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침입자다! 커헉!"
금성의 성벽을 올라 경비병들을 죽였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천년왕국의 수도답게 성이 꽤 그럴듯했다.
안에도 기와집들이 넘실거리고, 바둑판처럼 계획적인 도시였다.
성도 굉장히 컸다. 신라 서라벌에 비하면 완산주성은 엄청 작고 투박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 크기 때문에 호족들의 병사가 성을 전부 커버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덕분에 우리가 침입하기 쉬웠다.
"신라의 왕궁을 장악한다. 상귀와 상애는 왕궁을 장악하고, 나는 부여군과 함께 왕을 잡으러 갈 것이야."
"예, 전하!"
우리를 막을 병력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밤중의 고요한 서라벌을 달려 단숨에 왕궁을 포위했다.
국운이 기울대로 기운 천년왕국의 왕궁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지금 신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병사도 적고, 궁인도 적었다.
나라가 무너지고 있으니 왕궁도 초라하게 변한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오, 꼴에 우리를 막을 병력은 좀 있는 모양이다.
"너희들 왕 죽이러 온 사람이지 누구긴 누구야?"
"뭐라고? 침입자들을 죽여라! 크헉!"
콰앙! 콰아앙!
가지고 온 진천뢰들이 터져 왕궁을 지키는 소수의 신라군들조차 죽어 나간다.
전투로 단련된 백제군이 왕궁을 지키는 오합지졸에게 당할 일 따위는 없었다.
왕궁에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도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병사들을 나눠 남은 신라군 잔당들을 처리하고 나는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신라왕이 잘 자고 있을 전각으로 쳐들어갔다.
"대체 궁궐 안이 무슨 소란이란 말이냐!"
"소란은 너희가 저지른 일이고요."
백제인들을 기습해서 물건을 약탈한 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관청도 공격해서 무기고를 털었다.
"너, 너희는 대체 누구……."
"신라왕이시여. 백제가 지금까지 많이 봐줬으니 아주 호구로 보였지? 응?"
아주 호구로 보였을 거다. 그러니 신검이 나를 건드리는 지경에 이르렀지.
"그게 무슨 소리냐? 크윽!?"
국왕 김부의 목에 칼을 겨눴다.
"나는 백제의 부여금강이다. 항복하라고 대놓고 봐주고 있는데, 기어이 일을 저질러? 눈치라는 것이 없나?"
솔직히 스스로 항복하겠다고 하면 봐줄 생각이었는데. 적어도 내가 나서서 김부와 그 자식들을 봐 달라고 하려 했다.
약소국의 왕 정도야 충분히 봐줄 수 있다 이 말이지. 경순왕의 몰골을 보니 참으로 처량하기 짝이 없다.
신하들 등쌀에 못 이겼겠지.
"자, 잠시만. 일단 내 말을……."
"네 아들 새끼 관리를 왜 그리 못해?"
"아들 새끼라니, 태자가 무슨 짓을……."
뭐야, 설마 왕은 태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건가?
"모르는 건가? 태자가 도적이 되어 약탈을 저지르고 있는데?"
"서, 설마!"
왕은 정말로 모르고 있었나?
마의태자라는 놈이 물건은 물건이다. 지 아버지한테는 백제와 맞설 방법을 찾겠다 했으면서 우리 앞에서는 도적질을 한 것이다.
"신라의 태자가 도적질을 하니, 우리도 더는 못 참고 찾아온 것이 아닌가?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나?"
제아무리 화가 난 신검이라도 마의태자가 적당히 날뛰었으면 지방군을 움직여 서라벌을 포위하는 정도로 봐줬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태자 놈 때문에 입은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설마, 왜 내 자식이 도적질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라를 구해보려는 건 알겠는데, 방식이 너무 치졸하지 않나?"
아니, 어느 정도 인정은 한다. 천년왕국이다. 그 나라가 이제 멸망하게 생겼으니 가지고 있는 수는 전부 써보려 하겠지.
"그래서 백제왕이 그대를 보낸 것이오?"
"그렇지. 일단 항복을 받을 생각인데, 이러면 곤란해. 왕이 자기 자식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니."
