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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115화 (115/154)
  • 115화

    장수들 대부분은 이번 천황의 행동을 좋게 보지 않았다.

    "좋다. 이번에는 좀 제한을 둬야겠지."

    천황을 붙잡으면 서라벌에 강제로라도 박아야겠다.

    제한까지 둘 필요는 없고, 측근들을 쳐내야겠다. 후지와라노 다다히라는 안 되더라도 그 측근들이 천황을 못 모신 죄가 크니 죽어야 한다.

    겉으로야 천황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죗값을 받는 것이지만, 천황은 한 번만 더 도망치면 죽는다는 경고로 느낄 것이다.

    다다히라도 왔으니 이제 더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나는 육군 수군 합쳐 1만 2천의 병력을 태운 함대를 끌고 북해도로 향했다.

    아, 그런데 도착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북해도로 가준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고삐는 쥐어야겠다.

    "다다히라 공."

    "예. 말씀하시지요. 각하."

    내 부름에 다다히라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지금 내가 도우러 간다고 해서 기뻐해야 할 상황이 아닌데 말이다.

    "내 조금 나중에 말하려고 한 것인데."

    "예."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으니 말이다.

    나중에 괜히 딴말했다가 귀찮아지는 것은 질색이거든.

    "이번 일에 대해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소?"

    "그, 그게 어인 말씀이신지."

    정치판에서 많이 놀았다는 양반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는 아주 잘 알 것이다.

    슬슬 눈치가 있으면 반응을 해야지. 안 그런가?

    "말 그대로의 의미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색이 천황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가 있는데요."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다른 이유는 다 거르더라도 결국 후지와라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했으니 천황이 이렇게 끌려간 거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벌을 내릴 것은 내려야 한다.

    "서, 설마."

    다다히라는 등골이 오싹할 거다. 내 말이 무슨 의미일까. 한마디로 후지와라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소리다.

    "아. 다다히라 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후지와라 일족이어야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다히라는 그래도 천황을 모시면서 본의아니게 백제를 도운 인사다. 그러니 목숨 정도는 살려둔다.

    "우리 후지와라를 끝장낼 생각이시오?"

    "아,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가면 천황이 곤란할 수도 있다. 뭐 그런 단순한 말이다.

    최소한 본보기로 써야 하니 재물이 필요하지.

    내 말에 다다히라는 한참 생각하다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별다른 방법이 없음을 그도 알고 있다.

    "후지와라 일족을 내어드릴 테니 부디 우리 폐하를 살려주십시오."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나도 장인이 그리되어 유감이니."

    "알겠습니다."

    북해도라. 북해도. 이 시기의 북해도는 어땠으려나.

    그냥 정말 단순한 아이누의 땅이었을까. 관심이 없으니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 항해를 한 끝에 겨우 북해도에 다다랐다.

    "뭐야, 이 시체들은?"

    전투의 흔적이 있다. 몇몇 시신들은 백제인의 복장을 하고 있고, 다른 인물들은 왜인의 복장이 많다.

    "후지와라의 가신들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호족들이고."

    "허. 그렇다면 장인은 잡혀갔나."

    죽이지는 않았겠지. 설마.

    제아무리 못 배워처먹은 놈들이라 해도 나름대로 머리는 있을 것이다. 상당히 고귀해 보이는 신분을 그냥 둘까?

    "어서, 어서 군대를 내셔야 합니다!"

    군대를 바로 보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

    이런 곳은 언제나 늘 예외가 있는 법이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리 급해서는 될 것도 안 됩니다."

    "지금 한시가 급합니다. 한시가!"

    이쪽은 여유로우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한시가 급한 것은 네 사정이고, 천황은 뭐 그리 쉬이 죽을 인물은 아니다.

    "각하, 어찌 서두르지 않으시는 겝니까?"

