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바다를 가져라
서경이 되어버린 임황부는 이전 거란놈들이 살 때와는 다르게 발전시킬 생각이다.
"그러면, 임황부는 고려, 백제, 일본인들로 채우지."
"서역과 교역하는 장소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음, 나쁘지 않겠군."
임황부를 고려의 서쪽 도시로, 서역과 중원, 삼한의 교역장소로 사용하면 딱일 것이다.
장관들도 제법 긍정적인 반응이다.
"서역의 상인들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고려에서 진행된 줄 압니다만. 교역품을 늘려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고려로 한정되었으나, 이제는 연방이 되었다. 그러니 교역품도 그만큼 더 많아져야 한다.
"서역 사람들에게 무엇이 좋겠습니까?"
"도자기와 인삼이 어떤가."
한국은 역시 도자기와 인삼이 아닐까.
훗날 도자기는 일본에게 뜯기지만 인삼은 끝까지 독점했다.
"인삼. 나쁘지 않습니다."
"도자기는 삼한의 것이 최고지요."
도자기는 모르겠지만, 인삼은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고려삼, 백제삼, 신라삼 등등.
삼국시대부터 유명했다고 하더라. 조선 시대에는 일본에서도 유명했다지.
"앞으로 도자기장인과 인삼을 다루는 자들은 국가에서 귀히 쓰일 것이라고 전국에 선포하도록."
"예, 각하."
"그리고 배를 다루는 자도 모아야 하니 이 또한 알아보도록 하라."
북방도 평온해진 지금이 기회다.
잠시 평화로워졌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가장 최우선해야 할 문제는, 집안 문제다.
아마 소온이 이번 일로 조금이나마 섭섭하지 않을까.
* * *
"부인. 내가 왔네. 오늘은 요시코 대신 먼저."
퍽!
방에 들어가자 얼굴로 베개가 날아왔다.
딱딱하다. 나무로 만든 것이다.
베개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앞을 보자 소온이 씩씩거리고 있다.
"잘도 그 뻔뻔스러운 얼굴을 들이대는군요!"
"왜 그러나?"
"거란을 아주 그냥 작살 내어놓으셨다구요?"
아니, 허락한 주제에 이제 와 딴 말인가?
"부인도 허락한 일이 아닌가?"
"허락? 했죠. 하지만 야율배만 잡고 남은 거란족들은 살려둬도 되는 일 아닙니까? 애초에 우리 자식에게 거란족들을 다스리게 하겠다는 약조는 어찌하셨습니까?"
그 약조는 당연히 지킬 생각이다.
"내 그리할 것이네."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 어쨌든 그 지역은 야율배까지 잡고 임시 관리를 파견한 이상 훗날 황족의 피가 섞인 내 자식놈이 관리하는 것이 민족 통합에도 좋을 것이다.
"하, 대칸의 자리는 잘나신 가독부께 넘기셨다면서요? 왜요? 가독부께서 잠자리에서 저보다 더 정성이었나 보죠?"
무슨 말을 그리 천박하게 하는 건가.
애초에 그쪽은 고구려 시절부터 북방 유목민족들을 제어해 왔으니, 고씨의 고려를 이은 대씨 고려의 군주가 대칸의 지위를 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아니, 대칸의 자리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애초에 형식적인 것뿐. 다스리는 것은 임황부로 파견될 우리 자식이네."
어차피 그조차도 독재는 아니지만.
"임황부의 거란인들을 전부 노예로 만들었다 들었습니다."
그것도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임황부의 거란족들은 태반이 상류층들이었으니, 그들을 두들겨 잡아야 연방이 지배하기 쉽지 않겠나?"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임황부는 야율배가 황제가 되면서 요를 재흥시키기 위해서 임황부에서 부를 채웠다.
수많은 나라의 상인이 오갔고, 한족들의 유입과 한족화로 인해 거란의 귀족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 탓에 임황부는 비록 신분이 귀족은 아닐지라도 살고 있는 백성들 대부분이 거란의 상류층이다.
"정말 그 외의 뜻은 없습니까?"
