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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85화 (85/154)

85화

"사내아이라니. 때마침 후계가 잘 태어났습니다."

내가 없는 사이 대연화는 요시코의 도움으로 후사를 출산했다.

"제가 너무 낭군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한 것이 아닙니까. 정말 송구합니다."

"대전에서는 참으로 위엄있으셨던 분이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는 천상 소녀처럼 변하십니다."

정말 차이가 난다. 대전에서는 나름 여제의 분위기를 풍기는 몸이 단둘이 있을 때는 이렇게 여리디여린 소녀의 모습을 하니, 연기 하나는 잘하는 여자다.

"그야, 저는 낭군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허수아비일 뿐이 아닙니까."

"부인을 고려의 가독부로 만들고 뒤에서 배후역할을 하는 저를 비웃는 것입니까?"

가만히 표정을 보니 비웃는 것 같지는 않다.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다가는 눈을 움찔하더니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혹시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으면 신첩이 송구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만큼 전하께 진심입니다."

왜 이렇게 아양을 떨어? 요시코도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이러더라.

"보통 여인네들이 이러는 것은 뭔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까? 혹시 내게 바라는 것이라도 있으신지."

"딱히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왕 씨들을 처결할 권한만 신첩에게 주십시오."

대연화는 다른 것은 몰라도 왕 씨들 잡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집착했다.

"그리도 죽이고 싶습니까?"

"신하들이 바라는 문제기도 합니다."

나도 아까 봤다. 고구려계 귀족들 눈이 살벌하더라. 평양 이야기가 단순히 나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기 위함이라면 왕건의 문제는 고구려계 귀족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그럼 왕건을 제외한 왕 씨들에 대한 처결은 내리시지요. 대신 왕건은 신검 형님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럼 내일은 항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건 당연하지. 신검에게도 항복한 왕건이다. 그런 주제에 고려의 가독부에게 항복을 외치지 않고 배기겠는가.

"예. 왕건의 항복을 받고, 다시 백제로 보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아주 개고생을 시켜야지.

* * *

대연화와 밀담을 나누고, 요시코를 찾았다.

전쟁이 끝났는데, 조강지처를 보지 않았으니, 이건 유구무언이다. 나는 요시코에게 잘 못을 빌어야만 했다.

"아주 깨가 쏟아지십니다. 그새 소녀보다 고려의 성왕을 더 좋아하게 된 것입니까?"

"나는 모두에게 평등하오."

"예?"

요시코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자고로 큰일을 하려면 집안이 평온해야 한다. 나는 부인을 살포시 껴안았다.

"아니, 그대를 더 사랑한다는 소리지요. 뭐 당연한 것을 묻고 그러십니까."

"가독부와 있을 때도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래서 내가 더 많은 여자와 결혼하기 싫었다.

대인선을 살려두고 다른 방법이라도 생각했어야 했는데.

"상좌평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일본의 문제가 있었군."

그쪽은 여전히 화산이 터지기 직전인 것 같다.

상좌평이 보낸 서신을 읽어보았는데 꽤 흥미로웠다.

-전하, 일본의 상황이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일본 열도는 달구어진 쇳물과도 같으며 귀족들은 누가 먼저 들고 일어날까 서로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소신이 일본의 사정을 살펴 본국과의 외교를 천황을 위시한 후지와라 측에 잘 설명하여 귀족들에게 명분은 주고 있지 않으나,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태봉을 정벌하는 즉시 일본에 개입해야 할 것입니다. 또, 대 씨 고려의 서경유수 대봉예공이 이곳에 있습니다. 일본의 천황을 알현하지 않고 관직도 없는 것으로 보아, 망명은 아닌 것 같으나 피난을 온 것 같습니다.

음, 태봉을 먹은 다음에는 일본에 개입할 생각이기는 하니까. 슬슬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제는 대봉예인가. 그 인간 찾는 즉시 중경으로 불러서 국정을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일본까지 가 있었나.

눈치 하나는 빠르다. 전쟁이 어찌 돌아갈지 모르니 살려면 일본이 답이기는 했을 거다.

"일본에 개입하시렵니까?"

"예. 슬슬 해야겠지요."

