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5화
한가한 시간이었다. 태감이 대식가라곤 해도 이 넓은 주방에서 요리를 먹을 사람은 한 명이니 그날그날 재료준비가 끝나고 나면 남는 시간은 상당히 여유로워 가벼운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후궁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서적을 읽어 본다든가, 장이나 요리에 사용할 조미료나 술을 만든다든가.
아니면 주린 배를 잡고 찾아온 이들에게 간식거리를 내준다든가.
오늘은 지난번 일로 제법 친해진 장소와 아직 별다른 교분을 나누지 못한 이삼(李三)이라는 이름의 환관이 소년에게 간식을 얻어먹기 위해 찾아왔다.
맨 처음 보았던 네 환관 중 가장 왼쪽에 서 있던 쾌활한 미소년이다.
외모가 외모다 보니 옆에 다니는 장소와 어울려 다니며 후궁 내 나인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모양이었다.
전생에 저런 놈 둘만 더 구해서 4인조 아이돌을 짰으면 누님 팬들의 주머니를 긁어모았을 텐데…….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소년은 찜통을 열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댓잎떡(綜子, 쭝쯔)을 꺼냈다.
소가 들어 있지 않아 먹을 때 설탕을 찍어 먹는 나름대로 소박한 간식이었다. 보통은 속에 대추를 넣거나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대추를 미리 물에 불려놓는 것을 깜빡했다.
‘뭐, 상관없겠지. 대추보다는 설탕이 더 달콤할 테니까.’
시장에서 흔히 보이는 간식답게 만드는 법도 간단한데 물에 불린 찹쌀에 땅콩기름을 약간 섞어 물에 담가 부드럽게 해둔 대나무 잎 다섯 장을 준비해 싸면 되는데 숙련되지 않으면 이것이 약간 귀찮다.
우선 두 장을 X자로 깔고 중앙을 손바닥 위에서 오므린 다음 찹쌀을 네 큰술 듬뿍 퍼 올린다.
세 번째, 네 번째 잎을 안쪽 측면에 대고 다섯 번째는 위를 덮는다. 양옆에서 눌러주며 이파리 끝을 양쪽으로 접어 덮은 다음 앞쪽에서 반대쪽으로 접어가며 사각뿔 모양으로 모양을 잡아 준다.
이것을 풀어지지 않게 골풀로 묶은 다음, 물에 넣고 삶는다.
이렇게 준비해 둔 것을 먹기 전에 찜통에 쪄서 데우면 된다.
“맛있어요!”
“하나 더 먹어도 돼요?”
“……차도 좀 먹으면서 천천히 먹어요…….”
소도 안 든 떡을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소년의 양심이 조금씩 찔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잘 먹을 줄 알았으면 고기소를 만들어서 가흥육종(嘉兴肉粽)이라도 만들어 줄걸…….
“……배가 많이 고픈가 보네요. 뭐라도 좀 더 내올게요.”
꼭 결식아동들 같은 모습에 오랜만에 폐부 깊숙한 곳에서 동정심이란 감정을 끄집어낸 소년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떡이나 밥을 이제부터 하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고, 당장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생각한 물건이 당수(糖水, 탕쉐이)이다.
솔직히 중국에서 오래 유학도 하고 일도 해온 소년이지만 한국인에게 탕쉐이가 뭔지 설명해 보라고 하면 난감하기 그지없다.
죽이라고 하기에는 맑고, 차라고 하기엔 건더기가 많은, 말하자면 달콤하게 끓인 탕이다.
어떤 것은 차라고 쓰고 어떤 것은 탕이라고 쓰는 이 복잡미묘한 따뜻하고 달콤한 탕은 약재를 사용해 진하고 몸에 좋으며 때론 계란을 띄워 든든하게 먹어도 좋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면 첫 번째론 두부피와 은행을 넣은 부죽백과당수(腐竹白果糖水)를 꼽겠지만 은행도 까둔 것이 없고 물에 미리 불려둔 부죽(마른 두부피)도 없었다.
몸이 으슬으슬할 때 최고인 뽕나무 겨우살이와 연밥으로 끓인 탕쉐이에 달걀을 띄운 상기생연자단차(桑寄生蓮子蛋茶)는…… 겨우살이도 없고 솔직히 만들기 귀찮았다.
