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서라벌의 민심이 요동치면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 반란은 다른 반란과는 격이 다르다.
아마 신라 부흥 운동으로 넘어가겠지. 내가 김부를 개처럼 굴린 것도 있고, 원 역사와 달리 유배까지 보내뒀으니까.
"애초에 수도 천도의 목적이 신라인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일본열도와도 조금 더 긴밀히 연결되기 위해서였지. 이번에 막지 못한다면 그놈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늘 반발하고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천도 때부터 이 모양이면 좀 작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이라면 나중에 신검이 서라벌에 갔을 때, 신라 놈들이 어떤 반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으니까. 조금은 힘으로 밀어붙여야지.
"본보기로 반발을 주도하는 놈의 목을 베어 효수해라. 그래. 상귀 장군이 가는 것이 좋겠군."
"소장이 말입니까?"
"상귀 장군이 신라 서라벌을 털지 않았던가? 들어보니 그쪽 애들이 상귀 장군을 두려워한다며?"
"크하하핫! 당연합니다. 그놈들은 제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지리니 말이지요."
오, 그 정도인가? 그럼 만족스럽군.
"아주 그냥 나보다 더 무서워서 좋겠어?"
"그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송구합니다, 각하!"
상귀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어차피 나 혼자 일을 다 처리할 수 없는 일이고. 상귀 장군이 가서 그 정신 나간 놈들 정신 좀 차리게 해주게."
"옛! 각하!"
상귀가 총리관부를 떠났다.
언제까지 내가 일을 다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귀도 이번 일을 끝으로 좀 쉬게 할 생각이고. 슬슬 젊은 세대도 중요하겠지.
상귀를 내려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부인인 요시코가 총리관부로 찾아왔다.
"부인이 이곳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
"소온 공주가 회임을 하셨습니다."
"음? 그런가?"
요즘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나.
"그러니 이제는 좀 위로해주시고 부인으로 삼아주시지요."
소온 공주는 몇 년 사이 훌륭한 성인이 되었다.
안달복달해서 평양에 찾아온 공주를 버릴 수는 없어 그래도 받아주었는데,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지.
그리고 찾아간 소온 공주는 배가 불룩했다.
자식이 대체 얼마나 생기려는 건가. 소온은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해서 걱정 없을 줄 알았는데.
"맨날 밖에 나돌아다니십니까? 두 부인 때문에 세 번째 부인은 뭐 성에 차지 않다 이 말씀이십니까?"
"음? 갑자기 왜 그리 생각하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젊은 여자가 부인이면 싫어할 남자가 얼마나 될까?
서로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걸 싫어할 남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 어린 부인을……."
"후, 내 자네를 독수공방시키는 것이 아니네."
사정이 이러한 것을 어떻게 하나. 나는 나라를 이끄는 몸이니 말이다.
"그럼요? 설마 국사가 바쁘셔서라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시겠죠?"
"그 말 그대로인데."
"허 참. 그래요. 이제는 대국의 주인이 되었다 그 뜻이지요? 그래서 거란족의 황녀는 눈에 들지도 않는다?"
갑자기 얘가 왜 이래? 대놓고 나를 비웃는 소리에 약간 기분이 상했으나, 애써 표정을 고치고 소온의 두 손을 잡았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지 않나. 그랬으면 내가 자네와 밤을 같이 보내지는 않았겠지. 요시코와 가독부도 이해해주는데 자네도 좀 이해해주시게."
"제가 괜히 이러는 줄 아십니까?"
"그럼?"
내 물음에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이 반응하는데. 내가 뭐 잘 못 한 것이라도 있나? 항상 철없어 보이던 때와는 다른 분위기다.
"나도 나름 황녀입니다. 자존심도 있고, 우리 잘 난 각하께서 얼마나 바쁜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처한 상황도 좀 생각해달라는 거예요."
처한 상황이라니. 어쨌든 내 세 번째 부인이 아닌가.
몇 년 전에는 심하게 어려서 내가 부인으로 받아주지 않았었다.
"무슨 말인가?"
"내가 거란 출신 황녀라고 믿지 못하는 무리가 있다 이 말입니다!"
출신 때문에 소온을 무시했다고? 아무리 거란 출신이라고 해도 당장 요동에만 거란족 백성이 수만 명이 살고 있는데 소온을 건드린다?
"설마? 그렇다면 거란 출신들은 전부……."
"저는 황녀가 아닙니까? 고려를 침공한 거란의 황녀라는 뜻입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인데? 더군다나 소온은 여자다. 굳이 전쟁에 참여도 않은 소온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소온이 냉대받는 이유는 복합적일 것이다.
고려의 귀족들은 솔직히 태봉에 의한 피해가 더 컸지 요에 의해 입은 피해는 크지가 않다.
오히려 요가 중간에 회군하기도 했지.
"확실히 고려에서는 좀 눈총 좀 받으려나. 그렇다면 가독부에게 가보지 그랬나."
그래도 가독부는 소온을 지켜줬을 것이다.
"몸이 따가워서 어디 갈 수 있겠습니까?"
"음. 미안하네. 내 그간 너무 가만히 두고 있었군."
어쩔 수 없지. 이건 내가 힘 좀 써야 문제다.
소온의 문제도 계속 커지면 고려계 귀족들은 언제고 소온에게 반발하고 나한테도 당연히 불만을 표출할 것이다.
지금만 해도 소온을 남모르게 배척하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닌가.
나는 황녀를 데리고 모든 장관들을 소집했다. 장관들 밑에 각국의 귀족, 호족들이 있으니 아마 이것들이 배후에 있을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황녀 소온을 배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각하. 셋째 대부인께서 회임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 아이가 남자아이면 훗날 고려의 후계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혹시나 했는데, 그거 때문인가.
