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7화
억센 손이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다. 한 손으로도 잡힐 만큼 가느다란 목이다. 마치 사과를 따듯이, 닭 모가지를 비틀듯이 힘을 주면 된다.
하지만 위정은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물었다.
“남길 말 없느냐?”
“말을 남겨도 들어줄 사람 없습니다.”
말을 남기는 것은 그것을 들어줄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서가 아닌가. 소년에겐 두 가지 모두 없었다. 빈 몸으로 와 빈 몸으로 가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라지만 소년은 단 한 가지도 가진 것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청빈함이 도를 지나쳤다.
소년의 눈에서 빠르게 인생의 사계절이 스쳐 지나갔다. 즐거웠던 적은 별로 없었고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짧은 삶.
남들에겐 어이없을 만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며 살아온 비참한 인생의 종지부가 다가왔다는 사실에 소년은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그다음에는 분노가 치밀었으나 지난 삶을 돌이켜 보니 오히려 편안히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비루한 삶.
그저 짧은 악몽이었으려니 해야지. 기분 나쁜 꿈을 꾼 것으로 생각해야지.
눈을 뜨면 모두 꿈이었기를.
소년은 마음을 다잡았다.
각오를 마친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위정은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무언가 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소년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줄 말을.
고르고. 궁리하면서도 혀에서 맴도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위정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가 주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볶음밥 가지러 간 사람 어디 갔나?”
목덜미를 잡힌 소년을 흘깃 본 태감은 이내 능청스러운 태도로 다가와 볶음밥을 챙겨 들었다. 아직 식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바삭바삭한 파와 마늘 칩이 뿌려진 볶음밥은 포슬포슬한 밥알과 가늘고 부드러운 계란에 짭짤한 납육의 기름이 배어들어 있었다.
수저로 그것을 뜨며 마치 보석을 감별하는 감정사처럼 낱낱이 살펴보던 태감은 그것을 먹기 전 지나가는 어투로 위정에게 말했다.
“하지 마라.”
“태감님.”
“그리고 앞으로도 그 녀석을 죽이는 것을 금하겠다.”
그 말에 위정은 그 이상 태감의 명령을 거스르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리할 수 없다는, 부드럽지만 완강한 부정의 표시에 태감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지 말라고 안 한다면 이 세상이 조금은 더 편하게 돌아갔겠지. 사람이란 그렇게 편리한 동물이 아니다.
이해할 때까지 설명하고 보여줘야 이해하는 동물이다.
태감은 눈앞의 볶음밥을 한구석으로 미뤘다. 설명을 다 끝낸 다음에 먹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머리칼을 정돈하고, 허리를 곧게 펴고 발끝은 붙인다. 자세를 바로 한 것만으로도 태감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설득이라는 것은 말보다도 눈빛이, 목소리보다도 기세가 좋아야 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태감이 고개를 들어 위정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고픈 배를 부여잡고 야식거리를 찾으러 온 한량이 아닌 후궁이라는 복마전의 심부에 웅크린 수라의 얼굴이었다.
아무리 젋고 나약해 보여도 눈앞의 청년은 동창의 제독. 젊은 황제의 측근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위정. 세상이 변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선황 폐하의 치세도 이미 십 년 전에 끝났다. 대륙을 질타하며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전장을 긴장시켰던 금린대도 이젠 대다수가 나이를 먹어 은퇴했고 선황께서 내거셨던 금룡기도 이젠 보물고의 벽면 한곳을 장식할 뿐이다.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전 동창 제독 문일도 선황께서 은퇴하시는 그 날 폐하와 함께 은퇴했다.”
마치 뱀처럼 심중의 아픈 곳을 찌른 태감의 눈동자에 위정은 본능적으로 눈을 돌리며 그 시선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태감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큰 위정의 팔을 붙잡고 밀어붙이며 시선을 마주쳤다.
“언제까지 선황의 그늘에서 살 생각이지. 말발굽으로 시체를 짓밟으며 핏물을 삼키던 시대가 아니다. 시체가 쓰러진 자리는 이제 밭이 되었고 창칼은 농기구가 되었어. 이제는 같은 제국인이 서로의 피를 탐하던 시대가 아니다. 위정.”
