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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8화 (8/314)

환관의 요리사 8화

흑설탕에 자꾸만 손을 가져가는 태감을 말리기 위해 약간의 과일을 가져온 소년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번 연회는 어떤 일로 열리는 건가요?”

포도만으로는 부족한지 자꾸만 다 먹은 떡 그릇을 힐끗거리면서 태감은 대답해 주었다.

“지방으로 원정을 나가는 금군무장들의 사기를 격려하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팔군 소속 무장들에게는 그간의 공을 치하하는 위문회다.”

여기서 목이 탄 듯 밀크티를 벌컥벌컥 마셔 목을 축인 태감은 설명을 이었다.

“제국은 대대로 무를 숭상해 온 군사국가답게 이 위문회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오시는 것은 물론, 황후 후보자들이 전부 참석하지. 그리고 아직 폐하의 성은을 입지 못한 화비와 봉비들에게는 큰 기회이니 다들 신경도 날카롭고.”

하지만…… 제아무리 황실이라도 예산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한해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안 안에서 모든 행사를 처리해야 하니 예산을 다루는 부서의 환관들은 늘 피를 말리는 숫자와의 전투를 해야 했다.

“이번 년엔 용의 아들께서 친히 하늘에 제를 올리는 칠성제(七星第)가 있다. 홍수와 가뭄이 들지 않길 바라는 이 제사는 황실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지. 위문회에서 예산을 땡겨 쓰면 칠성제에 들어갈 예산이 부족하고, 참 골치 아프단 말이지.”

“위문회를 소홀히 하면 무장들의 시선이 따가울 테고, 그렇다고 칠성제를 소홀히 하면 민심이 사나워질 테니 이것 참 절체절명이군요.”

이죽거리는 소년의 말에 태감은 괜히 심통이 난다는 듯이 가면 끝으로 소년의 정수리를 콕 찍었다.

“그렇게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가능하면 비상시에 사용하려고 아껴둔 황실 유보금은 손대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거 참, 예산 짜느라 고생 많으시겠습니다.”

“넌 좋겠구나. 그날은 나도 없고 후궁도 텅텅 빌 테니 아주 휴일이겠어.”

“첫 휴일이군요.”

물론 최소한의 경비병력은 그대로 일터이니 소년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날이 소년에게 특별한 일이 없는 첫 번째 휴일이라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얼마나 감미로운 말인가.

방에 콕 틀어박히는 걸 싫어하지도 않고 사전에 달콤한 간식이라도 넉넉하게 만들어 책 한두 권만 챙겨두면 오히려 즐거운 휴가가 될 것 같았기에 소년은 입꼬리를 올리며 실실 웃었다.

실제로 남들이 보기엔 입매를 비틀었다 에 가까웠다.

“그럼 식사 준비는 하지 말까요?

“아침만 준비하거라. 공식적인 행사이니 점심 저녁은 뺄 수 없으니까. 계절이 바뀌고 첫 연회이니 아마 외궁의 식방각(食邦閣) 총괄요리장이 솜씨를 좀 부리겠지.”

아침 준비야 일도 아니지. 벌써부터 시무룩한 태감을 보며 소년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 궁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구더기로 바닥을 기는 동안 단 한 번도 휴일다운 휴일은 보낸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첫 번째로 얻은 휴일에 소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이 들떠 올랐다.

쉰다면 무엇을 할까? 고리타분하긴 하지만 모아둔 책 중에서 그나마 재미있는 설화집 같은 것을 골라서, 차도 조금 좋은 걸 끓이고 달콤한 간식도 준비하고…… 어차피 연좌궁 안에는 오직 나 혼자일 테니 조금 화려하게 식사도 준비할까?

그런 소년의 표정이 읽혔는지 요 맹랑한 소년의 꿈을 깨뜨릴까, 아니면 이번 하루 정도는 풀어줄까 고민하던 태감은 문득 지난 연회에서 먹었던 식사를 떠올렸다.

지방으로 내려갈 무장등을 위로하는 연회다 보니 음식도 화려하고 술도 훌륭한 것.

하지만 봄이라고 해도 아직 기온은 꽤 추웠고 날이 춥다 보니 음식은 금세 식고 또 대량으로 조리하다 보면 음식의 맛도 조금은 떨어졌다.

그야 황제 폐하와 오상비(五祥妃)께 올라갈 것은 바로 앞에서 소형 난로를 사용해 먹기 직전까지 따끈따끈하겠지만, 아무리 지체 높은 태감이라도 황제 폐하나 황후 후보자들과 같은 대접을 바랄 수는 없었다.

