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연방의 상좌평 최승우는 야율배의 막사에서 거침없이 야율배를 압박했다.
"최후통첩입니다. 지금 아국의 총리 각하께서는 대칸의 배신에 진노하시어 대군을 몰고 오셨소이다. 이미 진격 내내 보이는 거란족은 그 목을 베어 길거리에 버려뒀으니, 더는 우리 각하를 역린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뭐라고!"
아직도 사태파악을 못하다니.
애초에 야율배가 배신을 한 순간부터 총리의 손아귀에 놀아난 격이었다.
그 증거로 이미 병력이 큰 차이가 나지 않은가.
그럼에도 야율배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당장 우리 기병대만 10만입니다. 폐하의 군대와 정면에서 맞붙어도 능히 전멸시킬 수 있는 숫자입니다."
"말도 안 된다. 지금 연방은 도로 정비에 많은 정책을 추진하느라 그만한 군사를 내지 못할 것으로 안다!"
맞다. 지금 연방은 도로 정비를 비롯하여 화폐 통합 등 나라에서 추진하는 것들이 많다.
그의 말마따나 원정을 추진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보통의 나라들 사정이고, 애초에 총리는 평소에도 군부를 독촉하여 요를 정벌할 수 있도록 언제든 출병 가능한 군사를 준비를 해뒀다.
당연히 장관들이 안 된다 비명을 질러댔으나, 결국 총리의 그 준비가 이렇게 지금 그 빛을 발했다.
과거의 백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을 해냈다.
그렇기 때문에 최승우는 야율배에게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무슨 착각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폐하, 아국은 국가적인 대사업을 벌일 때 언제나 유사시 전쟁을 대비한 준비도 함께 해둡니다. 당장 임황부를 포위한 군사만 지금 25만에 달합니다."
"2, 25만!"
25만이라니. 그런 숫자는 생각도 못 했다.
"설마하니 아국이 그 정도 능력도 없겠습니까? 고작 요나라나 반란군 따위의 동원력은 우리 연방에 비교할 거리조차 되지 못합니다. 이것도 대칸의 말씀대로 국가적인 대사업을 하느라 바로 동원 가능한 인원만 모은 것이지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국가를 전시체제로 돌린다면 지금의 배는 되는 군대를 요로 보내 짓밟을 것이오."
이쯤 되자 야율배의 얼굴도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머리가 서서히 냉정하게 돌아갔다.
일단 저질러 보았다. 석경당을 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연방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가만히 야율배와 최승우의 대화를 듣던 하동절도사 유지원은 이러다 낙양협공에 차질이 생길까 하여 끼어들기로 했다.
"흥! 단순한 협박에 불과하지. 삼한 땅에서 어떻게 그만한 병력이 나온다는 말인가?"
"지금 난 요나라의 대칸과 대화를 하러 온 것이지, 일개 반란군 수장 따위와 말을 섞으러 온 것이 아니오."
"저, 저 자가!"
최승우는 유지원에게 한마디하고는 야율배를 쳐다봤다.
"우리 예맥한은 신의를 중시하며 국가 외교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소. 애초에 배신자와 반군 따위에 지킬 신의는 없으나, 설령 25만이 안 되더라도 임황부를 박살 낼 병력은 충분히 있소이다."
그 말은 맞다. 요나라의 황제 야율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연방이 25만까지 일으킬 힘은 없다고 해도 비어있는 임황부를 털 만큼의 힘은 갖추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무리한 것이 아닌가.
괜히 이번만 한 기회가 없다 여긴 탓에 너무 경솔하게 굴었다.
"아무튼 나는 통보를 하였으니, 정 믿기 힘들다면 당장 낙양성을 넘어보시오. 아마 임황부는 끝장나 있겠지."
"아주 허세를 부리는구나."
야율배는 최승우를 비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걱정이 많았다.
"아, 자꾸 그리 말씀하시니 조건을 바꾸지요. 반군이든 요군이든 그 누구라도 낙양을 넘는다면 그 즉시 임황은 물론이오 저 서쪽의 거란의 땅 모두가 불바다가 될 것이오."