넌 그 시대를 졸업해야 한다.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그 시대를 추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힘들고, 잔혹하고, 괴로웠지만 이젠 지난 일이라고. 살아남아서 다행이었다고.
태감의 말에 위정은 반박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목 천장을 뚫고 나올 것처럼 보였으나 수하로서의 자제력이 그의 본능에 제동을 걸었다. 할 수만 있으면 수십 가지 반박할 거리를 쏟아내었으리라.
“위정. 넌 더 이상 그 시절의 어린 병사가 아니다. 어설프게 창을 쥐고 선임의 구령에 멋모르고 달려가던 그 시절의 소년병이 아니야. 네 어깨에 많은 사람의 운명과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윗사람이 미몽에 빠져 있으면 아랫사람은 피를 흘리는 법이다.”
잔인하지만 태감의 말은 지극히 아픈 사실을 담고 있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말이었음에도 위정은 그것을 묵묵히 감내했다.
올바른 말이었다. 올바른 것은 늘 받아들이기 힘들고 아프다.
잠깐 사이에 위정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 같았던 얼굴은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바위가 되었다. 태감은 그 사실에 만족했다.
“하지만 역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전 아직 저 소년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만약 숨겨놓은 역적의 자손일 가능성이 있다면, 차마 죽지 않은 역적 중의 한 명이라면. 전 동창제독께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남겨두신 독침일 가능성은 아직 배제할 수 없습니다.”
‘X발 동창제독은 누구고 선황제가 뭐 어쩌고 어쨌다는 거야. 그런 건 좀 나 없는 데서 하면 안 되냐……?’
소년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둘 사이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일단 당장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방금 전 삶의 미련을 정리한 소년은 차라리 빨리 죽여주는 것이 더 이득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소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거취가 결정되는 것을 보던 소년은 쓸데없는 것을 계속 듣고 있느니 설거지라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둘을 지나쳐서 개수대로 향했다.
“위험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 양단이 고작 그런 독침 하나 간수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당분간 소년은 죽을 운명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사실에 유감스러움을 느끼며 위정의 퇴장과 동시에 소년도 피곤함을 호소하며 자러 가려 했다.
그것을 태감이 막아섰다. 태감의 손에는 다시 볶음밥이 들려 있었다.
넌지시 떠본다는 얼굴로 태감이 소년에게 물었다.
“어떠냐? 목숨을 부지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군요.”
“그러냐?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게 좋을 텐데?”
“사는 것도 사는 것 나름이지요.”
소년은 썩은 내장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구겨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비아냥거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그 표정에 태감은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로 웃었다.
밥 먹으랴 말하랴 웃으랴. 바쁜 사람이다. 이번엔 소년이 먼저 물었다.
“위정 나으리와 화해하라 하지 않으시는군요?”
“내가 너희들 스승이라도 되느냐? 싸운 애 둘이 불러놓고 서로 잘못 했으니까 화해하라고 하게. 사람 마음이란 것이 화해하란다고 화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면 어느 윗사람이 고생하겠느냐. 사람 마음이란 것은 오묘해서 칼로 밧줄 자르듯이 자를 수도 없고 실로 꿰매듯이 꿰맬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으냐. 그런 복잡 미묘한 것을 아물게 하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지.”
볶음밥을 훌훌 마시듯이 씹어 삼킨 태감의 수저를 쥐지 않은 왼손 검지와 엄지가 동그랗게 말렸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전생이 아닌 현생에서도 만국 공통으로 통하는 그 손동작. 그 사인.
“상처 입은 마음에는 돈이 최고지.”
거 참 명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유명하다는 명사들의 구태의연한 한마디를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직설적인 한마디에 소년은 단숨에 태감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뭐, 굳이 돈일 필요는 없지. 아직 어리니 술은 좀 그럴 테지? 그럼 여자는 어떠냐? 왕도의 기루에서 한번 질펀하게 놀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차 한잔 마시는 것만으로도 돈을 물 쓰듯이 써야 하는 곳에서 한번 놀아보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게야.”
아니, 술 마시는 건 안 되어도 여자는 괜찮다니. 이 세상은 어딘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이 세상이 인권이 희박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왕 그런 거면 여자보단 술 쪽을 허락해 줬으면 싶다.
‘물론 조리용으로 들어온 술을 자기 전에 홀짝거리긴 하지만.’
