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일본의 호족들은 급히 대책을 마련하려 했지만 적당한 것이 없었다.
군대로 맞선다는 어리석은 선택지는 고를 수 없다.
그러다가 배신당하거나 수하한테 목이 잘리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차라리 북쪽으로 갑시다! 바다 건너 섬이 하나 있으니 좀 잠잠해질 때까지 도망치면 될 것이오!"
"그럽시다!"
여기서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군사는 없으니 맞서 싸울 수도 없는 형편. 그렇다면 개죽음당하느니 차라리 북쪽으로 도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폐하는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폐하? 천황이 아직도 우리의 천황인가?"
이미 힘 하나 없는 허수아비인 주제에.
심지어 이렇게 도망 왔으니, 금강도 이런 천황을 다시 받아주지 않겠지. 백제로 도망친 주제에 갑자기 미쳐서 왜 돌아왔다는 말인가.
"이보게들!"
"그래도 일단 데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인질로 쓸 수 있을 것도 같고."
천황은 끽해야 인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힘도 무엇도 하나도 없는 자를 뭐 어쩌겠나.
쓸 가치라고는 없는 걸 그나마 연방군이 추격하지 못하도록 인질로 삼아 끌고 가는 것이다.
그래도 명분이 있는데 설마하니 천황을 건드릴까.
"그러지."
"자네들…… 뭐, 뭐하는 건가?"
후지와라 일족이 천황을 지키려 했으나,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던 호족들은 눈에 독기를 품었다.
"후지와라! 네놈들의 시대도 끝났다! 네놈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찾아왔으니, 우린 살아야겠다!"
남은 호족들은 천황과 후지와라노들을 모조리 포박했다.
어차피 힘도 뭣도 다 떨어진 놈들을 믿고 있다가는 서로 죽을 뿐이다.
그리고 대봉예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호족 놈들은 어디로 간 건가??"
남은 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일본 열도의 북부를 싹 뒤져봤는데도 없다.
"남은 북부 호족들이 모두 가산을 챙기고 도주했다고 합니다."
"도주를?"
도주했다면 결과적으로 그 땅은 연방의 것이니 오히려 이득이기는 하지만, 왜 도망을 쳤나.
"뭐 하자는 거지? 아니야. 잠깐만. 뭔가 이상하군."
대봉예는 호족들의 도주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놈들이 군사를 일으킨다 한들 잡으면 그만이고, 알아서 사라졌으니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천황은 어디로 갔는가?
천황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혹시 호족들이 천황을 데려갔나? 그들이 굳이 천황을 데려갈 이유가 있나?
"아니다. 잠깐."
정말로 호족들이 천황을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연합군이 천황을 핑계로 자기들을 죽인다는 정도는 알 것이다.
그렇다면 호족들은 천황을 인질로 삼고 도망친 것인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추격대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도독. 호족 놈들이 기어이 배를 타고 도주하였습니다."
"천황이 예상대로 북해도로 끌려갔다는 건가."
연방의 총리인 금강이 내어준 지도에 따르면 호족들이 갈 만한 곳은 끽해야 북쪽의 섬 정도였다.
"이번 일은 총리 각하께 보고하겠다."
총리 금강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 * *
도로 사정을 살피던 중, 나는 서라벌까지 둘러보기로 했다.
어차피 신검도 만나러 가는 길이니 혹시라도 길이 더 있을까 해서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일꾼들을 이용해 대야성 부근의 땅을 파보자, 백제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길이 있었다.
물론 신들이 백제 양식이라고 밀어붙인 도로 같은데. 삼국의 치열한 전장이었던 성에서 백제 양식의 도로가 나왔단 사실은 상좌평 최승우를 경악으로 물들였다.
"서라벌까지 길이 놓여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도 백제는 신라를 이길 수 있다고 여겨 지어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예 서라벌과도 완전히 붙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정말 백제의 유산이라면 얼마나 슬플까."
자기들이 이길 줄 알고 놓았던 다리가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신들은 전혀 눈치가 없었다.