일본의 왕권이 약화하여 전국시대가 열리려고 한다. 그때를 노려 백제가 개입한다면 일본은 충분히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제 아버님은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몸의 장인입니다.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상좌평이 가 있을 테니까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대연화가 왕건의 항복을 받고 곧바로 연방의 체제를 준비하는 즉시 일본에 개입해야 한다.

* * *

왕건의 항복은 백제와 비슷하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대발해국 가독."

"감히 저자가 어느 앞이라고 발해라는 국명을 논하는가! 이 나라는 고려야! 신라 호족 놈 따위가 감히!"

여전히 왕건은 대 씨 고려를 인정할 수 없었다.

"폐하! 저자를 처형하시옵소서! 왕건을 비롯한 왕 씨 모두를 척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셔야 합니다! 패망한 나라의 왕이 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 분명합니다!"

고구려계 귀족들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왕건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이거 대연화의 왕권이 불안전하니 귀족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내가 매번 돕기에는 결국 나 역시 일단 신하다. 왕권을 넘어서 신하들에게 힘을 휘두르는 것은 지금 대연화 정권에는 위험하다.

그래서 더 좋다.

여기서는 못 이기는 척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왕건을 조지면 된다.

"짐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감히 아직도 너희들의 주제를 모르는구나. 당장 태봉의 왕후들을 죽여라!"

"대고려국 가독부께 항복을 청합니다. 부디 이 어리석은 왕건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왕건은 스스로 대연화의 앞에서 발해가 고려임을 인정했다.

그게 답이기는 하다. 처자식이라도 지키려면 고려로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 진작 그랬어야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지 않나."

"폐하! 폐하아!"

왕건의 장수들은 왕건이 무릎을 꿇는 모습에 크게 통탄했다.

꼴에 삼국통일의 위인이랍시고 수하들의 신임을 온몸으로 받는 것을 보라. 여전히 왕건이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증거다.

유배를 보내도 다 뿔뿔이 뜯어내야 한다.

"태봉의 장수들은 모두 왕건에게 충성을 하고 있으니, 항복을 받은 것만으로 끝을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내상은 저들을 어찌하면 좋겠나?"

처자식은 고려에 남기고, 왕건과 귀족들은 백제로 보내는 것이 답이다.

백제에는 이미 고려의 귀족들이 있으니 왕건만 보내면 될 것이다.

"왕건은 백제에 유배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왕건의 처자식은 고려 땅에서 유배를 보내야 합니다."

"백제는 왕건, 우리는 왕건의 처자식인가? 경들은 그것으로 만족해줄 수 있는가? 왕건은 백제의 태자와 대내상의 아비인 마한황제를 시해한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으니 그 목숨은 넘겨도 좋다고 본다만."

고구려계 귀족들은 자기 밥줄만 지키면 된다. 지금도 자존심 때문에 왕 씨에 집착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왕건의 가족과 장수들은 우리의 뜻대로 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지."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고구려계 귀족들은 불만을 더 토할 것이다.

군권은 내가 쥐고 있지만, 괜히 뒷소리를 듣기는 싫다.

"너무 가혹하지 않소이까!"

"폐하께서는 그래도 한 나라의 군주셨소! 승자로써 최소한의 자비는 내리는 것이 맞는 일이 아니오?"

"짐이 패자들 따위에게 일일이 자비를 내려야 하는가?"

대연화는 내가 적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똑같이 비웃었다.

"그럼 대내상, 신라는 어찌할 것인가?"

"고려가 무너진 이상 신라는 마한황제께서 군사 수천만 보내도 항복할 것입니다."

신검에게는 서신을 넘겼으니, 서라벌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모두 취하고 신라의 항복을 받지 않게 할 것이다.

일본의 문제가 끼어있으니까.

"신라는 왕이 직접 항복할 수도 있겠군."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에는 마의태자가 있으니까."

나는 신라가 원 역사처럼 항복할 거라 생각지 않는다.

고려는 처음부터 호의적이었으나, 백제는 다르다. 백제는 지금껏 신라를 두들겨 패기만 했으니까.

마의태자가 거품 물고 날뛰면 신라왕은 쉽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 * *

서라벌.

왕건의 고려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은 서라벌에도 전해졌다.

