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고이면 썩기 마련
후진의 상황이 심각하다. 지금 석경당을 대신하여 황위에 오를 인물도 마땅치 않다. 황족의 혈통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거 그냥 아예 왕조를 바꾸는 것은 어떤가?
"차라리 이참에 후진을 아예 점령해버리시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들의 인구가 얼마더냐? 중원의 그 수많은 한족이 예맥한에 뒤섞여 연방이 중원계 국가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북방의 유목제국들은 중원을 점령하는 대업을 이뤘으나 결국 중국의 문화에 흡수되어 모두 중화가 되었다.
물론 청나라는 변발이나 호복을 입게 하는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훗날에는 전부 중국에 동화되어 중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해버렸다.
나는 그런 꼴을 보지 못한다.
중국을 먹더라도 중국이 조금 더 피바람이 불어 안남인 베트남이 넘볼 정도로 약화되었을 때. 나는 그때를 노리고 싶다.
나는 장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후진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진에서 급보가 도착하였습니다."
평양으로 돌아와 후진과의 외교를 담당하던 관흔이 소식을 가지고 왔다.
"급보라니 무슨?"
"후진의 석경당이 그만 죽었다고 합니다."
"음. 그런가."
뭐 살아나지 못하면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
문제는 이다음이다. 아마 우리에게 반발하는 정권이 세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반란에서 반연방 세력은 모두 축출되었으니까. 그렇다면 상유한이 뭔가 결단을 내리겠지.
스스로 황위에 오른다든가 말이다.
"조금 더 지켜보자."
아마, 조금 더 기다려 보면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예를 들면 지금의 내게도 보상이 새롭게 주어진다든가.
[바다를 장악하라! 업적달성!]
[중원을 손바닥 안에! 업적달성!]
[당신의 업적에 신들의 가슴이 웅장해졌습니다. 그 신기가 빗발쳐 연방에 무한한 영광이 뒤따를 것입니다!]
[후진의 친연방파 상유한이 측근들에 의해 후한의 새 황제로 옹립되었습니다!]
오, 이번 보상은 조금 이상하다.
보상치고는 좀 짠 편이 아닌가? 아니, 석경당을 쳐내고 유지원이 황위에 오른다면 이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뭐 결국은 보상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교통통신과 무기가 발달한 세계면 모르겠으나, 이 이상 저 서쪽으로 점령하려 든다면 연방이 유지되기 현실적으로 힘들다.
말 그대로 연방이기에 다른 나라를 넣을 수도 있지만,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질 것이다.
뭐 그냥 땅만 넓혀 나는 정복 군주라, 연방은 대제국이라 것도 알려지는 것은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중원에서는 새로운 소식이 연달아 평양으로 올라왔다.
"각하! 상유한이 새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래. 뭐 신이 그랬으니 황위에 올랐을 것이다.
나라 이름도 한나라 그대로 갈 테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관흔에게 슬쩍 물었다.
"나라 이름은 한이고?"
"어떻게 아셨는지요?"
"그냥 뭐 그럴 거 같았네. 그래서?"
상유한은 연방을 상국으로 생각하니, 우리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후한이 남아주는 것이 좋지.
아마 한나라는 이제 역사에 상씨의 한나라라고 해서 상한이라고 알려질 것이다.
"산둥반도의 지배권을 인정할 테니 한나라를 승인해달라 하였습니다."
"음. 그렇겠지."
나라가 새로 세워졌으니 전략 수정이 필요하기는 하다.
일단 독자적인 연호는 그래도 수용해야지. 연방을 직접 상국으로는 아니라도 황족들을 연방의 학교로 보내게 해야 한다.
국호가 한나라인 것은 굉장히 마음에 든다.
한족의 나라니 한나라. 뭐 상유한이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다만. 나쁘지 않지. 고조선을 멸망시킨 그 한이 지금은 연방의 조공국이나 다름없는 위치가 된 것이니까.
"한나라도 조공체제는 유지해야 합니다."
"오히려 석씨에서 상씨로 바뀌었으니 이걸 이용해서 조금 더 뜯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관들도 저마다 의견을 냈다.