    "조금 지켜보시오. 그렇게 막 달려간다고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연방군을 사지로 들이밀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보라 했다. 지금 이렇게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장관들이 오죽 나를 쥐어짰는가? 이번 원정도 반은 그냥 내 무리한 요구로 이루어진 거니 군사들의 피해가 늘면 아주 나를 잡아 죽이려 할 거다.

    "그야 그렇지만……."

    "저기 시신 중에 천황폐하는 없으니 아직 여유롭지 않겠어?"

    장난이 아닌 진심이다.

    어쨌든 아이누족은 천황을 죽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 아닌가.

    "주위에는 다른 인기척은 보이지 않습니다."

    근처에 따로 아이누족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륙을 서둘러도 괜찮겠지.

    "군사를 전부 상륙시켰습니다. 바로 공격을 합니까?"

    "정찰병을 사방으로 보내 아이누족의 동태를 확인해봐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법이라 했지. 그러니 충분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지금 각하께서 바로 군대를 보내지 않으시는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솔직히 노친네 한 명 때문에 우리 군을 죽게 내버려 둘 수야 없겠지. 일단 필요한 자재들은 전부 가지고 왔으니 건물부터 지어."

    이곳에 올 때 기술자들도 많이 끌고 왔다.

    그중에는 건축가들도 있지. 당장 북해도를 우리 터전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건물이라 하시면……."

    "거주지역 말이네. 병사들이 머물 병영이라든가, 필요한 것들을 짓게."

    어차피 북해도는 우리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 우리의 통제가 미치기에는 아이누족은 야만적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곳을 차지하고자 천천히 우리의 병영을 세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후에 아이누족과 싸우든 그 민족을 근절시키든 둘 중 하나를 해야겠지.

    "각하! 원주민 놈들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빨리도 알아냈군."

    북해도가 나름 큰 편이라 알고 있는데 말이다.

    "놈들의 정찰병을 뒤쫓아 알게 되었습니다."

    "놈들이 직접 정찰을 보냈다고?"

    아무래도 우리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예, 각하!"

    "흐음. 이거 잘하면 말이 통하려는 건가."

    어쩌면 교화로 다스릴 수 있을지도.

    잡아 온 원주민은 내 감으로는 아이누족이 맞는 것 같다.

    생김새가 딱 원주민 출신이니까.

    "우리는 너희들이 적이 아니다. 너희들이 데려간 포로들을 풀어준다면 우리들은 그냥 돌아갈 것이다."

    나는 아이누족의 언어를 대충이나마 알아듣는 자를 역관으로 삼아 통역하게 하였다.

    이 짓거리를 하다 보니 중국어나 거란어 등은 익힌 지 오래지만, 아이누족의 언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부산진을 떠나는 것이 조금 늦어진 것도 이러한 이유 탓이다.

    진짜 역관 구하기 정말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쉽게 내어줄 수는 없다고 합니다."

    아이누족이 손을 저은 것이다.

    "확실한가?"

    "예, 각하. 저도 이 자들과 몇 번 교류해본 것이 전부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자들과 그간 잘도 교역을 했군그래.

    "진정으로 연방의 천벌을 받아야 그제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상귀 장군, 그쯤 하지. 배운 것이 없는 자들이 아닌가."

    "하오나. 각하. 못 배워먹은 것들은 크게 꾸짖어야 합니다."

    글쎄 과연 그래야 할까.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나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어."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다. 놈들이 천황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모두 죽을 것이고 천황을 내놓는다면 달라질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어느 정도 유화책을 써야지.

    "그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있으니 그를 인질로 삼은 것이 아닌가."

    "지금 아이누족은 반으로 갈라졌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설마 파벌이 갈라졌다는 의미인가?

    "이번에 아이누족으로 온 천황과 그 일행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워낙 많아서, 그것을 두고……."

    아이누족이 재물을 두고 반으로 갈라졌다고?

    아니, 뭐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지. 욕심이 많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재물욕에 머리가 돌아버린 민족 같지는 않던데."

    "아무래도 살기 힘들어지니……."

