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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5화 (5/314)

환관의 요리사 5화

태감의 화려한 저녁 시간, 오후에 소년의 나약한 비위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이야기가 재개되었다.

막 쪄진 성도장압(成都醬鴨)을 식탁의 중앙에 배치하던 소년은 또 그 이야기냐고 얼굴을 찌푸렸다.

뼈가 쏙 빠질 만큼 부들부들하고 맛이 진한 오리찜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밥맛 떨어지지 않나?

“네 비위가 약한 게지. 다 후궁에서 살아남기 위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식이거늘, 이 이 동창 제독님이 친히 네놈의 선임 환관 노릇을 해주는데 영광임을 알거라.”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요.”

비꼬듯이 물만두에 고추기름을 올려 내민 소년의 접시를 받아들며 태감은 보기 드문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지하게 들어. 이젠 더는 평온한 그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너도 이해해야 할 거다. 내가 너에게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널 완벽하게 믿어서가 아니라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는 의미야. 없던 죄도 뒤집어쓰는 곳이 이 후궁이다. 내가 보호해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만약 네 실수가 네 가치를 능가하는 날에는.

태감은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즐거운 식사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소년이 그 정도는 알아차릴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큼은 소년 역시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기에 태감은 그 이상은 말을 아꼈다.

실제로 소년은 태감의 생각 그 이상으로 현 상황을 명확하게, 아니 조금은 과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잔혹하고 비정한 정치판! 오래전 즐겼던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스릴 넘치는 그 참혹하고 추악한 정치판이라는 장기판에 드디어 소년은 한 명의 장기 말로서 참전하게 된 것이다!

뭔가 망상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소년은 스스로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소설이나 만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발을 뺄 수는 없다.

소년에겐 이제 다른 길이 없었다.

구더기로는 죽지 않겠다. 죽더라도 사람으로서 죽겠다는 각오.

그 각오를 끝낸 소년은 오늘도…….

“그래서 오늘 후식은 무엇이냐?”

“일단 우유가 남아 행인두부(杏仁豆腐)를 만들어두었습니다만…….”

“호오, 살구씨가 들어간 두부라? 어떤 음식이지?”

“우유에 살구씨로 향을 내고 한천으로 굳힌 음식입니다. 말캉말캉하고 부드러워 먹기 좋지요. 여기에 꿀이나 졸인 팥 같은 것을 곁들이면 맛이 좋습니다.”

각오를 다져 봤자 소년이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요리였다.

* * *

도대체 그 조그마한 입에, 가늘다 못해 잘록하기까지 한 허리에 얼마나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 건지.

준비한 음식을 다 먹고도 교자를 한번 추가하기까지 한 태감은 후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듣고 나서야 아쉬운 듯 고추기름이 고인 그릇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진심으로 행인두부를 넉넉하게 만들어 두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붉은 봉황새 문양이 아름다운 사기그릇에 찰랑찰랑 흔들리는 행인두부는 아직 그 누구도 발을 내딛지 않은 순결한 설원과도 같았다.

그 옅은 미색의 행복을 받아든 태감에게 소년은 우선은 아무것도 올리지 않고 그대로 먹어보는 것을 권했다.

물론 곁들일 달콤한 것으로 꿀과 졸인 팥, 그리고 이제 막 제철인 딸기를 설탕에 가볍게 졸인 딸기 콤포트를 준비해 두었지만 우선 첫맛 정도는 살구씨의 그 오묘한 향과 은근한 유당의 단맛을 느껴주었으면 했다.

그것을 위해 일부러 식후 차도 향이 연한 것을 골랐다.

“우선 첫입은 그냥, 그다음으론 단팥, 그다음에 꿀을 드시고 마지막으로 졸인 딸기 순으로 드시면 됩니다. 중간중간에 차로 혀를 헹궈주시고요.”

“호오? 단팥이 가장 첫 번째인가?”

“예. 단맛이 가장 연하니까요.”

보통이라면 맛이 무겁고 진한 단팥이 가장 마지막으로 가겠지만 그러기엔 꿀과 딸기 콤포트가 너무 강렬하고 진했다.

태감 스스로도 타당하다 생각했는지 별 군말 없이 첫술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새하얀 행인두부가 태감의 입으로 미끄러지는 그 순간 모두가 한마음으로 태감의 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였을까?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태감이 반개한 눈을 완전히 뜬 순간.

그 투명한 눈동자가 흐려지며 한 방울 눈물이 탁자에 떨어졌다.

