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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7화 (7/314)

환관의 요리사 7화

눈을 아래로 돌리면 만발한 해당화가 화사하고 눈을 위로 돌리면 목련과 모란이 바람에 흩날린다.

담소를 나누고 있는 태감과 난화비는 마치 그들의 주위에만 따사로운 봄날의 훈풍이 머무르는 듯해 소년은 잠시 그 한순간만 허락된 광경에 눈길을 빼앗겼다.

어딘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환상적인 광경이 연출된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감각.

소년은 태감의 민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가면은 소년이 상념에 젖게 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신비로움 만을 더해줬을 뿐.

얼마 살지 않은 생에서 거의 없었던 여유를 맛보던 소년은 가면 아래로 웃음 짓고 있을 태감을 상상하며 한숨지었다.

사람이 사람의 정혈로 빚어내었다 하기엔 너무 아름답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그들이 있는 공간은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늙을 터인데. 시간이 야속하게도 흘러가는 삶의 사계절과 함께 아름다움을 훔쳐갈 터인데.

세상에 모든 아름다운 것 중에서도 시간 앞에 스러질 사람의 외모가 이리 아름다운 것은 어째서일까?

꽃은 지고 젊음은 시들 터인데.

사람이야 본능적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선망하고 질투한다지만 소년은 더 이상 외모에 신경 쓰며 남을 질투할 만큼 젊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리며 그때의 자신이 저들의 반만 닮았더라면 인생이 어찌 되었을지를 그려볼 뿐.

과연 태감의 반만이라도 닮았더라면, 요리를 했을까? 에이, 설마.

소년은 젊은 날 철없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다관에서 뿌연 차 연기가 피어올랐다. 달고 맛이 진한 케이크에 어울리는 오룡차(烏龍茶)는 복건성에서 들어온 최고급품이었다.

평소 향이 세고 맛이 강한 차를 즐기지 않는 난화비도 케이크와 어우러진 차의 맛에 반했는지 표정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이 바라 마지않던 말이 떨어졌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남은 케이크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제 시녀들에게도 한번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그 순간, 확연히 드러날 만큼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태감의 얼굴 아래쪽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소년이 한발 나섰다.

“예. 케이크와 생크림은 상하기 쉬우니 가급적 오늘 안으로 드셔야 합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등 돌리지 않고 그대로 뒷걸음으로 세 걸음 물러선 다음 떠난다.

배운 대로 최소한의 예법에 흠이 없도록 행동한 소년은 돌아가는 길에서 살짝 들뜬 표정으로 태감에게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성공 아닙니까?”

“뭐가 성공이냐. 케이크를 사수하지 못했는데.”

“……케이크야 또 구우면 될 일 아닙니까.”

“생크림이 없지 않으냐.”

“……우유야 또 구하면 되지요. 그보다, 어떠셨습니까? 난화비 님의 성품은?”

처음으로 올린 작은 성과에 눈을 빛내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지은 태감은 이내 평가를 시작했다.

“멍청한 녀석. 넌 네 의도대로 난화비가 행동했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난화비가 네 의도를 읽고 네가 바라는 행동을 했다고는 생각 못 하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첫 맛남과 그녀가 보여준 성품에 넘어간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솔직히 소년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쉽게 그녀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 태감께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그녀는 태감이 판단한 황후의 재목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신뢰하고 힘을 실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래. 나는, 그리고 폐하께서도 그녀의 인격적 고결함과 성품을 신뢰하고 있지. 하지만 그녀를 신뢰한다고 해서 그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토록 의심하시는 겁니까? 신뢰란 그렇게 가벼운 것입니까? 다른 범부도 아닌 용의 아드님과 양 태감님의 신뢰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야 하는 것이 폐하의 믿음 아닙니까?”

태감은 마치 아직은 세파에 찌들지 않은 어린아이를 보는 표정으로 소년을 굽어보았다.

철없는 어린것을 보는 듯한 뜨뜻미지근한 노인의 시선.

전생을 합치면 족히 태감의 두 배는 넘게 살았을 소년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서렸다.

그 찌뿌둥한 표정이 제법 우스웠는지 한차례 폭소한 태감은 소년에게 그의 의문을 설명해 주었다.

“그럼. 가볍고말고. 군주의 신의란 것이 그토록 무거웠다면 토사구팽 같은 말은 없었을 것이다. 혹시 난화비가 끝까지 숨겨왔던 흠이 있으면 어찌하겠느냐?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것이 다 연기였다면?”

소년은 태감의 차가운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비들께서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끝없이 의심받으시겠군요.”

“살아생전에만 의심받는 줄 아느냐? 죽고 나면 그 일가친척이 전부 조사를 받는다.

죽어서도 편치 않은 자리야. 그리고 나는, 동창이란 기관은 그것들을 끝없이 파헤치고 흠을 잡아야 하는 곳이다.”

오한이 척추를 타고 등골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더 이상의 이해를 포기했다.