달콤하고 속이 든든하기로는 개인적으로 번서당수(番薯糖水)라는 이름의 고구마 탕쉐이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만드는 것 또한 간단하기 그지없는데 좋은 흑설탕과 오래 묵은 생강에 고구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고, 매콤 칼칼한 생강 맛에 그윽한 흑설탕이 녹아든 단물이 촉촉하게 배어든 고구마 맛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여름에 기운이 빠질 때 원기회복으로도 좋고 추운 겨울 몸에 열을 내기 위해 먹어도 좋은 최고의 탕쉐이다.
마른 생강을 물에 넣고 팔팔 끓여 알싸한 매운맛을 우려내고 거기에 흑설탕을 듬뿍 넣어 달콤한 맛을 보태준다.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썬 고구마를 넣어 고구마가 말랑말랑해지고 단물이 촉촉하게 배어들면 완성.
단내에 정신이 팔렸는지 둘 다 혼이 나간 표정으로 아궁이 가로 모여들었다. 작은 사기그릇에 담아주자 후후 불어가며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거…… 후궁은 식사가 영…… 그런가 봐요?”
소년의 말에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해 연신 찬물로 혀를 식히던 장소가 고개를 들어 질문에 대답해 줬다.
“음…… 그건 아니에요. 사실 저희는 태감님 호위가 주 업무라 몸 쓰는 일이 많아서 식사가 잘 나오거든요. 고기 같은 거. 근데 호위업무라는 게 사시사철 호위 대상한테 눈을 떼지 않는 게 기본이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식사 외에 다른 간식 같은 걸 챙겨 먹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저희는 한창 성장기니까요. 히힛.”
두 소년보다 더 나이가 어린대도 요즘 영 입맛이 없는 소년으로서는 딱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맛있게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은 조금 측은지심이 들었다.
애들이란 자고로 배부르게 먹고 잘 자야 하는 법인데…….
인권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청소년 노동법 위반 현장에서 소년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후, 피곤하다. 뭐 달달한 거 없어?”
노동법 따윈 개나 줘버린 악덕 업주, 양 태감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어디 나갔다 오는 길인지 아직 가면을 쓴 채로 들어온 태감은 고위공직자답지 않게 터프하게 물바가지를 들어 안에 찬 땀을 닦았다.
“오, 뭔가 맛있어 보이는 걸 먹고 있네. 당수인가?”
“예. 고구마와 생강으로 만든 건데, 한 그릇 뜰까요?”
태감은 별말이 없었는데 열심히 먹고 있던 두 소년이 일어서서 소년을 말렸다.
마치 이걸 먹으면 큰일 난다는 태도여서 소년이 물었다.
“아니, 왜들 그러세요?”
“그…… 경사에서는 대대로 고구마를 천하게 여겨 왔거든요…….”
“서민들이야 입에 들어가는 대로 먹지만 태감님 같은 분들께는 고구마가 영…….”
진족은 아마도 전생의 한족과 비슷한 위치인가 보다. 저번에 장소가 소수민족 어쩌고 했으니 아마 나라를 통일한 부족이 진족이고 그 아래로 복속시킨 소수민족들이 있는 형태인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황궁에 살면서도 이 나라가 어떤 형태인지 어떤 문화인지는 하나도 모르는군.’
후궁에서 허드렛일만 하면서 살아서인지 소년은 이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거의 무지했다. 그리고 굳이 그런 것을 배워야 할 필요성 또한 느끼지 못했다.
“괜찮아, 한 그릇 다오.”
태감은 덤덤한 태도로 한 그릇을 주문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에 소년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사실 고구마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거든. 강서 서(鼠)족은 오히려 고구마를 굉장히 귀하게 생각해서 큰 연회에는 반드시 올라온다고 하더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언제 한번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
하여간 먹을 것 앞에서는 편견이 없는 양반이었다. 소년은 기대감에 반짝이는 태감의 눈을 돌아보며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국자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그릇 떠올리지요.”
작은 사기그릇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설탕과 생강즙이 녹아든 갈색 단물에 고구마뿐인 단출한 구성.
어쩌면 이 서민적인 맛이 또 나름 먹힐지도 모르겠다.
“생강 향이 좋군. 겨울에 감기 예방 삼아 먹어도 좋겠는걸.”
