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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89화 (89/154)
  • 89화

    "금강아, 가능하겠느냐? 일본은……."

    신검은 북방만이 아니라 남쪽에도 관심이 깊었다.

    아마 북방은 몰라도 일본은 가지고 싶겠지.

    어차피 연방 소속이지만 백제의 군주로서는 일본이 탐날 만하다.

    "예.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장인의 나라인 점을 이용할 셈입니다."

    "그런 나라를 백제에?"

    "따지고 보면 합병 못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제 아내가 일본의 황녀인데. 불가능할 것도 없지요."

    다만 신검 다음 대는 신검의 자식이 아니라 나와 요시코의 자식이 되어야 그나마 정통성이 있을 것이다.

    "설마 네 자식을 다음 황제의 위에?"

    "그것이 가장 정통성이 있습니다."

    내 말에 신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딱히 본색을 밝힌 것은 아닌데. 총리까지 쥐여준 마당에 내 자식에게 황위를 주기는 싫다 그건가.

    "네가 황제가 되려 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구나. 대신 그 자식을……."

    딱히 그럴 욕심은 없다.

    나라의 통합을 위해서지 내 자식놈이 명예뿐인 황제가 된다고 해서 좋아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니, 형님의 아들을 혼인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크으음."

    신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만도 하지. 신검은 지금 후계를 이을 자식이 없다.

    딸만 있거든. 아들도 있었는데 요절해버렸으니까.

    이 시대에서는 결국 어릴 때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그러니까 꼬우면 아들을 낳았어야지.

    "알겠다. 그래. 그리하마. 백제를 위해서라는데 어찌하겠느냐. 이 나이에 다시 아들을 낳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래. 그 나이에 자식을 낳기는 힘들 것이다.

    정말 하늘이 도왔지. 딸만 있으면 대연화의 자식에게 보내서 고려와 백제 황실의 통합을 이루면 된다.

    "송구합니다."

    "이제 평양으로 가는 것이냐?"

    평양? 아직 갈 때가 아니지.

    "아직 복구가 덜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이 아우는 일본으로 건너갈까 합니다."

    평양을 복구하는 동안 나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 호족들도 두들겨 팼다.

    "참 힘들겠구나."

    "어쩌겠습니까. 제가 가진 몸뚱아리를 생각하면 직접 나서야 합니다."

    금강이라는 몸을 달고 역사를 바꾸게 되었으니 스스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나 하나가 움직이면 역사가 바뀐다. 딱 그 정도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이미 중원으로 들어가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할 만큼 소질이 있다. 반면에 나는 내 몸 하나만 믿고 갈 수밖에 없다.

    결국 금강이란 그런 몸이니까.

    오로지 단신으로 가서 역사를 바꾸는 전쟁을 치르는 거다.

    "그나마 부여군이 나를 따르는 것이 좋은가."

    전에도 그렇고 대군을 끌기에는 내가 맨날 갖다 박기만 하니 문제다. 그래서 지휘권은 다른 장수들에게 주는데, 가끔 있는 전투에서 총사령관인 내가 달려들다 보니 군사들의 피해가 커졌었다.

    문제는 병사들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 따르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해서 같이 달려든다는 것.

    나를 너무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

    평양성 전투도 사실 조금 더 쉽게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냥 장수들에게 다 맡길 걸 그랬다.

    "왜 그런 얼굴을 하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부여군만 데리고 가야겠다.

    "일본에는 병력을 얼마나 대줘야 하냐?"

    "음. 저를 비롯해 1천의 부여군만 있으면 충분할 것입니다."

    대군을 모집하기도 그렇고, 아마 수백 척의 함대가 일본 열도에 상륙하는 순간 호족들이 더 길길이 날뛸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로지 내가 이끄는 1천의 부여군과 나 자신만으로 일본을 휘어잡아야 한다.

    "1천의 부여군? 그 정도로 일본을 얻을 수 있나?"

    이 1천으로 야전을 치르면 질 것이다.

    그것이 보통 지휘관이라면 그렇겠지. 그러나 나는 다르다. 금강이기 때문에. 내 자신이 칼 하나 통하지 않는 몸이니까.

