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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8화 (18/314)

환관의 요리사 18화

태감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둘은 서둘러 베이컨을 주방으로 옮겨왔다. 나무 도마에 켜켜이 쌓인 베이컨은 그것만으로도 한 폭의 비단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붉은 고기와 하얀 지방의 조화는 거장의 산수화에 비한다 해도 손색이 없다. 그 어떤 붉은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색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화사한 봄처럼 달콤하고 이미 죽은 주검이 가져다주는 생명의 장엄함조차 이 붉은 고기 앞에선 그 의미를 잃고 스러지고 만다.

그 어떤 대리석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지방의 순진무구함. 풍요로운 지방을 가진 삼겹살과는 다르다.

붉은 고기를 얇게 감싼 가는 지방 한 겹은 혀 위에서 아스라이 녹아내려 애간장을 끓게 만든다.

왜 가장 큰 행복은 항상 찰나에만 존재하는가?

덧없고, 그렇기에 애틋하다.

이것은 가장 화려한 형태를 한 생명의 퇴락이었다. 한때 땅을 밟고 자신의 의지로 먹이를 찾아 삶을 유지했던 짐승은 이제 갈고리에 꿰인 주검이 되어 그들의 앞에 놓였다.

생각하고 행동하던 지성을 가진 짐승이 이제는 탐욕스러운 식탐으로 혀를 내두르는 이들 앞에서 얇게 썰지 두껍게 썰지를 논할 대상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하는가?

모든 생명은 존중받아야 하는가?

소년은 그 대답으로 칼을 들었다.

그런 건. 먹고 나서 생각해.

두툼한 칼이 살점을 저민다. 눈 내린 것처럼 하얀 지방을 가르고 그 안의 고기를 저미고 들어간다.

옆에서 침을 삼키는 장소의 목울대 움찔거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적막감 속에서 소년은 하나둘 저며낸 베이컨 중 하나를 접어 입으로 가져갔다.

긴장감이 고조되어 단란했던 주방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격정적으로 변했다.

장소의 핏발선 눈을 마주 보며 소년의 이가 베이컨을 씹어, 삼켰다.

짜고, 기름지다.

그리고.

“쥬시하고…… 스파이시해!”

“네?”

“아…… 서방의 말입니다. 뭐, 백번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드셔 보시죠.”

드디어 장소 에게도 고기 한 점이 내밀어졌다. 마치 보물을 받아들듯이 경건함 마저 엿보이는 장소의 옆얼굴을 보고 피식 웃은 소년은 이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철과가 충분히 달아오르도록 장작을 가득 넣고 그윽하게 달궈지면 거기에 베이컨을 넣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달군 팬에 베이컨이 들어가는 순간. 베이컨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순간인지, 비교적 지방이 적은 등살 베이컨이지만 그래도 베이컨 인지라 베이컨이 튀겨지듯 익을 만큼 충분한 지방이 나왔다.

물론 그 지방은 베이컨을 튀기고도 남아 계란을 익히기에도 충분했다.

콜레스테롤? 혈관질환? 성인병? 칼로리?

당장 굶주림으로 사람이 죽는 시대에 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의미한 말인가!

성인병으로 죽을 내일보다 당장 먹지 못해 아사할 오늘을 두려워하는 것이 현재의 시대였다.

아무리 황제의 치세가 뛰어나 성군 소리를 듣는다 할지언정 굶주리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아직 완벽히 개량되지 않은 곡물과 가축들, 여전히 기후에 큰 영향을 받는 농사의 흥망,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농사 등등.

이런 시대에 채식주의니 다이어트니 하기만 해봐라. 당장 조리돌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베이컨 기름이 충분히 배어 나오고 그 끝이 바삭바삭해지기 시작하자 소년은 지체 없이 계란을 깨 넣었다. 계란이 부르르 끓어오르듯이 익기 시작하자 철과를 노려보는 소년의 눈동자에 갈등이 어리기 시작했다.

반숙으로 익힐 것인가?

뒤집어 완숙으로 익힐 것인가?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계란을 반숙으로 먹는 사람과 완숙으로 먹는 사람. 개인적으로 소년은 완전한 반숙도 완숙도 아닌, 노른자가 흐를 정도는 아니지만 투명감이 남아 있으며 퍽퍽하지 않고 탄력 있고 쫀득한 그 상태를 가장 좋아했다.

