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9화
잘못 본 것일까.
어쩌면 잘못 본 걸 수도 있다. 원체 거리가 멀었고, 황제는 수염을 길러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 한순간의 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호쾌한 미장부인 황제와 어딘가 여성성이 느껴지는 중성적인 태감의 얼굴은 한눈에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눈. 소년의 머릿속에서는 황제와 태감의 눈매가 계속 겹쳐 보였다.
젊은 나이에 비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지위도, 만약 그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날, 태감이 처음 자신에게 가면을 벗은 그날. 황제를 입에 담은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존귀한 혈통을 타고난 그가 어째서 후궁에서 환관 노릇을 하며 후궁의 실세 노릇을 하는 걸까. 황가의 혈통을 타고난 이라면 당연히 왕의 지위를 받아 한 지방을 통치해야 하는 것 아닐까? 소년은 순간 장소에게 질문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물어야 할 질문과 묻지 말아야 할 망언.
소년은 자신의 질문이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만약 알려줘야 할 비밀이었다면 자신에게 먼저 말했으리라.
말하지 않았다면 그저 가슴속에 비밀로 묻어둬야 한다.
시키는 것을 하고, 시키지 않은 것은 하지 않는다. 소년은 어느새 후궁의 궁인답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황제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는 소년을 장소가 헛기침으로 불렀다.
“저…… 그럼 돌아갈까요?”
“예? 아, 그래야죠. 밥도 먹다 말았고.”
“헤헤, 잘 먹었습니다.”
“네? 더 먹어야죠. 아직 반 공기도 못 먹었으면서.”
장소와 함께 샛길을 돌아 연좌궁으로 돌아온 소년은 다시 가려는 장소에게 따끈한 밥을 퍼 주었다.
갈팡질팡하면서도 시선은 밥공기를 떠나지 못하는 장소를 보며 소년은 다시 데운 뜨거운 마파두부를 그의 코 밑으로 슥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 산초 향기!”
안절부절못하는 장소의 모습은 밥반찬으로 딱이었다. 스스로 성격이 적잖게 꼬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마파두부를 흰 쌀밥에 올렸다.
붉은 양념이 촉촉하게 배어든 하얗고 투명했던 쌀밥을 입에 넣으면 구수한 장맛과 짭조름한 맛에 기름진 고기 맛, 그리고 매콤하고 얼얼한 고추와 산초의 풍미가 혀를 타고 내려가 목 점막을 자극했다.
꿀-꺽.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뜨겁고 강렬한 사천의 풍미. 장소의 목울대도 함께 움찔거렸다.
마른 침을 삼키고 있을 그에게 소년은 무한한 관용과 신뢰가 담긴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
“장소 님.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이미 늦었죠?”
“네? 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밥이라도 맛있게 먹고 늦는 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늦는 것보다 덜 억울하지 않을까요?”
“……!”
결심이 선 듯 장소는 다시 앉아 마파두부와 구황육사에 집중했다. 그래 소년, 한창 클 때이니 많이 먹거라.
흐뭇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늦으나 조금 빠르게 가나 어차피 혼나는 것은 똑같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편이 덜 혼난다는 사실을.
저 고양이 같은 소년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지만 이대로 보내기엔 조금 미안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태감이라면 뭔가 군것질거리를 가져가면 기분도 풀어주겠지. 식사를 끝낸 후 소년은 약한 불에 철과를 걸었다.
“어? 뭐 하시게요?”
“태감님 밖에서 심심하실까 봐, 땅콩 같은 걸 좀 볶아서 보내 드리려고요.”
소년은 잣과 호두, 땅콩 따위의 각종 견과류를 올렸다. 서역에서 들어온 피스타치오, 피칸, 그리고 아몬드에 개암나무 열매 등을 섞어 적당히 볶아졌으면 소금을 뿌려 살짝 식히고 여기에 건포도에 덩굴 월귤나무 열매, 살구, 남방에서 들어온 말린 파인애플(芒果)과 망고(芒果)까지.
없는 것이 없는 후궁의 식재료 창고에서 가지각색 건과일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마지막으로 량과(凉果, 소금에 절여 말린 과일)를 조금 섞어주면 출출한 태감을 위한 간식 주머니 완성.
