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북해도에서 연방의 추격군을 따돌린 호족들은 좀 여유가 생기자, 이제 천황의 처우를 논의했다.
"이제 더는 천황께서는 쓸모가 없으니 우리가 뭔 짓을 해도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그럼 없애자는 말이오?"
"딱하지만 살려 보낼 수는 없지 않소?"
"그렇소. 우리 인생이 지금 이 천황 탓에 크게 말아먹지 않았소."
호족들은 불만을 뱉었다. 당장 저 천황의 목을 베고 싶었다.
모든 걸 버리고 일본에서 튄 주제에, 결국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각오하고 연방 밑에서 살아남으려던 자신들을 또 방해한 작자다.
심지어 이 먼 섬까지 도망치게 만들었다.
앞으로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 가신들은 꽤 데리고 왔으나,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야 그렇긴 한데……."
"살려둬서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을 나눠주자는 말이오?"
결국 분위기가 영 좋지 못하게 흘러가자 후지와라노 다다히라가 앞에 섰다.
"폐하, 이곳은 신들이 지키겠습니다! 얼른 섬을 빠져나가시지요!"
후지와라 다다히라는 남은 수하들과 함께 천황을 피신시키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어디에 있든 죽기 마련이니까, 차라리 끝까지 충심을 보일 생각이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자, 잠깐! 그래도 그대들 역시 한때는 신하가 아니었나!"
"지금은 아니지 않소! 얌전히 칼을 받으시오!"
천황이 구걸하려는 찰나.
쉬이익 푸욱!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호족의 목을 꿰었다.
어디서 날아오는 화살인가 싶어 숲 쪽을 보니, 일본인과 신장이 큰 차이가 없으나 이상한 옷을 입은 인간들이 적의를 비추고 있었다.
딱 봐도 이 북해도의 원주민일 것이다.
"뭐야, 저놈들은?"
"젠장, 맞서 싸워라!"
하필이면 섬의 원주민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일본 천황과 호족들을 외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놈들은 대체 누구야!"
호족들은 원주민들에게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곳은 북해도,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당연히 호족들은 원주민들의 땅에서 맥을 못 췄다. 그냥 있는 그대로 적들에게 당할 뿐이었다.
"폐하! 도망치셔야 합니다!"
"젠장! 도망쳐라!"
호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후지와라는 천황을 보필하여 해안가까지 도망쳤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다행히 쫓는 자들은 없군그래."
한참 도망쳐 나왔는데, 그래도 뒤쫓는 자들이 없다.
"아마 다른 호족들이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쪽에서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천황을 납치하듯 이 섬으로 끌고 와 죽이려 들던 놈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렇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곳에 있다가는 꼼짝없이 다 죽을 몸이다.
"그건 다행이나,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지금은 방법이 많지 않다. 아니, 사실상 남은 방법은 백제로 돌아가는 것 정도. 지금 그것이 천황에게 남은 유일한 살길이었다.
"지금이라도 백제로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 호족들까지 저놈들에게 죽으면 일본을 되찾을 기회는 사라집니다. 차라리 광 황자님께 전부 맡기시지요."
결국은 그 방법뿐인가. 일본을 되찾을 수는 없나.
일본의 피가 섞인 광 황자. 그래. 나쁘지 않다.
힘이 없는 지금은 그거라도 믿어야 할 처지였다.
"그럼 결국 이대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딱히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금강은 명분상 천황 폐하를 어쩌지 못합니다."
금강이 호족들을 죽이기는 했어도 결국 천황을 데려가겠다는 명분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금강의 행보는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다.
애초에 호족들을 벤 것도 대봉예의 군사들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그렇지 이제 와 돌아가는 건…… 끄으응."
"폐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알았네. 그리하지. 하지만 어떻게 돌아간다는 말인가."
돌아가고자 해도 돌아갈 방법이 전혀 없다.
"사람을 서라벌에 보내보겠습니다."