이 거지 같은 생활 술 힘이라도 안 빌리면 못해 먹는다.
멀뚱히 서 있는 소년을 보며 태감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니면 역시 돈이 제일 좋으려나? 품 안에 당장 쓸 수 있는 금붙이가 있으면 사람이 여유로워지는 법이지. 이래 보여도 사례감의 태감이고 동창의 제독이다. 현금동원력은 상당하니 꼭 돈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봐.”
꼭 원하는 것.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소년이 대답했다.
* * *
후궁의 후미진 공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딘가 달큰한 과실향 같은 것이 느껴지는 연기 속으로 희미한 고기 향기가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그 근처를 지나가던 시녀들 사이에서 냄새의 출처를 두고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그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은 금녀의 구역.
연좌궁이었다. 담장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시녀들을 무시한 채 장소와 소년은 바위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빨리 됐으면 좋겠어요오오오.”
“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말꼬리를 늘이며 넓적한 돌 위에 늘어진 장소를 보며 소년은 길쭉한 직사각형의 나무상자 같은 구조물 아래에 피운 불에 젖은 장작을 한두 개 더 밀어 넣었다.
말하자면 간이 훈제기였다. 결이 촘촘한 나무판자로 벽을 만들고 거기에 걸대를 걸어 갈고리에 꿴 고기를 걸고 아래에 불을 피우는 단순한 구조였다.
마음껏 연기를 피울 수 있는 장소와 간이 훈제기를 만들기 위한 목재. 그것이 소년이 태감에게 원한 전부였다.
지난날 태감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들었을 때 돈보다 먼저 생각난 것이 있었다. 화퇴에 향장이나 납육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는 현대인의 갈망.
바로 베이컨을 향한 갈망이 소년의 쪼그라든 위장에 불을 지른 것이다.
어려져 손목은 가늘어지고 팔 힘은 약해졌어도 소년은 본디 요리사. 비록 전공은 아니더라도 베이컨이나 소시지 같은 육가공품은 취미 삼아 만들어본 적이 있었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허락해준 태감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고 날이 밝자 손이 빈다는 장소를 불러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판자를 구해와 몇 날을 씨름한 끝에 겨우 그 완성이 눈앞에 있었다.
고기는 평범한 미국식 베이컨을 만들 때 사용하는 삼겹살이 아닌 영국식 베이컨을 만들 때 사용하는 등살.
등심과 옆구리 살로 이어지는 긴 부분을 통째로 소금에 절여서 만드는데 삼겹살 베이컨과는 달리 기름이 적고 살이 많아 쥬시한 육즙을 느끼기에 그만이다.
염장할 때 사용한 향신료로는 후추와 갈변을 반지하는 초석을 한 줌, 그리고 백리향과 감귤류의 껍질로 향긋한 향기를 더했고 겨잣가루로 톡 쏘는 향기를 더했다.
이것을 절여줄 때 무거운 돌로 눌러주며 납작한 모양을 잡았다.
잘 절여진 것을 물에 담가 소금기를 빼 주었고 훈제할 때 사용한 것은 향기 좋기로 유명한 사과나무 장작을 물에 불린 것. 물에 불려줘야 연기가 잘 나온다.
그렇게 아침부터 불을 때기 시작해서 벌써 정오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윽한 고기 향기가 진동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장소의 어깨를 잡아 누르면서도 소년 역시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마침내 시간이 다 되자 소년은 즉시 훈연기 아래의 불을 빼고 막았던 연기구멍을 열어 연기가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 상태로 내부의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 자연스럽게 베이컨을 레스팅(Resting)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서서히 온도가 떨어지며 자연스럽게 육즙과 향이 고기에 스며들기까지 삼십 여분.
걸어 잠근 훈연기 문을 열자 갈고리에 꿰인 베이컨이 그 육중한 모습을 드러냈다.
두툼하고.
크고.
묵직하며.
아름답다.
고기는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했다.
“어…… 엄청나…….”
입이 떡 벌어지는 장소를 보며 소년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쾌감을 꼈다.