    "살기가 왜 힘들어진다는 말인가?"

    물론 섬이니 살기야 힘들겠지. 심지어 국가라고 할 수는 없는 작은 민족들 수준.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최근에 도적들이 자주 넘어온다고 합니다. 이런 거라도 먹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하는데, 어찌합니까?"

    "도적들?"

    도적들이 아이누의 땅에 있다고?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 아마 일본 쪽이 아니겠습니까?"

    "흠, 일본이라. 일본에서 건너온 도적들이라. 그렇다면 자업자득 아닌가?"

    일본에서 넘어온 도적들은 아마 호족들일 것이다. 호족들의 병사가 조금이라도 해 처먹으려고 발을 디딘 것이다.

    연방의 밑에 있으면 예전처럼 해 먹지 못하니 아이누족을 통해서 뭔가 얻어보려는 아주 저열한 수작질이다.

    그러니까 이번 습격은 호족들의 자업자득이라 뭐 이런 뜻이다.

    "식량을 비롯한 의복, 기타 등등을 지원해주면 되겠는가?"

    "그것만이 아니라 다른 부족들을 잡아달라고 합니다."

    "다른 부족들을? 그 정도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건가."

    참 얄궂은 운명이로다. 동족 상잔만큼 비극도 없지.

    "그 전에 천황부터 내어주게."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최소한 적들을 먼저 처리한 후에 그때가 되어야 이 협상을 할 수 있을 거라 합니다."

    저놈들이 원래 이런 놈들이었나?

    아무래도 그간 쌈박질만 하다 보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일단 잠시 그 아이누족에게는 거처를 마련해줬다.

    비열하기 짝이 없지만 지금 당장은 천황을 구하기 위한 창구나 마찬가지다.

    아이누족의 말을 들은 장수들도 그다지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물론 천황의 목숨을 생각하면 그것이 옳을 것입니다만 너무 하는 짓이 저열하지 않습니까?"

    그래. 거란조차도 이러지는 못했다.

    아무리 세상을 모른다 해도 그렇지 1만 2천의 병력을 상대로 그런 협박을.

    아니, 이만한 병력이니 협박하는 건가. 아예 소수의 병사만 끌고 왔으면 저자들은 물자만 바랬을 것이다.

    "예. 비겁하기 짝이 없습니다. 엎드려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감히 연방을 상대로 이런 협박이라니요."

    "차라리 그 반대편을 지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차라리 다른 부족을 지원하라.

    "다른 부족을 지원해서 저 졸렬한 무리들을 잡자? 좋은 계책이지 않습니까?"

    "흐음."

    아니, 그쪽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물론 천황을 구하는 조건으로 우리가 그 부족을 지원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하여간 저 장인이 조금이라도 어딘가에 숨어있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천황폐하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다다히라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는 천황을 구하러 왔지. 그런데 말이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하지만 현실을 보세요. 저놈들이 일을 다 마무리하고 나서 천황을 내어주지 않으면 어쩝니까?"

    "그건 그때 가서 토벌을 하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연방군은 뭐 게임에서 병사 찍어내듯 어디서 계속 생산할 수 있는 병력으로 아는 건가.

    "거듭된 전투로 죽을 우리 군사들은 어떻게 합니까?"

    "지금 폐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군사들이 문제입니까?"

    내게는 천황보다 군사들이 더 중요하다.

    "애초에 장인이 먼저 백제를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든 열도에 대한 정치는 연방이 주도합니다. 호족들을 건드려 일본을 이탈하게 만든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 위험에 빠져 연방이 군대를 끌고 오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입장에서 연방군의 피해를 더 늘리라는 말입니까?"

    "그래도 장인이 아닙니까?"

    장인이라고 구하려고 병사들의 피해를 늘리면 내 꼴이 뭐가 되겠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장인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을 죽게 만든 총리라고 나를 삿대질을 할 것이다.

    구하기는 구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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