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2화 (12/314)

환관의 요리사 12화

너무 뜨거워서도 안 되고, 너무 미지근해서도 안 된다.

고추기름을 만드는 것은 완벽한 온도감각을 요구했다.

너무 뜨거우면 고춧가루가 타버리고 너무 미지근하면 색소와 맛이 충분히 추출되지 않는다.

질 좋은 유채 씨 기름을 적절한 온도로 달궈 소금과 산초가루, 고춧가루를 혼합한 것에 부어 만든 고추기름은 풍미가 좋고 어디에 올려도 잘 어울린다.

삶은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무쳐도 좋고 면에 올려도 좋다. 탕에 뿌리면 얼큰한 맛과 간을 책임져 주고 채소를 무치면 산뜻하고 질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속이 없는 만두나 볶음밥에 올려 먹어도 좋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 고추기름을 베이스로 파와 마늘을 튀겨 향을 낸 향유(香油)에 다진 파 약간 넣고 알칼리수로 단단하게 반죽한 약간 두꺼운 면을 삶아 버무려 낸다.

취향에 따라 면과 함께 배추 같은 채소를 삶아 넣어도 좋지만.

오늘 아침은 다른 채소요리가 있어 굳이 넣지 않았다.

양념을 배합해둔 그릇에 면수 약간을 넣어 유화가 잘 되게 하고 거기에 면을 넣는다.

이것을 비벼 먹으면 중경식 마라소면 완성. 아침부터 고추기름에 버무린 면이라고 하면 속을 부여잡을 사람도 많겠지만, 중경(충칭)에서는 이 매콤한 국수 한 그릇을 먹지 않으면 잠에서 깬 것 같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에 부드러운 수란 두 알. 데쳐서 참기름과 간장을 끼얹은 배추에 수정효육(水晶肴肉).

한국의 편육과도 비슷한 이 음식은 머리 고기로도 만들지만, 보통은 후지(後肢), 그러니까 뒷다릿살을 소금에 절여 만드는데 얇게 썰어 먹으면 쫄깃하고 짭짤한 것이 술안주로 그만이었다.

원래는 점심상에 올릴 것이었지만 완성된 수정효육을 본 태감이 아침에 먹고 싶다고 야단을 부려 어쩔 수 없이 아침에 올리게 되었다.

‘거 참, 이러면 점심상엔 뭘 올리라고. 직장 생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원.’

수정효육 만드는 법.

뼈를 발라낸 껍질 달린 돼지 뒷다릿살을 꼬챙이로 여러 번 찔러 초석을 녹인 물 약간과 소금을 문질러 여름에는 열 시간 이내, 겨울은 일주일 정도를 재운다.

명반석 가루를 약간 넣은 소금물에 넣고 끓여 거품을 걷어내며 백주와 얼음 설탕, 파, 생강, 팔각, 회향, 화초, 백리향 등을 넣고 끓인다.

고기를 겹쳐 무거운 것으로 누르며 그사이에 끓여낸 육수를 부어 식힌다. 단단하게 굳으면 얄팍하게 잘라 담는다.

오이를 얇게 썰어 함께 먹으면 잘 어울리는데 보통은 그냥 먹지만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추기름과 함께 먹어도 좋다.

소년의 예상대로 매운 국수의 양념에 수정효육을 찍어 먹으며 태감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늘 그렇듯이 먹을 때만큼은 세상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그건 그렇고 점심에는 뭘 올릴까…….’

어제저녁은 돼지, 점심은 닭을 올렸으니 오늘 점심으론 생선이 어떨까. 구수하게 쪄서. 아님 튀겨도 좋겠다.

태감은 어지간히도 위장이 커서 쏘가리나 잉어처럼 큰 생선을 요리해도 부담 없이 먹어치워 요리할 때 양을 신경 안 써도 되니 좋았다.

쏘가리 하니 송서계어(松鼠桂魚)를 해도 좋겠지. 쏘가리를 다람쥐 모양으로 칼집을 넣어 튀겨 새콤달콤한 탕추를 끼얹어 내는 요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기 있는 메뉴로 소주지방에 가면 어지간한 큰 음식점은 어딜 가나 이 요리를 내놓을 만큼 인기 있는 음식이다.

“그건 그렇고 태감님. 이제부턴 어찌합니까?”

그 말에 입가에 번들거리던 고추기름을 핥던 태감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며 후루룩 면발을 빨아들인 태감이 입을 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뭘 말이냐?”

