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유지원을 잡아라
임황부.
임황부의 연방군과 대치하고 있던 야율배에게 뜻밖의 소식이 도착했다.
"폐하, 놈들이 물러났습니다."
조금 전에 연방군을 설득하라고 보낸 사신이 온갖 굴욕만 맛보고 와서 처형시키고 공격을 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연방군이 퇴각이라니. 기껏 점령한 임황부를 버리고 떠난다?
"물러났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역시 큰 피해가 있을까 하여 물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대가 4배 이상의 병력을 가졌다 하나 거란족의 기병대는 최강이라고 자부한다. 그런 군대가 6만이라면 금강이라도 조금 겁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금강이 정말로 빠졌다는 말인가?
"금강이 그렇게 빠질 리가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일단 임황부로 들어가지."
"예. 폐하."
임황부에 입성한 야율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기도 저기도 시체들이 넘쳐났다.
금강이 한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저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었으니, 야율배는 속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금강이 이놈! 아무리 그래도 어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다 죽이고 남아있는 자마저 모두 끌고 간다는 말인가.
임황부 성내에는 백성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온통 시체뿐이었다. 안 그래도 임황부로 들어오기 전에 거란족들로 세워진 경관이 있었다.
"안 되겠다. 지금 당장 놈들을 추격할 것이다!"
"폐하, 적들은 우리의 몇 배나 됩니다. 아군의 피해만 클 것입니다."
그래. 피해야 크겠지.
"놈들이 우리 백성들을 끌고 가지 않았다하던가. 군사도 조금이나마 빠졌을 것이다. 지금 공격하면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야!"
게다가 임황부 백성들이 몰살당한 일로 병사들이 모두 분노하고 있다. 지금 금강을 친다면 끝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쾅! 콰과광!
갑자기 성내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야율배는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왕위 연방군이 처음 왕권 다툼 때 임황을 점령하면서 사용한 신무기들이 아니던가.
왜 저 무기가 임황부 안에서 터지고 있는 것인가.
혹시 연방군이 안에 숨어있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미 들어올 때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저 굉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끄아아아악!"
"내, 내 팔이!"
저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댄다.
굉음이 들릴 때마다 무언가 박살 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병사들의 비명도 계속해서 들려왔다. 사방에서 쾅쾅거리면서 병사들의 대오가 무너졌다.
펑! 콰아앙!
이번에는 근처에서 터졌다. 장수들이 휘말려 죽어버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사방에서 저것들이 터지는 건가!"
콰앙! 투콰아앙!
야율배는 곳곳에서 쏟아지는 굉음과 병사들의 비명을 들어야만 했다.
"설마, 임황부 자체가 놈들의 무기가 되어버린 것인가! 안 된다, 함정이다! 임황부를 나가라!"
이곳에 있다가는 모두가 죽고 만다.
결국 야율배의 군대는 임황부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물론 그게 쉬울 리 없었다.
곳곳에서 터지는 저 소리 때문에 겨우 수습 가능한 군대를 이끌고 임황부를 벗어나려 했으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폐하!"
"무슨 일이냐?"
"성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뭐라고?"
퇴로를 찾던 장수의 보고에 야율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문이 막혀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함정도 이런 함정이 없다. 완전히 다 죽일 생각이었던 것일까.
어쩐지 승기를 잡은 금강이 임황부를 빠져나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퇴로가 없다.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필시 금강이 벌인 일일 것이다. 어떻게 이리도 잔혹하다는 말인가.
"끄아아아아악!"
야율배는 병사들의 비명과 굉음 속에서 절규하고 말았다.
* * *
콰과과과광!
성에서 강렬한 폭음이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되고 있었다. 요나라의 멸망이, 마침내 내가 바라는 일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이미 황족들도 평양에 끌려갔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야율배 한 명뿐. 야율배는 성내에서 폭발에 휩쓸려 병사들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멍청한 놈. 우리가 성을 비웠으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야율배의 멍청함에 혀를 찼다. 함정이라고 생각은 해야 하지 않나.
하긴, 그것을 알았으면 우리를 배신하려 하지도 않았을 테지. 그래도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난 한 번에 쾅! 터지는 것을 원했는데 말이지."
지금은 폭음이 꽤 크지만, 조금 전까지는 자그마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이왕이면 한 번에 펑 터지는 것을 바랬는데, 아깝다.
"음, 그래도 저 정도면 괜찮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급하게 준비한 것이니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맞다. 그것도 이 시대로 치면 나름 잘한 일이다.
오히려 저렇게 터트린 것도 칭찬해줘야 마땅하겠지. 나중에 그 병사들은 따로 불러 상을 내려야겠다.
"그렇겠지."
"승자로 입성하시옵소서."
나는 군사들을 이끌고 당당히 임황부에 입성했다.
임황부는 예전의 모습이 남지 않았다.
폭발로 인해 건물이 많이 무너졌으며, 아직 죽지 않은 요나라 병사들의 신음이 천지를 뒤덮었다.
"여기저기서 화약 냄새가 아주 대단하구만. 살아있는 자는 얼마나 될까?"
"살아있는 자는 꽤 되는 것 같지만, 전투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마 대다수는 죽었겠지. 건물들이 다 무너져 내렸는데 건물에 깔려 죽은 놈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나마 멀쩡한 놈들이 저 바닥에서 신음을 흘리는 놈들인데, 그들도 대다수 전투가 가능한 상태는 아니었다.
여기저기 펑펑 터졌으니 당연하겠지.
"남은 자들은 어찌할까요?"
"기어 다니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놈들 천지입니다."
장수들은 팔다리가 성치 않은 채 기어 다니는 거란족들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멀쩡한 놈만 잡아라. 그리고 야율배를 찾아라."