"네 이놈!"
협박이 아닌 오로지 진실이다.
25만의 병력이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야율배는 인정하기 싫어도 그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연방은 지금 연운에도 군사가 있다. 그 연방에 있는 수만의 군대가 움직이기만 해도 요나 유지원에게는 큰 압박이 될 수도 있음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소이다. 모쪼록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를 바라오."
최승우는 일방적인 통보만 하고 그대로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최승우가 나간 자리는 적막하기만 했다.
요의 장수들이나 야율배는 현실을 직시했다.
설령 임황부가 적의 공세를 막는다고 해도 연방은 그 신무기도 있으니 피해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적막함 속에서 침묵을 깬 것은 유지원이었다.
"단순히 허세일 것이오."
"하지만 허세라고 하기에는 영."
임황부는 연방에 가까이 있다.
설마 진과 연방이 저만큼 긴밀한 관계일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야율배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백제인들을 죽인 것은 큰 실책이기는 하지만, 연운만 공격하지 않는다면 전쟁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낙양을 순식간에 정복한 다음 진을 반으로 갈라 먹을 생각이었는데.
"설마 이제 와 물러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어쩌자고?"
"폐하는 북방을 호령하는 대칸입니다. 제아무리 연방이라고 해도 인명을 그리 살상하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 아닌가.
저놈이 지금 자기 일이 아니라고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근거는?"
"당장 전에도 부여금강을 후당을 무너뜨리고 중원 천하의 천명을 쥘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과 임황부의 백성들을 죽이지 않는 것이 무슨 관계인가?"
"솔직히 연방은 중원을 관리할 역량도 없으나, 그자는 황제의 위에 존재하는 총리입니다. 하여 진을 제후국으로 두려 하고 있는데, 굳이 요의 백성들을 도륙할 일이 있습니까?"
확실히 금강이란 자는 거란족들을 백성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 자가 요의 백성들을 학살할까?
"즉, 금강이란 놈이 요나라조차 제후국으로 여기고 있다? 하여 죽이지 않을 것이다?"
"무례한 말씀으로 들리겠습니다만,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 백제인들을 부르지 않았겠습니까?"
유지원은 어떻게 해서든 야율배의 협조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마냥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다.
일부러 요나라 정계에 백제인들을 진출시킨 까닭이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요나라를 친백제 나라로 만들 생각이다. 그 끝에는 제후국이 있을 것이고.
"그래. 그렇겠지."
야율배도 지금은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차피 중원만 평정한다면 임황부가 떨어져도 중원의 힘으로 연방을 상대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이미 저지른 일. 설령 이대로 회군한다 해도 연방의 백성들을 죽였으니 아마 연방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
그리고 임황부도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성을 보수하고 외침에 대비할 수 있도록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빠르게 낙양을 점령하고 놈과 싸우면 된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습니다. 백제인들을 죽인 이상, 결국 연방과의 일전은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낙양을 집어삼키고, 다시 군대를 내어 연방과 일전을 치르면 됩니다."
유지원도 그렇게 말한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면 유지원과 연합해서 한판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방이 죽든 요가 죽든 결국 어느 한쪽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다.
* * *
낙양성.
요 황제 야율배를 훌륭하게 협박한 최승우는 다시 낙양성으로 들어가 석경당을 알현했다.
야율배와 유지원을 보고 있자면 반드시 전투는 일어날 것이다. 결국 임황부는 연방군에게 박살 날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이라도 심어줘야 낙양이 야율배의 회군까지 버틸 것이다.
"폐하, 신 부여연방 상좌평 최승우입니다."
"오오. 연방에서 왔다고?"
석경당은 최승우를 매우 반가워했다.
나라로 거듭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진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연방 사람인 최승우를 극진히 대접해야만 했다.
애초에 최승우가 낙양까지 온 것은 틀림없이 지원군 때문이리라.
"예, 폐하."
"연방의 총리께서는 지원군을 보내 주신다 하던가?"