짭짤함과 고소함, 그리고 새콤함과 달콤함이 어우러진 마성의 간식 주머니는 큰 것은 태감에게, 조금 작은 것은 장소를 위한 것이었다.
“하나는 태감님께 드리고, 하나는 장소 님이 드세요. 다른 분들이랑.”
“그래도 될까요?”
“뭐 하나 만드나 두 개 만드나 수고는 크게 다를 거 없는데요.”
그렇다고 재료비가 드는 것도 아니고. 후궁에선 아무리 많이, 양껏 써도 재료비는 한 푼도 들지 않고 다음 날이면 또 창고가 그득하게 차 있었다.
이것이 공무원의 기쁨이요 권리 아니겠는가. 이런 자기 본위적 생각을 평소였다면 열과 성을 다해 욕을 했겠지만, 그 권리를 누리는 입장이 되자 그럴 마음이 쏙 사라졌다. 세금 낭비 만세!
“그럼 태감님의 네 심복 중 제일의 준각(駿脚)을 자랑하는 이 장소! 어서 이 간식 주머니를 태감님께 전달하겠습니다!”
배가 든든해서인지 근심 하나 없는 미소를 보내는 장소를 보니 어딘가 양심이 찔려 소년은 어정쩡한 미소로 그에 화답했다.
“거…… 정 태감님이 화를 내시면 점심은 따뜻한 용안이 들어간 닭고기탕을 준비한다고 전해주십쇼.”
“네!”
스스로 준각이라고 자부한 만큼 장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갔다.
통통 튀는 발걸음이 꼭 고양이 같아 멀어져 가는 등을 보며 헛웃음을 흘린 소년은 이내 주방으로 돌아갔다.
주원증계(柱元蒸鷄)는 족히 두 시간을 쪄야 하니 이런저런 간식거리도 포함하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했다.
“에이, 이래서 오늘은 탕이나 찜 요리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소년은 경쾌한 리듬으로 칼을 놀려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주원증계(柱元蒸鷄).
약효가 센 용안에 보양이 되는 닭을 끓여 감기 환자가 먹기에 좋은 음식이다.
닭을 손질해 소금과 후추, 술과 물 녹말 앙금으로 고기를 주무른 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내 불순물을 빼고 작은 냄비에 닭과 껍질과 씨를 뺀 용안을 넉넉하게 넣고 파와 생강을 넣어 소금과 소흥주, 청탕(淸湯)과 후추로 맛을 내 두 시간 이상을 끓여낸다.
끓일 때 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뚜껑의 이음새에 밀가루 반죽이나 젖은 종이를 두르는 것이 이 탕 요리의 핵심.
그리고 약 불에서 은근하고 진득하게 달여야 그 맛과 향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오래 끓인 탕은 영양가가 풍부하고 소화하기 쉬워 노인과 환자에게 좋다.
언젠가 스승님에게 이 요리를 배우며 마누라가 아플 때 이 탕을 끓여주면 사랑받는다는 스승님의 말을 웃어넘긴 적이 있었다.
‘스승님, 비록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마음을 담아서 끓이면 되는 거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골탕 먹이고 싶은 사람이지만, 어쨌든 요리를 먹을 때만큼은 진지한 사람이니 이쪽도 진지하게 대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얄미울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짓는 태감의 얼굴을 생각하며 소년은 아궁이에서 불을 조금 빼 화기를 줄였다. 탕은 은근하게 끓여야 한다.
탕 요리가 유명한 광동 지방에서 요리를 배울 때 탕 하나에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붙어 있어야 했던 것도 지금은 좋은 추억이었다.
“그때는 피곤해 죽을 것 같았지만, 뭐든 지나고 나면 좋은 추억이지.”
좋은 추억이라는 것은 결국 그 고난의 끝에 성공과 행복이 있었다는 증거다.
어찌 되었든 잘 된 탕은 맑고 투명한 찻물 색이 나면 성공이다. 불순물을 잘 제거하지 않으면 국물이 탁해진다.
앞으로 두 시간. 잠깐 책을 볼 여유는 있으리라.