“차게 먹어도 나름 괜찮지만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 납니다.”
“그래그래. 재촉하지 마.”
앵두처럼 빨간 입술 틈새로 호로록 단물을 마시는 모습이 묘하게 선정적 이어서 기분 나빴다.
소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건한 태도로 단물을 마시던 태감은 부드럽게 잘리는 고구마를 숟가락으로 떠 입으로 가져갔다.
“촉촉하고…… 달콤하군.”
“입에 맞으십니까?”
소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태감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고구마를 베어 물었다.
호박색 선명한 고구마는 생강과 흑설탕물이 배어들어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달콤한 맛이 입안을 쓰다듬고 가면 목구멍 안쪽에서 알싸한 생강 향이 코를 톡 치고 올라온다.
만들기는 쉽지만 맛을 내기는 어려운 요리라는 건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만이 맛의 비결인 요리다.
“괜찮은걸, 아니, 아주 좋아.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맛인데도, 어린 시절 동심을 떠오르게 하는 맛이야.”
말을 마친 태감은 한동안 말없이 당수를 들이켰다. 그 두 눈에서 일렁거리는 향수를 소년은 모른 척했다.
그저 소박한 단맛은 만국 공통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과 통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이름과 함께 과거도 묻어버린 소년에겐 추억할 고향이 없었다. 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망향의 슬픔을 공감해줄 사람 또한 없었다.
그저 어딘가 슬픔에 가까운 태감의 눈을 보며 소년은 애써 동질감을 찾아보려 했다.
* * *
저녁을 준비하기 전, 태감의 집무실에서 소년은 태감과 마주 앉아 식단을 짜고 있었다.
태감의 식단이기도 했고, 앞으로 황후 후보자의 식단이 되기도 할 식단표였다.
“그러니까, 한 번에 아기씨가 들어서는 그런 음식은 없는 거지?”
“그런 게 있으면 누가 불임으로 고생하겠습니까?”
물론 현대에는 영양학적으로 항산화제 성분과 엽산, 비타민b12를 풍부하게 섭취하는 것이 임신에 도움이 된다는 정보는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움을 주는 정도지 마법처럼 단숨에 아이가 생기는 그런 비상식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몸에 좋은 그리고…….
“피부 미용에 좋은 콜라겐…… 그러니까 돼지껍질 같은 것에 많이 포함된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하면 도움이 되지요.”
결국 아기씨가 드는 것은 사람이 노력해야 할 일이었다. 소년은 황제 폐하께서 열심히 허리를 놀릴 수 있도록 비들의 외모를 서포트 하기로 했다.
“호오…… 그리고?”
“혈행을 촉진하는 식재료로 혈액순환을 좋게 하는 것 역시 피부미용에 도움이 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것도 미용과 건강 양쪽 모두에 도움이 되지요.”
소년은 남자이기도 했고 죽을 때까지 미혼자였기 때문에 자세한 정보는 몰랐지만, 출산을 할 때 하반신 근육을 단련하는 운동, 예를 들면 스쿼트 등의 운동을 충실하게 한 여성일 경우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출산을 수월하게 끝낸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출산시간이 짧을수록 산모와 아이 모두의 위험도 줄어들고 거기에 하반신을 튼튼하게 단련하면 다리맵시가 아름다워지는 효과도 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가.
한참을 하반신 근육 운동의 우수한 점을 설파한 끝에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던 태감도 어느 정도 납득을 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뭐가 되었든 서방에서 검증된 정보라고 설파하면 대강은 먹혀들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소년으로서는 설명의 귀찮음을 줄일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거기에 난화비는 고상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승마가 취미라 하지 않았는가. 승마만큼 하체단련에 좋은 운동도 없었으니 태감으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그래, 운동은 그렇다 치고…… 오늘 저녁은 뭐로 할 생각이냐?”
“우선은 두사저두(豆渣猪頭)를 올릴 생각입니다. 야들야들한 껍질을 드시면 미용에 좋지요.”
“돼지머리라……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대놓고 식탁에 돼지머리가 올라와 있으면 조금 놀라지 않을까?”
“아니, 뼈는 발라내서 그렇게 대놓고 머리 같아 보이지는 않을 텐데요. 일단 한번 드셔 보시죠.”
간장에 푹 졸인 고기인 만큼 진한 양념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밥으로 저녁상을 준비하기로 했다.
