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9화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이제 잠자리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에도 연좌궁 주방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나인들이 바삐 비들의 침상을 정돈하고 후궁의 환관들은 내건 등불을 거두어들이는 시간인데도 소년은 피로감이 엿보이는 얼굴로 바쁘게 나무 주걱과 얇게 쪼갠 대나무 조각을 엮어 만든 거품기로 무언가를 휘젓고 있었다.
내일, 홍엽비와의 다과에서 낼 케이크 반죽이었다.
주재료는 역시나 술에 불린 달콤한 각종 건과일과 견과류. 그리고 달콤한 향기가 진동하는 바닐라빈이었다.
바닐라빈은 우방국이자 오상비 중 한 명인 라하비의 고향인 찬드라 왕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교역품으로 본고장인 찬드라 왕국에서도 술의 재료로 귀하게 여겨지며 제국에서는 심신안정에 도움을 준다고 여겨지는 의약품으로 생각되어 같은 무게의 금으로 거래를 하는 귀중한 것이었다.
외궁의 약사들이 보면 천인공노할 짓이라고 대경할 짓을 소년은 태연하게 저질렀다.
길고 가는 꼬투리를 세로로 길게 쪼개 그 안의 달고 향긋한 바닐라빈을 긁어내어 아낌없이 묽은 반죽 안으로 넣었다. 코끝을 간질거리는 것 같은 달콤한 향기.
태감은 그 달큰한 향기에 자신까지도 기분이 들뜨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낯설지만 그리 싫지 않은 달콤한 향기는 향낭으로 만들어 허리춤에 차면 저절로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지 않을까 싶을 만큼 달콤했다.
몇 번이나 시험을 통과하여 그 실력을 증명한 만큼 소년은 그 실력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이름도 들어보지 못할 귀한 재료뿐만 아니라 토목이나 건축 공사를 담당하며 궁궐에서 사용하는 구리, 놋쇠, 철, 나무 등의 재료로 만든 기구를 공급하고 관리하는 내관감에 요청해 자신만의 도구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 거품기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튼튼하고 무거운 무쇠 파운드 케이크 틀을 얻었다.
묵직한 무게감과 매끈한 표면, 기름을 잘 먹인 틀은 윤기가 흘렀다.
여기에 기름을 먹인 종이를 깔고 반죽을 부어 평평하게 골라준 다음, 오븐은 아니지만 그 대용품쯤은 되는 화덕에 넣고 구워주면 된다.
그러기 위해 소년은 우선 너무 덜 탄 장작은 빼내고 적당히 탄 잉걸불만을 남겨 화덕 내부가 은근하고 고른 열기가 이어지도록 했다.
“호오, 거의 타들어 간 것만 남기는군?”
“예. 안 그러면 열기가 고르지 못해서 한쪽이 타거나 덜 익게 돼서 그럽니다.”
소년은 상관의 관심이 썩 유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묵한 눈은 피로해 보였고 때때로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굽은 허리를 펼 때면 고된 삶에 지친 노동자의 비애가 엿보였다.
그 표정은 위로는 상사에게 시달리고 아래로는 부하직원들에게 고통받는 비참한 중간관리직에게나 어울릴 만한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소년은 썩 잘 생겼다고 평가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가는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삼백안은 우묵하게 깊이가 있어 짖은 음영을 만들었고 코는 매부리코에 입술 또한 얇게 찢어져 날카로운 인상엔 오랜 후궁 생활로 비굴함이 배어 있었다.
거기에 왼 다리를 절고 평생 굽신거리면서 살아 허리가 굽어서인지 가뜩이나 못 먹고 자라 왜소한 체구가 더 작아 보여 볼썽사나웠다.
비루먹는 개처럼 처량하기 그지없는 놈. 이것이 소년에 대한 태감의 평가였다. 그런 놈이 성격은 어찌나 더러운지…….
하지만 그럼에도 소년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그 모든 조건을 감수 할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요리가 맛이 있어.’
요리가 맛이 있다. 세상천지의 산해진미를 즐겨온 그조차 게걸스럽게 식탐을 부릴 만큼, 소년의 조리 실력은 그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칭할 만했다.
제 말처럼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배우고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하거늘 어찌 낮도깨비도 아닌 것이 이런 놈이 나왔을까?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태감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딴청을 피우던 소년은 이내 부담스러운 적막감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솔직히 소년의 말은 의문보다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 더 강했다.
피로감이 느껴지는 소년의 표정은 빨리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였지만 태감으로서는 그를 아직 놔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언제나 말꼬리를 끌어본 적 없었던 태감에게도 부담스러운 주제였는지, 태감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전날 위정과 했던 대화를 기억하느냐?”
