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조선 제국
마한공주 부여은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총리 자리에서 내려오시면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글쎄. 부인들과 여행을 다니고 싶구나."
아내들과 다 함께 떠나는 여행도 즐거울 것 같다.
내 자식들은 대부분 관직에 진출했다.
명목상 황위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낫다는 생각 같았다.
"이 귀여운 조카의 곁에서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이제는 너의 시대가 될 것인데. 아직도 이 숙부에게 의지하려 하느냐?"
"그래도."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다만 나는 비선 실세가 되기 싫은 인물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네가 필요하면 도와주기는 하겠다만, 마냥 나에게 의지해서는 지도자로서 흔들릴 수 있음이다."
"예. 숙부님."
얼마 후, 장관들에 의해 새 총리가 선출되었다.
마한공주 부여은이 연방의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평양에 있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마누라들을 끼고 있었다.
"마한공주가 잘하겠습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문제는 자식놈이 아닌가?"
문제는 황위가 좀 애매하게 되었다.
"광이도 설마 총리부에서 일한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따지고 보면 황제가 실권도 없는 자리니 어쩌겠습니까."
실권 없는 황제는 굳이 할 이유가 없겠지.
아이들이 나를 닮아 그런지 좀 활동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소온이 가슴을 쳤다.
"광이는 그나마 관직에라도 진출했죠. 그런데 제 자식은 무슨 상인이 되겠다고!"
"뭐, 그래도 자식이 아닌가."
"정말 제가 속이 터져요! 속이!"
심지어 소온이 낳은 자식놈은 초원을 다스리라니까 귀찮다고 상인이 되어버려서 소온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했다.
뭐, 초원을 거란 황실 출신이 다스리게 된다면 아마 다시 거란의 나라를 세우려는 불손한 무리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이 시대엔 상인도 나쁘지 않다.
"애초에 백제 황실은 본래 호족 가문에서 시작되었으니. 뭐, 내 자식이 어딜 가든 잘 크기만 하면 좋지."
애초에 견훤 집안의 뿌리를 아직도 알지 못한다. 거란도 본래는 그런 쪽이다. 결국 무슨 직업을 가지든 잘 크면 그만이다.
"그래도 설마 고려 황제의 아들과 우리 딸을 혼인시키다니요. 고귀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근친은 어쩔 수 없으나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혈통을 통합할 좋은 기회니까."
다음 대에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혈통이 될 것이다.
"한동안은 또 고려 황제께서 상당히 힘드시겠습니다."
원래 대연화는 황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연방이 새롭게 변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남게 되었다.
"어차피 장관들의 결정을 총리가 수락하면 황제는 옥새만 찍으면 되는 거니까."
소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삐죽 입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황제께서는 총리부에 처음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음, 그렇지."
황제는 총리부가 처음이다.
이왕이면 내가 지켜보는 것도 좋겠지.
"한번 가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리하시죠. 데려오세요."
부여은은 황실이 통합되면 내가 하려 계획했던 일들을 시행하고 있었다.
수도를 아예 평양으로 통합시켰다.
연방과 제국의 수도가 된 것이다.
총리 부여은이 대연화에게 옥새 찍을 걸 잔뜩 줬더니 신음을 흘렸다 한다.
당연히 총리부 회의에도, 실권은 없지만 황제가 참여하게 된다.
총리부에서 황제는 장관들처럼 의견을 낼 권한을 가지고, 총리가 다수의 의견으로 논의를 끝내면 황제가 수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번 총리부로 가서 직접 보기로 했다.
* * *
"고려와 백제 양국의 황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씨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총리부의 회의를 참관하니, 터질 것들이 터졌다.
성씨 문제는 역시 터질 문제라고 여기기는 했는데.
"당연히 대씨로."
"아니, 부여씨지요."
역시 여기서 또 갈리는구나.
황실을 통합하는데,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되면 또 왕조가 갈릴 것이 우려된다.
그렇다고 2 황조로 유지하기에는 연방이 언제고 나뉠 수 있으니 위험하다.
"그래도 수백 년간 나라를 이어온 대씨가 낫지 않겠소?"
"두 나라 모두 부여의 명맥을 이었으니 부여씨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게다가 연방 수립을 주도한 것은 백제가 아닙니까?"
"황제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여기서 새로운 방법이 제시되었군.
그래. 차라리 그편이 낫다. 어느 한쪽을 따라가면 결국 황가가 싸우게 되는 법이니까. 그러니 아예 성씨를 통합해야 한다.
"아예 성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어떤가?"
"우리가 있는 이 땅은 청구입니다. 중국에서도 동북방을 청구라 불렀죠. 하여 청씨가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중국이 우리를 이르는 말이 아닙니까? 중원을 중심으로 동북에 있는 땅을 청이라 한 것입니다. 이제 중원이 아닌 우리 예맥한이 중심인데 굳이 중원의 오행설을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토론 아주 마음에 든다.
"숙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총리 부여은이 대뜸 내게 바통을 넘겼다.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넘겨.
그 바람에 장관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그래. 뭐 나쁘지는 않다.
따지고 보면 중국을 기준으로 삼았다 해도 우리 것으로 만든 다음, 우리가 기준이 되면 그만이다.
오히려 중국을 겨냥한 것이 되겠지.
이제 천하의 중심은 청구라고 말이다. 그러니 나는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나는 청씨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비록 중원이 우리를 이르는 말이라고 해도, 우리가 청으로서 천하의 중심이 된다는 뜻으로 지어도 되지 않겠느냐."
"나 역시 숙부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게다가 일부 기록에서는 청구를 전설의 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천하의 중심. 중국인들이 전설의 땅이라 말하는 이 동방의 주인으로서 청씨도 나쁘지 않다 생각합니다."