"그냥 우리끼리 먼저 돌아가면 안 되는 것인가?"
안 된다. 그건 위험하다. 만에 하나 금강이 천황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위험합니다. 일단 명분이 폐하를 데려오기 위함이라 해도…… 소신이 직접 가 금강을 만나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호족들을 베어버린 것이 비록 대봉예의 군사라 해도 그 뒤는 금강.
금강이 만일 다른 생각을 품고 있으면 죽어도 혼자 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하게. 다만 우리가 이렇게 도망쳐 나온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변명을 해야 할 것이야."
"예, 폐하. 그리할 것입니다."
이미 생각해둔 변명은 있다. 금강이라는 자는 명분으로 움직이고 명분으로 멈추는 자다. 적당한 명분을 던져주면 반드시 도우러 올 것이다.
* * *
군대를 이끌고 부산진까지 내려왔다.
도로의 효과는 확실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미완성이지만, 백제와 신라를 잇는 도로망의 틀이 발견된 덕에 군대가 움직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빠르더라. 이건 정말 혁명이었다.
다만 부산진에 와서 아이누족의 언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놈을 찾는 것이 좀 오래 걸렸다.
일단 일본 출신들로 알아보는지라 일본부에서 올라오는 시간도 한참이 걸리니, 시간이 엄청 소요되었다.
그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후지와라노 다다히라가 직접 왔다는 건가."
직접 준비하고 한참을 내려와 부산진까지 왔는데, 의외로 천황과 후지와라는 뚝심이라는 것이 없는 인물들 같았다.
그쪽에서 하려던 일들이 잘 안 되었나 보다.
멍청하지 않고서야 대뜸 나한테 선전포고를 할 리도 없을 테니까, 아마 살려달라고 빌려고 온 거겠지.
어디 그 다다히라의 얼굴을 볼 필요가 있다.
"이거 참, 후지와라노. 어디 있다 이제 온 것이오?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송구합니다."
"장인께서는 어찌 된 것입니까? 설마하니 다다히라 공이 장인을 두고 도망친 것은 아니겠지요?"
설마 이미 죽었다거나? 아니지. 그래도 후지와라는 천황을 모시는 가문이다. 그러니 그냥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닙니다. 혹시 모르니 폐하를 안전한 곳에 모셨습니다. 언제든 배를 타고 탈출할 수 있도록 다 준비를 해뒀습니다."
"흐음. 그런데 왜 같이 오지 않고."
"그, 그것은……."
이미 알고 있구만. 그러니 나를 경계하는 것이다.
북해도에서도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배편만 마련해두고, 다다히라는 내 속을 떠보기 위해 홀로 온 것이다.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인물이 아닌가.
"그래서 어디 있다고 하셨지요?"
"천황께서는 지금 북쪽 섬에 계십니다. 열도에서, 그리고 여기 서울에서는 동쪽 바다를 건너는 곳에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지.
그런데 다른 호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지 않나.
"그렇습니까. 지금 호족들은?"
"아마 다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다 죽었다라. 아이누족에 대한 평가를 바꿔야 하나?
뭐 함정일 수도 있으니, 역시 군사는 만 단위는 끌고 가야겠지.
"음. 뭐 이 사위가 구해드리러 가야겠지요. 어쩌다 그런 험한 데까지 끌려가셨는지. 에잉, 쯧쯧쯧."
그러게 왜 그런 개고생을 하고 있나. 어차피 무슨 수를 쓰든 일본이라는 나라를 천황이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말이다.
그런데 다다히라의 얼굴을 보니 조금 전부터 입이 움찔거린다. 뭔가 말하려나 본데, 대체 무슨 변명을 하려는 걸까.
하도 답답해서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다다히라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 음…… 저 그게, 실은……."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후지와라노 다다히라도 일단 장인의 측근이니 이 총리와도 각별한 사이가 아닙니까? 말씀하시지요."