무슨 이유가 있든 간에 어쨌든 거란은 적이었다. 그것도 힘이 급격하게 줄어들게 만든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여자아이면 광이와 붙여주지."
"근친혼은 고귀한 혈통을 잇기 위해 당연하지만, 만일 남자아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거란족의 핏줄을 고려의 가독부로 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아이 이야기로 넘어가 버렸다.
"황위에 거란의 핏줄은 안 됩니다, 각하."
"핏줄은 오로지 고구려와 백제의 혈통이어야 합니다."
그 말들이 맞기야 하지.
나도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다. 소온의 핏줄은 결코 나라를 이끌어갈 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거란의 핏줄을 고려 귀족들을 두들겨 패며 황위에 올릴 수는 없다.
"사내아이면 거란으로 보내지."
"천륜을 저버리고 자식을 버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쳤나. 내가 내 자식을 버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그 무렵에 거란은 정리되어 있을 텐데 무엇이 문제인가? 정 뭣하면 평양의 내 사저에 지내게 하지."
이것으로 대충 일단락되었다.
결국 이건 세월의 문제다. 소온이 계속 내 부인으로 남고 내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이 장성하여 문제가 없게 되면, 그제야 소온은 온전히 연방인으로 남을 거다.
물론 그때까지 단순히 그대로만 둘 생각도 없다.
고려계 귀족들은 내 말에 그나마 한시름 놓은 듯 보이지만, 언젠가 다시 터질 수도 있는 일이다.
아무래도 고려의 중경에 둘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온에게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래도 소온 그대와 내 자식이라는 게 문제요."
"그럼 뭐 배에 있는 아이를 잡으라는 말씀입니까?"
설마. 내가 그런 일을 벌일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지 않소? 거란의 핏줄이 고려의 황위를 이을까 걱정들이 앞서는 것이오."
"하아. 그래요. 거란은 고려에 원수가 아닙니까."
소온은 어린 시절과 달리 많이 성숙해졌다.
"그래서 내 그대에게 청할 일이 있소."
"무엇입니까?"
"만일 딸이면 내 광이에게 붙여줄 것이오. 부인은 내 선택을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부인을 지키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오."
장관들의 자식들과 맺어주는 방법도 있으나, 그 혼인은 내가 총리인 이상 권력과 깊은 관계를 맺을 것이 뻔하다.
"사내아이라면요?"
"거란을 다스리게 하지."
내 말에 소온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겠지 지금 거란은 야율배의 천하다.
"거란이라니. 설마 요나라를 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패망을 시킬 것이오. 그리하면 부인은 요나라 황녀 신분을 떼고 오로지 연방의 일인자인 내 부인으로 남겠지."
사실 요나라를 먹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아니, 제 조국을……."
"그러니까 선택하게. 솔직히 나도 이제는 부인을 평생 책임지고 싶네. 그러자면 요나라는 방해가 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이 원한다면 요나라는 내버려 두지."
한마디로 그녀의 손에 나라의 모든 것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요를 치는 것이 전부 저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부인, 아무리 연방이라도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야. 조금 시간을 두고 군대를 모아 요를 칠 생각이지."
언젠가 아율배가 도전해온다면 싸워야만 한다.
분명 놈은 연방의 천하질서에 도전한다. 명색이 요나라의 황제인데 자기만의 천하를 만들고 싶은데 우리는 방해일 것이다.
물론 명분이 필요하겠지. 그때는 내가 직접 만들어줄 생각이다.
요를 조져놓을 좋은 명분을.
"나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까?"
"그래. 어디까지나 부인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오."
소온에게는 이 정도로 포장하면 되겠지. 사실 틀린 말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말하면서 구애하는데 내가 그 청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오, 웬일로 말을 잘 듣는다.
"괜찮소?"
"따지고 보면 연방에 와서 산 지도 오래 되었어요. 오히려 저 초원에서 살 때 보다 지금이 더 나은 거 같습니다."
"그럼 다행이로군."
너무 선뜻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백제인이라고 해도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장관들도 만족할 거다.
* * *
백제 서라벌.
나주대도독이라는 명예직을 가진 상귀는 병사들을 끌고 마침내 서라벌까지 내려왔다.
서라벌에 주둔한 백제군은 상귀가 온다는 소식을 무척 반겼다.
"대도독, 오셨습니까!"
"이번 신라인들과의 분쟁을 내가 직접 처리하는 일을 일임하게 되었네."
"아, 그렇습니까?"
연방 소속 백제군들 사이에서도 상귀라는 장수는 맹장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불과 1만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신라 천년 수도를 함락시켰다. 당연히 백제군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취급받았다.
"총리께서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 하시더군. 마한황제께서 성공적으로 천도를 할 수 있도록 말이야."
서라벌 주둔 백제군은 그제야 좀 마음이 놓였다. 이제야 좀 제대로 일이 풀릴 것 같다.
사실 힘으로 끝낸다면 벌써 끝났으나, 괜히 신라인들을 건드리는 것이 우려되었다.
"호오. 그거 잘 되었군요."
"그러니 싹 다 잡아야지."
이번에 아주 싹 잡아서 다시는 신라인들이 백제에 조금이라도 들고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리 만들어야 한다.
상귀가 오고도 신라 호족들은 기세등등했다.
어차피 자기들은 서라벌의 지도층이니 제아무리 백제라고 해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만일 그리하면 민심을 잃을 수 있으니까.
"흥! 우리들을 어찌할 것이냐! 죽이기라도 할 것이냐?"
"그래."
"어?"
서걱!
상귀의 검이 신라 호족의 목을 떨어트렸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다. 총리 각하께서 너무 많이 봐줬다.
서라벌 내에서 피바람이 좀 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