노른자를 응시하는 소년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극도의 집중력이 발휘되기 시작하자 흐르는 시간마저 느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세상엔 오직 불과 노른자만이 존재했다.

바람마저 숨을 멈추고 불꽃마저 춤을 놓아 버린 멈춰선 듯한 세계에서 소년의 눈동자만이 개미가 기어가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짙은 주황색 선명한 노른자의 끝자리가 익어 노오란 색으로 변하는 그 시간.

그때.

세계는 맥동하기 시작한다.

조금 전까지의 침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거의 난폭하기까지 한 동작으로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을 철과에서 꺼낸 소년은 그와 동시에 넓은 접시에 희고 고슬고슬한 쌀밥을 퍼 올려 넓게 폈다.

흰 쌀밥 위로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가 올라가자 숨 막힐 듯한 얼굴로 서 있던 장소가 한꺼번에 숨을 토해냈다.

마치 첫 실전을 치른 병사처럼 떨리는 다리로 주저앉은 장소에게 소년이 접시를 내밀었다. 장소는 거의 홀린 듯한 표정으로 접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수저를 뜨기 전에 소년은 우선 젓가락으로 계란 이곳저곳에 구멍을 내었다.

어째서 그런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가? 어째서 이 완벽한 작품에 스스로 흠을 내는가?

장소의 의문은 머지않아 해소되었다.

소년이 간장을 꺼냈다. 국에 간을 할 때 사용하는 짠맛이 진한 간장이 아니라 맛이 순하고 살짝 단맛이 도는 그런 간장이었다.

그리고 계란으로 그 간장을 흘려보내자 요리는 비로소 완성되었다.

완성된 요리에 간장을 첨삭함으로써 작품은 걸작이 된 것이다.

간장을 받아 들어 신중하게 간을 하는 장소를 보며 소년은 젓가락으로 베이컨을 집었다.

‘아직 바삭하군…….’

베이컨의 양쪽을 젓가락으로 누르고 그것으로 밥을 만다. 베이컨을 이용해 밥을 떠낸 것이다. 기름이 자르르 배어 나와 밥을 윤기 있게 물들였다.

입에 양껏 밀어 넣어 볼이 미어지도록 씹고 싶은데도 소년은 일부러 신중하게 적은 양의 밥을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하고 기름지긴 하지만 기름이 입안에 넘쳐 흐를 만큼은 아니다.

입천장에 대고 혀끝으로 부드럽게 밀면 찢어질 만큼 부드럽지만 기름 부분은 바삭바삭해 식감 대비가 훌륭하다.

염분 농도를 조절할 때 공을 들인 만큼 너무 짜지도 너무 싱겁지도 않았으며 그윽한 백리향 향기 아래로 감귤류의 달콤한 향기와 톡 쏘는 겨자 향기가 훈연할 때 배어든 사과나무 향기의 훈연향과 함께 조화롭게 어울렸다.

맛있다. 정말 맛이 있는데…….

“……이렇게 맛이 있었나?”

기이한 의아함에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만들어본 것은 아니었다. 지금 만든 베이컨은 전생에 몇 번이나 만들며 맛을 확인한 검증된 레시피였다. 그때도 분명 맛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너무 맛이 좋아 본래의 맛을 기억하는 소년으로서는 석연치 않은 기분이 느껴질 정도였다.

너무 맛이 좋아서 수상하다니. 생각할수록 우스운 이야기였다.

“엥,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거겠지.”

한동안 고기를 입에 대기 힘든 생활을 하기도 했고 이번 생에선 처음 먹는 베이컨이니 이 정도 감동이 느껴질 수도 있다고 스스로 납득한 소년은 이내 아무 의심 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 * *

“맛 좋다! 납육을 볶거나 다른 요리에 넣지 않고 이렇게 밥에 싸 먹기만 해도 맛이 좋을 줄이야.”

“다른 납육은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소금간을 세게 해서 말리니 안 되고 이 베이컨은 어디까지나 금방 소비할 생각으로 간을 슴슴하게 한 것이니 그렇습니다.”

오늘 태감의 점심은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에 유채 기름으로 구운 토마토와 조금 남아 있었던 버터로 볶은 모듬 버섯이었다.

물론 이것만 올린 것은 아니었고 여기에 채소볶음과 두부가 들어간 탕에 생선찜과 튀겨낸 닭까지 떡 벌어지게 차리긴 했지만, 태감은 이 매력적인 서양식 식단에 마음이 빼앗겨 있었다.