지금 한나라의 상태로 볼 때 더 뜯어내기는 힘들 테고. 차라리 지금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교역을 위한 통행권, 황족들의 연방 중앙학교 입학, 세폐 등만 유지하면 연호를 비롯해 다른 것은 전부 인정해준다고 하지."
그게 가장 낫다.
중원의 문제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면 내 문제가 남았다.
"내가 지금 백제 황제도 겸하고 있던가."
황위는 얼떨결에 내가 받았다. 그러나 백제 황제보다는 총리로서의 이미지가 강해 황제의 자리가 묻힌다.
그냥 군주제를 아예 없애버릴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습니다."
"폐하와 각하. 둘 다 되시는군요."
"뭐, 어쩌다 보니라는 게 맞겠지."
이대로 그냥 황실을 폐지하고 대백제 황실로 형식적으로 남겨만 둘까 생각 중인데. 그러자면 고려도 걸린다.
어쨌든 총리의 자리는 내려놓도록 할까.
"슬슬 내려놓는 것도 좋겠군."
연방의 총리로 이 정도면 많이 해 먹은 것 같다. 나라를 이 정도로 이끌었으면 나름대로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예? 아직은 정정하지 않으십니까."
그래. 나는 아직도 젊다. 어쩌면 신이 뭔가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내 외관은 꽤 젊은 편이다.
"음, 그래도 좋지가 못해. 나는 내가 할 일을 다 한 기분이거든."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로마의 정치 제도를 보니 지금의 연방은 총리가 집정관 같은 느낌이다.
그것도 한 명이니 오로지 독식하는 형태다.
이게 계속되면 내 이후에는 결국 새로운 왕조로 탈바꿈할 수 있다.
그래서 입헌 군주제로 남겨두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신분제는 타파하였으나 연임으로 어느 정도 제한을 두는 것이 맞다. 두 황조가 존재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황제를 꿈꾸는 자도 있을 테니까.
"안 됩니다. 총리께서 물러나신다면……."
"나도 알고 있네. 체제가 불안정해지겠지. 그래서 최소한 내 다음이 준비될 때까지는 총리 자리는 유지할 생각이네."
중원도 이제 혼란기가 계속되고 천하에 오직 연방만이 태평성대를 유지하는 대국이다.
물론 중원의 사정에 개입할 날이 앞으로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을 것이다.
초원을 중심으로 동서양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연방에 부족한 지식과 기술들을 들일 수 있었다.
로마에서나 볼 수 있는 공중목욕탕을 비롯해 이 시대에 구현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상하수도도 만들고 화장실 같은 것도 정비했다.
나날이 나라가 풍요로워지니 백성들도 여유롭게 되었고, 평양과 같은 대도시들에는 찻집이라든가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해져 사람들의 오락거리가 늘었다.
법률도 로마와 중원의 것을 들이고 제대로 정비, 통합하여 모든 백성이 연방의 법령에 속하게 하였다.
그렇게 꽤 세월이 흘렀다.
총리부에서는 늘 그렇듯 국가의 정책을 논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번에는 조카인 마한공주도 참여한 회의다. 무려 외교부 장관의 자리에 올라 이 자리에 있었다.
"남당이 군대를 크게 일으켰다고 합니다."
"중원의 상황이 급변하면 저희도 참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필요하면 나서기는 해야겠지.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농업도 좀 더 개발, 이앙법의 시작으로 인구도 크게 늘었으나 연방은 군사력만 유지하면 되지 굳이 중원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잠깐 뜸을 들이며 장관들을 지켜보는데, 마한공주가 입을 열었다.
"아직은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음, 그럼 어떻게 나서야 할까. 마한 공주의 반응이 궁금하다.
"공주께서는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남당이 화약 무기를 개발했다지만 그 수가 미미합니다. 이주를 통해 오월과 민에 이전에 우리가 사용하던 화약 무기를 싼값에 넘기죠. 그렇게 하면 남당을 견제하고 오월과 민으로부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맞는 말이다.