“이제 그 뭐시기 연회도 끝났으니 다시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멀뚱히 태감의 밥이나 차리고 있기엔 전날 본 안양비의 서릿발 같은 얼굴과 그런 위협을 모르는 듯한 천진한 얼굴로 방긋방긋 웃고 있던 난화비가 떠올라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태감이 황제를 배경으로 둔 숨은 권력자라고 해도 실질적인 황후라는 권력을 안양비가 거머쥔다면 그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태감이야 원체 얼굴이 반반하니 죽지야 않겠지만, 소년처럼 얼굴도 안 되고 몸도 반병신인 놈은 무릎 꿇고 빌어보기도 전에 모가지가 잘려서 들판에 개먹이 삼아 버려질 것일 뻔했다.

안양비가 조금 더 잔인하고 과시욕이 강한 성격이라면 모가지는 장대에 걸려 저잣거리에 내걸려 구더기가 필 때까지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글쎄. 뭘 할까.”

‘이런 X발.’

소년의 얼굴이 대번에 썩어들어갔다. 그런 소년의 얼굴을 보며 우물우물 수정효육을 씹어 삼키던 태감이 다시 물었다.

뭘 할까?

“그보다는 우선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구나.”

“당면한? 무슨 문제라도?”

혹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문제가 일어난 것은 아닌지 소년은 긴장하며 몸을 바싹 일으켜 세웠다.

소년에게 태감은 세상 둘도 없이 중요하다는 투로 말했다.

“점심 말이다.”

“이런 씨…… 하아…… 자라라도 올릴까요?”

소년은 나름 에둘러 태감을 욕한 것이었다. 중국에서 자라를 뜻하는 왕빠단(王八蛋)이라고 하면 정말 칼침 맞을 수도 있는 심한 욕이었다.

지금이야 귀한 식재료로 대접받지만 예전에는 자라를 식재료로 치지도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지만 태감은 소년의 말이 솔깃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라며 소년을 채근했다.

“호오, 이 경사에는 자라를 잘 먹지 않는데, 맛있나?”

“예? 그야 맛은 있지요. 고기가 쫄깃하면서도 말캉하고 특히 정력과 피부미용에 좋다고 들었습니다.”

“흠…… 자라, 자라란 말이지…….”

격식을 중요시하는 경사의 식사문화, 그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황궁의 식문화는 식재료 하나에도 품격을 따졌다.

황궁의 식탁에 오를 식재료는 보기 좋아야 하고 값비싸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저 먼 남방에서나 먹는 자라는 태감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식재료였다.

“생각해 보니 바다거북은 먹어본 적 있어도 자라는 먹어본 적 없군.”

“예? 바다거북은 드셔 보셨습니까?”

“그래. 귀한 식재료라 후궁에도 가끔 들어오지. 특히 그 등껍질이 꼭 방패 같아서 무관들의 승진을 축하하는 연회엔 바다거북탕이 많이 나온다.”

바다거북은 전생엔 보호종으로 거의 취급할 수 없는 식재료였다. 아주 가끔, 뒤 세계의 루트를 통해 들어온 것을 한두 번 다뤄본 것이 전부였던 귀하신 이름에 소년은 군침을 삼켰다.

곰곰이 턱 끝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태감이 물었다.

“자라는 보통 어떻게 먹지?”

“보통 탕으로 즐긴다고 들었습니다만 튀김으로 먹어도 맛있다 하더군요.”

“튀김이라…… 자라를…….”

자라 하면 보통 누구나 진한 탕을 떠올렸지만 일본 요리에는 자라 튀김이라는 생소한 요리가 존재했다.

소년도 몇 번 접해본 적이 있었는데 물컹한 콜라겐질의 껍질 안쪽으로 맛이 진한 닭고기 같은 쫄깃한 살점이 일품이었다.

입안에 착 감기는 진한 육즙 하며, 산초가루 조금 섞은 소금에 콕 찍어 먹으면 소금기가 밴 그 기름진 살코기가 부들부들하니 입안에서 뭉그러지며 그윽한 육수를 뿜어내는데, 지금껏 먹어본 그 어떤 튀김보다도 일품이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식재료를 튀김으로 접하는 것은 제아무리 식성 좋은 태감이라도 꺼려지는 듯했다.

태감은 고민 끝에 오늘 점심은 탕을 먹겠다 했다.

“그럼 오늘 점심은 자라탕을 준비하겠습니다.”

자라, 그것도 탕 요리 라면 마침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패왕별희(覇王別姬).

항우와 우희의 이별을 그려낸 작자 미상의 경극이 요리의 이름으로 붙은 것은 이 요리에 얽힌 옛 설화 때문이었다.

유방의 포위를 받아 기세가 꺾인 항우를 위해 우희가 자라와 닭으로 탕을 끓여 항우를 달랬다고 한다.

그 자라와 닭으로 끓인 탕을 후세에 사람들이 그 일화를 본 따 패왕별희라고 불렀다.

닭과 자라는 서로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전생의 한국에서도 용봉탕이란 탕이 있을 정도이니 그 조화가 만인에게 알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시간을 조금 주신다면 제가 특별한 탕을 끓여보지요.”