난 이래 보여도 상당히 속이 깊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해해줄 수 있다. 변명이나 해봐라.
내 말에 다다히라는 그제야 내 속뜻을 알아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릿속으로 변명을 생각해내라.
"아, 저 그것이, 그…… 사실……."
"사실?"
뭐야, 변명이라도 생각해둔 것이 있나?
"호, 혼슈 북부랑 슈코쿠 지역의 호족들이 중립이라는 말을 듣고, 혹시라도 그자들이 연방에 방해가 될지 해서……."
혼슈 북부와 슈코쿠 지역의 호족들. 그래, 그렇지. 그놈들 아직 방해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걸리적거리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일본은 바다 건너에 있으니까. 호족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을 먹으려 한다면 곤란하다. 그래서 내가 백제라는 이유로 우리가 남이 아니라는 식으로 일본을 먹은 것이 아닌가.
후지와라노가 제법 내가 듣기 좋은 소리를 골라 하는구나.
"그래서?"
"장인으로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그 일이라도 처리하고 싶다며 혼슈 북부까지 가셨다가 그만…… 호족들이 폐하를 납치하여 북쪽의 섬으로 끌고 가셨습니다."
호오, 그럴 듯하다. 벌써 거기까지 다 각본을 짜뒀다는 이야기인가.
"아하."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쓴다. 호족도 그렇고 그놈들을 설득하려고 간 천황도 대단하다.
사실은 그놈들을 설득해서 백제와 한판 해보자 이거였겠지. 지금 다다히라는 오히려 천황을 피해자로 만들어 다시 연방으로 돌릴 셈이고.
그래. 나쁘지 않다. 현실을 직시했으니 내 뭔들 못 해줄까.
"슈코쿠 호족들은 건드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아, 장인에게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
참으로 깊은 뜻이다. 정황을 다 아는데 마치 뜻을 이루지 못해 쓰러진 영웅처럼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웃긴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신속히……."
"북해도에 군대를 보내달라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지금 부산진에 다 준비를 해뒀다.
남은 것은 출발하는 것뿐이지. 설마하니 다다히라가 먼저 올 줄 누가 알았을까?
더는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 천황이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한들 결국 북해도는 아이누족의 땅.
"알겠네. 안 그래도 그 땅을 점령하려 했지. 내 직접 갈 테니. 기다리십시오. 지금 함대를 준비하고 있으니."
"예. 각하!"
다다히라에게는 북해도로 갈 선박 한척을 주었다.
처음엔 웃음이 나는 변명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헤아려 보니 그래도 저 정도면 나름 그럴듯한 명분이다.
일단 저리 명분은 가져왔으니 장수들을 소집하여 다다히라가 내놓은 변명거리를 들려주었는데.
"제법 그럴듯한 변명이 아닙니까?"
"저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기 스스로 숙이고 들어온 격이 아닙니까?"
"저 정도라면 아예 숙이겠다는 뜻이지요."
장수들도 다들 좋은 반응을 보였다.
아마 천황은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결국 연방에서 벗어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말이 중립 호족들이지 가지고 있는 군사도 없고, 호구조사까지 다 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맞설 힘이 없다. 뭐 그런 소리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요. 천황을 붙잡는다면 이전보다 더욱 혹독하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역시 그런가?"
하긴 그 늙은이가 쓸데없이 움직이면 곤란하다.
일단 이번 일로 더 움직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이제 천황은 갈 곳이 없거든. 중국이 통일이라도 되어있다면 중국의 천자에게 원병을 청할 지도 모르지만, 중국은 지금 분열되어있으니.
"예, 각하. 우리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잘도 도망친 주제에 이제 와 목숨이 위험하니 살려달라니요. 어휴."
장수들이 짜증을 냈다. 특히 상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솔직히 천황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자기가 다스리던 나라를 통째로 나에게 넘기는 격이다. 심지어 그는 이전에도 아낌없이 나에게 전부 주었다.
생각해 보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복지는 철저히 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