그냥 적당히 그럭저럭한 틀만 남겨주지. 그럼 박연이 넘겨준 설계에서 그냥 적당히 돌만 쌓으면 되는 구조다.
게다가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이것으로 우리 백제는 삼국 중 도로 기술이 가장 발달한 국가였던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도로를 파괴한 것은 통일한 신라였지요."
"그, 그렇게 되겠군요."
백제의 역사에서도 한 획을 긋는 일이 될 것이다.
암습당한 백제의 역사가 도로 하나로 바뀌겠지.
백제는 도로와 운송이 발달한 국가라든가, 신라가 백제인들이 도로를 이용해 혹시라도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해서 도로를 파괴했다던가.
"어? 그거 좋은 방법이로군."
"예?"
"백제의 사서를 만드는 거지. 신라 서라벌에 있는 옛 기록들을 모두 모아 백제에 관련된 기록들을 중심으로 새로 편찬하는 겁니다."
신라 왕궁에는 신라를 중점으로 다룬 사서가 많았다.
이제 그 사서들도 써먹을 때가 되었지.
"그거 좋은 방법이로군요."
"대야성은 아마 백제가 점령한 이후 도로를 판 것이 되겠죠."
"김춘추의 딸과 김품석을 죽인 이후로군요."
그렇게 되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백제는 스스로 신라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으니까.
"지금까지 발견된 도로들을 보니,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자왕의 업적에 하나 더 추가될 필요가 있지요."
"도로 정비를……."
"예. 의자왕은 도로를 이용해 나라를 크게 발전시킬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나도 내가 뭔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신이 깔아놓은 거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렇게 하지요. 아마 백제는 도로를 정비하여 대야성을 기반으로 옛 가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음. 그럴듯합니다."
아직 사서에 적지도 않았지만, 적는다면 그렇게 될 것 같다.
나중에 장관들 모아서 본격적으로 사서 편찬을 해야 한다.
지금은 고려와 백제가 한 몸이지만, 그 오랜 옛날 나제동맹 시기에 고씨의 고려는 백제의 적이었다. 대신 신라와는 동맹이었는데, 신라는 영토를 인정해준다는 고구려의 말에 나제동맹의 대의를 저버렸다.
후일 성왕이 먼저 배신때렸다는 설이 있으나, 한강 하류까지 신라가 가져가 버린 탓에 화가 치민 성왕은 신라에 보복하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에 굴복한 김춘추야 딸 보복을 위해 같은 삼한인을 팔아먹었다는 이유로 매국노로 역사에 기록하면 딱 좋을 것이다.
연방 관점으로 보는 역사서를 새로 편찬해야 한다.
"지금 그냥 돌아가서 사서를 편찬할까요?"
"허허, 지금은 도로를 살피셔야지요. 국가의 중대사라 할 수 있는 대규모 공사인 만큼 총리께서 모범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건 아쉽군. 솔직히 햇빛 아래에서 좀 둘러보는 것도 피곤하다.
얼른 총리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기고 좀 편히 살고 싶다.
"저기 누가 옵니다."
그런데 서라벌 쪽에서 연방기를 든 병사가 말을 타고 왔다.
다급해 보이는 것이 서라벌로 올라가 신검을 알현했다 다시 나를 찾아온 것 같다.
"총리 각하 되십니까?"
"복식을 보아하니 일본 출신이로구나. 일본에서 건너왔느냐?"
복식이랑 말투를 보니 이제 막 우리 언어를 익힌 일본 출신인 것 같다.
"예. 각하!"
일본에서 건너왔다면 대봉예겠군. 그렇다면 천황의 일 같은데. 아마 호족들을 몰살시켰다는 소문일 것이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각하, 지금 일본에서……."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소상히 말해보라."
뭐 멍청한 천황 덕에 잘되었다.
태봉의 호족들은 그나마 태봉을 점령하면서 필요한 걸 다 뜯어냈고, 연방정부의 관리로 등용까지 했으나 일본은 아니거든.
