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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92화 (92/154)

92화

상좌평과 일본 호족들에 관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호족들 중 전하께 도움을 청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백제는 그들에게 있어 일본과 끈끈한 혈맹이니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붙으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조금 못마땅하지만 이해를 못할 것도 없다.

"그렇겠죠. 천황은 백제에 있으나, 결국 일본의 천황이 되려면 백제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또는 다타라와 뭔가 해보려 하겠지.

다타라는 지금 백제와의 교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

다타라가 붙어만 준다면 헤이안쿄로 입성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점령해 나가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니, 그건 너무 오래 걸린다.

"중원을 잡으려면 일본을 최대한 빨리 잡기는 해야 하는데."

"전하, 한 걸음 한 걸음 가셔야 합니다."

그래, 급할 필요가 없지. 중국의 오대십국은 아직 좀 남았으니까. 일본은 1년 안에 먹으면 된다.

호족들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잘하면 가능할 테니까.

"그렇다면."

"다타라를 중심으로 저에게 붙을 호족들을 구해야 합니다."

"아군을 늘려 일본에서의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뜻이로군."

본국의 군대는 안 되지만 일본 호족들의 군대라면 써먹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 뜻에서 고안한 방법이다.

"예. 구주를 비롯하여 일본의 전국 각지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죠. 당분간은 지켜봐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거점을 아예 신라 쪽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

"나주도 좋지만, 신라 백성들도 순시할 겸 신라에 수군 기지를 옮기는 것입니다. 남해안에 진을 설치하고 부산진. 어떻습니까?"

수도를 천도할 준비를 하려면 군사를 주둔시키기도 해야 한다. 지금 신라 지역에는 수천의 지방 호족군이 전부다.

백제 본국의 군대인 내 부여군을 주둔시켜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고, 신라인들로 군대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특히 신라인들은 일본에 대한 원한도 있다.

일본의 호족들에게 당한 것이 크니까.

"호오,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되는 대로 대마도를 점령합시다."

우선 교두보를 확보해야지.

"대마도 점령이시라면……."

"거기도 수군 기지를 설치할 생각입니다."

차례대로 가는 것이다. 부산진과 대마도에 설치될 수군 기지, 일본의 호족들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백제가 수군 기지를 설치해서 일본을 정벌할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일본을 공격할 교두보라."

"결국 내가 지휘하는 것은 부여군뿐이지만, 일본의 호족들은 상당히 불안해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무기도 경험하였으니까요."

아마 믿지 못하겠지. 그래도 백제군이 강하다는 것은 분명히 호족들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럴 것입니다. 적들 중 먼저 고개를 숙이고 오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문을 살리고 봐야 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가독부의 소식은 알고 계십니까? 얼마 전에 신라왕 김부가 내 아내 앞에 무릎 꿇고는 당적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일에 대하여 죄를 밝혔다고 들은 거 같기는 한데."

신라왕은 백제에 항복한 이후 온갖 치욕을 당하다가 겨우 고려로 갈 수 있었다.

당연히 고려에서도 온갖 조리돌림을 당했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신라는 수백 년 전 김춘추가 저지른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김춘추를 대신하여 그 후손인 김부가 살아서 끝까지 수모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 아내인 가독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음. 일본 일로 고민이 많으신 전하께서 불편해하실 것 같아 나중에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그것이…… 고려의 가독부께서도 꽤 독하게 나오셨습니다."

나한테 말 못 할 정도로?

"무슨 말입니까?"

"왕건과 그 아들들은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래.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고 보니 왕건이 죽었던가. 왕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전에 내려왔으니 신검 손에 죽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딸들은?"

"우선 유력층들의 부인이나 딸들은 고려의 귀족들이 첩으로 들였으며, 왕후와 그 딸들은 아직 처결 전이라 합니다."

"그것이 정말 내 부인의 뜻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왕건에 대한 한이 깊어도 그럴 수가 있나?

"정확히 말하면 귀족들의 짓이겠으나, 결국 허락한 것은 가독부가 아니겠습니까."

"신하들이 등 떠밀면 어쩌겠습니까. 아마도 못 이긴 것이겠지."

일단 그 귀족들도 여색을 밝혀서 그런 짓을 벌인 건 아닐 것이다. 왕건에 대한 분풀이였겠지.

언제 한 번 귀족들을 두들겨 잡아야겠는데. 생각보다도 행보가 너무 거칠다.

자꾸 제멋대로 행동하면 간신히 이룬 연방이 무너질 수도 있다. 연방의 총리부에 소속될 고구려계 귀족들이나 말갈계 귀족들이 가독부에 하는 것처럼 멋대로 굴면 곤란하다.

"전하, 그 정도는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상좌평이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이 노친네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간 고려의 귀족들이 전하께 억눌려있지 않았습니까. 적당히 당근과 채찍을 주셔야 합니다."

"그 방식이 너무 야만적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배를 보내거나 노예로 만들지언정 어떻게?

"동서고금을 통틀어 승자가 패자의 여자를 취하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지요. 문제 될 것은 딱히 없는 줄로 압니다."

"음, 그래도 그렇지……."

뭔가 찝찝하다는 뜻이다.

그 왕건의 가족들조차 이런 식으로 결말을 맞이하다니.

"게다가, 사실 이런 말씀드리기 뭐합니다만…… 관흔 장군이 중경의 소식을 전해왔는데, 왕건의 부인과 딸 몇은 남겨뒀다고 합니다."

"설마. 그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나보고 왕건이나 그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맞을 것입니다, 전하."

"아니, 나보고 왕건의 부인과 딸들을 취하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건 좀 아니지 싶은데."

나는 전리품으로 여자를 얻는 그런 야만스러운 짓은 못 한다.