“그래. 베이컨이나 계란도 좋고 버터로 고소하게 익힌 버섯도 마음에 들지만 다른 것보다도 이 토마토가 좋군. 이렇게 기름에 익히면 더 영양가가 있다고?”

“예. 토마토 말고도 당근 역시 기름에 익혀 먹으면 지용성인 비타민A를 흡수하기 쉬워지기 때문에 야맹증에 좋지요.”

이미 더 이상 숨기는 것도 귀찮아진 소년은 어차피 못 알아듣겠지 하는 심정으로 태감에게 비타민이니 리코펜이니 하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어차피 태감이야 그 내용이 중요하지 비타민이니 DHA니 하는 말은 별 중요하지 않을 테니.

“그래. 야맹증을 예방한다라…… 의원에서 처방하는 쓸데없이 비싼 약초를 달여먹지 않아도 된단 말이지?”

“예 뭐…… 그 대신 즉효성은 없습니다. 음식은 약이 아니니까요.”

즉효성이 없는 대신 몸에 부담도 없는 것이 음식의 장점이었다. 센 약은 센 독과 동의어이며 약효가 센 약은 그만큼 간에 부담을 줘 간이 상하기 쉽다.

먹는 음식으로 병을 예방하고 고친다.

의식동원(醫食同源)이야말로 중국요리가 최고로 치는 가치가 아닌가.

소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먹는 요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태감의 입꼬리가 화사하게 올라갔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은 누구를 이야기하기로 했지?”

“어디…… 아마 홍엽비 님이실 겁니다.”

홍엽비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녀의 배경인 팔군도독 당량 대장군을 빼놓을 수가 없다.

각 지방 국경부의 팔군을 통제하는 팔군 도독부의 수장인 당량 대장군은 현재 공석인 금군총괄 상대장군 직을 제외하면 현재 군부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인물로 그 위세가 막강하기 그지없다.

소년은 처음엔 전생과 같이 이곳도 문관이 무관을 천시하는 사회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생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제국은 처음 일어설 때부터 창칼로 일어선 군사국가로 대대로 문보다는 무를 숭상해 왔으며 권력 역시 문신보다는 무신이 더 강한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선황제 역시 스스로 창칼을 쥐고 전장을 질타하며 스스로를 증명했기 때문에 난세에 백성들의 인심을 끌 수 있었다고 말하는 세상이었으니 소년의 상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겉으로는 인의예지를 중시하고 선비정신을 강조하는 문사들 같아 보였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며 폭력성을 터뜨릴 날을 기다리는 듯한 제국의 사회 풍조에 소년은 배우면 배울수록 소름이 돋았다.

“아무튼 홍엽비 자체는 우유부단하고 대가 약해 황후 감은 아니다. 물론 원체 당량 대장군이 홍엽비를 아끼기도 하니 당장은 그 권세가 대단해 황후 후보 일위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성정은 궁의 정치 암투를 헤쳐나가긴 힘들지. 차라리 봉비(鳳妃) 정도였으면 그럭저럭 행복했을 텐데…….”

태감의 말에 소년은 옅은 미소로 그 말을 비웃었다. 비릿한 웃음이었다.

이 황궁이라는 장소에 행복이라는 건 없다. 그저 서로가 조금이라도 덜 불행해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장소일 뿐.

그리고 소년은 덜 불행해지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자신보다 더 불행한 대상을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행복은 정해진 절댓값이 없으므로 모든 인간은 사실 불행한 것 아닐까? 캬, 중학교 이학년 때였으면 안 부끄러웠을 텐데.”

소년의 쓸데없는 딴생각을 모르는 태감은 피가 되고 살이 돼 줄 귀중한 정보를 아낌없이 소년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성적인 성격과는 다르게 홍엽비의 가문은 만만하지가 않아. 아마 자신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현 황후 후보 일 순위는 홍엽비다.”

“만약 홍엽비께서 황후가 되지 않으셔도 찜찜하겠군요.”

홍엽비가 아닌 황후가 오르게 되어 다른 오상비(五祥妃)들의 숙청이 시작된다면 홍엽비 역시 그 칼날을 피하기 어려우리라.