“이럴 수가!! 태감님이 눈물을 흘리시다니!!”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길래?!”

“젊은 나이에 벌써 태감님의 눈물샘을 뒤흔들 만한 실력자란 말인가?!!”

주변의 환관들이 마치 요리만화의 심사위원처럼 떠들어댔다. 순간 달라진 분위기에 소년이 흠칫 놀랐지만 어린 환관들은 위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들며 태감에게 몰려갔다.

“이것은…… 그래, 인간의 혀가 처음으로 접해본 가장 관능적인 촉감이랄까……?”

옷섶으로 눈물방울을 닦으며 태감은 뭐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극찬을 쏟아냈다.

“혀에서 미끄러지는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식감이었다. 떡이나 묵과는 비교할 수 없어. 첫눈처럼 덧없고 부드러운 말캉함 속에는 우유 본연의 은근한 단맛이 있다. 간이 세고 진한 요리만을 찾아 혀가 둔해진 천박한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무구한 단맛이…… 이것은 그래!! 타락한 인간들에게 내려진 신의 마지막 자비!!”

“혹시 앵속이라도 태우신 겁니까?”

소년은 진심으로 태감과 환관들의 정신을 걱정했다. 너무 장르 전환이 빨라서 도저히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후궁의 권력 구도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방금 전 태감님 스스로가 정적을 실각시키기 위해 모략을 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전에 독살당한 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이래도 되는 겁니까?

“흥, 조금 과장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건 정말 맛있는 음식이다. 네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면 당장 폐하께도 진상하고 싶을 정도야. 그리고, 고작 누가 실각당했다던가 누가 독살당했다던가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마라. 그래선 후궁에서 못살아 남지. 그냥 어디서 멍청한 놈이 또 죽었구나 하고 흘려 넘겨야 한다.”

그 말을 하는 태감의 얼굴은 수려한 용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정말로 사내다운 담대함이 서려 있어 소년은 무심코 인정하고야 말았다.

어쩌면 이 갑작스러운 소란은 서릿발처럼 차갑고 냉엄한 이 후궁이라는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소년이 너무 긴장하지 않도록 선배들로서 신경을 써준 것이 아닐까?

그걸 위해서 저런 우스운 광대 짓을 연기하는 것이라면…….

“아니! 단팥을 더하니 또 다른 맛의 지평선이!!!”

“이젠 더는 못 참겠습니다. 태감님! 저에게도 그 행인두부를!!!”

연기……하는 거겠지?

연좌궁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소란스러운 환관들의 틈바구니에서 저물었다. 결국, 소년은 자신의 몫으로 빼둔 것까지 전부 진상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 *

오늘 아침 양 태감의 조반 메뉴는 광동죽(廣東粥)이었다.

쌀을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실온에 말리면 부서진다.

부스러진 쌀에 참기름을 조금씩 스며들게 해 그대로 두었다가 냄비에 가득 팔팔 끓인 물에 넣고 강 불에서 뭉치지 않게 주걱으로 저으며 익혀준다.

물이 하얗게 탁해지고 끈기가 생기며 쌀알이 퍼지기 시작하면 30여 분을 더 끓여 완성.

이것이 죽의 기본이 된다. 여기에 파와 생강, 다진 돼지고기를 넣고 소금, 후추, 간장에 소흥주(紹興酒) 등의 갖은 양념을 하고 먹기 전에 달걀 푼 것을 넣어 2~3분을 더 익히면 완성이다.

여기에 저번에도 먹었던 두 장과 각종 절인 채소. 아침은 가볍게 먹는다고 하는 태감이었지만 그 가볍다는 뜻은 어디까지나 음식의 종류가 적다는 것인지라 양은 제법 많았다.

“오늘부터 난 점심 이후의 다과를 오상비(五祥妃)들과 함께할 거다. 그중 네가 요리를 대접해야 할 것은 둘. 난화비(暖花妃)와 부여비(芙麗妃) 이 둘이다.”

“어째서입니까?”

소년은 태감이 그녀들의 고결한 성품이나 덕 따위를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자고로 한 황실의 황후라 하면 고매한 성품으로 만백성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여인이 아닌가. 소년의 말에 태감은 코웃음 쳤다.