"당연하지. 게다가 설령 자식 일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연방의 총리고 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입장이며 자네는 내 부인으로 안주인이네. 저 거란초원은 고려 황제의 땅이기도 하지만, 자네와 내 땅이기도 해."
그러니까 거짓말이 아니라는 소리다.
소온은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는 겨우 납득했다.
* * *
초원길이 열리고 서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 왔다.
아무래도 요나라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고려가 채웠다 하니 기이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서역의 상인들을 수소문하여 배 기술자들을 모색했다.
대만도에 가는 것은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결국 나중의 일이니까.
국내에서는 한동안 도로정비 사업이 끝났다.
"음, 많이도 모였군."
서역을 통해 구한 조선 기술을 아는 인물들을 골랐는데. 딱 한 명만이 부여말도 익히고 있었다.
꽤 실력도 좋다는 것으로 보아 그놈을 책임자로 하여 일꾼들을 붙여 새로운 배를 만들게 할 생각이다.
직접 만난 그자는 정말 이국적으로 생겼다. 서역과 삼한의 외모가 동시에 합쳐져 있는 묘한 얼굴이다.
어디 한 번 이름이나 들어볼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다울라입니다, 총리 각하."
"이름도 그럴듯하구나."
다울라라, 어감이 참 좋지 않나. 뭔가 배를 뚝딱뚝딱 만들어낼 것만 같은 그런 이름이다.
배를 써먹는 곳 말고도 다양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배를 원하십니까?"
다울라가 부산진에 정박한 한선들을 살펴보더니 내게 물었다.
"자네가 볼 때 우리 배는 어떻다고 보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형편없습니다. 그냥 거대한 바구니를 보는 느낌이 듭니다."
"솔직히 내가 봐도 그래."
너무 직설적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생긴 게 바구니 같기는 해. 심지어 숙련된 격군들이 없으면 함포전도 어려울 테고.
"확실히 배가 필요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원하시는 배를 말씀해주십시오."
"속도가 빨라 군사용으로 썼으면 좋겠는데. 평저보다는 역시 첨저선으로. 군사도 많이 태우고, 화포도 싣고 싶고. 엄청 컸으면 좋겠군."
그래. 이왕이면 킹왕짱 배를 원한다 이런 뜻이지.
유럽만큼의 것이 아니어도 좋다. 최소한 이 동아시아의 바다를 전부 주름잡을 수 있으면 그 정도라도 감지덕지지.
"음, 실례지만 화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화포의 존재는 아직 아는 이가 많지는 않다.
군인들이 아니고서야 일반 백성들은 신무기가 있다는 정도만 아는 상태다.
어차피 이 나라에 정착할 놈이니 보여줘도 괜찮을 것이다.
콰앙!
화포를 보여줬더니 이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 그대로 군사용에 해적에 대항하기 위한 배기도 하겠군요. 설마하니 이런 무기를 싣는다고 하실 줄은……."
"뭐, 그렇게 되려나?"
지금도 화포는 버틸 배는 있지만, 그래도 병력도 좀 더 싣고, 포도 많이 탑재해서 한 척으로 꽤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이왕 서역에서 들였으니 뽕을 뽑아야지.
그런데 가만히 화포와 배 설계를 번갈아 보던 서역인이 한숨을 쉬었다.
"저, 그런데 각하."
"그래.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얼굴을 보니 그다지 좋은 얼굴은 아닌데.
"바랄 걸 바라십시오. 저런 무기를 싣고 군사도 많이 태우고, 속도가 빠른 것을 바라신다니요. 차라리 쇠로 만든 배를 만들라는 것이 더 현실적입니다."
너무 쎈데. 음? 쇠로 만든 배라고 했나, 지금? 설마 만들 수 있다는 소리?
"증기선을 만들 수 있나?"
"대체 그건 또 무엇인지."
다울라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그래도 명색이 연방의 총리인데 그런 표정은 좀 심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무리겠지. 산업혁명 때도 아닌데 가능할 리가.
"그래도 조금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나?"
