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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4화 (14/314)

환관의 요리사 14화

해당화가 만발한 정원에는 옅은 봄바람이 꽃잎을 싣고 살랑거렸다. 느긋하고 나른한 시간, 위로는 목련과 모란이 서로 화사함을 뽐내고 있었다.

시위에 걸린 화살 단 한 발. 오십 보 거리의 과녁을 두고 난화비는 천천히, 신중하게 시위를 당겼다.

그 고고한 자태에 시녀들은 숨을 쉬는 것을 멈추었고 바람마저 잠시 그녀의 궁도를 감상하기 위해 쉬어 가는 듯했다.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손을 떠난 화살이 바람의 장막을 가르며 오십 보 밖의 과녁에 파고들었다.

숨소리마저 방해될까 입을 막고 있던 시녀들의 환호성과 함께 난화비는 멈추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어째서 난 활을 놓지 않았을까.

황후 후보자로서, 무예를 갈고 닦는다는 것은 사실 남 보기에 그리 좋은 취미는 아니었다.

그녀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어째서 난 활에서 손을 놓을 수 없는 걸까.

시위를 풀고 활대를 손질하며 난화비는 자신에게 끝없이 되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취미여서? 가끔 몸이 찌뿌둥할 때마다 움직이고 싶어서?

결국에는 불안감이었다. 이 냉혹한 후궁에서, 황후의 후보자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활을 쏘는 것은 불안감을 표출하는 행위였다.

좋아하는 담요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유아기적 버릇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활을 쏜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자조적인 웃음을 시녀들에게 숨기며 난화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복건성에서 올려다본 것과 맨 처음 활을 배우고 말을 타기 시작했을 때와 다를 바 없다만 오늘은 유난히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야속하게만 보였다.

활을 쏘고 기마술을 수련한다 한들 후궁에서의 암투에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난화비는 때때로 활을 들고 말을 타며 스스로를 단련했다.

그런 난화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녀들은 그녀의 고상함과 늠름함이 겸비된 자태에 도취되어 시선을 몽롱하게 일그러뜨렸다.

시녀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한참을 웃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동쪽으로 향했다.

동쪽. 황제 폐하의 침소가 있는 곳. 그리고 태감의 집무실인 연좌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무심코 입맛을 다신 난화비가 고개를 돌려 시녀들에게 말했다.

“저번에 먹었던 케이크, 맛있었지?”

“네? 아 그때 그…… 정말 맛있었어요.”

“달콤하고, 촉촉하고, 또 몽실몽실해서…….”

“그 크림이라는 건 정말 대단했죠? 부드럽고 가벼우면서 혀 안에서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게…….”

그때의 맛이 되살아났는지 발갛게 볼을 물들이여 황홀경에 빠진 시녀들에게 난화비가 질문했다.

“혹시 그런 과자를 파는 곳을 알고 있니?”

후궁에 메인 그녀는 자유롭게 밖으로 드나들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모인 시녀들이 그녀의 눈이고 귀인 셈이었다.

단 걸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때때로 수도의 유명 과자점을 돌아다니며 과자를 사 오는 시녀들이었지만 그런 과자를 파는 곳은 알지 못했다.

“혹시 태감님이 서역과 자주 왕래하셨던 난화비 님을 위해서 특별히 공수해 오신 것 아닐까요?”

“하지만 그 크림이라는 거, 금방 상한다고 했잖아? 먼 서역에서 어떻게 공수해 왔을까?”

그 나이 때 여자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다양한 가설을 말해 보았지만, 진실과 근접한 것은 거의 없었다.

난처한 듯 미소 지으며 그녀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난화비는 고개를 들어 흘리듯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겠구나. 다음에 양 태감님이 다시 과자를 선물해 주시길 기다려야겠네.”

‘그럼 그 소년도 다시 올 수 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난화비가 자신의 가설을 검토하는 동안 시녀들은 태감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꺅꺅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근사한 목소리와 가면을 쓴 신비로운 모습에 사랑에 빠진 듯 시녀들이 눈을 반짝였다.

어린 시녀들에게 그를 눈앞에 두고 냉정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겠지.

눈을 반짝이며 질문해 오는 시녀들에게 난화비는 꿈을 포기하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은 젊음의 특권 아닐까. 어머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늙은 것 같잖아?

“태감님이 다시 오실까요?”

“……아마 오실 거야. 그때 과자의 출처를 물어보자꾸나.”

그렇게 생각하는 난화비도 본인의 나이는 이제 막 스물이 넘은 꽃다운 나이였다.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 그녀의 감수성에 그녀는 스스로 애석함을 느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조숙해진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품은 것도 잠시뿐 이었다.

