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남쪽 통로를 통해 낙양에 잠입했다. 그리고 부여군 몇 명을 풀어 진천뢰를 낙양 곳곳에 던졌다.
그 폭발에 황궁의 병사들이 빠져나왔다.
지금이 기회다. 바로 낙양으로 진입해야 한다.
"내가 앞서겠다. 모두 뒤를 따르라!"
낙양의 주력군이 빠진 것은 정말로 하늘이 도운 일이다.
"예! 각하!"
"아니, 네놈들은 누구냐!"
"말이 많구나. 다 죽여라!"
황궁은 조금 전의 소란으로 꽤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나는 부여군들과 함께 남은 황궁의 병사들을 잡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도시에서 펑펑 터지는 소리 때문인지 황궁의 병사들은 흩어져 있었다.
황제가 빨리 모은다면 우리가 위험하지만, 이렇게 떨어져 있는 지금이라면 기회다.
퍼엉! 콰앙!
황궁에서도 진천뢰를 마구 터트렸다.
그리고 한참 뒤져 황제의 침소를 찾았다.
나는 병사들을 시켜 황제를 무릎 꿇렸다.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황제 이종가인가?"
딱 봐도 황제 같이 생겨 먹었군.
그리고 그 옆은 황후인가. 이들이 후당의 마지막 황제와 황후라니. 나는 한국사 최대의 업적을 일구어냈다.
중원의 황제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지 않은가.
반강제기는 해도, 어쨌든 꿇긴 꿇은 것이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고 묻고 있다! 감히 황제가 있는 황궁을 노리다니, 네놈들이 정녕 미친 것이냐!"
"닥쳐라!"
부여군 애들이 황제 이종가의 뺨따귀를 후려쳤다.
그래도 자살하기 전에 잡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잡았으니, 당은 더욱 혼란에 빠질 거다.
"빨리 황제와 황후, 황자를 데려간다!"
싹 다 잡아가야지. 암.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석경당에게 우리는 언제든 황제마저 잡을 수 있는 강자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 이놈이 다른 수를 생각 못 하겠지.
"각하! 전국옥새도 챙겼습니다!"
"잘했다!"
전국옥새는 이종가가 죽으면서 함께 사라진 중국의 천명을 쥔 옥새. 그 전국옥새까지 챙겼다면 볼 일은 이제 끝났다.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놈들! 우리를 어떻게 할 셈이냐!"
"당연히 석경당에게 끌고 가야겠지."
석경당이라는 발언에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제야 사태파악이 되는 모양이다.
지금 당장 석경당과 함께 하는 세력은 연방 밖에 없으니까.
"차라리 우리와 협상하시오!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황제가 그럴 듯한 개소리를 씨부렸다.
원 역사대로 자결하려 들 줄 알았는데, 협상해달라니. 어디 일단 들어나 보자.
"석경당은 황제가 되는 조건으로 연운 16주를 내주고 매년 비단 40만 필씩 바치기로 하였다. 네 놈은 그보다 더한 것을 줄 수 있냐?"
"연운 16주에 40만 필? 무슨 이런 강도 같은!"
그 강도 같은 짓을 석경당은 받아들였지.
그래서 후진이라는 나라는 거란의 뜻대로 놀아나는 나라가 되어버리지.
"여기에 은 10만 냥도 추가하지. 어떤가? 그리한다면 내 연방군에 밀지를 내려 석경당의 반군을 모조리 잡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도 토벌군이 있는데, 그게 무슨!"
그 토벌군? 먹혀버릴 텐데.
이종가. 전쟁지휘력이 뛰어난 당신이 직접 나선다면 모르겠는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대군만 보내놨으니 연방에게 탈탈 털릴 것이다.
"호오라, 토벌군이 이길 거라 확신하는 건가?"
"아무리 연방군이 대단해도 토벌군은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먹히지 않는 소리다. 신세를 뒤집고 싶었으면 여기서 나와 협상이라도 잘했어야지.
부여군이 황궁을 제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각하! 당나라의 토벌군이 아군에게 패퇴하였다 합니다!"
"호오, 그래?"