소년은 오래전 최고의 보양탕을 끓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개발했던 탕을 떠올렸다.

닭이 아닌 살집이 좋은 야생기러기를 사용하고 동충하초를 비롯한 귀한 약재와 망태버섯, 능이버섯에 후두(猴头, 노루궁뎅이 버섯) 등을 비롯한 귀한 버섯을 넣고 달인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탕은 그가 자랑하는 요리로 약효가 강해 큰 수술을 앞둔 환자나 긴장되는 자리에 서는 정치인, 혹은 경기를 눈앞에 둔 스포츠 선수들이 찾을 정도였다.

먹는다면 서초패왕 항우와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는 탕. 만약 정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소년이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요리였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태감은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저으며 소년을 만류했다.

“아니, 괜찮다. 당장 힘쓸 일도 없는데 그런 진한 약탕을 마셔봐야 뭐하겠어. 그냥 평범하게 맛있는 탕으로 준비해 다오.”

“예, 살집이 튼실한 놈으로 고르겠습니다.”

자라는 평소 황궁에서 자주 쓰이는 식재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소년은 미리 재료를 주문하려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그런 소년을 태감의 질문이 잡아 세웠다.

“근데 패왕별희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이야기지?”

“예? 그게 그냥 오래전에 읽은 책에서…….”

“나도 이 자리에 앉기까지 꽤나 공부를 한 몸이다만 네가 말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구나. 조금 들려주겠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야기하는 것은 꽤 자신이 있었다.

소년은 오래전 양주에서 일할 당시에 양주 지방에서 유명한 설창(說唱) 문예의 한 종류인 평화(評話, 한 사람이 노래나 음악 없이 사투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예술)의 달인인 양 선생님을 사귀어 그분께 평화를 꽤 배운 적이 있었다.

평화는 사백여 년을 넘게 이어져 내려온 민간 예술로 전쟁과 영웅, 사랑과 이별, 그 장절한 이야기를 혀끝 하나로 엮어내는 예술이었다.

사랑 이야기 같은 낯간지러운 건 잘하지 못하지만 차가운 배신과 뜨거운 영웅들의 전쟁과 결투 이야기 같은 것은 듣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말하는 것도 잘했다.

초한지는 사실 꽤 자신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패왕 항우가 말하길, 힘은 산을 뽑고 기상은 세상을 덮는데,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 마저 가지 않누나…….”

평화는 노래 없이 혼자서 하는 공연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말의 기세와 표정이 중요했다.

손동작, 부채를 펴는 동작과 그 소리. 손으로 낼 수 있는 소리, 그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매료시켜야 하니 배운다 하면 보통 공부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한 것이라 혀가 전성기만큼 매끄럽게 구르지는 않았지만, 태감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태감뿐만 아니라 어느새 그의 심복들도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와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전 이만 식사준비를…….”

“잠깐만 더 해도 괜찮지 않으냐.”

“아니,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탕 준비가…….”

“조금만, 조금만 더.”

결국, 소년이 정말 시간이 없다고 뿌리치고 나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 * *

탕을 끓이기 전, 자라는 먹기 좋게 토막을 쳐 향채를 넣고 미질향(迷迭香, 로즈마리)이나 백리향(百里香, 타임) 같은 향채와 파, 편으로 썬 생강 약간을 넣고 가볍게 볶다가 도수가 높은 술을 넣고 불을 붙여 누린내를 제거한다.

자라를 다 익히면 닭도 토막을 쳐 한번 익히고 도자기로 만든 탕관(湯罐)에 넣어 그 외에 대추와 구기자, 결명자에 옥죽(玉竹, 둥굴레), 말려서 채 썬 연잎 같은 각종 약재를 넣어 밀봉하고 젖은 종이로 이음새를 막는다.

광동 사람들은 탕 요리를 장기로 삼는데 광동식 탕은 탕관을 증기로 쪄서 간접열로 익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화기가 들어오지 않아 영양소 손실이 적지만 그만큼 조리시간이 길어 인내심이 필요하다.

잡티 하나 없는 백자에 푸른색으로 잉어와 연꽃을 그린 탕관을 잘 밀봉하여 찜기에 넣고 나자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탕이란 뚜껑을 열어 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음식이지만 이번 탕은 분명히 잘 되었을 거라고 소년은 스스로를 자축했다.

요리를 오래 하다 보면 그런 감이란 것이 생기는 법이다.

맛이 연한 재료를 사용할 때는 돼지의 껍질이나 닭발 같은 콜라겐질이 풍부한 재료와 화퇴 같은 짜고 감칠맛 나는 재료를 더하지만, 이번엔 자라가 원체 맛이 강한 식재료다 보니 다른 재료는 넣지 않았다.