지금은 국익을 볼 때다. 제해권도 장악한 지금 굳이 육지로 중원의 전쟁에 끼어드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냥 구식 화약 무기를 팔아먹는 것도 좋겠지.
"기술 유출의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화약의 존재는 중원도 오래전부터 아는 일. 언제고 저들도 개발할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이윤을 보는데 주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무기를 얻음으로써 의존하게 만든다면 저들 스스로 개발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음, 저것도 맞는 말이다.
개발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사는 것이 더 싸게 먹히는 걸 알려주는 거지.
그사이 우리는 더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이제 막 화약 무기 개발에 들어간 남당보다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도 차지하고 있다. 화약 보유량도 만만치 않지.
마한공주의 뜻대로만 된다면 그냥 우리는 무기만 팔면서 중원의 인구조절 및 전쟁을 지속시킬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더 있다.
"남당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북방 초원 민족들의 문화가 너무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유목민족들의 문화 유입.
변발은 아니더라도 호복이나 장신구라든가 여성들의 머리라든가. 그런 게 취급 유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가만히 마한공주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본래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우리와 한뿌리입니다.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여 우리 식대로 바꾸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은 한족의 문화입니다. 후한과 교류하면서 한족의 문화가 연방에 들어오고 있으니 이를 경계하고 자국 문화를 더 널리 장려해야 할 겁니다."
마한공주가 제법 보는 눈이 있다.
중원의 문화가 유입되면 곤란하지.
"각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한테 바통이 넘어왔다.
"마한공주의 말이 맞다.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민족들은 본디 다 같은 북방 민족의 혈통이 아닌가. 우리 예맥한도 마찬가지. 다만 우리 문화에 저 유목민족들의 문화가 흡수되도록 잘해야지."
적당히 초원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우리 것으로 만들려면 문화도 수용해야 한다. 저들과 우리가 한 핏줄이라고 선전도 해야 하고. 만일 그러지 않고 차별한다면 후일 몽골처럼 들고일어날지도 모른다.
마한공주가 제법 진심이라서 다행이다.
나는 총리부에서 장관들의 회의가 끝나자 따로 마한공주를 불렀다.
"흐음, 대단하구나. 역시 형님의 딸이다."
"낳아주신 분은 돌아가신 아버님이시지만 제 인생의 아버님은 숙부뿐입니다."
마한공주는 꽤 솔직한 아이다.
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하여 아비처럼 여기는 조카다.
지금까지 봐온 대로라면 나쁘지 않다.
게다가 내가 싫고 좋고의 문제를 떠났다.
"내가 뭘 해줬다고 하하. 그래. 장관들 대부분이 너를 인정했다는 소리지."
장관들도 인정을 했다.
심지어 다음 총리 후보로는 마한공주 외에는 찾기 힘들다고 한다.
장관들이 모여 선출하는데 뻔할 뻔 자겠지.
"예. 숙부께서 소녀가 후광 때문에 지지를 받는다 생각하신다면 쳐내도 됩니다."
뭐하러 그러나. 귀찮을 뿐인데.
게다가 머리는 나보다 더 좋으니, 나보다는 이제 마한공주를 비롯한 젊은 세대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다. 애초에 호족들의 자식들은 더 그러하지 않냐. 너는 같은 피를 다 떠나서 충분히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마한공주는 지위와 후광을 떠나 충분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내정을 관리하는데 제법 열심이다. 외교부를 이용해 능숙하게 중원을 요리하고 있고, 문화부에서는 백제와 고려의 문화통합을 꿈꾸고 있다.
솔직히 내가 여자라면 마한공주 정도가 아닐까 그리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나와는 다르게 마한공주가 더 정의롭지. 아비가 신라인에 의해 죽고 상당히 냉정하게 변한 듯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
"그래. 신라인에 대해서는 적당히 하고."
"네. 그러나 연방 중앙정계에는 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완전히 연방인으로서 따라야 합니다."
"음. 그래야지."
그 문제도 차차 해결될 것이다.
어차피 원 역사에서도 신라인들은 결국 고려에 동화되었으니까.
백제가 통일하면서 신라에 반감이 크던 백제인들의 한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결국 연방의 아래에 통일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