스스로 연민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자신의 불행과 타협하게 되고 자신의 불행을 방패 삼아 주저앉아 버린다. 의욕을 잃고 희망을 잃어버린 비들을 난화비는 몇 번이나 보아 왔다.

그녀의 손에 달린 것은 단순히 자신의 목숨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문이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녀는 여염집 처녀가 아니었다. 이 후궁의 정점에선 다섯 명, 오상비(五祥妃)이자 황후의 후보자였다.

잠깐 사이에 마음을 다잡은 그녀의 눈은 결연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가혹한 궁내 정치에 아직 시들어 버리지 않은 시녀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던 그녀는 이내 입가에서 쓴웃음을 털어버리고 그녀들을 끌어안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분명 다시 오실 거야.”

그때가 되면, 넌지시 여쭤보자꾸나. 아직 어린 그녀의 시녀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스스로 되뇌었다. 스스로 다짐하듯이.

* * *

아직 어둠이 내려앉지 않는 후궁의 길을 태감과 소년 둘이서 걷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근처에 태감의 심복들이 감시하고 있을 테지.

그 사실을 아는 소년은 큰 걱정 없이 아직은 푸르른 저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소년을 따라 지평선 끝 노을을 보던 태감은 이내 관심을 잃었는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보이더냐? 부여비 님은.”

“잘 모르겠습니다. 용모가 빼어나시긴 하더군요.”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그녀는 후궁의 다른 비들 중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도도하고 기품이 있었지만 안양비처럼 표독스럽지는 않았고 시녀들에게 관대한 것 같았지만 난화비처럼 친밀한 정도는 아니었다.

조곤조곤 말하는 투를 보면 확실히 귀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규중의 처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청순하고 단아한 모습은 아마 남자들의 이상형에서 겹치는 부분만을 뽑아낸 듯했다.

정적에게 암투를 사용하고 웃으며 독을 마실 정도의 독심은 없어 보이고 다른 이의 단점까지 포용할 만큼 관대한 사람 또한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소년은 부여비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무언가 특징이 없이 모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쁘기는 하지만 향기는 없는 꽃.

마치 일부러 그런 인상을 받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 같은. 소년은 의구심을 지으며 태감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중간하다는 뜻이냐?”

“어중간한 것이 나쁘지는 않지요.”

오히려 각각 양방향으로 극단적이라는 안양비와 난화비보다는 적당한 부여비가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난하다 이겁니다. 어느 쪽이든 큰 변수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크게 물욕이나 권력욕도 없어 보이시더군요. 그분이라면 폐하의 뜻을 거슬러 외가에 과하게 힘을 실어주거나 하는 일은 없으시겠지요.”

어디까지나 소년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어떠한 객관적인 증거 자료도 없는데도 태감은 소년의 말에 집중했다.

“흠, 만약 난화비가 황후가 되지 못한다면 그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상외로 괜찮을 수도 있겠는걸?”

“난화비 님은 좋은 의미로 특별하시지만, 특별한 사람은 반드시 예상 못 한 변수를 만들어내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기이하게 웃었다. 마치 새알을 눈앞에 둔 뱀과도 같은 미소였기 때문에 소년은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맞아.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만드느니 차라리 통제할 수 있는 무난함이 좋을 수도 있다.”

소년은 어딘가 태감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인권도 희박하고 인명 존중보다 경시가 먼저 일어나는 세계에서 인도적인 행위를 바라는 것은 소년의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의외구나. 난 네가 분명 난화비를 더 높게 칠 줄 알았다.”

태감의 말에 소년은 쓰게 웃었다.

“예. 지금도 높게 칩니다. 첫인상이 좋았거든요.”

“그럼 왜 지금은 부여비를 추천하느냐? 부여비도 첫인상이 좋았느냐?”

태감의 말에 소년은 잠깐 말을 입안에서 굴리고 곱씹었다. 뭐라 말해야 할까. 장고 끝에 소년이 말을 꺼냈다.

“나쁘지는 않더군요.”

“그럼?”

소년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눈앞의 환관이 어지간한 일로 소년을 내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말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누가 되든 상관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안양비 님만 아니라면 누가 황후가 되든 제가 신경 쓸 필요 있습니까? 다른 분이 황후가 되신다고 다른 비 분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

소년의 말을 끊고 태감이 말했다. 소년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았던 말이었다.

“봉비(鳳妃)나 화비(花妃)와는 달라. 오상비(五祥妃)는 후궁 내의 민감한 정보를 상당히 꿰차고 있을 게 틀림없지. 그것이 대립하는 다른 비의 정보라면 더욱더. 황후가 되실 분은 그 어떤 흠도 티도 없어야 한다. 그 허물을 가장 많이 알고 있을 이들을 숙청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충분히 이해가 가는 설명이었다. 그 말을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된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도 소년은 되물었다.