두사저두(豆渣猪頭).
간장 베이스의 맛이 진한 양념으로 야들야들하게 졸인 돼지머리는 박력 있으면서도 입에서 사르르 녹아 쫄깃한 껍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척 좋아할 법한 음식이었다.
우선은 돼지머리의 잔털을 족집게로 뽑는다. 큰 털을 제거하고 나면 달군 쇠막대로 태워 작은 칼로 재를 밀어낸 다음 찬물에 한 번 씻어낸다.
양념으로는 큼직하게 썬 대파 두 대, 다진 생강 한 개에 간장을 여덟 큰술, 백주 한 컵, 찹쌀로 빚는 단술을 여섯 큰술을 준비한다.
소금과 팔각, 산초, 후추를 넣은 주머니를 양념과 함께 청탕(淸湯)에 넣고 여기에 돼지머리를 넣어 두 시간 정도 졸여준다.
여기에 달군 돼지기름에 설탕을 넣어 누렇게 볶은 것을 국물에 넣어 맛을 더해준다.
향긋하고 기름진 향기가 주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좋은 음식이 될 거라는 증거, 기분 좋은 예감에 소년은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아마 소년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미소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돼지머리가 졸여지는 동안 따로 준비한 돼지껍질을 이십여 분 정도 쪄서 천으로 짜 수분을 제거해 준비해 둔다.
두 시간 정도가 지나면 돼지머리에서 뼈를 발라내고 다시 뚜껑을 덮어 두 시간 찐다.
돼지껍질은 따로 머릿고기를 졸이던 국물 두 컵을 끼얹어 걸쭉해지도록 국물을 끼얹으며 졸인다.
다 졸여진 머리를 꺼내 그 위에 따로 졸인 껍데기를 올리고 졸인 국물은 물에 푼 전분을 섞어 걸쭉하게 윤기가 나게 한 다음 요리에 끼얹는다.
요리를 담은 흰 사기그릇은 푸른색으로 돼지를 치는 아이들과 감나무가 그려진 아름다운 것이었는데 연좌궁의 그릇 중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귀한 것이라고 위정에게 잔소리를 들은 물건이다.
여기에 당근과 무로 꽃을 조각해 올리고 향초로 장식해 상에 올리자 태감의 입에서 경탄사가 튀어나왔다.
“이거 굉장한데, 잘 졸여진 것이 아주 군침이 나오는군.”
“귀 부분이 특히 맛이 좋습니다.”
소년이 솜씨 좋게 작은 칼과 집게로 머리와 껍데기를 먹기 좋게 해체하자 태감의 젓가락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껍질은 부드럽고 쫀득하고 안쪽의 살은 푸근한 맛이군. 탱글탱글한 감촉이 기분 좋은 맛이야. 맛이 진해서 밥과도 잘 어울리고, 이런 맛있는 걸 먹으면서 미용효과도 볼 수 있는데 여자들은 왜들 그렇게 한숨을 쉬는 걸까?”
‘다른 여자들은 댁처럼 생기지 못했으니까 그러지 이 양반아.’
굳이 즐거운 식사 시간에 핀잔을 줄 필요는 없었다. 진한 국물을 밥에 끼얹어 먹고 싶다는 태감을 위해 넓은 접시에 밥을 담아온 소년은 이내 태감의 손짓에 자리를 비켜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소년의 등을 가만히 보던 태감은 위정을 향해 손짓했다.
곤란한 미소와 함께 다가온 위정을 향해 태감은 작은 호리병을 흔들었다. 검은색 호리병엔 붉은색으로 작게 글귀가 쓰여 있었다.
“태감님. 아직 업무가 남아 있으실 텐데요.”
“뭐 어때. 저녁 반주 한잔 정도는.”
위정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 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찬장에서 잔을 두 개 꺼내 들었다.
바위처럼 미동 없는 눈가와는 달리 수염에 가려진 그 입은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위정이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호리병 입구의 밀랍을 뜯어내고 나무 마개를 뽑자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
“상산(常山)의 봉밀주(蜂蜜酒)군요. 이 귀한 술을…….”
“술만큼이나 안주도 좋아.”
험준한 상산에서 채취한 목청(木淸)과 석청(石淸)으로 만들어지는 봉밀주는 천하에 이름 높은 명주였다.