"예! 석경당이 무서운 속도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화포가 있는데 지는 것이 이상하겠지. 심지어 상대는 관흔. 많은 전투에서 단련된 불굴의 명장이다. 그 밑의 장수들도 쟁쟁하다.
"안타깝게 되었군, 황제. 그러게 진작에 알아서 기었어야지. 한심하기는. 이거 석경당이 물러간다고 해도 어떤 바보가 황제의 천명을 인정하겠는가?"
여기서 황제를 도와 석경당의 군대를 몰살시킨다면 이 화북도 필시 분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석경당은 살려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종가는 어차피 역사대로라면 낙양이 포위된 시점에 자살했을 놈이다. 이제 와 항복한다 해도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대에 당이 멸망하고 마는 것인가!"
당연히 멸망해야지.
사실 큰 원한은 없지만, 그래도 명분은 그럴듯하게 있지 않나. 결국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트린 국가니까.
"네놈들이 국호라도 다른 걸로 지었으면 내 봐줬겠지만 말이다. 진짜 당 황실의 후손도 아닌 오랑캐 주제에 감히 당나라를 칭해? 우리 연방에게 있어서 당은 옛 고씨고려와 옛백제를 멸망시킨 불구대천의 원수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놈들을 끌어낸다."
"예. 각하."
이로써 당나라는 끝났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던 그 당나라의 황실은 이미 주전충이라는 놈이 끝내버렸으니, 후당의 황실을 잡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황제 폐하를 풀어줘라!"
황궁을 빠져나가는 길에 당군들이 우리 앞을 막았다.
"이놈들! 화살 하나라도 날리다가는 네놈들의 황제는 목숨이 끊길 것이다!"
"크으윽!"
나는 이종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라 그러면 큰 일이니까.
결국 병사들은 활과 칼을 내렸다. 가는 길에 진천뢰까지 던지니 그들은 우리가 낙양을 빠져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 *
낙양에서 탈출한 이후 나는 연방군의 깃발을 들고 낙양 근처까지 진군한 관흔의 군대에 합류했다.
생각보다도 연방과 석경당의 연합군은 멀쩡했다.
당군이 그렇게 형편이 없던 걸까. 이런 당군도 혼자 막지 못하고 뭐 하는 짓인가.
"석경당, 내가 왔네."
"예? 아, 예. 오셨습니까."
석경당의 얼굴은 마치 네가 왜 여기 있냐는 표정이다.
군대를 이끌고 진군할 때 뒤에서 열심히 배웅해주던 인간이 이곳에 있으니 황당하겠지. 오히려 불편하다는 얼굴이다.
"자네 설마 내가 혼자 왔을 거라 생각하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에게 주는 선물일세. 황제와 황후 및 기타 등등이지."
황제와 황후, 황자들을 직접 석경당의 앞에 꿇렸다.
처음엔 믿기 힘든지 얼굴이 굳었던 석경당은 앞에 무릎 꿇린 황제와 황후 등을 보고 그제야 두 눈을 부릅뜨고 황제를 노려봤다.
그리고 황제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네 이놈 석경당! 어찌 중원의 싸움에 동이 놈들을 끌어들인다는 말인가?"
"호오. 아직도 그런 말을 하다니. 놀랍구만."
아까는 협상하려 하더니 이제는 욕이라. 놀랄 노자다.
"흥. 애초에 황제가 나를 좌천시키지만 않으셨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오. 지금 누가 누구 탓을 하는 것이오?"
"뭐! 이놈, 차라리 그만 욕을 보이고 죽여라!"
"그렇다면."
그런데, 이건 조금 아깝지 않나 싶다.
당 황제는 내가 잡았는데, 왜 석경당한테 주어야 하나.
심지어 군대의 상황을 보건대 토벌군도 일방적으로 격파한 것 같다.
"아, 석경당. 내 자네에게 긴히 부탁할 일이 있네."
"말씀하시옵소서."
"당나라 황제와 황후, 황자를 연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이 어떤가."
후일 석경당이 멍청한 짓을 저지르면 석경당이 세울 진나라를 다시 당나라로 만들어줄 생각도 있다.
"그게 어인 말씀이신지."