“황후께서 권좌에 오르시고 나서 처음으로 하는 정치 활동이 숙청 이란 말씀입니까?”

“무슨 말이냐. 막 황후에 오르시는 분께서 그런 허물을 덮어쓰실 수는 없지. 숙청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손을 쓰신단다.”

황당하리만치 역겨운 이야기였다. 듣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이 후궁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여전히 그 뱀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태감은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이 소년에게 속삭였다.

“대단하지 않으냐? 부부의 연을 맺고 같은 침상에서 잔 여자를 앞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숙청하시는 선황 분들의 독심이. 황제란 무릇 그래야 하는 법이다. 정을 나눈 여인이라 하여 장부의 독심이 흔들린다면 어찌 이 광대한 제국을 경영하겠느냐?”

마치 쓴 것을 씹어 뱉듯이 내뱉는 태감의 말에 소년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후궁에서는 당연히 누구나 아는 선악의 경계라는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더 큰 대의를 위해 무수히 일어나는 악행을 장부의 결단이라고, 작은 희생이라고 포장해도 되는 걸까? 그것이 장부의 도리인가? 도리라는 것은 무엇일까?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장부 이전에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이 후궁에서 일어난 일들은 정말로 사리에 그릇된 점 없이 바른가?

그것이 대의라면, 제국의 미래라는 크고 광대한 그림 전체를 본다면 옳은 선택일 수도 있다.

늘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며 자신의 선택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앉은 황제라는 이가 그리 생각한다면. 밑바닥을 기는 구더기의 좁은 안목이 내리는 결정은 우물 안 개구리의 우스운 자만심처럼 보일 것이다.

“뭐.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역대 비들의 숙청이 일어났던 것은 황후의 자리를 노린 경쟁이 극심했던 때야. 극히 드물기는 했지만, 황후가 다른 비들과 사이가 좋아 피를 볼 필요가 없었던 때도 있었다.”

태감의 말이 썩 위로되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일단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해 피폐한 정신을 더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년의 표정을 읽은 태감 역시 그 이상 후궁의 밑바닥 심연을 들춰내지는 않았다. 그 대신 둘의 대화 주제는 오늘의 저녁으로 넘어갔다.

“오늘 저녁은 무엇이냐?”

“글쎄요. 돼지고기를 간이 세게 해달라 하셨으니…… 홍소육(紅燒肉肉) 이라도 만들까요? 간장 양념을 해서 달콤 짭짤하게 조려서. 계란도 두세 알 함께 졸이면 맛이 좋고, 보기도 좋지요.”

“홍소육 이라. 밥과 면 중 뭐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으냐?”

태감의 말에 소년은 그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는 투로 단정 지었다.

“하얗고 고슬고슬한 쌀밥이지요.”

본토 중국인이라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 태생이 한국인인 소년에겐 아무리 생각해도 면으로 배를 채우면 어딘가 허전했다.

면 요리를 좋아하는 산동 사람들에게 칼침 맞을 소리기는 했지만, 동양인의 주식은 뭐니 뭐니 해도 쌀 아니겠는가?

윤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에 짭조름하고 달콤한 홍소육 한점을 함께 먹으면 기름지고 달콤짭짤한 양념이 하얀 쌀밥에 배어들어서…….

계란 말고도 푸주(腐竹, 부죽)라고 부르는 말린 두부피 등을 넣어 조리면 달콤 짭짤한 양념이 배어 좋다. 여기다 몇 가지 다른 반찬을 곁들이면 훌륭한 한상차림이 되리라

소년의 설명이 어지간히도 그럴듯했는지 태감의 입보다 태감의 배가 먼저 소리를 내었다.

태감의 재촉을 받으며 불편한 다리를 열심히 놀려 궁으로 돌아온 소년은 잠깐 숨을 돌리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가 요리를 시작했다.

껍질이 붙은 돼지 오겹살을 불로 한번 그을려 잔털을 제거하고 먹기 좋게 썰어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껍질을 쫄깃하게 한다.

간장과 설탕으로 진하게 간을 하고 생강과 향신료로 향을 낸다. 홍소육은 집집이 조리방법이 달라 진한 간장으로 색을 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개중에는 취두부나 커피 가루 같은 고유의 방법으로 맛을 내기도 한다.

홍소육의 특징인 매력적인 붉은 색을 내기 위해 질이 나쁜 식당에서는 캐러멜색소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년은 그저 색이 진한 간장과 꿀을 듬뿍 사용해 그윽한 풍미와 윤기를 더했다.