여기까지만 발을 담그자. 더 이상 발을 담그면 좋은 꼴 못 보겠다는 소년의 판단은 정확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보다는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으로 가야 한다. 이 세계의 하이리스크는 신용불량자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좋게 봐줘야 깔끔하게 참수. 운수 나쁘면 죽는 것도 편치 못하게 고문당하다 죽는 수도 있다.

하지만 지위가 낮으면 기껏해야 매질 좀 당하고 쫓겨나는 정도이니 목숨을 간수 하려면 야망을 줄이는 편이 궁 생활에 이롭다.

“앞으로도 꾸준히 난화비와 자리를 만들 테니, 다양한 요리들을 해서 그녀의 반응을 엿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혹시 태감님이 드시고 싶으셔서 그런 건 아니시죠?”

“가자.”

하루의 반절이 지나고 이제는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 어느덧 하늘의 끝자락에서 황혼의 불빛이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시간. 태감은 잠시 멈춰서 그늘에 몸을 숨기고 가면을 벗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그의 얼굴에 순간 황혼의 정제되지 않은 빛이 쏟아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소년이 태감에게 물었다.

“오늘은 밥을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면을 드시겠습니까?”

“밥을 먹는다 하면 무엇이 나오고, 면을 먹겠다 하면 무엇을 내겠느냐?”

태감의 말에 잠깐 고민을 한 소년이 이내 말했다.

“밥을 드신다 하면 돼지고기 완자를 중심으로 표고와 채심을 볶고 탕도 한가지 해서 상을 차리고, 면을 드신다 하면 돼지고기와 장으로 국물을 낸 납면(拉麵)에 돼지고기를 볶고 절인 채소요리로 상을 차리겠지요.”

그 두 가지를 저울질하는 듯 잠깐 멈춰선 태감의 얼굴 위로 근심 어린 표정이 서렸다.

도대체 한 끼 먹을 식사로 뭘 저리 고민을 하나 싶었지만, 소년의 상상 이상으로 미식가인 태감에게는 중대 문제였다.

“완자라…….”

“만든다면 사희환자(四喜丸子)를 만들 생각입니다. 돼지고기에 새우살을 조금 넣어 다져 양념해 노릇노릇 튀겨내고 간장으로 달콤 짭짤하게 한 양념에 죽순이랑 함께 살짝 볶아서 녹말 물로 걸쭉하게 하여 데친 청경채랑 함께 먹으면…….”

“밥으로 하지.”

연좌궁으로 돌아가는 길. 머지않아 붉은색으로 물들 푸른 하늘 아래를 둘이서 걷는 길은 저녁 식사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 * *

소년은 연좌궁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고 태감은 소년이 만들어주는 음식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마른 것은 천성인지 소년은 여전히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태감은 최근 음식이 맛있어서인지 살짝 창백했던 피부색이 밝아지고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한창 물오른 미모에 그의 호위인 위정 ‘나으리’께서는 태감님이 가면을 쓰고 다니셔서 다행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대단하다는 호위무사라 할지라도 결국 한 손으로 열손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니.

그리고 사랑을 하는 소녀는 강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소년은 전생의 극성 아이돌 팬을 떠올리며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서류가 쌓인 집무실. 다른 이들이 한창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지만 태감은 오후의 간식을 빼먹는 법이 없었다.

오늘 간식은 얼마 전 다시 들어온 우유를 풍성하게 사용한 밀크티와 얼마 전 코코넛 밀크를 짜내고 남은 야자 과육을 소로 사용한 잎으로 싸서 쪄낸 찹쌀떡 야황빈엽각(倻皇蘋葉角)과 그냥 팥소를 사용한 두사빈엽각(豆沙蘋葉角).

나뭇잎을 벗겨내면 뽀얀 찹쌀떡이 먹음직스럽고 씹으면 설탕에 버무린 코코넛의 아삭아삭한 식감과 팥소의 푸근한 맛에 마음까지 들뜬다.

“난 이상하게 이 쫄깃쫄깃한 찹쌀떡이 좋더라. 이 밀크티라는 것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익숙해진 것은 소년만이 아니었는지 태감 역시 소년이 때때로 중얼거리는 영어에 익숙해졌다.

특히 서홍시보다는 토마토가 발음하기 편했는지 요즘은 부하들에게도 서슴없이 토마토라고 말하고 있다.

“떡 드시면 배부르시지 않습니까? 저녁을 생각해서 적당히 드시는 게…….”

“저녁 먹을 위장은 따로 있단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린데…….’

소년과 말을 하면서도 태감은 아이 손바닥만 한 떡을 벌써 다섯 개째 입에 넣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녁 시간이 되면 밥을 두 공기씩 비우는 것을 보면 자연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문득 차를 따르던 소년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태감의 등 뒤에 서 있는 환관들에게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은 안 드십니까?”

“우린 괜찮다. 태감님을 호위하는 중에 필요 이상의 음식물을 섭취하면 변소를 자주 가게 되니까. 늘 정해진 양을 정해진 시간에 먹는다.”