하지만 태감의 말대로 팔군도독 대장군 당량이 그녀를 그토록 아낀다면 멀쩡한 딸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는 데 뜬눈으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각 지방의 국경을 수비하는 칠십만 정예군의 수장인 그가 분노에 미쳐 날뛴다면 칠십만이라는 든든한 방패가 제국의 심장을 겨눈 창끝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평소대로라면 군대를 움직인다 해도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상비군은 남겨두는 것이 정상이지만…….

‘아니면 오히려 그걸 노리고 미쳐 날뛸 수도 있지. 짐승도 제 새끼 잃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사람이라고 다를까.

사실 아무리 대장군의 위엄이 대단하다 한들 황제의 위엄에 비할까. 대장군이 반역을 일으킨다 한들 그 칠십만 지방군이 전부 들고일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은 한차례 큰 내전을 치렀다. 한 번 더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제국의 오랜 숙적들도 가만있지 않겠지.”

오랜 전통을 가진 군사국가답게 제국은 안뿐만이 아니라 밖으로도 적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경은 늘 물샐 틈 없는 경비가 필요했고 팔군의 수장인 도독에게는 문신들이 감히 어쩌지 못할 막대한 권력이 주어졌다.

그 말을 듣자 소년은 오히려 아직까지 홍엽비가 황후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태감 역시 차라리 그냥 홍엽비가 제 권력을 휘둘러 스스로 황후자리에 올랐으면 이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거라고 짧은 욕설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네 역할이 중요한 거다.”

“예?”

“네 목표는 난화비를 황후로 세우는 동시에 안양비를 제외한 다른 비들을 화합하게 만들어 숙청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후궁을 화합시켜 폐하의 든든한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 하였던가. 군자의 덕목이라 흔히 말하는 말이지만 이 후궁만큼 그 말을 이루기 어려운 곳이 또 있을까?

소년은 진지하게 배 째라고 나자빠져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권이나 근로기준법 따위가 없는 세계라도 최소한의 도리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상도덕의 문제 아니냐. 애초에 나 월급도 안 나오잖아?!

궁내 나인들의 노조설립과 건전한 노동환경 조성을 위한 불타는 투쟁심에 눈을 뜬 소년이 고개를 쳐드는 순간 서릿발 같은 태감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째라고 하면 진짜 쨀 거다.”

“째시든가요.”

소년은 해볼 거면 해보라는 듯이 윗옷을 걷어 갈비뼈 앙상한 배를 보여줬다.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지 아니면 격무에 시달려서인지는 몰라도 소년의 배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창백하고 핏기가 없었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태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한 번 더 소년에게 물었다.

“정녕 방법이 없겠느냐?”

장난스럽게 물어올 때는 장난이라 생각하고 욕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물어오면 소년도 방법이 없었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궁색한 답안을 짜냈다.

“그럼 이러는 건 어떻습니까? 우선은 난화비 님과 홍엽비 님 사이에 자주 다과회를 가지게 만드는 겁니다.”

“그다음엔?”

“홍엽비 님의 찻잔에 중독성이 강한 앵속 같은 것을 타는 겁니다. 아주 극 미량씩 점차 양을 늘려가면 제아무리 대가 센 자라 할지라도 중독되지 않고는 버티질 못할 겁니다!”

“네가 미쳤구나. 다음.”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짜낸 답이었는데 태감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호되게 소년을 질책했다.

‘확실히 아무리 중세쯤 되는 세계라도 대놓고 마약을 쓰는 건 너무 나갔지…….”

하지만 같은 남편을 둔 여자가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거기에 권력이 달려 있다면? 자신뿐만이 아닌 가문의 미래와 자식의 미래까지 달려 있다면? 그런데도 서로 웃으며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권력이란 자식과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인생에 가장 아름답고 꿈 많을 나이에 원치 않는 사람과 혼인을 해 동침을 하고 평생을 독과 암살의 위협을 조심하며 말 한마디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궁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그녀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후궁에서 살고 있을까?

소년은 진심으로 자신이 후궁의 비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생각했다. 노예 같은 삶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비였다면 정말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을 보며 태감 역시 장고에 빠졌다.

“일단, 이렇게 하자. 내가 어떻게든 식사자리를 만들 테니 넌 요리를 해라. 일단 자주 보기라도 하면 안면이라도 트겠지.”

일단은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둘이 의외로 취향이 잘 맞아 금방 친해질지도 모른다고 억지로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소년은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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