여기에 다른 반찬으로 중국식 두부조림이라 할 수 있는 가상두부(家常豆腐)와 녹황색 채소를 섭취하기 위해 시금치를 가볍게 볶은 초파채(炒菠菜)를 내고 상에 국물음식이 있어야 하니 미리 준비해 둔 모탕(毛湯)을 낸다.

머리와 닭발을 떼지 않은 닭과 돼지 정강이 살, 생강과 대파를 넣고 한번 끓여 거품을 제거하고 난 다음 고기를 꺼내 물에 깨끗하게 씻는다.

그것을 냄비에 넣고 술 약간과 파 생강을 넣고 끓인다. 팔팔 끓을 때까지는 강불로, 끓기 시작하면 약불로 줄인다.

확 끓어 오르면 국물이 탁해지기 때문이다. 거품을 제거하면서 서너 시간을 끓인다. 이것이 모탕의 기본 레시피였다.

육류를 꺼내고 걸러 내면 다양한 탕과 요리에 사용할 수 있는 국물이 된다.

여기에 따로 데친 닭고기를 잘게 찢어 넣고 계란을 풀어 넣은 뒤 파와 고수를 얹어 내면 국물 요리도 완성.

“너무 육류만 나오면 그러니까 생선요리도 한가지 할까.”

보통의 저녁상 차림이라면 이것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소년이 대접하는 것은 후궁의 권세 높은 권력자였다.

이 후궁에는 지체 높은 권력자들을 비꼬는 말로 보기 좋지 않으면 입에 대지 않고 귀한 것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으며 차린 것이 부족하면 입에 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로 상선감이나 요리를 담당하는 나인들이 하는 말로 그만큼 후궁의 권세 높은 환관들이 음식을 먹을 때 유난을 떤다는 뜻이었다.

거세를 한 환관들은 성욕이 줄어든 만큼 식욕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높은 지위의 환관일수록 풍채가 후덕한 경우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거기에 높아진 권세만큼 입맛은 까다로워지고 씀씀이는 커졌으니 시중에서 흔한 것은 천하다 업신여기며 온갖 취향을 요구하니 나인들의 한숨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그가 모시는 태감은 그런 천박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대단치 않은 요리실력 하나로 그의 눈에 들었는데 그 요리마저 변변치 않아진다면 소년에겐 무슨 가치가 있을까?

창고를 둘러보던 소년의 눈이 나무통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로 향했다. 팔뚝만큼 크고 굵으며 비늘이 선명한 싱싱한 놈이었다.

“……초어가 싱싱하군.”

황궁은 내륙에 위치하여 크고 좋은 바다 생선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큰 강과 호수를 끼고 있어 민물고기는 자주 들어왔는데 땅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권세 높은 황궁에 자잘한 것을 보낼 수 없어서인지 팔뚝만 한 잉어나 민물 농어 따위가 흔하게 들어왔다.

초어는 잉어과의 물고기로 풀을 주식으로 하며 특유의 향이 있어 중국인들은 좋아하지만 한국 사람 중에는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실제로 소년도 전생에는 썩 좋아하는 식재료는 아니었다.

하지만 살이 부드럽고 기름지며 크고 뼈 바르기 편해 먹기 좋고 황궁에도 자주 들어오는 생선이니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초어는 탕으로도 먹고 쪄서도 먹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날것으로도 먹으나 초어를 이용한 요리 중 가장 유명한 곳을 뽑으라고 한다면 서호초어(西湖醋鱼)를 꼽는다.

초어를 손질해 한번 튀겨내고 설탕과 간장에 식초를 넉넉하게 넣어 만든 소스에 튀긴 초어를 넣고 물전분을 풀어 걸쭉하게 하면 완성된다.

서호초어가 완성될 때 홍소육도 딱 좋게 조려졌다. 탕에 계란물을 흘려 넣고 향채와 파를 넣어 상을 차리자 평소보다 조금 늦었던 만큼 이미 식탁에 앉아 있던 태감이 스스로 일어서서 직접 음식을 날랐다.

고위공직자답지 않게 수선을 떠는 모습이 황당했는지 소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배가 많이 고프셨나 봅니다.”

“난 머리를 쓰면 배가 고프거든.”

뇌는 인체에서 포도당을 가장 많이 소모하는 기관이니 태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포기해버린 소년과는 다르게 태감은 포기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위치였다.

“오, 오늘은 준비시간이 짧아서 사실 크게 기대 안 했는데 이거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왔구나?”

“뭐, 밤이 깊도록 고민에 빠지실 텐데 배라도 든든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체 노동자인 만큼 머리 쓸 일도 없는 소년은 태감과는 다르게 달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식 웃는 소년을 보며 달을 벗 삼아 머리를 써야 하는 태감은 우울한 기색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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