일단 혼슈 북부 애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알아서 굴복하여 군을 내놓았으나 중앙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중립을 표방했던 이상 이 호족들은 찝찝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이들은 일본인이니 하니 훗날 뒤통수를 조심해야 했다.
그러자면 처단을 해야 했다.
결국 그 천황이, 내 장인이란 자가 갑자기 어디서 소문을 들은 건지 몰라도 더는 안 되겠다 여긴 건지 일본으로 건너간 덕에 호족들을 처리할 명분만 쥐게 된 셈이다.
설마하니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혼슈 북부 세력이 크다고 할 수 있나?
"천황이 혼슈 북부 호족들과 함께 북쪽에 있는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북쪽에 있는 섬이라면 북해도를 의미하는 거다.
이제는 거기까지 갔다고? 작정하고 덤빌 셈인가?
"확실한가?"
"예, 각하. 하여 연방 도독께서는 어찌해야 할지 각하께 직접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흠."
그러고 보니 북해도는 어찌해야 한다.
북해도라면 처리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북해도라니 어인 말씀이십니까?"
상좌평 최승우의 물음이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북해도를 점령해야 하나 싶습니다."
북해도를 쳐버릴까?
"북해도라면, 그곳에는 그 섬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천황과 그 똘마니들이 힘을 키우기 쉬울 겁니다."
그 전에 잡아 죽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굳이 놈들이 세력을 키울 기회를 주면 곤란하다.
저놈들은 천황을 인질로 삼아 튀었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잘 되었다. 연방은 천황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보내면 그만이다.
"일단 평양으로 돌아갑시다."
* * *
평양의 장관들을 총리부로 소집했다.
이번 일은 좀 빨리 처리해야 한다.
북해도로 갔다면 열도를 떠난 셈이니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닌가.
"북해도를 점령하지."
"북해도라 하시면?"
"바로 열도 위에 있는 섬이네. 어마어마하게 크지. 이곳에는 원주민들도 살고 있어서 상대하기가 좀 까다로울 것이야."
우리보다 문명의 질이 떨어지지만, 그곳은 아이누족의 본산이다.
원래 개새끼도 지네 집에서는 늑대가 되는 법이다. 괜히 무턱대고 쳐들어갔다가 아이누족에게 얻어터질 수도 있는 일이지.
"굳이 점령할 이유가 있습니까?"
"땅이 마냥 넓으면 지키기만 힘들 뿐입니다."
그렇지. 인구도 많지 않은데, 땅이 넓어지면 지키기만 힘들 뿐.
"이미 일본을 우리가 가진 격이니 바다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점이 없는데 무슨 연유로 그러십니까?"
이점이 없지. 솔직히 나도 북해도는 그대로 내버려 두려고 했다.
굳이 먹는다면 오키나와를 비롯해서 저 대만도 정도일까.
북해도는 지금 당장에는 쓸모가 없다. 중원이 중요한 이 시기에 관리할 구역만 늘려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신라가 존재했다면 일본으로 갈 교역선이 표류할 위험이 있으나, 이제는 저 남쪽을 통해 교역하면 되는 일. 굳이 섬으로 쳐들어갈 이유가 있습니까?"
신라가 있을 때는 동해를 그대로 통과해야 하니 여러모로 힘들 무렵이었다. 일본과 교역을 하던 발해의 사신들이 매번 북해도에서 죽어 나갔으니까.
"이번 도로공사만 해도 국가적 대사업입니다. 그런데, 작다고는 하나 그 섬에 보내려면 최소 1만의 군대는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만의 군대라. 어쩌면 그 이상 들어갈지도 모르지.
섬이 워낙 커야 말이다.
일단은 가서 이것저것 설치도 해야 할 테니, 한동안은 준비도 해야 하고.
"하물며 고작 야만족들이 사는 섬 하나를 취하기 위해 굳이 소규모라고 한들 군대를 내는 것은 영."
장관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 마음을 왜 모를까. 잘 알고 있다. 그래. 슬프겠지.
하지만 이유가 있다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