오래전 중국에서 처음으로 일했던 북경의 호텔에서 배운 레시피를 후일 독자적으로 개량한 것으로 맛이 진하고 국물을 마시면 입술이 쩍 달라붙을 만큼 진하지만, 끝 맛이 가볍고 개운하며 고기는 야들야들하고 만인에게 잘 받는 약재를 사용해 약효가 순한 것이 특징이다.

탕이 진하고 건더기가 많으니 다른 반찬은 산뜻하고 가벼운 것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허리를 폈다.

“아이고, 허리야. 죽겠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다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천형을 타고난 것인지 소년은 왼 다리를 절고 허리가 조금 굽어 있었다.

궁 밖에서 살았다면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기 전에 굶어 죽거나 혹은 그보다 심한 꼴을 당했을 테니 어쩌면 눈뜬 장소가 궁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늦은 밤까지 공연을 관람해서인지 뜨뜻한 불 앞에 있으니 절로 졸음이 몰려왔다.

다된 탕을 눈앞에서 망칠 수는 없어 허벅지를 꼬집으며 소년은 다른 요리를 준비했다.

태감의 불호령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요리사로서의 자부심의 문제였다.

가벼운 채소와 건두부 볶음에 찹쌀을 채워 찐 연근, 산초를 넣어 조린 산천어 등등. 어디까지나 메인이 되는 탕을 보조할 만한 산뜻한 음식들이었다.

오늘 점심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시작되었다. 초한지를 읊느라 아무리 단축하려 해도 조리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탄수화물은 고슬고슬하게 잘 지은 밥 외에도 국물에 찍어 먹어도 좋고 다른 반찬을 끼워 먹어도 좋은 꽃빵(花卷)을 준비했다.

잘 쪄진 것을 접시에 올려 정원에서 따온 화사한 꽃으로 장식해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내자 굶주림에 지친 태감이 아귀도의 망자처럼 달려들었다.

“열어! 빨리!”

“제발 좀 품위 있게 기다려주시면 안 됩니까?”

젖은 종이를 가르고 뚜껑을 열어 첫 국물을 뜰 때까지, 얇게 호선을 그리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한 폭의 미인도처럼 기다려주었으면 했건만. 태감은 너무 과격한 형태로 미모를 낭비하고 있었다.

아아, 첫 맛남에서처럼 품격있고 고상한 식사 모습은 이제 다시는 기대할 수 없는 꿈이란 말인가.

저런 꼴인데도 비련의 슬픔과 고통을 견디는 거룩한 모습이 연출되는 것을 보면 신이란 이토록 불공평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재촉하는 태감의 명에 소년은 서둘러 탕관을 열었다.

작은 소도로 탕관 이음매 부분에 붙인 젖은 종이를 가르고 뚜껑을 열면 구수한 향기가 물씬 피어오른다.

작은 은 국자를 넣어 첫 국물을 떠내 찻잔 같은 작은 그릇에 뜨면 그 색이 뽀얗게 탁하지 않고 찻물처럼 맑고 투명한 것이 최고로 잘 우러난 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 국물은 건더기나 다른 양념 없이 그대로 마셔 탕의 순수한 맛을 느낀다.

혀끝으로 세밀하게 맛을 보고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과정에서 탕의 온도가 변하며 맛 또한 변하는 그 과정을 느릿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느껴야 하건만 태감은 그런 예의를 무시하고 거의 들이키다시피 국물을 마셨다.

“오…… 오오…… 이렇게나 진하고 구수하다니, 자라란 이토록 고상하고 품격있는 맛이었나?”

“이 근방에선 잘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까울 정도로, 자라는 맛있지요.”

‘빨리 먹는 것 치고는 맛은 참 잘 느낀단 말이지…… 절대미각인가?’

태감이 난동을 벌이기 전에 서둘러 고기를 건져내 국물이 자박하도록 끼얹어 내었다.

곁들이는 양념은 다른 것은 곁들이지 않고 단맛이 나는 간장에 등자 나무 열매즙을 조금 섞은 즉석 폰즈 소스.

“이렇게 야들야들하고 고소하다니. 육고기와도 어류와도 비슷하지 않은, 도저히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맛이로구나. 쫄깃하면서도 씹다 보면 녹아내릴 듯이 부드럽고 진한 육수와 함께 먹으면 혀끝에서부터 어금니 가장 안쪽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듯한데, 새콤한 맛이 나는 간장에 찍으면 맛이 또 색다르구나.”

닭도 자라도 굳이 뼈를 발라내려 고생할 필요 없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뼈만을 발라내면 될 정도로 잘 삶아졌다.

정신없이 국물을 떠먹고 고기를 바르는 태감을 보며 무언갈 생각하던 소년이 불현듯 말했다.

“국물이 남으면 밥을 넣고 죽을 끓여도 맛있습니다.”

“그걸 먼저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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