신라의 태자가 숨기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자식이 자기 아비한테 도적질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유구무언이오."
그래 유구무언이어야 하지. 그래야 네놈이 마지막 양심은 있다고 취급받을 거다.
"유구무언이고 나발이고, 나는 단순히 태자를 징벌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신라를 끝내기 위해 온 것이니 항복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이오."
의자왕이 당한 치욕을 경순왕이 겪게 될 것이다.
"그게 무슨…… 우리보고 항복하라?"
"어차피 힘의 차이는 분명한데 굳이 그렇게 질질 끌고 싶소? 이제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 것이 도리 아닌가?"
어차피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계속 버틸 셈일까?
왕건조차도 결국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데 감히 신라 따위가 계속 버틸 수 있을 거라 보는 걸까.
"우리를 왕건과 같은 꼴로 만들 셈 아니오?"
왕건과 같은 꼴? 이산가족에 굴욕이란 굴욕을 다 맛본 일 말인가.
왕건을 심하게 대하기는 했지. 그런데 어쩔 수 없었다.
"신라는 왕건만큼 짜증 나지 않았거든. 그런데 지금은 화가 나려고 그러네? 어차피 신라는 오늘부로 끝. 항복하겠소, 안 하겠소?"
내 말에 경순왕은 두 손을 불끈 쥐었으나, 내가 노려보자 이내 고개를 떨궜다.
"내 자식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왕께서 명을 내려 지금 저 철부지 짓을 그만두게 만들면 봐줄 생각도 있소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칼을 뺄 수밖에 없지."
마의태자를 죽이겠다는 소리다.
원 역사처럼 현실감각 떨어지는 짓이나 하고 있다. 그렇다면 눈에 거슬리니 죽이는 것이 온당한 처결이다.
"명을 내려 내 태자도 항복하겠소. 이제 그만해주시오. 왕자의 말대로 우리 신라는 항복하고 백제의 품으로 들어가겠소. 그러니 제발 살생은……."
"진작 그랬어야지."
다음 날, 나는 신라왕과 왕족들을 왕궁 밖으로 끌어냈다.
간밤에 신라 왕궁이 점령당한 일은 신라인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는지, 왕궁에 걸린 백제의 깃발을 보고 구릉처럼 몰려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왜 왕궁에 깃발이?"
"백제군이 쳐들어왔다는구먼."
"하룻밤 사이에 왕궁이 점령당했다고?"
"신라는 끝났군."
그래. 신라는 끝났다. 너희들의 왕은 스스로 항복을 청했다.
신라 백성들은 슬퍼한다기보다는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저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신라는 끝났음을. 언제든지 왕이 항복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날이 밝자 마의태자가 신라왕의 명을 받들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왕궁에 꽂힌 백제 깃발을 보고 게거품을 물었다.
"부왕께서는 정녕 실성하신 겁니까!"
면상은 멀쩡하게 생긴 것이 자기 아비보고 실성했다 그랬나, 지금? 아직도 신라가 부흥할 수 있을 거라 보나?
"태자야. 이제 그만하거라. 이미 신라는 끝났다!"
그래. 왕이 인정했는데 왜 저러나.
"일찍이 삼한을 통일한 신국입니다! 대체 뭐가 두려워 이런 굴욕적인 항복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 삼국을 통일한 나라로써 뭐라도 좀 해보고 싶었겠지. 그런데 그 통일조차 반쪽짜리가 아닌가.
당나라의 지원을 받았으며 고구려 땅의 절반도 얻지 못했다.
그것을 진정한 삼국통일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결국 백제는 지금 시대에 이르러 의자왕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나라가 재건될 정도로 여전히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다.
고구려는 멸망하고 30년 후에 발해, 대진, 대씨 고려로 다시 태어났다. 그런데 삼국통일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백제인들의 마음에는 신라에 대한 증오도 남아있었다.
즉, 이들의 통일은 완전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게 잘못 되었어."
나는 마의태자를 막아섰다.
"뭐라고?"