솔직히 말하면 벌써 셋이나 있는 마당에 부인을 또 들이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다.

지금까지 들인 부인들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이기는 한데.

"이게 나쁘게 볼 일은 아닙니다, 전하."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만 해도 부인이 많아서 문제인데 나쁘게 볼 일이 아니라고?

"전하께서는 연방의 총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여전히 태봉 땅에서는 많은 호족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특히나 딸들을 왕건에게 바친 호족들은 더 그러하지요."

"설마."

나보고 왕건이 했던 것처럼 혼인을 하여 안심시키라고?

왕건의 부인들은 자식도 있는데?

"왕건은 호족들의 딸과 결혼하여 호족들은 안정시켰습니다. 지금 태봉 땅은 불안정하니 일본 일이 마무리되면 호족들과도 타협을 하셔야 합니다."

하긴, 태봉을 무너뜨렸다고 해도 호족들이 전부 무너진 것은 아니다.

결국 내가 총리로서 연방을 다스리고자 하면 호족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즉, 내가 다시 왕건의 첩을 들이든 그 딸들을 들이든 해야 한단 것인가.

"아니, 신검 형님도 있는데 왜 내가……."

"결국 총리라는 자리가 연방을 이끄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내가 실권자인 건 알 것이다. 그러니 신검보다 나라는 건데. 그럼 왕건의 아들들은 어떻게 되나?

고려의 2대 왕이 되는 혜종이라든가.

"왕건의 아들들은?"

"여기 왕건 아들의 명단입니다."

상좌평 최승우가 준 서책에는 태봉의 왕실과 친인척관계 및 요직에 앉아있던 자들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 중 왕건 자식들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보다 조금 놀랐다.

"이렇게 적다고? 원래 역사랑 너무 다르지 않나?"

왜 그렇게 줄었지? 왕건의 정력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면 원래 역사에서도 사실 입양한 자식들이었다든가?

"원래 역사라니요? 그게 무슨……."

"아, 아닙니다. 그럼 결국 내가 혼인하는 것이 좋다는 겁니까?"

"예. 전하."

역사가 또 바뀐 것은 확실하다.

왕건의 자식이 왜 그리 적어? 물론 지금 왕후 중 내 또래가 있는 것은 안다만, 그래도 원래는 자식이 꽤 있지 않았던가.

아, 이제야 알겠다.

나는 신의 대리인이다. 결국 나를 위해 조절한 것이다.

어쩌면 이 세계의 왕건은 정력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생각을 해봅시다. 과부 들이는 건 좀 문제가 큽니다. 당장은 왕건의 방식이 잘 먹혔다 쳐도, 차라리 힘으로 누르는 게 낫습니다."

"음, 그렇습니까?"

"아예 태봉을 도운 호족들을 싹 다 잡아두는 것이 좋겠지요. 왕건의 부인들 집안 말입니다."

원 역사의 광종 때 피바람이 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게 낫다. 대체 우리가 뭐가 모자라서 굳이 혼인 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하시지요. 왕건은 태봉이 멸망 전까지 호족들 딸을 부인으로 들였습니다. 덕분에 혼인만 했지 독수공방한 부인들도 많은 실정입니다. 아직 왕건에게 자식을 내놓지 않은 호족들이나 독수공방을 한 딸들과 혼인하시지요."

"음."

독수공방한 딸들이라고 해도 결국 왕건의 부인들이 아니었던가. 한 침대에 누웠을 텐데. 찝찝하다.

"자식들은 굳이 보지 않으셔도 되는 일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찝찝한 문제가 있다.

굳이 혼인 정책을 밀어붙여야 하는지도 의문이 들고.

"왕족이나 권력자가 첩들을 두는 것은 그리 흠이 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우선 부산진 설치부터 합시다. 호족들도 부르고 고려에 연락을 해서 왕후와 후궁, 그 딸자식들을 부산진으로 보내라 해야 합니다."

"예, 전하.

내가 여진족도 아니고, 역시 과부를 들이는 것은 나한테 맞지 않는다.

일단 호족들, 그리고 왕후와 후궁들을 본 다음 내가 직접 처리를 해야 한다.

* * *

나는 총리로서 부산진 설치를 본격적으로 천명했다.

부산진에는 당장 나주의 수군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서라벌 역시 백제의 임시수도로서 기능하기 위해 동경이 설치되었다.

태봉 지역의 호족들은 따로 불러들였다.

후백제와 신라의 호족들은 이미 준비가 다 되었고, 고려의 경우 귀족들이 좀 문제기는 한데 두들겨 잡으면 된다.

"흠, 그대들이 왕건에게 딸들을 보낸 호족들인가."

가만히 보니 다들 두 손을 떨면서 고개를 숙인 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하다.

"전하, 사정을 봐주십시오."

"사정을 봐달라?"

호족들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있다.

"예, 전하. 우리도 대세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고려에 수없이 따로 세작을 파견하였으며 전하의 군대가 늘 백전백승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저희가 가라앉는 배를 타려 하겠습니까?"

그렇겠지. 후삼국통일 전쟁 때 가장 눈치가 빨랐던 것은 호족들이었다. 왕건이 패전 소식을 통제했다고는 하나 결국 진실을 캐는 호족들이 있었을 것이다.

호족들은 대세에 따라 후백제, 고려로 갈아탔었지.

확실히 박쥐 같은데, 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또 어쩔 수 없다. 호족들을 한데 모으면 귀찮아지지만, 개개인의 세력은 후백제와 고려를 이길 수 없으니까.

게다가 나도 호족들이랑 같은 처지라면 그리했을 거다.

"그럼 왜?"

"전하, 왕건은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우리도 당장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디 사정을 봐주십시오."

그래. 바로 옆에 여우가 있으면 호랑이보다 무섭기는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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