“그녀들이 가장 권력욕이 적고, 외가의 세력이 그나마 약한 편이기 때문이지.”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황후의 권력이 세다는 것은 곧 황제의 권력을 갈라 나눈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태감이 바라는 이상적인 황후란 실권은 없이 중요한 행사에 얼굴만 비춰줄 얼굴마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차가운 말에 소년은 한기를 느꼈다. 권력자란 전부 애욕도 사랑도 없는 비정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런 소년의 마음을 짐작한 것인지 태감은 씁쓸하다는 듯이 상위에 올려둔 가면을 매만지며 숨을 골랐다.

“그럼 난화비 먼저 설명하지.”

태감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어 입안을 촉촉하게 적셨다.

“난화비. 나이는 이제 막 스물. 출신지는 제국 최고의 항구도시인 복건성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외가의 상단을 따라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사려 깊고 총명하지만 활달한 성격이라 지금도 궁 안에서 승마를 하는 등 활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지.”

“다른 사람들이 좋게 보지는 않겠군요.”

이 시대의 여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가 정숙함 임을 아는 소년은 그런 활동적인 취미를 가진 난화비가 다른 이들에게 백안시되지 않을지 염려했다.

“아무튼, 친가는 복건성의 군권을 쥔 정이품 도지휘사(都指揮使)이고 외가 쪽은 해양무역으로 돈을 번 상단으로 복건성 일대에서 가장 큰 부를 일군 상단이지. 외모도 아름답지만, 성격 또한 상냥하고 아랫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 비이다. 보통 시녀출신인 화비도 막상 비의 자리에 오르면 시녀들을 업신여기게 마련인데 그녀는 그런 일이 없어 시녀들에게 평이 좋지.”

말만 들어보면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총명하고 거기에 성격마저 좋다면 국모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무언가 그 외의 흠이 있기 때문일 터.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물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녀는 인품도, 외모도 무엇 하나 모자란 것 없는 재원(才媛)이지만 지지기반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도지휘사의 권력은 막강하지만, 그 힘을 떨치기엔 이 경사가 너무 멀어. 그리고 해양무역으로 세를 키운 외가도 그녀의 권력 기반이 되어주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지지기반이 약한 그녀가 황후에 오르려면 누구보다도 먼저 황자를 낳아야 할 것이다.

황자를 가장 먼저 출산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확실한 명분이 될 테니. 하지만 아이란 신이 점지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폐하께서 힘을 쓰시긴 하셔야 합니다만…….”

“물론 너에게 그런 신적인 능력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네 지식을 살려서 난화비의 건강을 보다 완벽하게 하길 원하는 거지. 그리고 아직 그녀로 결정된 건 아니야.”

처음 태감이 말한 비는 총 둘. 앞서 소개한 난화비와 두 번째로 부여비가 있었다.

“부여비 또한 그녀에 못지않은 재원(才媛)이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그녀는 제국의 존경받는 대학사들에게 사사해 현재 요직에 앉은 문관들과 친분이 있다. 지혜롭기는 난화비를 꼽지만, 학문의 깊이는 부여비가 더 뛰어나지. 거기에 친가의 지위 또한 도찰원(都察院)의 우도어사(右都御司)에 있으니 직위 또한 막강하다. 그리고 부여비는 물욕에 초탈한 천생 학자 기질이기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일 것이다. 물욕이 적고 세상 명리에 초탈한 자라면 그만큼 최소한의 요구조건만 충족시켜 준다면 협력할 여지가 있으니.

거기에 난화비와는 달리 지지기반이 있으니 쉽사리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차마 참지 못하고 태감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는 여인은 어떤 분입니까?”

쓰고 독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소년이 한 질문은 태감의 가슴에 긴 가시를 박아넣는 한마디였다.

검은 가면을 으스러지도록 잡으며 쓴 잔을 받듯이 말했다.

“……나라의 앞날에 보탬이 되고 황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인이다.”

“그뿐입니까?”

“그래. 오직 그뿐이다.”

소년은 창백하게 질린 태감의 손을 보며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도 어른스럽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 대신 소년은 화제를 돌렸다.

“그럼 내일 점심 다과 때 난화비 님과 차를 드시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 내일 다과는 이인분을 준비하도록. 아, 그리고 우선은 너도 그걸 준비해야겠군.”

“그거? 뭘 말씀하시는지…….”

태감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따라 벽에 일렬로 서 있던 환관들 또한 소년의 주위로 다가왔다. 기이한 압박감을 느낀 소년이 뒷걸음질 쳤지만, 어느새 등 뒤에 서 있는 위정에게 부딪혀 도망은 무산되었다.

“너도 대외적으로는 환관으로 활동해야 하니 말이다…… 환관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것이 있지…….”

서,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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