아까 볶아둔 견과류와 건과일을 챙긴 소년은 그나마 제일 재미있어 보였던 고전 무협지 같은 제목의 책을 빼 들었다.
창룡검왕천하평정기(蒼龍劍王天下平定記).
보기만 해도 고전미가 느껴지는 무협지로다.
창밖에선 어렴풋하게 뿔피리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후궁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 * *
묘족의 아들, 장소는 작은 보폭으로 달음박질쳐 단숨에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계단식으로 세워진 연회석의 그림자를 타고 황제의 곁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태감에게 접근한 그는 한창 공연에 시선이 쏠려 있는 동안 불쑥 태감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호흡과 배우의 표정에서 나오는 압박감에 집중되는 사람들의 눈빛을 읽고 가장 관심이 쏠리지 않을 때 소리소문없이 접근하는 그의 솜씨는 귀신같았다.
촤르륵- 펴지는 부채가 슬쩍 배우의 얼굴을 가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배우의 가면이 바뀌고 그와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훌륭한 변검에 어울리는 아낌없는 칭찬과 함께 착석한 장소는 태감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고개는 정면으로 고정한 상태로 눈만 힐끗 돌린 태감은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각종 견과류와 건과일 사이사이에 거무튀튀한 색의 짭짤한 량과가 섞인 간식 주머니는 고소하고 달고 시고 짠 맛이 조화롭게 순환되어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시간을 보내는데 최적일 것이 눈에 보였다.
내용물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거린 태감이 장소와 눈을 마주하고 미소 지었다.
한없이 선량하게만 보이는 태감의 미소에 장소도 배시시 미소 지은 순간 태감의 불끈 쥔 주먹이 장소의 머리를 강타했다.
유난히 둔탁한 소리가 울렸지만, 악사들의 연주 가락에 묻혀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저 고양이상의 환관 한 명이 울상을 지었을 뿐.
두 명 모두 시선은 전방의 천극(千劇)에 눈을 둔 상태로 대화를 했다. 목소리를 낮게 깔아 음악 소리에 묻어버려 그들의 목소리는 오직 어깨를 붙이고 앉은 둘만 들을 수 있었다.
“뭐 먹고 왔지.”
“예? 에…… 네.”
거짓말보다는 솔직한 대답이 덜 혼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담아 장소는 순순히 대답했다.
태감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해 주기 위해 배우가 가면을 바꾸는 찰나에 한 번 더 따끔한 꿀밤을 날렸다.
다시 한번 둔탁한 소리가 울렸지만, 이번에도 역시 악사들의 힘찬 연주에 매몰되었다.
정수리를 부여잡고 수그러진 장소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키며 태감이 다시 물었다.
“에휴, 상관은 추운 날 날바닥에 앉아 시답지 않은 공연을 보는 동안, 뜨거운 밥을 먹으니 참 좋았겠구나. 뭘 먹었니?”
“어…… 그러니까…… 황부추를 넣고 볶은 돼지고기랑 마파두부요. 흰 쌀밥이랑…….”
“마파두부, 그래. 마파두부란 말이지…….”
마파두부라!
다진 고기가 알알이 씹히는 그 얼큰한 양념 하며! 겉은 단단하면서도 속은 야들야들한 하얀 두부를 혀에서 굴리면 어떤가!
그 코를 찌르고 목 점막을 태우는 신랄한 매운맛의 자극적인 풍미가 지나고 나면 그윽한 장맛과 고소하고 짭조름하고 기름진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울 터인데.
하얀 쌀밥과 함께 볼이 미어지도록 채워 넣으면 그 얼마나 행복할까.
눈앞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열연과 혼신의 열정을 담은 악사들의 연주보다도 태감은 상상 속의 마파두부에 빠져들었다.
녹말로 걸쭉하게 한 그 양념을 하얀 밥 위에 올리면 고슬고슬한 밥에 양념이 그윽하게 배어들 텐데, 다진 고기가 씹힐 때마다 고소하고 신선한 산초 향기가 톡 쏘겠지.
사천요리의 정수라고 할수 있는 마 와 랄(麻辣)을 소년이 제대로 표현할 것이다.
그 추레하고 비굴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소년의 손놀림은 진짜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언제나 간신배처럼 비굴했지만, 요리에서만큼은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태감은 소년을 신뢰했다.