이왕 돈도 많은 지금 뭔가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흠, 알겠습니다. 한 번 노력해보겠습니다만…… 이 화포를 달고 빠른 배를 만들려면 첨저선이어야 하는데. 그 화포를 한두 번만 사용해도 배가 몹시 기울 것입니다. 균형을 아무리 잘 맞춘다고 해도 이건……."
그렇겠지.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러니 그냥 그 무게마저 버틸 만큼 무식하게 키우면 되지 않을까?
"일단 기본적으로 이 한선을 비롯한 다른 배들은 저 서쪽의 것들보다는 상당히 뒤처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나?"
"보아하니, 해전이 그만큼 없었다는 증거겠지요. 많았다면 배도 그에 맞춰 발전을 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겠지. 그래 봤자 판옥선 루트겠지만 말이다.
일단 조선의 경우에는 거대한 배를 만들기 힘들었다. 그래서 판옥선을 더 만들게 된 것이고.
"그래서 내가 시작을 하려 하네."
물산이 풍족한 지금이 기회지 언제 또 해보겠나.
"혹시나 참고하라고 설계도도 준비했는데, 할 수 있겠나?"
내가 설계도를 내어놓자 그제야 다울라의 표정이 바뀌었다.
"제가 아는 것과는 너무 다른데…… 음, 해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합니다."
"잘 되면 내 자네를 병기창의 관리직을 내어주지. 부여인으로서 살 수 있도록 조처해주겠네."
"각하의 말씀 가슴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잘해줄 텐데.
내가 준 설계도를 바탕으로 다울라는 일꾼들을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배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번 일은 다울라에게 맡긴 채 새로운 것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보지."
본래는 외적의 침공을 막고자 목판에 부처의 말씀을 새긴 것이다.
초조대장경과 제조대장경이 있는데 초조는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소실되었고, 재조대장경이 다시 새롭게 만들어졌다.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담은 대장경.
사실 지금은 외적의 침입이 명분인 이상 의미는 없다. 그런데 원인이 어떻든 본래 21세기 한국까지 전해지는 팔만대장경이 없는 역사가 되는 것은 아쉽지 않은가.
"팔만대장경이라 하시면?"
"말만 들어도 전쟁이 아닐까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내가 그간 그렇게 전쟁을 많이 했었나.
"이 나라는 불교 국가네. 아닌가?"
연방이 세워지면서 특히나 불교 문화가 특히 발전했다.
"예, 각하. 그렇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불경을 목판에 새기는 걸세. 부처의 말씀 말이야."
"분명 불교의 국가라고 하나 그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없지. 그냥 국력을 과시하는 용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불교국가인 만큼 나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적당한 명분은 필요할 것이다.
"그냥 문화적 가치겠지. 후세에도 길이길이 사람들에게 전해져 황제를 시작으로 말단 백성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종교를 알릴 필요가 있다."
"이제 연방의 정치와 권력 중심지는 평양이니 황권을 누르는 데는 적합할 것입니다만, 만일 불교가 필요 이상으로 커진다면……."
"그래서 선은 그어두는 것이야."
승려들은 정치에 개입할 수도 없다. 딱히 특혜도 줄 생각은 없지. 그냥 불교국가기 때문에 불교 관련 문화재를 만든다. 이 정도일 뿐이다.
"음,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상징적이기는 할 것입니다."
"중원에도 그만한 목판은 없겠군요."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이케우치 히로시라는 학자가 팔마대장경을 몽골의 침공에 탈탈 털리던 고려가 만든 종교상 미신의 결과물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일본도 몽골의 침공을 신불이 나서서 물리치길 기원하면서 덴노조차도 피로 불경을 필사했었다.
게다가 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탓에 일본은 일제강점기까지 꾸준히 그 대장경을 달라고 징징거렸었다.
이제 그럴 일본도 없으니 안전하게 문화승리라는 느낌으로 만들면 된다.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야겠군요."
"이건 뭔, 나라가 커졌고 마구잡이로 국력을 쓰려고 하시니."
고려는 몽골에 두들겨 맞고 있을 때도 만든 것이다. 못할 것이 무엇일까. 전쟁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