    "형님. 이 이상 대군을 끌면 기껏 통일한 백제가 다시 분열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이 아우를 따라주십시오."

    "알겠다."

    나는 굳이 대군을 이끌 필요가 없다.

    군대는 다른 장수들이 지휘하면 그만이지.

    부여군을 이끌고 나주로 이동했다. 나주로 돌아간 상귀로부터 수군함대를 얻어타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일본의 사정도 알아봐야 했다.

    "상좌평 정말 오랜만입니다."

    "허허, 일본에서도 전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간만에 만난 최승우는 머리가 완전히 백발이 되었다.

    서리가 머리카락을 뒤덮은 모양이라 초라해 보였다.

    내가 너무 일만 시킨 것은 아닐까. 관흔에게 요동을 맡기기는 했는데.

    "지금 일본에선 후지와라가 천황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호족들은 천황에게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음, 그럴 만도 하지."

    문제는 그 살얼음판 같은 상황을 잘도 유지하고 있다는 것. 내가 천황이라면 그냥 백제로 망명하고 말 것이다.

    어? 그거 좋은 방법 아닌가? 이거 잘 이용해 먹으면 일본을 먹기 더 쉬울 것 같다.

    천황이 이곳으로 망명만 하면 일본에 군대를 보낼 명분은 확실해진다. 그리고 한 번 나라를 버리고 망명한 천황은 다시 일본의 권력을 잡기 힘들 것이다.

    심지어 중앙집권도 아니지 않나. 내가 나중에 일본을 되찾아주고 백제로 귀국한 다음 천황은 제대로 다스릴 수 있을까?

    호족들은 전부 다 때려잡는다 해도 결국 천황의 황권은 무너질 것이다.

    이거 좋은 방법인데?

    "전하, 왜 그러십니까?"

    "상좌평,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인어른을 이곳 나주로 모셔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천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터. 내가 일본을 수습한 후에도 답이 없겠죠."

    한마디로 일본 열도에서 천황을 끌어내어 열도 자체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고, 전국시대에 돌입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타라씨와 함께 일본 열도를 장악하면 그만이다. 호족들이 아무리 강해 봐야 전국시대를 거친 백제군이나 내가 이끄는 부여군보다도 못할 테지.

    "음, 확실히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천황에게 망명하라 그러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화를 내겠죠."

    "좋은 명분이 있으십니까?"

    명분이라, 명분. 있지.

    "음. 이렇게 하죠. 지금 당장 삼한을 통일한 탓에 지금 대군을 낼 여유가 없다고. 준비 중이니 정 위급하면 나주로 피신을 오라고."

    반은 진실이다. 지금 백제는 일본을 도울 대군을 준비하기 힘들다. 당장 신라계 호족들을 제대로 눌러두려면 백제의 군대를 써야 하니까. 애초에 1천의 군대와 다타라의 힘을 이용하려 할 생각이었으나, 천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뻔하다.

    "좋은 방책입니다만."

    "내 이름을 대면 아마 싫어도 오지 않겠습니까."

    사위가 나주에서 천황을 기다리고 있다.

    목숨이 아까운 천황은 결국 어떻게든 오려 할 것이다.

    그때 내가 잘 다독이면 되겠지. 그렇게 해서 천황이 나주에 눌러앉게 한 다음 적당한 때에 대군이 아니라 1천의 군대만 낼 것이다.

    "음,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이 헤이안 쿄에 다녀오겠습니다. 다만 그리하면 해적질을 하는 일부 호족들이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상귀에게 함대를 끌고 지키라 해야겠지."

    자, 이것으로 이제 판은 마련되었다.

    * * *

    헤이안 쿄.

    일본에 도착한 최승우는 즉각 천황을 알현하여 금강 왕자의 뜻을 전했다.

    "뭐라고? 사위라는 놈이 지금 군사 지원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폐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필시 그냥 군대를 지원하기 싫어서 대는 핑계일 것이다. 그런 주제에 대체 무슨 변명을 할 속셈인가.

    "일본 열도의 호족들을 두들겨 잡으려면 백제에서도 대군을 보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게 뭐?"

