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화 (1/314)

환관의 요리사 1화

붉게 칠한 대들보와 동으로 만든 봉황 장식이 흔들리는 처마 밑에선 아름다운 여인들의 교태에 젖은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옥구슬을 꿰어 만든 발, 장미목 가구 사이로 사뿐사뿐 걸어가는 여인들의 자태는 꽃잎 위에 앉은 나비와도 같다.

비단옷에 보석과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 하얀 분가루와 숨 막히는 향으로 치장한 황제의 여인들이 사는 곳.

후궁(後宮).

오직 여인과 거세한 남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금남의 구역. 그곳에 멀쩡한 몸으로 들어올 수 있는 남자는 용의 핏줄을 이은 황제와 그 혈육뿐.

대대로 자손이 귀한, 특히 남아를 보기 어려운 황제가 한시라도 빨리 후계자를 만들 수 있도록 전국은 물론, 인접한 동맹국에서까지 가리지 않고 미녀를 긁어모은 여인의 화원은 그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복마전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큼 암투와 모략이 기어 다니는 뱀굴이었다.

그곳에선 숨을 흐트려서도 안 되고 말실수를 해서도 안 되며 세 끼 식사는커녕 다과를 먹을 때마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흐트러진 자세에 질타를 받고 말실수에 목이 잘리며 한 끼 식사에 독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복마전에서 거세하지도 않고 여인은 더더욱 아닌 소년이 살고 있다면, 그는 분명 용의 핏줄을 이은 동궁(東宮, 왕세자)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용의 핏줄의 적통.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누리지 못할 것이 없고 취하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의 위에서 군림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누구나 부러워하고 그 이전에 두려워할 존귀한 자일 것이다.

“홍화전 동춘(東春) 정원에 난 잡초를 뽑고, 그 이전에 사원국(司苑局)으로 가 비료로 쓸 것들을 가져다 두어라.”

황궁의 시설과 청소를 담당하는 직전감의 환관이 소년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소년은 차가운 돌바닥의 그늘진 응달에 꿇어 엎드린 채 미동도 하지 않으며 대꾸는커녕 숨소리마저 내지 않으려 했고 명령하는 환관은 소년에게서 등을 돌린 채 먼 곳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에게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각인하듯이. 서로가 눈길 한번 마주칠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말을 끝내자 환관은 지체 없이 자리를 피했다. 그 동작이 마치 부정한 장소를 뜬다는 듯이 날랬다.

환관이 사라지자 소년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낡아 빠져 기운 흔적이 많은 옷을 걸친 남루한 소년은 왼 다리를 절면서도 익숙하게 그늘진 곳만을 골라 이동했다.

소년은 구더기였다.

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벌레. 사람 눈에 보이면 밟혀 죽는, 하지만 궁 밖을 벗어날 수도 없는 존재.

그는 사람 눈에 띄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배운 것이 그것이었고 한평생 그 명령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는 이 후궁의 용의 핏줄이 아닌 유일한 거세하지 않은 남자였다.

* * *

잡초를 정리하고 후궁에서 나인들이 먹을 채소를 기르는 사원국으로 가 비료로 쓸 퇴비를 사원국 외곽의 텃밭으로 옮긴다.

간단해 보이지만 어린 소년 혼자서 하기에는 벅찬 일이고 꼬빡 하루는 걸려서 할 일이었다. 실제로 오늘 그가 할 일은 그것이 다였다.

궁내 나인들의 시선을 피해 그늘진 곳으로만 이동하고 만약 눈이 마주치거나 할 것 같으면 그늘진 곳으로 엎드려 시선을 피한다.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렸다가 고개를 내민 소년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잡초를 다 뽑고 나면 정원의 큰 바위 뒤 그늘진 곳에서 가벼운 점심을 때운다. 별것 아닌 보리쌀을 섞은 주먹밥 한 덩어리.

속 재료는 살짝 맵게 무친 자차이(榨菜, 갓과의 식물을 소금에 절인 것) 약간.

아무리 구더기라지만 그래도 궁중 나인들이 먹는 식재료를 받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보리보다는 쌀의 비율이 높았다.