이 연좌궁은, 후궁의 정 중앙에서 조금 남쪽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 외궁 북쪽의 선수각과의 거리는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궁내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업무 대부분이 은밀하게 행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보니 다른 이들보다 운신이 자유롭기도 하고, 솔직히 아무리 맛이 있어도 찬 음식보다는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소년을 빤히 보는 태감의 시선에서 그의 식욕을 느낀 소년은 얌전히 평온한 휴일의 일부를 포기했다.

어차피 자기 먹을 걸 만들어야 하니 거기에 태감이 먹을 것도 함께 만드는 것은 큰일이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대신 좋은 재료를 구해주셔야 합니다.”

“그럼, 네가 먹을 것까지 넉넉하게 좋은 것을 구해주마.”

처음으로 이루어진, 소년과 태감의 거래였다.

* * *

연회 당일. 후궁의 모든 이들이 바쁘게 오가며 연회준비로 바빴지만, 오직 소년만큼은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침대 위에 누워 모처럼 느긋하게 오수를 즐기기도 하고, 그동안 바빠 봉투를 뜯어보지도 못한 값비싼 차를 우려보기도 하고.

아주 휴일을 맘껏 누리고 있었다.

서호 용정차의 그윽한 향기를 즐기며 무협지를 뒤적거리던 소년은 마침내 인정하고야 말았다.

자신이 지독한 일 중독자라는 사실을. 처음 한 시간 정도는 나른하니 즐거웠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루함이 관절에 들러붙어 몸을 삐거덕거리게 했다.

“……밥이라도 먹을까.”

왠지, 배가 고파졌다.

나른하고 무기력한 심신에 활력을 줄 무언가가 필요해.

소년의 뇌리엔 순간적으로 수많은 요리가 스쳐 지나갔다.

고기, 무언가 기름지고 짜릿한 요리가 좋겠어.

삶거나 찌는 담백한 조리법이 아니라 숯불에 기름을 쫙 빼가며 굽던가, 아니면…….

“볶던가.”

기름을 넉넉하게 넣고, 화끈하게 고추와 산초가루를 넣어서. 그 순간 소년의 머릿속에서는 혜성처럼 하나의 이름이 떠올라 스치고 지나갔다.

“마파두부다.”

번갯불처럼 소년의 뇌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마파두부였다. 연두부를 튀겨서 넣어도 좋고 조금 단단한 두부를 살짝 데쳐서 넣어도 좋은 마파두부.

연두부는 귀찮으니까 그냥 두부를 쓰겠지만 그 얼큰하고 혀가 얼얼한 마파두부를 뜨거운 쌀밥에 올려 먹으면 분명 끝내줄 것이다.

아침으로서는 어쩔지 모르겠지만 아직 젊은 위장은 강력하게 그것을 원하고 있다.

주방으로 달려간 소년은 도마 위에 새로 장만한 두툼한 칼을 뽑아 올렸다.

“마파두부 한 가지만 먹으면 좀 그러니까 채소가 듬뿍 들어간 요리도 하나 있어야겠군. 부추를 돼지고기와 볶아볼까?”

구황육사(韭黃肉絲).

황부추를 6㎝ 정도로 자르고 홍고추는 씨를 빼 채 친다. 채 썬 돼지고기를 간장, 술, 물 조금을 넣고 전분을 섞은 뒤 기름을 두른 냄비에 미지근한 온도에서 밑간한 돼지고기를 풀어가며 익힌다.

대충 익으면 건져내고 기름을 한번 따라낸 뒤에 다시 기름을 조금 두르고 고추와 황부추를 닭 육수를 조금 넣고 센 불에 확 볶는다.

돼지고기를 다시 넣고 소금, 간장, 설탕 후추로 간한다.

그다음에는 마파두부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맵게 무친 자차이와 다른 밑반찬을 조금씩 꺼내고 고슬고슬하게 지은 쌀밥을 듬뿍 푸면 소년의 아침 겸 점심이 완성되었다.

‘사실은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더 할까 했지만…… 역시 귀찮을 것 같아.’

그릇에 수북하게 구황육사를 담아내고 우묵한 그릇에 뜬 마파두부 위에는 살짝 산초가루를 더 뿌린다. 먹음직스러운 향기, 코를 찌르는 얼얼한 산초향.

아직 젊기에 먹을 수 있는 아침이었다. 아직 세상의 쓴맛에 지치지 않은 젊은 위장이라면 아침부터 고추기름 흐르는 이 식사라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으리라.

거나하게 차린 상을 앞에 두고 음침한 미소를 흘리는 소년의 뒤에서 순진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우와, 아침부터 안 무거워요?”

“예? 어어?!”

