔야 할 주인을 능멸한 그 죄는 목숨 하나로는 용서받기 어려운 죄.

하지만 그것이 다름 아닌 홍엽비의 궁이었기에 태감은 쉽사리 동창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신경줄 굵고 아무 데서나 베개 없이도 잘 자는 그들과는 다르게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매달린 나뭇잎보다도 섬세한 홍엽비께서 곡소리를 하며 끌려가는 시녀들을 보고 무슨 충격을 받으실지 태감은 상상할 수 없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일을 아랫것들에게 떠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좀 잘 생각해 봐라. 어떻게 해야 홍엽비 님의 시녀들을 경질 시키면서도 홍엽비 님의 성격도 조금 활달하게 바꿀 수 있을지.”

“이런 젠장. 제가 심리상담가도 아닌데 말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차라리 앵속을 타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태연하게 마약을 권하는 소년을 보며 많이 컸구나, 대견해 하면서도 태감은 끝까지 소년의 충언(?)을 듣지 않았다.

답답해서 가슴을 치며 한탄하는 소년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 태감은 태연하게 무리한 주문을 요구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쥐어짜면 찢어지는 인간과 쥐어짜면 짤수록 즙이 나오는 인간.

소년은 쥐어짜고 갈아 넣을수록 훌륭한 성과가 나오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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