"우리를 보호해주던 고려도 대진국과 백제연합에 의해 끝이 났네. 이제 우리들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930년에 경애왕이 죽고 김부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신라는 국운이 기울대로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이제는 믿던 왕건의 고려마저 망해버렸다. 신라는 왜와 백제 사이에서 고립된 처지로 전락하여 조정의 파벌이 갈렸다.

"폐하, 이제 더는 천하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을 줄로 압니다. 이미 삼한의 새로운 주인은 백제가 되었으니 항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서라벌의 백성들도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괜히 버티다가 백제의 대군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항복을 청하셔야 합니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왕건이 항복하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자식은 대진국에 남고, 귀족과 왕건 본인은 백제에서 유배를 보낸다고 합니다! 우리도 왕건을 도와 백제에 맞섰으니,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

왕건이 마한황제라 불리는 신검에게 항복을 하면서 굴욕을 받고, 또 북쪽으로 끌려가 대진국의 가독부 대연화에게 항복을 했다. 그 꼴을 들었으면서도 항복을 운운하는가.

"아닙니다! 우리는 약소국이 아닙니까? 백제도 우리 사정을 헤아려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검은 왕건이 견훤을 죽였기에 그런 굴욕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따지고 보면 신라는 백제를 적극적으로 공격한 적이 없다. 왕건에게 끌려다니기만 하고 왜가 침공해올 때는 아예 서라벌을 지키느라 급급했다.

"헤아려준다는 국가가 왜를 이용해서 우리를 계속 털어먹었나?"

백제는 계속해서 일본을 동원하여 신라의 해안을 약탈하고 서라벌까지 습격해오기도 했다.

그런 나라가 신라를 가만히 둘 리가 없다.

"태자 전하!"

"폐하, 안 됩니다. 우리 신국은 천년왕국이며 일찍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북방의 강국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한을 통일한 나라입니다. 항복은 안 될 것입니다! 백제 놈들에게 항복은 결코 안 됩니다!"

항복하느니 다 같이 죽고 말 것이다.

그것이 지금 신라가 가야 할 길이다. 적어도 태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태자야. 그러나 왕건도 저 지경이 되었고, 우리는 더 버틸 힘이 없다. 백제가 가만히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폐하!"

"그럼 네 생각은 무엇이냐?"

"맞서야 합니다!"

말은 참 쉽다. 그것이 쉬울 리가 없는데.

"지금 우리가 저들과 맞설 병력이 있다고 보느냐?"

서라벌에 남은 군대라고 해봐야 귀족들의 사병이 전부였다. 호족들의 군대는 왜와의 싸움에서 죽거나 전부 백제에 항복해버렸다.

"없다고 해도 맞서야 할 것입니다!"

"폐하, 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백제는 결코 우리를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백제는 의자왕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들고 일어났습니다. 지금 신검은 고려 땅을 순시하고 있어 우리 신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나, 이제 본격적으로 왕이 된다면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백제의 재건 명분이 의자왕의 복수였다. 그렇다면 신라는 반드시 그 재건 명분에 의해 멸망할 것이 뻔하다.

의자왕의 치욕을 갚을 것이다.

"그럼 맞서자고?"

"폐하, 비록 국운이 기울었다 해도 이대로 항복을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힘만 빼앗기다가 항복한 국가로서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차라리 맞서야 합니다!"

항복한 국가로서 역사에 남는다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 천년왕국의 신라다. 이렇게 그냥 가만히 나라를 들어 바치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을까.

김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닐 것이다.

"태자 전하! 어찌 현실을 보지 않습니까?"

현실을 보지 못하다니. 지금 누가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가.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귀족들을 손가락질했다.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대들이오! 이대로 항복하면 우리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닐 것이오! 죽을 때까지 모욕을 받게 될 것이고, 신검은 우리를 그대로 살려둘 생각도 없을 테니까! 우리가 고려와 함께 한순간 이미 결정된 것이오!"

"크흠."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반으로 갈라진 신라 조정은 좀처럼 단합하지 못하였다.

항복하자는 파벌은 기어이 신라를 떠났으며, 신라왕 김부와 태자는 남은 귀족들과 함께 결사 항전을 각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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