양 태감의 네 수하 중 한 명. 첫인상이 고양이 같았다고 평가했던 환관이 소년의 등 뒤에서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눈이 가늘고 길어 고양이 같기도, 여우 같기도 한 인상의 환관은 청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선이 가늘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귀엽다고 평가할 만큼 수려한 미소년이었지만 긴 후궁 생활로 심각한 인간불신과 인감혐오가 동시에 발병 중인 소년은 표정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고양이 환관이 박장대소했다. 한참을 바닥을 구르며 웃던 환관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소(張炤)라고 해요.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이름도 모르는 사이네요?”

소년은 장소의 손을 마주 잡았지만, 쉽사리 그에게 이름을 말해 주지는 못했다.

소년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전생의 그에게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나 할아버지가 작명소에서 받아오신 멋지고 자랑스러운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죽은 사람의 이름이다.

그걸 생각한 순간, 자연스럽게 장소에게 자신의 본래 이름을 대답하지 못한 그 순간.

그 순간 그가 처해왔던 환경, 그의 상황이 입체적으로 그를 공격해왔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어딘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불우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관람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였지만, 이름에 관한 기억을 떠올린 순간 소년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사실은. 이곳이, 이 환경이 실제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냥, 구더기라고 부르십시오.”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요?”

“뭐든 사람을 지칭하면 그것이 이름이지요.”

소년은 도망쳤다.

이 상황을 자신의 현실로 인정하는 것에서. 역경과 고난에서.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의 장소를 앉히고 소년은 밥공기를 들이밀었다.

난처해하는 장소를 자리에 앉히고 고봉밥을 가득 떠안긴 소년은 장소를 설득했다.

“네? 괜찮은데…….”

“장소 님도 배고플 거 아니에요? 어차피 많이 만든 거라 혼자 먹으면 남을 거고.”

“에헤헤…… 그럼 사양 안 할게요. 저 상당히 많이 먹어요?”

“밥도 많이 해뒀습니다. 넉넉하게 드세요.”

생각보다 입이 큰 태감은 그 우아하고 고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지극히 사내다운 모습으로 우적우적 와구와구 먹어 치웠지만 (남들 앞에선 깨작깨작 고상하게 먹는다. 우웩-)

장소는 그 귀여운 얼굴만큼이나 입도 작은지 깨작깨작하는 것처럼 보여도 젓가락질 속도가 원체 빨라 생각보다 먹는 속도가 빨랐다.

“야, 정말 끝내주네요! 사실 태감님 뒤에서 먹는 걸 볼 때마다 배가 고팠는데 이번에 소원성취했어요!”

확실히, 태감은 보는 사람도 배가 고파질 만큼 맛있게 먹으니 보고만 있는 것도 곤욕이겠다.

소년은 피식 웃으며 장소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그럼 같이 드시지는 않으십니까? 식재료가 넉넉해서 사실 몇 인분을 하든지 큰 상관은 없는데요.”

“음…… 사실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요…… 위정 아저씨가 원체 깐깐해서 말이죠. ‘규정상 안 돼!’라고 늘…….”

그 바위 같은 얼굴만큼이나 성품도 고지식한 모양인 위정 때문에 그 아래 부하들은 상당히 고생하는 모양이었다. 상관이 융통성 없이 FM으로만 하려고 하면 힘들지…….

소년은 기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벌써 한 그릇을 비우고 밥그릇을 빤히 보고 있는 장소에게 고봉밥으로 듬뿍 퍼 주었다. 벌써 두 번째 공기인데도 장소의 식사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 마파두부 정말 끝내주네요! 제가 귀주성 출신이라 매운 걸 좋아하는데 이 마파두부는 본고장에서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어요.”

“좋아해 주시니 저도 기쁘군요. 근데 귀주성 출신이시라고요?”

귀주성이라면 분명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곳이었지? 특히 묘족(苗族)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엔 소수민족의 음식을 배우러 참 여러 지방을 들쑤시고 다녔는데…….

“네. 정확히는 귀주성 근방의 소수민족인 묘족(猫族) 출신이에요…… 히히, 맛있는 식사를 해주셨으니까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 이거든요.”

“네, 묘족…… 묘(猫)족이요?”

‘어…… 원래 묘족이 고양이 묘(猫) 자를 쓰던가? 모 묘(苗) 자를 쓰던 것 같은데?’

현재 그가 사는 곳이 원체 고대의 중국과 흡사한 문화였기 때문에 소년은 순간적으로 장소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양이 족?

이름은 꽤 귀엽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소년은 멀쩡한 남자가 자신을 고양이 족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의 건전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장소는 꿋꿋하게 말했다.