짭짤한 자차이를 반찬 삼아 게눈 감추듯이 밥 한 덩어리를 먹고 나면 일부러 물을 뜨러 갈 필요 없이 정원에 흐르는 인공수로의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소년은 문득 수로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히죽 웃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매부리코. 얇은 입술. 훌륭한 간신배의 얼굴이었다. 불편한 천형은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일이 다 끝나면 후궁 외벽의 그늘을 따라 사원국을 향해 절룩거리며 걷는다.

도착하면 사원국 외곽의 비료 더미를 작은 수레로 한 번에 옮길 수 있을 만큼만 실어 옮긴다.

결코, 빠르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시간이 되는 만큼, 게으름 피우진 않더라도 특별히 노력을 더 기울이지는 않는다.

일은 나인들이 하나둘 처소로 들어가고 처마 끝에 등을 다는 저녁이 될 때까지.

외궁의 하인들이 후궁의 경계선까지 식재료를 운반하면 황제의 진선(進膳, 황제의 식사)을 담당하는 상선감에서 식재료를 가져가고 그 후 나인들이 먹을 식재료가 분배된다.

후궁의 나인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는 내식방의 식재료 창고에서 그가 먹을 오늘의 저녁거리를 가져오는 것이 그의 하루 마지막 일과였다.

오늘 그의 저녁 식사 거리는 백채(白菜, 중국 배추)와 제법 신선한 작은 향어 한 마리였다.

식재료를 보는 소년의 우묵한 눈에 생기가 돌았다.

향어의 아가미를 들춰보고 비늘이 붙어 있는지를 확인하며 소년은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꽤 괜찮은 향어군. 살이 단단한 걸 보니 아주 신선해. 역시 황궁은 황궁이야 자투리 식재료도 품질이 좋은 걸 보면.”

재료를 품에 안은 그가 달음박질을 쳐 그의 처소로 향했다. 후궁 내원 가장 바깥쪽의, 본래는 직전감의 창고로 썼던 빈 건물이 그의 처소였다.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허름하기 그지없어 오두막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 소년은 이곳에서 십 년이 넘게 살았다.

도착하자 문을 걸어 잠그고 부싯돌로 아궁이에 불을 땐 그는 찌그러진 철과를 불에 올려 달궜다.

땔감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큰불을 쓰기 어려워 달궈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가 나간 채도(菜刀, 중국 식칼) 한 자루를 도마에 올린 소년은 그 비루한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행복해 보였다.

“자, 이걸 어떻게 요리한다?”

신선한 향어이니 그대로 찜통에 쪄서 생강 간장으로 향을 내고 끓는 기름을 살짝 끼얹어 청증향어(淸蒸香魚)를 만드는 것도 좋겠고 아니면 튀겨서 새콤달콤한 탕추를 끼얹는 것도 좋겠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면 탕추 소스를 끼얹고 가는 용수면을 튀겨서 함께 먹으면 정말 맛있지.

바삭하게 전분 가루를 입혀 튀긴 다음에 식초 간장에 새콤달콤하게 조려서 녹말 물로 걸쭉하게 한 다음에 생강을 다져서 뿌리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년의 꿈일 뿐이었다. 설탕이나 꿀 같은 값비싼 감미료는커녕 간장이나 식초도 넉넉하지 않은 소년의 살림살이에 식초와 설탕을 넉넉하게 사용해야 하는 탕추 소스는 언감생심이었다.

소년의 살림살이에 어울리는 조리법은 어디까지나 굽거나 끓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향어는 끓여도 맛있는 생선이었다.

일단은 크고 살집이 많아 발라먹기가 편하고 기름이 많아 끓이면 달고 진하다.

향어로 탕을 끓인 다음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이 제일 포만감 있고 현명하게 향어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머릿속에서는 새콤달콤한 소스 맛이 떠나지를 않았다.

미련임을 알면서도 소년의 혀끝에는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향어의 기름진 살과 새콤달콤한 탕추 소스가, 아릿한 생강 향과 아삭하게 튀겨낸 용수면 촉감이 되살아났다.

소년은 요리사였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중국 요리를 전문으로 배운 중화 요리사였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오랜 세월 중국 본토에서 요리를 배워 마침내 자신만의 가게를 개점하게 되는 그 기쁨의 순간에 사망한 불운한 사나이였다.