죽을 뻔했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태감과 위정이 나누었던 대화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복잡한 궁내 정치에 연관되고 싶지 않아 일부러 한 귀로 흘려듣기로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하고 외면하려 해도 태감의 스산한 눈빛에선 피할 수 없는 작두의 칼날이 목 끝까지 치달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네 과거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지워져 있었다. 이것은 선황 폐하를 모시던 전 동창제독 문일의 솜씨지. 당시 동창은 현재처럼 궁에서 가장 권력이 집중된 감찰기관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는,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그 당시 문일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생에 만인지상의 자리라 하면 신하로서 더 이상 오를 자리가 없다는 영의정의 자리를 칭하는 말이 아니었던가.
천대받는 환관의 신분으로 그런 자리에 올랐다면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년은 말을 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양 태감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늘 당당했던 그가, 세상에 꿇릴 것 하나 없다는 듯이 행동했던 그가 주저하고 있었다.
“그래. 네 과거를 지우라 명하신 것은 선황 폐하이실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널 후궁에 매어 두신 것 역시.
소년은 태감의 사람이 되기로 한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줄곧 외면해 온 불안감이 구체적인 현실성을 띠고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겨진 혈통이나 출생의 비밀에 관한 환상을 품었던 것은 언제 적 이야기였을까. 아마 중학생이 되기 전에 그 꿈은 끝났을 것이다.
정신 연령 반백의 나이에 찾아온 출생의 비밀에 소년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꽤나 허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말씀은…… 제가 당시 죽이기엔 너무 어렸던 역적의 자손…… 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뭐. 좋게 생각하면 네가 사실은 어느 나라의 왕족 출신일 수도 있다 이거지.”
태감의 유쾌한 농담에 소년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참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군요. 당장 제 출생의 비밀을 찾고 싶은데 퇴직하면 안 될까요?”
“후임자를 구할 수 있다면 말이지.”
소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그의 짧고도 길었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 힘겹고 고단했던 나날을 넘어 이제는 살얼음판 같은 후궁의 정치판에 들어선 것은 어째서였나.
나는 무엇을 위해 태감의 심복, 황실의 하수인이 된 것일까.
“선황 폐하라…….”
그는 태감의 심복이며, 태감은 황제의 심복이다. 이는 곧 소년 역시 황제의 심복이며 황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나를 이 후궁에 매둔 것이 선황이라면.
난 곧 나의 원수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소년의 탁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태감을 담았다. 세월에 깎여 흠이 생긴 눈동자는 태감의 얼굴에서 또다시 황제와의 유사점을 찾았다.
누구도 보상해 줄 수 없는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구원한 자. 그리고 그에게 고통을 선사한 원수의 핏줄이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자.
소년의 눈동자에 고통의 상흔이 아로새겨진 순간, 그 텅 빈 공간에 원한이 들어찬 그 순간.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이나 먹을까요.”
문득 소년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태감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밀가루 독으로 걸어가 도마 위에 밀가루를 퍼 올렸다.
납면(拉麵).
밀가루에 물을 넣고 소금 한 자밤을 넣는다. 여름에는 소금양을 조금 많이, 겨울에는 적게 사용한다.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하면 힘있게 눌러주고 치대주며 부드럽게 늘어날 정도로 반죽해 준다.
반죽이 완성되면 젖은 천으로 덮어 삼십여 분을 재워둔다.
반죽이 숙성되는 동안 국물을 만든다.
육말장탕(肉末醬湯).
간 돼지고기와 생강, 마늘, 파는 곱게 다지고 그것을 유채 기름으로 볶아준다.
고기에 색이 나기 시작하면 짭짤한 황장을 넣고 맛을 낸 뒤 청탕 두 컵을 넣어 끓여준다.
간단하고 만들기 편하지만 고기 맛과 구수한 장맛이 어우러져 가볍게 한 그릇 먹기에 좋은 탕이다.
간을 보던 소년은 작은 종지에 국물을 담아 멀뚱히 서 있는 태감에게 건넸다.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그것을 건네받은 태감이 종지를 들어 마시자 짭조름하고 순한 국물맛에 표정이 풀어졌다.
“첫맛은 간이 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하고 부담이 없군.”
“예. 자기 전에 짠 걸 너무 먹으면 얼굴이 붓지요.”
다 된 탕을 구석으로 치워놓고 면판에 밀가루 조금을 덧가루로 뿌려 숙성시켜둔 반죽을 올렸다.