이미 지원군은 임황부를 포위하고 있다.
다만, 당장 진나라를 지원할 것은 아니다.
지금 제 주인인 금강이라는 사람은 거란족을 완전히 근절시키려고 하니까.
"25만의 군대를 출정시켰으나 낙양이 역도들에 의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니, 요의 임황부를 포위하고 총리께서는 저를 보내시어 폐하를 안심시키고 요황제를 압박하라 이르셨습니다."
"임황부를?"
"결국 지금은 유지원의 15만 군대는 진나라의 군대로 물리칠 수 있지 않습니까? 걱정이 되는 것은 거란족이지요."
진이 군사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유지원 정도야 잡을 수 있지. 문제는 요나라 군 6만이다.
당장 낙양에 오는 지원군을 끊어버리는 것이 요나라군이었다.
그놈들만 없으면 유지원을 처리하여 반란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실제로 놈들이 파죽지세로 낙양으로 오는데, 요나라의 공이 컸네."
"당장 낙양을 지원할 군대는 연운에서 낼 것입니다. 일단 낙양에도 화포가 있지 않습니까? 당장은 그것으로 막고 계시지요."
화포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한 두 번의 전투를 치를 만큼은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가 버티지 못 한다면."
"그렇다고 지금 당장 우리 대군이 내려가려면 시간이 촉박합니다. 오히려 남하하다 낙양을 놈들이 밀어붙인다면 버틸 수 있겠습니까?"
"끄응."
틀린 말도 아니다. 유지원은 작정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요까지 끌어들였다.
아마 대군이 남하한다면 낙양이라도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단순한 공성전이 아니라 맹공을 가해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낙양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차라리 여기서 석경당이 조금만 버텨주면 요군이 회군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에서 요가 물러가는 쪽으로 아국에서 힘을 써볼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지요."
"알겠네. 그렇다면 야율배는 압박했나?"
"이미 씨를 뿌렸으니, 거두는 일만 남았습니다. 설마하니 자기 황도가 죽음의 성이 되어도 낙양을 공격하겠습니까?"
반군을 도우러 왔다고는 하나 제정신이라면 자기 황도가 불타오르는데 가만히 있을 황제는 없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국의 군대는 임황부까지 진격하면서 보이는 거란족들은 모조리 그 목을 베었습니다."
"오오, 총리께서 많이 분노하셨군."
석경당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되어야지. 빌어먹을 오랑캐들은 다 죽어야 한다.
"안 그래도 야율배란 자가 신의를 저버리고 백제인들을 죽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발인데. 감히 진나라를 공격하다니요. 총리께서는 친히 거란족들을 도륙하며 임황성을 파괴할 생각으로 가득하십니다."
최승우의 발언에 진나라의 황제 석경당과 신료들은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 자리에 있는 황제와 신료들은 연방군이 어떤 인물들인지 잘 알고 있다.
후당군을 무찌를 때 함께 했던 장수들은 연방군의 그 악귀와 같은 무기를 두 눈으로 지켜봤으며 한때 후당의 신료들이었던 이들은 총리가 소수의 병사들만 끌고 낙양으로 들어와 황제와 황후, 황자들을 끌고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거나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화가 났다고 한다.
"요나라도 끝났습니다."
"아무렴요. 총리의 역린을 건드리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연방을 우방으로 두어 다행입니다."
신료들은 저마다 연방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 총리의 능력을 생각하면 요나라는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는 실책을 벌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차라리 잘 되었다.
연방에 대적하는 것보다 연방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의 화평을 모색하고자 하는 석경당에게 지원군을 이끌고 온 총리가 너무나 든든했다.
"부디 잘 되었으면 좋겠네."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폐하. 성심을 굳건히 하시어 낙양을 방비하소서."
석경당을 알현한 최승우는 군사들의 방비 상태가 약화하고 황제가 요와 유지원에게 맞서 싸울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고 그래도 낙양이 버틸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렇다면 임황부를 끝내고 남하할 때까지 진은 버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