"황제가 자결했으면 모를까, 이렇게 잡혀 온 처지네. 덕분에 자네의 천명이 애매하게 되었지. 전국의 절도사들도 자네를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할 테고. 하지만 연방군이 백제와 고구려의 복수를 하겠다고 이들을 끌고 간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네."
석경당이 그냥 단순히 제 욕심을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면, 절도사들의 의심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습격해온 연방군에게 고구려와 백제의 보복이라는 명분이 있으면 석경당의 처지는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다.
"그건 그렇습니다. 감히 이놈들은 대백제와 대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를 칭한 극악무도한 노들입니다."
"심지어 돌궐계지. 실제 당 황실의 후손도 아닌 주제에 감히 당 황제를 칭하고 당나라를 세워?"
명분은 충분하지.
"음. 아, 알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네 이놈들 이거 놔라!"
"감히 이놈들이 자결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포박해야 할 것이야."
자살하면 귀찮아진다. 최소한 나중에 써먹지 못한다고 해도 삼한 땅에서 죽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예! 각하!"
"나는 대당제국의 황제이니라! 어찌 이럴 수 있다는 말이냐! 하다못해 나에게 명예롭게 죽을 기회라도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명예를 주는 것은 승자의 몫이지 패자가 요구할 권리가 아니다.
"폐하아! 폐하!"
"폐하아!"
이종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황후와 황자는 울기만 했다.
그나마 살려주는 것도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럼 자네는 이제 새 나라의 황제가 될 것인데, 언제 황위에 오를 것인가?"
"총리께서 직접 황제를 책봉해주시지요."
총리가 직접 황제를 임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어쩌면 석경당은 총리라는 자리를 황제의 위로 두고, 나중에 총리를 노릴 셈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웃으면서 지켜봐 주지.
"호오라. 참으로 기특하구나. 좋다. 좋은 날을 잡아 황위에 올라야지. 나라 이름은 생각해두었는가?"
"진이라 할 것입니다."
국호는 원 역사대로다.
석경당에게는 아직 시련이 남아있다. 아마 유지원이라는 자가 석경당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원 역사에서 거란에 연운 16주를 내줄 때도 크게 반발했다지. 아마 바뀐 역사에서도 분명 그럴 것이다.
"진이라. 중국을 처음 통일한 나라도 진나라가 아니었던가. 나쁘지 않군. 새 황제에 즉위하는 걸 축하하네."
"황공하옵니다."
연합군이 이제는 낙양으로 진군하는 일만이 남았다.
다시 도착했을 때 낙양은 이미 꽤 혼란스러웠다.
적군은 몰려오는데 황제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나가서 찾기에는 적군이 몰려오고 있으니 힘들다.
저렇게 동요하는 것도 당연하다.
"너희들의 황제는 붙잡히고 이제 토벌군도 궤멸되었다! 항복하라! 항복하고 새 황제를 맞이하라!"
토벌군 궤멸에 이어 황제와 황자. 황후가 붙잡힌 낙양은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낙양 성문은 그대로 열리고 석경당은 개선장군이 되어 당당하게 낙양으로 입성했다.
"관흔 장군, 수고 많으셨네."
"아닙니다, 각하. 당군이 너무 나약했습니다."
그 정도로? 아무리 이종가가 없다고는 하나 이종가가 키운 군대가 아닌가?
그 정도라면 관흔도 제법 힘이 들었을 텐데. 결국 황제 없는 당군도 연방군을 무시하다 호되게 당한 것이다.
"그보다 석경당이 왜 저런 꼴인지 알 수 있나?"
"원래 각하께 충성을 맹세하기로 한 자가 아닙니까?"
그 충성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저 정도로 고분고분한 것이 이상한데? 아무리 겁을 먹어도 이종가를 보면 자기가 잡아 죽이고 싶었을 텐데."
석경당이라면 그럴 법한데, 그게 아니었나.
"눈앞에서 포병대와 화총수들을 보고 놀라 뒤집어지더군요."
"호오, 겁을 먹은 것인가."
그렇다면 인정이지.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석경당이라고 해도 그런 무기들을 보면 선뜻 뭔가 저지르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