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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120화 (120/154)

120화

야율배는 유지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폐하, 아국의 황제는 연방의 꼭두각시입니다. 오로지 연방만 믿고, 연방의 말을 충실이 따르며 연방의 제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원의 것과 달리 통일되지 않은 법률도 그대로 들여 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이 아닙니까?"

하동절도사 유지원은 답답하기만 했다.

황제 석경당이 연방의 제도를 들이기 시작했다. 재상과 요직들이 나라를 관리하는 연방 체제가 아니라 그 외의 법률 등을 말이다.

본래 대씨 고려와 백제가 중원의 법률을 가져다 써서 자기들 입맛대로 바꿔쓰고 있었는데, 그렇게 완전히 오랑캐화한 법률을 다시 들인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연운 16주를 그대로 연방에게 내주었으니 이 나라의 북방은 온전히 연방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겠지. 전에 그 연운 16주라는 지역을 보니, 연방의 깃발이 빼곡했다.

백성들도 주로 연방인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어차피 북방은 연방 말고는 없지 않은가? 우리 역시 진을 칠 생각은 없다."

"그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나라의 안위를 다른 나라에 맡기는데, 중원의 천명을 가진 황제가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 그런데 그것을 왜 요나라 황제를 찾아와 말하는 건가.

설마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건가. 명색이 요나라의 황제란 자가 일개 절도사의 하소연이나 듣는 처지라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심지어 본디 고려와 백제는 우리 중원왕조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던 국가였습니다. 사사로이 내부에서 황제를 칭하던 것도 못 봐줄 일인데, 이제는 대내외적으로 황제라 칭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이 아닙니까?"

말은 잘하고 있다만, 그렇게 치면 고려와 달리 고려와 중원에 복속되어왔던 거란 야율배의 입장은 어쩌라는 말인가.

"그건 짐에게도 하는 말이 아닌가?"

"폐하께서는 대칸이시자 한족들을 아우르고 계시니 북방의 천자라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삼한 것들은 다릅니다."

이렇게까지 비위를 맞추려는 것을 보면 원하는 것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제 목을 걸고서까지 자신을 보러 온 것이 아닌가.

"원하는 바를 말하라."

"외신을 도와주시옵소서."

"어떻게 말인가? 군사적 지원을 말하는 건가?"

아마 군사겠지. 또는 말이라든가. 지금 하동절도사가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중원에 비하면 풍족하지 않은 요에 식량을 구걸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예, 폐하. 연방을 견제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것입니다."

연방을 견제한다라. 하기는 해야 한다. 이대로만 있다가는 금강의 연방이 천하를 완전히 쥐고 흔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연운 16주 중,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석경당이 연방에 바치는 공물의 반을 바치겠습니다."

"흐으음."

이득이기는 이득이다.

연방을 견제하고 연운의 절반을 얻는다면 만족스럽지. 멍청한 석경당이 연방에 너무 많이 주어 신하들의 불만이 있는 것이니.

유지원 입장에서는 결국 16주 중 절반을 회복하게 되는 격이니 나쁠 건 없다.

더불어 석경당에서 유지원으로 황제가 바뀌면 나라가 더 안정적으로 변할 테고.

"석경당을 몰아내고 이 외신은 새로운 천자에 오를 것입니다."

"천자라. 천자가 되겠다?"

포부 한 번 대단하다. 그래,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라면 꿈이 커야 한다. 황제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중원의 주인은 늘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석경당은 황제이면서 오랑캐들이 만들어낸 ‘총리’라는 지위보다 황제가 못나다고 여겨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자신도 대체 그게 무슨 꼴인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으니까. 결국 천하의 주인은 황제다. 그러니 자신도 대칸이면서 황제의 자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오직 저 연방만 총리의 자리가 황제들 위에 서 있으니 웃긴 일이다.

"그렇지. 그래. 군사는 언제 일으킬 생각인가?"

"귀국하자마자 날짜를 정해 서신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폐하께서도 백제인들을 처리하셔야 합니다."

백제인들 처리.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군사도 충분하다. 연방에 비해 밀리는 부분은 있으나, 그래도 그간 많은 준비를 해왔고 석경당이 망하면 연방 혼자 유지원과 요의 대군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변수는 늘 있기 마련이다.

"확실히 우리가 석경당을 쳐낼 수 있겠나? 석경당을 빨리 쳐내지 못하고 연방이 군대를 몰아온다면 큰일이야."

"연방은 그리 쉽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가?"

금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움직이지 못한다? 쉽게 믿을 수는 없는 말이다.

"나라가 안정되니 저 삼한 땅 전국에 도로를 놓는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답니다. 그 와중에 전쟁을 치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도로라. 그런 말이 있기는 했다. 연방이 대규모 도로정비를 통해 백성들이 움직이기 쉽게 한다고.

"알겠네. 받아들이지. 다만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것이야."

"예, 폐하. 폐하께서도 반드시 백제인들을 척결하셔야 할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다. 백제인들이 계속 요에 남아있으면 요는 계속해서 금강에게 묶이게 될 것이다. 지금만 해도 많이 의존하고 있는 처지라 하고 싶은 것도 못 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유지원과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연운을 가지고 유지원의 새로운 국가가 우방이 된다면 감히 연방이 두려울까? 아마 중원을 통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슬슬 조정을 정리해야겠지.’

우선 백제인부터 쳐내어 요를 완전한 자주적인 독립국으로 만들 것이다.