위정의 단호한 대답에 소년은 위정의 뒤로 서 있는 환관들을 보았다.

‘그런 것 치고는 저번에 행인두부를 만들었을 때는 마음껏 드시던데…….’

그런 것들은 아마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할 추억이라는 것일 것이다. 너무 뜨겁지 않게 우려낸 차에 따끈한 우유를 넣고 설탕을 약간 넣으며 소년은 그때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태감님. 근데 아직 난화비 님과의 다과는 예정이 없습니까?”

그 말에 여섯 번째 떡의 겉에 싼 이파리를 벗겨내던 태감이 고개를 들었다.

“왜. 보고 싶어서 그러느냐?”

“누가 들을까 봐 무서우니 그런 천벌 받을 소리 하지 마십쇼.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그 말에 피식 웃은 태감에게 차를 가져다주면서도 소년은 목덜미가 서늘한 듯이 사방을 둘러 보았다.

작은 소문 하나에 목이 저울질 되는 곳이 바로 이 후궁이다. 방금 태감의 말도 다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소년의 목이 날아갈 만한 죄였다.

“본래의 예정이라면 이제 슬슬 한번더 떠볼 때가 되긴 했지만, 예정이 변경되었다. 본래대로였다면 예정에 없었을 후궁의 연회가 있어 다섯 명의 비가 전부 모이게 되는데 만약 이럴 때 난화비를 만나게 되면 난화비가 집중견제를 당하겠지?”

태감의 말대로 그의 지위가 보통이 아니니 그를 자주 만나는 비일수록 황후의 자리에 가깝다고 여겨질 것이다.

봉비(鳳妃)들이나 화비(花妃)들이라면 그것을 잘 모르겠지만, 오상비(五祥妃)들이라면 이미 그것을 이해하고 있을 터.

비록 후궁에선 권력을 사용할 수 없지만, 후궁 밖이라면 그녀들 전부 쟁쟁한 세도가의 여식.

후궁의 밖에서라면 얼마든지 그 권력이라는 힘을 휘둘러 상대를 실각시킬 수 있었다.

“이 기회에 난화비와 부여비를 제외한 다른 세 비도 설명해 주마.”

사실은 그리 말하면서 업무를 회피할 요량이었는지 서류뭉치와 목간들을 치워버리고 소년을 앞에 앉힌 태감의 표정은 빛나 보였다.

“우선은 라하비. 서역의 우방국인 찬드라 왕국의 공주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우리말이 익숙하지 않으니 이름만 알아 두고, 두 번째는 현 후보 중 가장 친가의 권력이 강한 홍엽비다. 홍엽비는 팔군도독부의 도독(都督) 당량(當良) 대장군의 여식으로 성격이 유하고 대가 약해 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정치 암투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태감은 혀를 차며 손에 묻은 떡고물을 핥아 먹었다.

“비로서는 제 몫을 해도 황후자리를 노릴 만한 인물은 아니지. 그리고 황후의 자리에 올리기에는 외척의 세력이 너무나도 크다.”

여기서 말을 끊은 태감은 한숨을 내쉬며 여덟 번째 떡의 이파리를 풀었다.

고민이 많을수록 식사량도 늘어나는 것인지 남으면 다른 환관들에게도 줄 생각으로 넉넉하게 떡을 담아온 소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러고 나서도 저녁이면 또 밥 달라고 아우성이겠지?’

그런 소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떡을 우물거리며 태감이 말을 이었다.

“너도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어봤을 것이다. 안양비(安洋妃)의 소문을.”

소년은 이 후궁에서 소문에 둔감한 존재였다. 단순히 그와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지만 그럼 에도 나인들의 수군거림을 주워들은 적은 있었다.

다른 비들은 몰라도 안양비라는 이름만큼은 소년도 알고 있었다.

“그래 너도 알겠지. 현 황후 후보 중 가장 큰 파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안양비다. 나라를 말아먹을 악녀는 아니다만 권력을 쥐면 외척세력에 힘을 실어줘 나라를 어지럽히고 자신의 욕망을 채울 것이다. 거기에 아비가 육부의 수장 역할을 하는 이부의 상서(尙書)이니 손에 쥔 권력도 크고 거기에 딸이 황후까지 된다면 감당이 안 된다.”

역시 스트레스성 폭식이었는지 떡을 다 먹고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태감은 차에 넣어 먹을 단지의 검은 각설탕마저 꺼내 사탕 대신 입에 넣었다.

“이번 연회에선 네가 나설 일이 없으니 그 기간 동안 푹 쉬는 대신 멀리서 비들의 얼굴을 기억해 둬라. 특히, 안양비의 얼굴은 확실하게 익혀두도록.”

서릿발 같은 기세가 서려 있는 말에 소년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탕은 그만 드시죠.”

그리고 한참 동안, 설탕 단지를 사수하려는 태감과 소년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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