“어…… 어미에 냥 같은 거 안 붙일 거예요. 원래 묘족은 고양이로서 신수의 자리에 오른 위대한 월묘를 추종하는 소수민족일 뿐이지 결코 스스로를 고양이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필요 없어요.”

사내자식이 냥냥거리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소년은 현기증을 느끼며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어떤 일로 오신 겁니까? 늦은 아침을 드시러 오신 건 아니실 테고…….”

“아! 태감님이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이제 폐하와 비 분들의 입장 시간인데!”

“……어차피 이미 늦었는데 적당히 놀다 가죠?”

“그래도 태감님이 이번에 안양비 님은 꼭 뵈어야 하신다고 하셔서…….”

“하이고…… 예, 갑시다, 가요.”

소년은 남은 마파두부에 밥을 대충 비며 입에 밀어 넣은 다음 냉수 한 잔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지금 가 봐야 늦지 않았을지 의문이었지만 장소는 소년을 다른 나인들을 모르는 샛길로 인도하여 회장과 제법 가까운 자리까지 소년을 데려다주었다.

회장과 가장 가까운 전답의 창고로 쓰이는 방, 그곳의 창문을 내려다보면 회장이 한눈에 보였다.

“햐, 저걸 다 조립식으로 지었다 부쉈다 한다고요? 미쳤네, 진짜…….”

수백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좌석과 상, 그 사이사이를 꾸미는 꽃병과 그늘을 만드는 천막까지.

고작 일주일의 준비시간을 들여 완성했다고 하기엔 연회장의 규모가 너무나 대단했다.

“아, 저기 태감님이 앉아계시네요.”

“응? 어디요? 아…… 저기?”

황제의 자리와 가까운 곳일수록 권력이 높다는 증거였다. 소년은 황제가 오를 단상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가면을 쓴 태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가면을 쓴 채 신하들 사이에서 고요히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태감은 수많은 군상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태감님은 왜 가면을 쓰고 다니십니까? 너무 잘생겨서?”

“음…… 그것도 이유기는 한데…… 아마 조금 있으면 알게 되실 거예요.”

확실히 그 정도로 잘생겼으면 오히려 피곤할 법도 하다만. 시시한 생각을 하며 연회장을 둘러보던 소년의 시선이 일순간 한 곳으로 고정되었다.

행렬의 마지막. 키가 큰 여인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회장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입장하는 비, 다섯 황후 후보자 중 한 명.

안양비가 융단을 밟고 입장하고 있었다.

“네, 저분이 바로 안양비 님이세요.”

녹색의 비단 궁장은 금실로 봉황을 수놓아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칠색 보옥으로 장식된 비녀에 옥고리가 찰랑거리는 다양한 황금 머리 장식은 장인의 솜씨가 느껴졌다.

범인이라면 소화하지 못할 장신구를 당연한 듯이 걸친 여인은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한 분위기가 초면인 소년에게까지 느껴졌다.

그녀가 표독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태감에게서 그녀에 대한 험담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 자체의 분위기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보편타당한 미인상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그녀에게서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

그야말로 범과도 같은 인상. 날카로운 눈매와 도도하고 장엄한 기세. 어지간한 남자를 내려다보는 큰 키와 칼처럼 곧게 세운 자세.

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소년은 안양비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에 압도되었다.

“과연…… 태감님이 견제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안양비의 첫인상은 너무나 강렬하게 소년의 흉금에 남았다.

그것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모든 비가 자리에 도착하고 이미 문무관들 사이에서는 술이 몇 순배쯤 돌았을 때. 악사들이 연주를 멈추었다.

소란스러운 대화도 자취를 감추었고 지저귀던 새 한 마리까지도 숨을 멈추었을 때.

붉은 비단에 금실로 용을 수놓은 융단을 밟고 대제국의 지배자. 황제가 회장에 입장했다.

그 순간 회장의 모든 이들이, 심지어 회장의 바깥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장소까지도 무릎을 꿇고 존귀하신 용의 아들을 배알 했다.

오직 소년만이. 시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망향의 표류자만이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칠척의 큰 키에 허리가 곧고 걸음걸이가 당당하여 비할 데 없는 사내는 수염을 멋들어지게 길렀지만, 주름이나 피부를 보아 소년의 생각보다는 무척 젊은 듯했다.

굵은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에선 만인의 위에 서는 기상이 느껴졌고 신하들을 치하하는 목소리는 힘이 있어 사내의 기개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수염에 가려진 입매는.

그 날카롭고 오뚝한 콧대는.

그 강렬한 눈동자는.

가면에 가려진 태감의 것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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