부여은은 신검과 달리 나를 쏙 빼닮았구나.
"그렇다면 옛 고구려의 고씨를 잇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한 장관이 다른 의견을 냈다.
고연화, 청연화, 대연화. 음, 확실히 청은 처음에 나온 성씨지만, 영 이질적이란 말이지.
"고씨도 일리는 있군요. 백제나 지금의 고려 모두 옛 고구려에서 나왔으니 고씨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황실의 성씨를 바꾸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고씨와 청씨. 꽤 의견이 갈리기는 했으나, 결국 갑자기 튀어나온 청씨보다는 고씨가 우세했다.
결국 황실의 성은 고씨가 되었다.
"황실이 통합되었으니, 이제 연방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국호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을 잇는다는 뜻에서 조선은 어떻습니까?"
설마 여기서 조선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조카가 제법 잘한다.
무려 단군조선을 이은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직접 국호를 정하는 거지. 원 역사의 이씨 조선은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두 국호 중 하나를 선택해달라 해서 조선이 된 것이다.
알고 보면 명나라를 엿 먹이면서 조선을 국호로 정할 수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솔직한 말로 결국 독자적으로 정했다기에는 좀 찝찝한 국호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조선이란 국호는 자주국으로서 스스로 국호를 바꾸게 되는 것이다.
"일리가 있습니다."
"황실의 성씨는 고씨, 국호는 조선. 완벽합니다. 그럼 조선의 황제께서는 고려의 태왕이자 가독부, 일본의 천황, 유목민족들의 대칸. 모두를 겸하셔야 합니다."
이야, 대단한데. 내 마누라가 정말 어마어마한 황제가 된 격이 아닌가.
가만히 보니 성까지 확 바뀌게 된 대연화는 무척이나 수심이 깊다.
"그럼 중원의 황제와는 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격이 더 높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호칭은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같은 황제라도 상대가 조공을 바치면 자연스레 상국과 제후로 나뉠 것입니다."
그렇게 되겠지. 요와 송이 그러했고, 금과 송이 그러했다.
그러니 가능한 영역이다.
"또 저 서쪽의 로마라는 나라는 천년을 넘게 대제국으로 군림해왔습니다. 그들의 안정적인 통치제도도 들여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꽤 그럴듯하다.
확실히 로마의 것을 들이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동방에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다만, 계속된 전쟁과 이제 막 제국을 이룬 시점에서는 로마의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으로 조카가 주관한 총리 회의는 꽤 성공적이었다.
"숙부. 이 조카가 주관하던 총리 회의는 어땠습니까?"
"음. 좋았다. 앞으로도 그리하면 될 것이야."
이제 이 삼촌은 더는 바라는 것이 없단다.
이제는 내가 없어도 잘 될 것 같다. 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데 아까 왜 내 의견을 물어본 거냐?"
"아, 이왕이면 참관하러 오셨으니 한 번은."
그런 것치고는 나에게 의지하려 한 것이 좀 문제가 된다.
"속내는?"
"숙부가 안 계시면 좀 불안합니다."
"어쩔 수 없군."
"감사합니다. 숙부!"
이거 내가 비선 실세 노릇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내가 없어서 불안하다면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떻게 되려나.
어쩔 수 없이 한동안은 지켜보기로 했다.
부여은이 총리로 있는 기간에는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어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예맥한의 문화가 크게 발전했으며 유목민족들과의 문화 융합 및 서역의 의학 도입으로 인한 의학의 발전은 민족의 통합과 수명을 증가시켰다.
대연화. 아니, 고연화도 이제는 황위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평양에 있는 내 저택에서 함께 살고 있다.
나라는 더욱 풍요로워졌다.
"막상 역사를 바꾸니 이상하군."
한반도에 갇혀 있던 작은 역사가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이제는 연방. 아니, 조선은 저 서역과도 교역하며 동양의 대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막상 바꾸고 나니 허탈하다.
기쁘기는 기쁜데, 원 역사를 미리 안 덕에 이렇게 제국을 이루지 않았나.
"그러게 말입니다."
"어?"
"네?"
내 옆에 앉아있던 요시코가 조금 전에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조금 전에 무슨 말을?"
"잘못 들으셨겠지요."
요즘 들어 요시코가 유난히 능글맞다.
아직 귀가 침침한 것도 아닌데. 좀 전에 내 말에 동조하지 않았나?
그런데, 기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참 기이한 일이로군."
"무엇이 말입니까?"
"이상하리만큼 부인들이나 나나 늙고 있지 않은 듯하니. 수상하지 않나?"
요시코와 함께 이 자리에 있는 소온과 고연화를 쳐다보니 두 사람도 싱긋 웃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 다들 쉽게 늙지 않는다.
처음에는 쑥쑥 커서 아이도 낳던 소온도 어느 순간 나이를 잘 먹지 않는 것 같다.
"그러게 말입니다?"
다들 뭐 서로 짜기라도 한 건지 나 빼고 자기들끼리 웃고 있다.
팔자 편하다. 늙지 않는다고 칭찬하니 그리도 기쁜가.
그럼 이제 내 할 일은 전부 끝났으니 쉬어도 되는 건가.
뭐랄까, 다시 쉬기만 하니 몸에 살만 붙는 느낌이다.
하도 움직이기만 해서 그런가. 어딘가로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불편하다.
"나라는 날이 갈수록 풍요로워지고, 여전히 중원은 혼란만 가득하며 세상 어디에도 연방 같은 나라는 없지요."
"음."
맞지. 동아시아는 사실상 한국이 먹은 거다.
이제 저 북아메리카든 어디든 신대륙 개척하게 만들어야지.
유럽 열강보다 먼저 먹어야 한다.
가만, 내가 미리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