덧가루가 부족하면 보충해 가며 고루 말랑해지도록 주물러 주고 다루기 좋아지면 굵은 막대 모양으로 만든다.
‘납면을 뽑는 건 오랜만인데.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선 처음이군.’
납면보다 만들기 편한 절면(切麵)은 자주 만들었지만 이렇게 공을 들여서 납면을 만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납면을 뽑는 것은 어려운 기술이다. 중화요리의 세계에서도 면 뽑는 기술자는 따로 둘 정도로 내공이 필요한 것이 바로 납면이다.
충분한 완력과 숙련된 기술이 조화되지 않으면 면은 너무 딱딱해지거나 너무 물러지기에 십상이다.
부드럽고 차지며 쫄깃하지만 질기지 않은 그런 면.
장인의 솜씨를 눈으로 볼 수 있어서인지 태감 역시 조금은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한국에서도 수타면을 뽑는 가게는 주방에 따로 창을 내서 광고를 하니까.’
나름대로 퍼포먼스 성도 강한 게 바로 납면 뽑기다.
반죽의 양 끝을 잡고 면판 위에 굴려 쭉쭉 늘리며 충분히 늘어나면 두 가닥이 되도록 고쳐 잡는다.
이 작업을 반복해 충분히 가닥 수가 늘어나고 끈기와 탄성이 강해지면…….
“헛……차!’
소년의 짧은 기합성과 함께 손안의 면이 탄력 있게 허공에서 펴졌다.
공중에 던져 펴고, 비틀듯이 빙글빙글 회전시켜 그것을 반으로 접고 다시 펴는 과정을 반복한다.
면 다발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에서 비틀리자 태감의 입에서 경탄사가 터져 나왔다.
수년간 손에서 놓았던 작업인데도 몸이, 아니, 영혼이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만족스러울 만큼 작업이 진행되자 소년의 입에 웃음이 걸렸다.
적당한 굵기가 되면 면판 위에 밀가루를 뿌리고 면을 올려 골고루 밀가루가 묻게 한 뒤에 양 끝을 잘라낸다.
열탕에 면을 삶아내기 전에 태감이 면 한 가닥을 들어 올렸다.
가늘고 굵기가 균일한 면은 단 한 가닥도 굵기가 다른 것이 없이 일정했다.
늘 일상적으로 먹어오는 것이 면이지만 눈앞에서 만드는 것을 보고 나자 평소와는 다른 두근거림이 태감의 심장을 기분 좋은 고양감으로 들뜨게 했다.
“자, 이제 삶기만 하면 되나?”
“예. 삶아서 탕을 끼얹으면 됩니다.”
뜨거운 온수에 삶아낸 뒤 쫄깃한 것이 좋으면 그대로 찬물에 한 번 헹궈내고 부드러운 식감을 즐기고 싶으면 바로 탕을 끼얹는다.
소박한 야식 한 그릇을 나눠 들고 태감과 소년은 아궁이 옆에 나란히 걸터앉아 밥을 먹었다.
상 위에서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태감과 소년의 첫 겸상이었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에도 아직은 서늘한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밤공기를 더운 국수 한 그릇이 따스한 온기로 덥혀주었다.
겉은 부들부들하면서도 씹어보면 쫄깃한 느낌이 남아 있는 국수 면발은 목 넘김이 좋아 매끈하게 넘어가고 짭짤한 국물 속 다진 고기가 면발에 딸려 올라가 색다른 식감을 연출했다.
한참을 말없이 먹기만 하던 태감이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있던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어쩔 셈이냐.”
대답하려던 소년은 기도로 다진 고기 조각이 들어가 한참을 기침했다. 간신히 기침이 멎자 소년은 죽다 살아난 얼굴로 태감의 의문에 대답했다.
“뭐 어쩔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살던 대로 살아야지.”
발버둥 친다 해도 핏줄의 낙인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고 제아무리 권세 드높은 양 태감이라고 해도 전 동창제독의 입김이 들어간 소년을 함부로 궁에서 빼내 줄 수도 없었다. 결국, 소년의 처지가 변할 일은 없었다.
소년의 얼굴을 보던 태감이 다시 농을 던졌다.
“그래도 아쉽지 않으냐? 막상 나가보면 네 앞으로 상속된 고래 등 같은 저택에 막대한 토지와 소작인들이 딸려 있을지 누가 알겠느냐.”
태감의 말에 소년이 코웃음 쳤다.
“지금은 태감님의 전속 요리사로 족합니다.”