* * *

후진.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자기 세력을 이끌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친연방정책에 매번 반발하는 유지원을 주시하던 후진의 조정은 신속하게 유지원의 반란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하동 절도사 유지원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처 죽어도 시원찮은 자가 아닙니까!"

"폐하의 은혜를 배신하다니!"

황제 석경당과 신하들은 격분하였다.

그간 수상해도 개국공신이라 봐주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사실 전부터 그럴 낌새가 있기는 하였습니다. 연운 16주 협상에서 오죽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우선 연방에 사신을 보내게. 생각보다 유지원의 세력이 크다면 연운 16주를 노릴지도 모르니까."

"예. 폐하."

물론 아직은 아니다. 연운 16주를 내어준 석경당이라고 해도 필요 이상으로 연방이 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반란이 일어난 지역은 하동. 연운 16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혹시 유지원이 연운을 칠지 모르니 미리 서신을 보내 알리는 선에서 끝을 내고 지원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때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유지원 혼자면 모르겠는데, 유지원은 홀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얼마 후, 낙양에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폐하. 하주에서 요의 대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장계가 올라왔습니다!"

요의 대군이 남하하고 있다고 한다.

하주에서 올라온 보고니 이미 지금쯤은 하주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요나라의 침공 소식에 조정은 놀라 뒤집어졌다.

"요의 대군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유지원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요의 군대라니. 요의 군대는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그저 오랑캐가 아닌가?"

"그 오랑캐의 기세가 매우 험합니다. 북방의 대부분은 이미 요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동북방은 연방이 평정하고 있으나, 만리장성 이북과 저 서쪽은 전부 요의 땅이었다.

그만큼 기세가 대단한 오랑캐들이었다.

"유목민족들이 그 세를 키우면 늘 중원의 근심거리였습니다. 하동절도사와 요가 연합을 했다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당장 진에는 연합한 두 세력을 막을 힘이 없다.

머릿수는 어떻게 맞출 수 있으나, 문제는 군사의 질이다.

유목민족은 말을 타며 뛰어난 기동력과 함께 전투력이 강하다.

그런 숫자가 무려 6만에 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냥 무시할 만한 병력이 아니었다. 그 6만이면 중원의 수십만 대군과 맞먹지 않을까.

뭔가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연방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숫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총리께 지원을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끄응. 그렇게 해야 하나. 그런데 전제 연방에서 보낸 신무기들이 있지 않은가? 화약 무기 말이네. 우리도 화약은 만들 수 있으니 그 무기들을 계속 사용할 수 있지 않나?"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닌가. 연방이 조금이기는 해도 신무기를 지원받았다.

"연방에서 받은 무기로는 도저히 물리칠 만한 병력 수가 아닙니다. 20만이 넘는다면 만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군사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것인가.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다.

"각성에 전령을 띄워 지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 그리고 놈들이 연방과 우리를 차단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셔야 할 것입니다."

"옳은 말이다. 얼른 평양에 사람을 보내라. 군사지원을 요청해라."

승산이 확실하지 않다면 결국 연방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당장 전 후당 황실만 하더라도 미련하게 연방을 우습게 보다 말아먹지 않았나. 그런 전철을 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상좌평의 혜안에 나는 감탄해야만 했다. 아마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요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랐을 것이다.

"각하! 요나라에서 급변이 일어났습니다! 요나라의 백제인들이 도륙당했습니다!"

"각하! 진나라의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각하! 진나라의 황제 석경당이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설마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을 겪을 줄이야.

최악이 연이어 겹쳤다. 원 역사와 다르다고 해서 조금은 방심했다.

멍청한 석경당한테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일단은 백제인들을 죽인 요나라가 문제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무슨 일이 있었나?"

"요에서 도망쳐온 백제의 관리들이 하는 말로는 야율배가 유지원을 따로 만났으며 그 이후 백제의 관리들을 모아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

"사실인가?"

설마 아니겠지. 그놈이 대체 무슨 깡이 있어서 그런 미친 짓을 하겠는가.

아니, 잠깐만 하동절도사 유지원? 석경당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놈 아닌가?

"지금 꽤 큰 검상을 입은지라…… 이미 요군이 움직인 행보도 있으니, 이는 사실인 것이 분명합니다."

요나라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어쨌든 사실이라면 장관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 보는가?"

"반군 하나 제압하지 못한 석경당을 엄히 꾸짖고 지원군을 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하십시오. 무능한 황제 석경당을 엄히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

이건 전쟁이다. 군대를 내야 할 것이다.

"요군이 얼마나 되는가?"

"6만으로 파악되고, 유지원은 석경당에 반발하는 세력들의 군사를 끌어모아 15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족히 21만인가. 유지원의 병력이 15만이라면 이미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로군.

아마 전투를 치르게 된다면 저번과 같은 전개가 될 것이다.

석경당은 후당의 경우도 있으니 아마 우리가 지원군을 보낼 때까지 군대를 내어 적들을 토벌할 생각은 안 하겠지.

한바탕 대회전을 치르다 뒤지는 것보다는 낫지.

"요동에서 군대를 동원해야 할 것 같네. 지금 군부가 보기에 군대를 얼마나 낼 수 있을 것 같지?"

"음 지금 준비를 한다면 20만까지는 가능할 것입니다."

"빠듯하군."

아니, 오히려 적당히 많은가. 지원군으로 당장 준비가 20만이라면 연방도 꽤 커진 것이 아닌가.

북해도 올 때까지만 해도 한숨 쉬던 놈들이 중원 일에는 제법 적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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