거기에 그 비굴함이 더 큰 권력 따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목숨 하나를 잡고 있기 위해서라는 점 또한 태감이 소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목숨을 아까워하는 것들은 그 목줄을 쥐고 숨통만을 트여주면 일단은 충성하는 척이라도 한다.
태감이 보기에 소년은 타고난 반골의 상이었으나 그러기엔 이 차가운 후궁의 밑바닥에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반골 기질이 눈뜨기도 전에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먼저 배워 약삭빠른 기회주의자가 되었으니 태감에겐 이보다 더 다루기 쉬운 자도 없었다.
거기에 기묘하게도 진실할 때는 진실하고 충직할 때는 충직하다. 무엇보다도, 요리가 맛이 있었다.
아아 마파두부, 그 얼큰한 마파두부 양념에 밥을 쓱쓱 비벼 먹었으면.
거기에 사천식 아삭아삭하고 새콤한 포채(泡菜, 무, 오이, 껍질 콩, 양배추, 고추, 배추 등을 염장하여 발효시킨 것)를 씹으면 상큼하고 새콤해서 텁텁해진 입을 깔끔하게 정돈해 주겠지?
시큼한 것을 생각하니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한 줌을 입에 털어 넣었으나 그가 기대하는 매콤 짭짤함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아삭아삭 졸깃졸깃, 달고 고소하고 살짝 짭조름한 맛이 혀끝에 퍼졌으나 그것은 태감의 공복을 더 부채질할 뿐이었다.
“저…… 태감님. 제가 기미를 볼까요?”
견과류를 씹을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태감의 얼굴을 보며 장소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연을 즐기며 먹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앞에는 각종 떡이며 명절에나 올라오는 월병, 양갱 따위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다른 이들은 벌써 반절쯤 먹어 치우고 덩치 좋은 무관들은 이미 새로 음식을 주문했지만 양 태감과 그의 일행은 상에 올라온 요리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아니, 되었다. 별고 먹고 싶은 생각도 안 들어.”
아무리 맛 좋은 음식이라도 수족에 비견될 바는 아니었고 눈앞에 있는 음식이 충직한 부하와 저울질할 정도로 궁극의 음식도 아니었다.
방치하여 딱딱해진 떡과 메마른 양갱을 먹느니 차라리 소년이 볶아준 견과류라도 먹는 편이 낳았다.
어딘가 상심한 듯한 태감의 옆얼굴에 안절부절못하던 장소가 태감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저…… 오늘 점심은 주원증계라고 하던데요.”
“그래?”
은은한 단맛과 산미가 감도는 진한 닭고기 국물을 생각하니 태감의 입에도 없던 미소가 걸렸다.
소년의 음식 솜씨라면 틀림없겠지만, 그거 하나로는 역시 부족하겠지?
“그럼 그 아이에게 전해주거라. 오늘 점심은 주원증계에 마파두부도 먹고 싶고 또 저번에 먹었던 토마토 요리도 준비해 달라고. 아, 달콤 짭짤한 돼지고기 요리도 부탁한다♥”
“예? 점심으론 너무 많지 않을까요?”
“꼭. 부. 탁. 한. 다. 고. 전해다오. 알겠지?”
또박또박 끊어서 부탁하는 태감의 친절한 부탁에 사색이 된 장소가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그런 장소의 등을 보며 위정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너무 놀리지는 마십시오.”
“나도 알아. 그래도 얄밉잖아? 상관이 차가운 바깥에서 배를 곪는데 혼자서 뜨거운 밥을 먹고 오는 건.”
“뭐,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바위처럼 과묵한 위정도 내심 그렇게 생각했는지 선선히 긍정하며 수염을 쓸었다. 어느덧 화려했던 천극도 끝나고 악사들과 배우들이 퇴장하자 북채를 든 고수들과 창과 검을 든 굴강한 체격의 무장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금군 소속의 무장과 팔군 소속의 무장. 오랫동안 대립해온 두 집단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그 모습을 나른한 표정으로 굽어보던 태감은 이내 관심을 잃었는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혀끝으로 건과일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아아, 빨리 밥이 먹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