"당나라 없었으면 니들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 같아? 당나라 오랑캐들 덕분에 백제와 고구려를 무찔러 그들이 넘겨준 대동강 이남이나 통일한 주제에, 그것을 진정한 통일이라 할 수 있나?"
외세를 이용한 통일. 심지어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넘겨줘야 했다. 백제멸망도 당나라 13만의 군대 아니었으면 신라 혼자 가능했을까? 아니다.
비록 백제 말에 의자왕이 정치를 못 했다고 하나, 당나라를 상대로 양면 전선을 감당하는 것은 당대 어느 나라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에 신라군은 백제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당이 없었으면 신라가 반대로 여제 연합군에 탈탈 털렸을 거라 생각한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어찌 우리 신국을 능욕한다는 말이오!"
이게 능욕? 능욕이 아니라 사실이지 이건.
"능욕은 무슨. 사실이 아닌가. 능욕당할 짓을 한 김춘추를 욕할 일이지. 왜 나한테 발끈하고 그러나?"
욕먹을 짓을 했으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당시에는 한민족의 개념이 없었다 해도, 그리고 신라를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현대인의 감성으로 볼 때 신라는 중국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한 나라일 뿐이다.
"폐하, 항복은 안 됩니다!"
"그건 왕이 결정해야지 도적놈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네."
어딜 도적놈이 끼어들어?
"나는 도적이 아니오! 내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것이 어찌 도적이란 말이오!"
백제인들의 물건을 훔치는 놈들이 그걸 나한테 묻는단 말인가.
"국운이 기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부리면서 백제인들을 공격하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이 아닌가. 중과부적이라는 말을 모르나?"
이미 국운이 뻔히 기울었다. 신라는 서라벌 하나만 남기고 남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폐하! 항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다 끝났다! 그만하라!"
"폐하, 폐하아!"
"그래서 항복의식은 어찌 치르는 것이오? 완산주로 가야 하오?"
왕은 태자의 말을 무시하면서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국의 폐하께서는 내게 직접 신라왕의 항복의식을 치르라 하셨소."
신검이 허락한 일이었지.
"웃기지 마라! 신라군은 무엇을 하나! 금강을 죽여라!"
저렇게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서야.
어느새 태자의 병력이 나를 포위했다.
"아주 죽으려고 지랄을 하는구나. 백제군은 가만히 있으라."
"네놈이 우리 전부를 상대하겠다고?"
"애초에 나 혼자서 끝낼 일을 내 병사들을 죽게 할 수는 없지. 내가 왜 금강이고 마한패왕인지 보여주마."
나는 태자의 병사들을 단숨에 쓰러트리고 신라 태자의 팔을 그대로 꺾어버렸다.
"끄아악!"
"그, 금강 왕자! 부디 자식은 살려주시오! 과인이 잘못했소이다! 부디 못난 과인을 봐서라도 용서해주시오!"
못난 과인이라. 그래. 그런 태도 마음에 든다.
자식이 잘못 했으면 그 아비가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옳은 것이다.
"좋소이다. 왕건이었다면 내 진작에 죽였을 것이오. 그러니 그나마 약소국 신라니 이 정도로 해주는 것이오."
나는 태자가 난리 치지 못하도록 백제군들에게 넘겼다.
왕건 같은 인물은 사람들의 신임도 받는 데다 그 군사적 능력 때문에라도 죽일 만한 가치가 있으나, 왕권도 불안정하고 고작 동네 이장 수준에 불과한 신라왕은 죽일 이유는 없다.
"약소국이라니!"
"고작해야 도시 하나 가지고 있는 나라가 그럼 약소국이지, 무엇이란 말이냐? 설마 강국 취급을 받겠느냐?"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서라벌 하나만 있는 신라가 감히 뭐가 어째?
"네 이놈! 금강!"
"네놈에게 이놈 저놈 들을 나이 지났다. 뭣들 하냐. 신라왕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 서라벌 백성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할 것이다!"
마침내 의자왕이 당했던 치욕의 역사를 갚을 때가 되었다.
신라는 오늘 국왕 김부의 항복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역사에 신라의 이야기를 분명히 기록할 거다. 외세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던 최악의 국가로. 쓰레기 국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