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천황은 호족들을 열심히 설득했다.
"지금의 백제는 옛날의 백제가 아니네. 이름만 이었을 뿐, 신라의 후신국이라는 말이네! 백제 견훤의 아버지는 신라계 호족이었네!"
그 말에 호족들은 수군거렸다.
견훤의 아버지가 신라인이라니. 견훤은 부여씨가 아니라는 소리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의 백제는 신라의 뒤를 이어 일어난 국가란 말씀입니까?"
"그렇네! 놈들에게 협력하면 안 되네! 신라에 백제가 통째로 넘어가는 격이야!"
호족들은 천황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일본을 떠난 천황이다. 뒤늦게 주인행세를 하며 다시 넘어온 것이 아닌가?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호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가 않다.
"하지만 백제는 신라의 서라벌을 진압하여 그 백성들을 우리 호족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런 백제가 정말……?"
말도 안 된다. 정말 신라계 국가라면 신라인들을 그리 쳐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천황은 지금을 기회로 밀어붙였다.
일본을 이대로 끝장낼 수는 없으니까.
"그것이 다 천명을 쥐기 위한 수작이네! 모두 다 함께 군사를 일으켜야 하네!"
"우리는 군사가 없습니다."
군사가 없다. 당장 군사를 키우면 연방에서 따질 텐데 어떻게 키우나. 분명 이전만큼의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처지지만, 그렇다고 연방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있지 않은가!"
"굳이 따지자면 조금은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들고일어난다고 해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이미 호족들은 다 알고 있다.
백제가 가진 그 강력한 군사력. 심지어 고려군까지 밀고 들어오면 과연 호족들이 버텨낼 수 있을까.
심지어 일본의 절반은 이미 백제가 점령했다. 그곳에서만 군사를 일으켜도 남은 호족들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결국 호족들이 백제를 따르는 이유도 백제가 일본과 하나였기 때문이 아닌가! 지금의 백제는 가짜네! 그걸로 선동하면 호족들도 들고 일어날 것이야!"
천황의 연설에 호족들의 의견은 나뉘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습니까? 연방은 단 한 번의 출정으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괴뢰국을 세웠습니다."
"요나라의 황제도 세웠다지요."
핏줄을 떠나, 이건 냉정하게 접근할 문제였다.
천황의 핏줄만 믿고 막무가내로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목숨줄이 연방에 쥐인 이대로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렇다고 일본을 백제에 다 넘겨주자는 말인가!"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지요. 애초에 이 나라는 삼한 땅에서 넘어온 백성들의 후손들이고, 삼한의 문화로 발전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때가 되어 다시 하나가 되는 것뿐입니다. 굳이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매국노들 같으니!"
천황은 격분했다.
어떻게 일본을 팔아먹으려 드는가. 나라가 사라질 위기다. 그렇다면 마땅히 힘으로 헤이안쿄에 있는 연방 관청을 부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호족들도 할 말은 너무나 많았다.
"천황께서도 현실을 보시지요. 애초에 천황께서 백제 지원을 조금 심사숙고하셨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백제에 들이박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이제는 별 의미도 없다.
애초에 당시에 귀족들도 수락한 일이었으니까. 누구 잘잘못을 따질 처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야 과거 일을 이야기하자는 건가?"
"이제 와 옛 신하들을 죽으라고 떠미는 건 또 무슨 파렴치한 짓입니까?"
호족들은 저마다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이, 이놈들이!"
"폐하, 시기가 시기입니다. 이미 열도에 백제의 법령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연방의 군사는 많습니다."
일본 전역이 백제와 연방의 법령으로 돌아간다.
전쟁의 피해를 입은 지역도 백제식으로 복구가 되어가는데, 더 말해 무엇할까.
무슨 이유가 있든지 간에 안 된다.
"그래서 나보고 포기하라?"
포기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호족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노망이라도 난 건지 왜 자기들을 찾아와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몇 달 전이라면 그래도 사병을 키울 만큼 틈은 있었지.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다르다. 군사가 없는데 무엇으로 연방을 몰아내나.
"폐하께서 굳이 이곳에 계시겠다면 성심을 다해 모실 것이나, 전쟁을 치르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나마도 최대한 예우를 해주는 것이다.
"크으윽, 정녕 그렇다는 말인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그건 당연했다. 현실을 보자면 군사력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으로? 천황이라는 자가 그 머리는 장식인가.
고작해야 한 줌의 병력으로 연방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럴 바에는 천황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방법이었다.
"그러니 폐하, 불가합니다."
호족들은 여전히 거부하였다.
누구 좋다고 연방을 거스르나. 이제 일본은 끝장났다. 혈통이 대수인가? 지금은 일족을 지키느냐, 마느냐가 걸려있다. 그나마 백제가 백제의 국호로 일본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위안 삼을 뿐이다.
이렇게 하면 자기합리화라도 가능하니까.
"흥, 웃기는군. 어차피 짐을 맞이한 이상, 너희들도 연방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갑자기 그건 무슨 개소리인가.
"그게 무슨……."
"연방은 호족들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느니라!"
설마 이렇게 고개 숙여 살고 있는데 군대라도 보내 토벌할까.
"이미 연방에서도 짐이 일본으로 돌아온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터! 아마 명분으로 삼아서 너희를 치려 할지도 모른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순전히 억지다. 저 말을 굳이 들어줄 이유가 없다.
"무슨 그런 억지가……."
"당장 신라의 호족들을 보면 모르는가? 걸리적거린다고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죽인 것이 연방이다!"