거기에 기껏 되살아났는데도 후궁의 음습한 곳을 기는 구더기로 태어났으니 이 정도면 불운이란 표현조차 파랗게 질려서 도망갈 정도가 아닐까.

이름마저 잊히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다리를 다쳐 왼쪽 다리를 절게 된 소년에게 그나마 남은 즐거움이라 한다면 먹는 것 정도였다.

그렇기에 소년은 오랜만에 들어온 이 횡재를 놓칠 수가 없었다.

탕추가 안 되면 최소한 튀기기라도.

물론 식재료를 풍덩 빠뜨릴 만한 기름 따위가 있을 리가 없으니 튀긴 다기보다는 ‘지진다’에 가깝겠지만, 그것이 어딘가. 기름 한 방울 허투루 사용할 수 없는 소년에게 이것은 큰 모험이었다.

손질한 향어를 밀가루 옷을 입혀 튀겨내고 남은 기름에는 마늘과 약간의 파 등을 볶아 향을 내 먹기 좋게 썬 백채를 볶아낸다.

원래대로라면 기름을 따라내고 팬을 깨끗하게 씻은 뒤에 만들어야 하지만, 그 정도 낭비를 할 만큼 풍족한 형편이 아니다 보니. 이마저도 큰 사치였다.

최소한의 맛을 내고 싶었기 때문에 향어구이에는 몇 알 남지 않은 산초로 향을 냈고 밥은 보리밥이 아닌 하얀 쌀밥이었다.

이 정도면 일반적인 환관이나 나인에게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먹기 힘든 식사였다.

흰 쌀을 박박 긁어 만든 하얗고 고슬고슬한 쌀밥에 산초로 향을 낸 향어구이. 백채 볶음.

“이 정도면 훌륭하지.”

지금 당장 뜨거운 향어 살에 취하고 싶었지만 먹기 전에 찬물 한 바가지라도 퍼 둘 생각으로 소년은 밖으로 향했다.

후궁의 우물에서 떠온 물은 차를 우려내지 않아도 흙내가 나지 않아 식수로 쓰기 좋았다.

소년이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을 제외한 방문객이 없었던 그의 오두막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맛있군. 바삭바삭하게 튀긴 향어에 산초 향이 잘 어울려. 밥도 고슬고슬하니 윤기가 돌고. 양념이 과하지 않은 볶음도 좋아.”

남성이라 하기엔 조금 가늘고 여성이라 하기엔 굵은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린 순간 소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면서도 눈을 흘겨 바라본 자는 환관의 복장을 한 청년이었다. 아니, 정말 청년일까?

기이한 자였다. 사내인지 아니면 가슴을 동여매 숨긴 여성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 환관은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이하게도 새카만 흑단 재질에 무늬 하나 없는 가면은 고정하는 끈 따위도 없이 환관의 얼굴에 붙어 있었다.

십 년이 넘게 후궁에서 밑바닥을 기어온 소년도 이렇게나 기이한 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소년은, 그가 무척이나 미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가면의 아래로 드러난 고상한 백자 같은 희고 가는 턱선과 앵두 같은 붉은 입술.

남성용 비녀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흑단처럼 검고 사슴처럼 긴 목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환관이 걸친 복장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문외한인 소년이 보기에도 보통이 아닌 비단 재질은 어지간한 환관이 걸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허리띠는 대모갑에 칠보 장식, 걸친 팔찌며 비녀 끄트머리에서 흔들리는 붉은 홍옥 하며…….

최소 십이감 중 한 곳의 우두머리인 태감(太監), 그중에서도 환관을 총괄하는 사례감(司禮監)의 사례태감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궁의 모든 환관을 대표하는 자리인 사례태감이라고 하기에는 그 차림새가 지나칠 만큼 비범해 소년은 속단할 수가 없었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바닥에 엎드린 소년을 굽어보며 향어의 뼈를 바르던 가면 환관의 입꼬리가 생긋 활처럼 휘었다.

가면 아래의 입꼬리만 올라간 것인데도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오두막 내부는 꽃이 피어오르고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화사해졌으나 바닥에 이마를 붙인 소년은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네가 바로 그 아이로구나. 명부에 적히지 않는 노비. 이 후궁에서 십 년을 넘게 살았다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