그중에서도 호리병이 검고 그 위로 붉은색으로 천하제일밀주(天下第一蜜酒)라 적혀 있으니 천하의 꿀 중에서도 가장 귀한 석청만으로 만들어 상산봉밀주 중에서도 가장 가격이 높고 돈을 줘도 구하기 어렵다는 특등품이었다.
그 그윽하고 달콤한 향기에 바위 같았던 위정의 입가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과연 천하제일밀주가 아닐 수 없군요. 향이 달고 진하면서도 코끝에 스며들어 여운이 짙으니 향만으로도 과연 천하제일입니다.”
“감상 끝났으면 빨리 따라서 마시자고. 원체 향이 날아가기 쉬워 보관할 때 밀랍으로 봉할 정도로 섬세한 술이니.”
위정은 마치 신을 영접하는 듯한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술을 따랐다.
이 작은 술병 하나가 같은 무게의 금을 줘도 구하기 쉽지 않으니 흘리는 한 방울 한 방울이 돈을 땅에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마치 영원과도 같았던 찰나의 순간 메마른 입술 속으로 빨려 들어간 술이 혀의 미뢰 세포를 쓰다듬으며 몸 안쪽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혈관을 흐르는 체액 한 방울까지도 꿀로 바뀌어 버린 듯한 달콤함, 액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녹아내린 황금과도 같은 무게감, 그 존재감!
“아!”
그 순간 모든 미뢰와 모든 정신력을, 뇌에 잠들어 있던 모든 감각을 동원하며 술을 느낀 위정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거장의 솜씨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무한한 감동과 영광이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날려 보냈다. 기가 막힐 정도의 고양감이 느껴졌다.
“아. 달다.”
“……고작 그 한마디이십니까?”
벅차오르는 감격을 표현할 수 없어 말이 없었던 위정과는 달리 태감은 그 짧은 한마디로 평을 끝냈다.
아무리 극상의 술이라도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저 달콤한 음료일 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무미건조한 한마디로 끝내기엔 아쉬울 정도로 좋은 술이었다.
순간적으로 위정은 눈앞의 주인을 때려눕히고 술을 빼앗아 음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술맛도 모르는 인간에게 이 술은 너무 아까웠다.
“안주도 먹어. 잘 조려졌다 정말.”
“예, 그러지요.”
사실은 조금 더 그 맛에 취해 있으면 싶었지만, 상급자가 권하는데 멀뚱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윤기 있게 조려진 돼지고기가 썩 먹음직스럽기도 했다.
매끄럽고 보들보들한 껍질과 그 아래로 쫄깃한 고기가 적절한 비율로 이루어진 한 첨을 집어 입에 넣을 때까지만 해도 위정은 큰 기대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좋은 술은 안주를 눌러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술 앞에선 아무리 좋고 화려한 음식도 빛이 바래고 만다.
이런 좋은 술의 안주라면 그저 맑고 차가운 물 한잔에 소금 정도면 딱 좋으리라.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깎아내리기에는.
“맛있군…….”
“그래, 그렇지?”
무심코 속내가 흘러나올 정도로, 머릿고기가 너무 맛이 있었다.
달콤 짭짜름한 양념이 흠뻑 배어든 껍데기는 야들야들하고 입에 짝 달라붙었고 기름지고 쫄깃한 고기가 야들야들한 껍질을 탄탄하게 받쳐줬다.
“아니, 이건 정말 맛있군요. 대단한 걸작입니다.”
이 음식은 술에 지지 않을 만큼 육중한 무게감이 있었다. 기름지고 부들부들한 것이 술과 어울려 서로를 해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면서도 서로가 치열하게 혀의 주도권을 다투니 용호상박이며 그 가운데 피어나는 조화는 중용의 맛이었다.
위정은 상사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정신없이 요리를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보며 나긋한 표정으로 술 한 잔을 넘긴 태감이 말했다.
“어때? 그 녀석, 쓸 만하지?”
술과 안주의 여운에 취한 위정은 더운 숨을 내쉬며 태감을 보았다. 살짝 취한 듯 여린 홍조를 띠는 볼, 입꼬리를 살짝 올린 태감에게선 불안과 근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리듯이 술 한 모금을 넘긴 위정이 술기운과 함께 말했다.
“죽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