확실히 그런 소문을 듣기는 들었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은 다르다. 신라는 백제에게 있어 불구대천의 원수지만 일본은 백제와 혈맹이었으며, 지금은 백제와 일본이 한 몸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백제가 일본의 호족들을 가만히 안 둔다? 심지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설마,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고……."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는데도 과연? 오히려 이번을 기회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
천황은 이판사판이었으나 나름 논리가 있었다.
실제 연방의 행보를 돌이켜 보자면 호족들은 다 죽어 나갔다.
그나마 태봉의 호족들에겐 회유책을 좀 썼던 것 같은데, 그들마저도 후에는 모든 권리를 다 잃었다.
규슈의 호족들도 최소한의 권리만 누릴 뿐 어지간한 권한은 전부 연방정부로 넘겼다. 남은 것은 중립 호족들 뿐.
"이런 어리석은!"
"천황이 진정 미치셨소?"
죽으려면 혼자 죽지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가.
하다 하다 권력을 되찾기 위해 다 죽자는 수를 쓰다니.
오히려 이 천황이라는 인간이 연방에서 보낸 자객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러니 어차피 네놈들 죽고, 나 죽는 것이다! 자, 어찌할 테냐!"
"우리가 연방에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소?"
호족들은 천황을 비웃었다.
이미 나가떨어진 천황이다. 예전처럼 잘 대우해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요시코 내친왕의 자식이라는 부여광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미리 선을 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천황이란 작자는 또 쓸데없는 소리를 뱉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그냥 둘 것 같나?"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거요?"
천황이라는 작자가 대체 우리와 무슨 원수가 져서 이러는 것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네놈들이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않았어도 이 꼴은 아니었을 거다!"
안 그래도 황궁에서 일어난 급변과 함께 여러 불행이 겹쳐 황족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못 할 짓이 무엇인가.
지금 천황에게 남은 것은 잠깐이라도 다시 일본의 천황으로서 살아가는 것. 오로지 그뿐이었다.
"그걸 왜 또 우리 탓을 하는 겁니까? 정작 나라를 망친 것은 천황 본인이면서!"
"그래서 어찌할 것인가?’
호족들은 갈팡질팡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망할 천황이 한번 거하게 말아먹었으니, 이제 자신들은 연방에 머리를 숙여도 과연 멀쩡하지 못할까?
"제아무리 폐하의 말씀이라도 받들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천황은 호족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절대로 황을 따를 수 없다. 누가 신하를 죽이려 하는 천황을 따르겠는가.
차라리 연방과 서라벌 백제조정의 뜻을 따를 것이다.
"지금 사태가 이러한데 지켜보겠다고?"
사태라니. 호족들은 헛웃음만 나왔다. 자기가 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될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걸 정녕 모르는 건가.
"닥치시오!"
이게 대체 누구 탓인데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나.
하지만 이것은 피바람의 서막일 뿐이었다.
대봉예가 보낸 군사가 샅샅이 천황을 찾기 때문이었다.
호족들은 당황했다. 설마하니 연방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알았을까. 그리고 연방군은 기어이 호족들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결국 호족들은 급하게 남아있는 병사들이라도 모조리 모았다.
그리고 천황은 숨겼다. 적어도 천황이 없다는 증거는 보여야 한다.
"젠장, 이제 어찌합니까?"
"어쩌기는 뭘 어째. 가만히 있어야지."
결국 답이 없다. 호족들은 그저 모른 체하기로 했다.
천황을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니다. 천황의 말이 나름 그럴듯하니 괜히 천황을 바쳤다가 모함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배 째는 식으로 있어도 되겠지.
"천황이 이곳에 없나?"
호족들을 직접 찾아간 대봉예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황께서 이곳에 계실 리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아니라고 잡아뗐다.
"총리께서 걱정하신다. 정말로 본 적이 없나?"
"예."
아무래도 수상하다.
"어차피 천황은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
"예, 옙, 도독.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사위가 이리도 그리워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예?"
한마디로 사위가 애달프게 찾고 있으니 얼른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물론 정작 대봉예는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번이 호족들을 전부 쓸어낼 좋은 기회를 굳이 놓치려 할까.
"아무래도 안 되겠군. 병사들은 뭣들 하느냐! 다 죽여라!"
"갑자기 이, 이게 무슨 짓들이오?"
대봉예의 군사들이 칼을 뽑자 호족들은 당황했다.
대체 왜 칼까지 뽑는 것인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대봉예에게 따지자 돌아온 답변은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게 누가 숨기라고 했나? 우리가 바본 줄 아는 것인가? 병사들을 그리 모아두고 있으면 당연히 천황이 있는 줄 알지!"
바보도 아니고 얼마 되지도 않는 군대를 끌어모았으면 당연히 의심이 가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아, 아니…."
"죽어라!"
결국 호족들 여럿이 우르르 한꺼번에 죽어 나갔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호족들은 자기들 차례가 올까 두려워 도망쳤다.
천황의 멱살을 붙들고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젠장! 왜 여기로 와서 우리를 다 죽게 만드는 거요!"
"왜 군대도 없는 것인가!"
이제 와 그게 중요한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말귀를 못 알아먹나.
설마하니 연방의 눈을 속이고 대규모 사병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알았을까.
천황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생각이 없을 수 있는가.
"그걸 왜 우리에게 묻습니까! 우리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지! 젠장, 천황이 우리를 다 죽이는구나!"
대봉예의 군대가 몰려오니 호족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