소년은 이 장소라는 귀엽고 살짝 어리숙한 소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태감처럼 배배 꼬인 성격도 아니고 위정처럼 자신을 죽이려 하지도 않고 맛있는 걸 주면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못 먹고 자란 것도 아닐 텐데 사슴처럼 가늘디가는 팔다리를 보면 빨리 뭘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태감의 다른 부하 중에선 가장 한가한 편이라 자주 말동무를 해주는 것도 고마웠다.
오늘 이 특별한 자리에 초청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게 오늘 태감님의 점심상에 올라갈 건가요?”
“에이, 무슨 말씀을. 어딜 서방의 검증되지도 않은 음식을 태감님 상에 올리겠습니까.”
“그럼?”
“태감님 상에 올리기 전에 기미를 볼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장소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하는 거지만 현세에 저런 소년이 있었다면 누님 팬들의 지갑을 탈탈 털 수 있었을 텐데……아주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떠나질 않는다.
잡념을 털어낸 소년이 도마에 베이컨을 올리고 칼을 들어 올렸다. 일단 처음엔 너무 두껍지 않게, 베이컨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도록 얄팍하게 썰었다.
소년이 베이컨을 써는 동안 장소는 훈연기에서 끄집어낸 잉걸불을 긁어모아 장작을 조금 더 넣어 작은 모닥불을 만들고 있었다.
막 훈제한 녀석이니 바로 먹어도 맛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베이컨의 참맛은 지방 부분이 바삭해지도록 굽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지고 나온 철과를 모닥불 위에 올리고 달아오르길 기다리는 두 소년은 마치 소소한 장난을 준비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보였다.
“어이, 뭣들 하고 있어?”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간 소년의 청정에 돌을 던지는 한마디.
한창 집무실에서 업무를 하고 있어야 할 태감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들에게 다가왔다.
담장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시녀들 때문에 일부러 가면을 쓰고 나온 모양이었다.
“이게 네가 말한 그 베이컨이라는 서방의 납육인가? 제법 맛있어 보이는데.”
“글쎄요. 그건 아직 모르지요. 잘 되었는지, 모양만 그럴싸하고 속은 엉망일지.”
“그래? 그래서 오늘 내 점심은 이거냐?”
어딘가 기대감마저 엿보이는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매섭게 고개를 저었다. 보고 있던 장소가 깜짝 놀랄 만큼 단호한 태도였다.
“어찌 제대로 되었는지도 모르는 서방의 천박한 음식을 태감님의 상에 올리겠습니까? 이것은 그저 저희 같은 상것들이 맛이나 볼 생각으로 만든 것입니다. 태감님께는 오늘 크고 물 좋은 쏘가리가 들어와 튀김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실제로 외궁의 의원과 약사들도 서방의 의학을 천하다 여기며 의서를 내다 버리는 것을 보면 서방의 문화를 천박하다 여기는 것은 제국에서 오랜 전통이 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 아집이 언젠가 제 목을 물어뜯을 독이 될 것이 뻔했지만, 소년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해 제 잇속을 차릴 생각을 했다.
이 베이컨만큼은 넘기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에 불타는 소년을 보며 태감이 다시 물었다.
“그래도 이건 너희들이 다 먹기엔 좀 많은 것 같은데.”
“아이고 태감님, 저도 그렇고 저기 장소 님도 아직 한창 성장기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저희만 먹을 수 있습니까. 서방의 천박한 납육이라도 귀한 고기임은 틀림없으니 나눠 먹어야지요.”
우선은 소년과 장소가 실컷 먹고, 이삼에게도 주고, 그러고도 남으면 아직 이름도 잘 모르는 안경 쓴 환관에게도 돌려서 환심을 살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진 태감은 이내 백기를 들며 전면 항복했다. 소년이 처음으로 얻은 승리였다.
“머리 좀 굵어졌다고 벌써 상관을 제치고 자기 잇속만 차리려고 하다니,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법도는 어디로 간 건지……에휴. 내가 졌다. 나 혼자 다 먹겠다는 말은 안 할 테니 좀 나눠다오.”
“예. 그럼 오늘 점심은 이 베이컨과 달걀 요리를 올리겠습니다.”
“오냐.”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업무를 보려 휘적휘적 걸어가는 태감의 등을 보며 아직 얼떨떨해하는 장소에게 소년이 말했다.
“잘됐네요. 이제 눈치 보지 말고 팍팍 먹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