* * *
다 구워진 케이크는 시럽을 바르고 당의(糖衣, 아이싱)를 입혀 하룻밤 재워두었다. 서늘한 곳에서 재워두는 동안 시럽은 촉촉하게 케이크에 배어들고 그윽한 향기에는 깊이가 더해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휘핑할 만큼의 생크림을 확보하지 못해 그 대용품으로 아이싱을 해 보았는데 한 조각 먹어본 태감의 의견으론 본인은 이쪽이 더 취향이라고 하신다.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아이싱이 맛있기는 하지…….’
전생에는 아이싱도 뭔 크림치즈 아이싱이니 초콜릿 아이싱이니 온갖 종류로 다양화되었지만, 소년은 전생에서도 지금도 살짝 촌스러운 설탕맛 아이싱을 두툼하게 바른 것을 제일 좋아했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혈당이 무서워 멀리했지만, 기껏 젊은 몸이 되었으니 이럴 때라도 즐겨 봐야 하지 않겠는가?
소년은 그릇의 남은 아이싱을 긁어 잘라낸 케이크 끄트머리에 발라 한입 베어 물었다.
씁쓸한 차 한 모금이 없으면 결코 씻어낼 수 없는 다디단 맛. 이 단맛은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분명 전생이었으면 두 번은 못 먹었을 위험천만한 맛. 하지만 그 단맛은 소년의 스트레스를 조금 누그러뜨려 주었다.
케이크 부스러기를 우물거리는 소년의 뒤로는 화려한 비단 예복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평생 거칠고 투박한 옷만을 입어온 소년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오그라들 만큼 불편해 보이는 예복은 양주에서 들여온 비단에 허리띠는 무려 복건성에서 들여온 대모갑(玳瑁甲) 재질이었다.
가죽신은 수사슴 가죽이고 은실로 자수 놓은 예복은 평범한 환관들이 걸칠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소년이 키가 크고 허리가 곧아 옷맵시가 사는 사람이었으면 그럭저럭 어울릴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저 옷을 걸친 소년의 모습은 탐관오리 옆 부패 향리였다.
‘같은 옷도 장소 님이 입으면 깜찍, 내가 입으면 끔찍. 역시 난 결혼은 하지 말아야겠어.’
아님 혼인은 하더라도 아이는 가지지 말던가. 아이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할 천형은 병뿐만이 아니었다.
아니면 돈이라도 많아 재산이라도 한 짐 물려주면 좋으련만 그럴 가능성도 희미해 보였다.
“아, 아직도 안 입으셨어요? 태감님이 슬슬 출발하신다는데…….”
“아. 이게 영 입기가 어려워서…….”
“하긴 궁중 예복이 복잡하기는 하죠.”
소년을 부르러 온 장소에게 어려움을 토로하자 장소 역시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우선은 비단 내의를 입기 위해 상의를 벗자 장소가 내의를 입혀 주었다.
“여기 두 번째 옷고름을 먼저 여미신 다음에…… 네. 그 구멍으로 머리를 내미시면 돼요.”
“아이고, 팔 아파라. 이거 몸이 유연하지 않은 사람은 혼자 입기도 힘들겠어요. 몸에 딱 달라붙게 만들어져서.”
마치 딱 달라붙는 재킷을 입기 위해 억지로 팔을 쑤셔 넣는 기분이었다.
입으면 라인이 딱 떨어져서 체격 좋은 무관들이 입으면 멋질 것 같기는 했다.
한참을 낑낑대며 예복을 갖춰 입자 제법 그럴듯한 부패 환관 한 명이 완성되었다.
구리거울을 들여다보던 소년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딱 봐도 탐욕이 덕지덕지 붙은 게 최소한 연륜은 있어 보이는군.’
움푹 들어간 눈덩이의 음영이 관록은 연출해 주어 키만 조금 컸으면 서부극의 악역 중간보스자리 정도는 노려봐도 좋겠다.
최소한 나이 어리다고 무시는 안 당할 것 같으니…….
어쩐지 옛날 좋아했던 서부영화의 악당을 닮은 듯해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다만 입고 있는 옷이 판초에 카우보이모자가 아니라 고풍스러운 궁중 예복이니 멋이 살지 않았다.
문득 소년은 손가락을 세워 총 모양으로 만들어보았다. 철없는 시절에 멋있다고 뜻도 모르고 따라 했던 그 대사.
‘Adiós Amigo.’
탕!
“아아, 다시 한번 클린트 이스트 우드를 볼 수 있다면.”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장소를 눈앞에 두고 홀로 추억에 빠진 것이 부끄러웠는지 소년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서둘러 걸었다.
하지만 다리를 끌며 복도를 걷는 소년의 머릿속에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The ecstacy of gold’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