    "지금 우리 백제는 태봉을 멸망시켰으나, 온전히 흡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대군을 모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핑계라도 진실은 진실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백제는 무리한 전쟁을 연이어 치렀다. 일리천에서는 선황제가 죽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일리천에서 선황제의 죽음, 태봉 점령, 연방국가 성립, 신라항복 등. 거대한 파도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래. 그럴 테지. 그런데 일본의 꼴을 보게! 가능하다고 보나? 호족들이 그새 들고 일어나면 이 헤이안 쿄가 위험해!"

    "흐으음."

    위험은 할 것이다. 그런데 그건 일본 사정이지, 백제 사정이 아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게! 백제에서 군대를 내놓으란 말이야! 우리가 4만이나 지원하지 않았나! 천황이 되어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이 졸렬하지만, 그 옛날 나당연합군에 맞설 때도 대군을 지원했었네! 어떻게든 완산주의 군대라도 끌어모아야지!"

    그래. 그 일은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거란과 고려의 전쟁에서 4만을 지원해준 것은 삼국동맹과 신라 땅이라는 거래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인가!"

    "폐하. 아국이 폐하와 신의를 위해 대군을 내면 백제가 흔들리게 됩니다. 완산주의 백성들은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은 군대지요. 오히려 피해만 늘 뿐이고, 호족들에게 들고 일어날 명분만 줄 뿐입니다."

    실제로 지금 백제군은 신라와 태봉의 땅에 있는 호족들을 흡수하는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신검이 군대를 내어준다고 언급은 했으나, 얼마나 줬을지 알 수 없다.

    "그러면 이대로 앉아서 언젠가 들어올 칼날을 받으라고?"

    대체 뭐가 그리 겁나 칼날이라고까지 칭하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아국의 전하께서 장인인 천황폐하께 청할 것이 있다 하였습니다."

    "청은 뭔 놈의 청? 한참 출세한 사위가 지금 죽기 직전인 장인에게 청할 것이 있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한창 달아오르게 만들었으니 이쯤에서 최승우는 천황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주로 피신하라는 청입니다."

    "뭐라고? 나주로? 짐에게 일본을 버리고 백제 땅으로?"

    설마 제 귀가 잘못되었나. 천황은 의심이 들었다.

    "폐하, 백제는 폐하께 타국이 아닙니다. 사위의 나라기도 하며, 백제와 일본은 하나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금강 왕자는 안 될 거 같으면 감성팔이로 꼬드기라고 했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망명해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고.

    "그렇다 해도 여기서 내가 벗어나면 어찌 되겠는가!"

    "폐하, 설령 지금 급하게 대군을 모은다 해도 한참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그 안에 무슨 일이 터지기는 터질 텐데, 그리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천황을 돕기 위해서 대군을 모은다면 이번에는 마한 땅만이 아니라 편입된 신라나 태봉 땅에서도 군량을 끌어모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 군사를 끌어모으려면 호족들의 군세를 생각해 최대 4~5만으로 해야 하는데. 이것은 점령지의 백성들까지 강제로 끌어모아야 가능한 숫자다.

    이후 백성들의 원성을 무시하고 반강제로 끌어모은다고 하면 불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안 그래도 싸우기 싫어하는 자들이 일본 가서 싸울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이제는 부여연방이다.

    연방정부에서 허가가 떨어져야 한다. 당연히 고려 측의 허락이 있어야 하고 백제 출신들도 이번 전쟁에서 군대를 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할 것이다.

    당장 주인인 금강부터가 대군을 내기 어렵다고 했으니 뻔할 뻔 자다.

    "그,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는가?"

    "폐하, 아국의 전하께서도 심히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러나,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정 그러하시다면 백제에서 대규모 지원군을 준비할 때까지만이라도 폐하께서 호족들을 잘 눌러주시지요."

    "그, 그것은!"

    천황이 입을 우물거렸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백제에서 대군을 모을 때까지 자신이 일본에서 호족들을 억누르고 있으면 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후지와라만 해도 벌써부터 호족들에게 습격을 받고 있었다. 마치 천황에게 다음은 나라고 하듯 말이다.

    "조금 생각을 해보겠네. 일단 물러가 있게."

    "예. 폐하."

    천황에게는 당장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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