야율배의 희망을 철저히 부숴줄 것이다.
20만이 넘는 군대가 사방을 포위하고 있으니 야율배가 도망칠 구석도 없겠지. 어떤 몰골인지 꼭 한 번 보고 싶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나는 시신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야율배를 발견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야율배가 아닌가!"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어찌 이렇게 잔혹하다는 말인가!"
이놈 입에서 잔혹하다는 말이 나오네.
"내가 신의를 저버린 놈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 해도 우리 요나라를 이렇게 만들다니!"
당장 수도는 이미 내게 탈탈 털렸고,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제 더는 이 어리석은 야율배가 활약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시작했나? 결국 원인은 네놈에게 있지 않나? 누구 덕에 황위에 올랐는데, 은혜도 모르고 감히?"
이래서 검은 머리는 들이면 안 된다고 하는 건가.
그 덕에 요나라를 정복할 명분은 얻었지만 말이다.
"배, 백성들은 어찌 되었는가. 임황부의 백성들은!"
"저항하는 자는 죽이고, 나머지 본국으로 끌고 노역을 하게 될 것이다."
당연한 것을 묻고 있나.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안 된다면 네가 어쩔 건데? 네놈은 이제 끝이다. 평양으로 돌아가서 연방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을 귀찮게 만들었으니 끌려가서 심판을 받아야지. 암.
"이놈, 이노오오옴!"
이놈 저놈 하지 마라.
"당장 포박하여 평양으로 끌고 가라!"
야율배는 밧줄에 묶여 그대로 끌려갔다. 끝까지 뒤에서 욕하는 소리가 귀를 더럽혔으나, 어차피 거란어였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요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걱정이 없다.
만리장성 북쪽의 북방은 이제 온전히 우리가 가지게 되었다.
거란의 초원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제 저 서역과도 쉽게 교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유지원이다.
석경당은 유지원을 쫓아낼 힘은 있어도 무찌를 힘은 없다.
요나라군이 석경당을 지원할 병사들을 끊어냈다고 했으니, 유지원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태원에서 버티는 이상 잡기 힘들 것이다.
"유지원을 잡는데 많은 군사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군사의 반만 끌고 갈 것이니 장수들은 남은 전투에도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 각하!""."
기병은 야율배와 한판 붙은 것도 아니니 여전히 전력은 보존 중이다.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유지원 그 멍청한 놈은 태원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군사는 많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정확히 기병 반, 보병 반씩 나눠 연운 16주에서 화약을 비롯해 보급을 마치고 태원부로 남하했다.
그리고 태원부 근처에서 석경당의 군대와 합류했다.
"각하를 뵙습니다."
황제인 석경당은 여전히 나를 은인으로 보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닐세. 아니야. 자네는 천자야. 함부로 허리를 숙이지 말게."
황제가 어떻게 총리에게 허리를 숙인다는 말인가.
나는 결국 고려와 백제의 군주에 의해서 임명되는 것에 불과하다.
나라를 이끌어간다 해도 황제의 아래에 있는 존재라 이 말이다.
그러나 굳이 해명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황제의 위에 있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으니까.
"예, 각하!"
"야율배는 평양으로 압송하고 요나라 놈들은 싹쓸어 멸망시켰으니, 이제 북방은 걱정하지 말게."
요나라 땅까지 이참에 기병들로 싹 쓸어서 초원이 이제 전부 우리 차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쓸어버렸다는 말씀은……."
"저항하는 자는 죽이고 남은 무리들은 전부 노역에 쓰려고 본국으로 끌고 갔지. 아, 한족들은 따로 분류해서 내려보냈는데 받지 않았나?"
한족들은 연운 16주로 보냈다가 다시 낙양으로 보냈다.
그놈들 대다수가 요나라의 지식인층이니까 써먹어도 되고 역적질을 한 죄목으로 사형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예."
"그들의 처분은 자네에게 맡기지. 마음껏 바라는 대로 처리하게."
"놈들은 한족이면서 감히 거란에 빌붙어 요나라를 키운 역적들입니다. 어찌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백제도 백제지만 한족들이 더 큰 문제다. 한족의 지식인들은 요나라의 정치체제를 안정시켰고, 이번 전쟁을 추진하기도 했다.
"잘 생각했네. 이제 유지원을 잡으러 가지."
"예. 각하. 지금 놈은 태원부에 있습니다."
태원부라면 놈의 본진이 아닌가.
"하동절도사라 그런가."
"결국 도망칠 곳은 그곳뿐 아니겠습니까? 놈이 성을 증축하고 우리 군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숨어서 중축했다는 것은 끝까지 농성하겠다는 의미. 놈의 병력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다.
군대가 꽤 남아있었으면 나와서 맞서 싸웠겠지.
원 역사에서는 독립하여 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태원에 처박혀 있는 꼴이라니. 동정심마저 들었다.
"끽해야 농성인가. 패배를 인정하면 좋았을 것을. 끝까지 맞서려고 하다니 전혀 사내답지 못하군."
그렇다면 태원부를 통째로 박살 내야 하나?
"반란군 놈이 어쩌겠습니까."
"병력은?"
"우리를 상대할 만큼은 되지 못합니다."
그냥 목을 내놓고 끝낼 일이지, 어떻게든 천하를 가져보겠다 저러는 것인가. 그곳에서 박혀 있다 한들 지원군을 누가 보내지도 않을 것인데.
설마 남쪽의 다른 나라에 지원이라도 요청한 걸까?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인가?"
"유지원을 도울 나라는 없습니다. 연방이 뒤에 있는 이 나라를 누가 적으로 삼으려 하겠습니까?"
그렇겠지. 이제 연방은 명실공히 대국이다.
지금 중원이 당장 통일되지 않는 이상, 누가 우리와 맞서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