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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84화 (84/154)

84화

왕건의 항복과 함께 모든 전쟁이 끝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진작에 끝냈던 전쟁을 이제야 마무리 지었단 것이 맞을 것이다.

신라는 얼마 되지도 않는 작은 세력이니, 일본과의 거래를 깨트릴 때까지만 살려두면 그만이다.

"그럼 이제 개경으로 내려간다. 현덕부에 전령을 띄워 가독부께 승전을 보고하고 개경에서 왕건의 항복을 받는 의식을 치를 것이다."

"굳이 개경까지 내려갈 필요가 있습니까?"

관흔이 미간을 좁혔다. 나도 평양에서 끝을 내고 싶다. 그런데 평양에서 끝내면 개경의 민심을 다독일 수 없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개경으로 내려간다면 신검 태자에게 공을 넘기게 될 것입니다. 신검 태자를 평양으로 불러올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삼국통일의 공을 온전히 전하께서 차지할 것입니다."

관흔은 나에게 공을 전부 넘길 생각이었나.

이거 나한테 왕위라도 넘길 셈 아니야? 지금 관흔의 뉘앙스가 그렇다. 그럼 곤란하다. 분명히 내 공은 백제의 군주가 되어도 부족함이 없으나, 그렇게 되면 고려와의 연방에서 내가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와 신검의 뒤통수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민심을 위해서도 개경에서 항복을 받는 것이 맞다. 평양은 본디 태봉의 수도도 아니고, 개경의 백성들은 저들의 왕에게 배신당한 백성들이다, 그들을 속인 군주가 얼마나 처참한 패배자인지 인식시켜야지."

평양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포로들과 함께 개경으로 남하했다.

홍유의 군대도 왕건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항복하여 무장해제를 해야만 했다.

"폐하, 어찌 항복하셨습니까! 차라리 소장에게 죽음을 명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자결을 명하소서!"

홍유를 비롯한 남은 태봉의 장수들이 구슬프게 울었다.

그리고 나는 신검과 합류했다.

신검은 나와 합류하자마자 또 귀찮은 짓을 했는데, 왕건을 쓰러트린 기쁨보다는 왕건에 대한 복수심이 흘러넘치는 모양새였다.

"금강아! 왕건을 살려두자는 것이냐!"

역시나 신검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형님, 왕건은 살려두셔야 합니다."

"우리 아버님을 시해한 놈이 저놈이다! 그런데도!"

그래. 잘 알고 있지. 어떻게 해서든 죽이고 싶을 거다. 어느 이가 제 아비를 죽인 자를 살려두고 싶을까.

그런데도 왕건은 살려둬야 한다.

"형님, 민심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뭐라고?"

"왕건은 패배했으나, 어쨌든 지금까지 백성들을 잘 다스려 민심을 쥐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만일 왕건을 죽이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고려는 원래 영토를 회복한 것에 불과하지만, 고려와 밀약에 따라 백제는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백제 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즉, 왕건이 다스리던 땅의 민심도 우리가 돌봐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 마당에 왕건을 죽여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태봉 땅 전체가 혼란에 빠지겠지.

"그래서 못 죽인다는 것이냐!"

"아버님께서 승하하시고 형님을 비롯하여 백제인이 얼마나 화냈습니까? 그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전국적으로 왕건파벌의 호족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개경의 민심을 잃었다고 해도 다른 지역의 호족들은 그것을 모른다. 여전히 왕건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도 많을 거다. 그 마당에 왕건을 잡아 죽인다? 아주 단체로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 수도 있다.

적어도 각지의 민심을 백제가 휘어잡기 전에는 왕건을 죽일 수 없다.

"허. 왕건이 그 정도라는 말이냐?"

그걸 말이라고.

"이 아우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나도 왕건 저놈 때문에 죽은 아버님과 수하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피를 토할 거 같습니다. 유배를 보내뒀다가 신라까지 먹고 민심이 좀 안정된 후에, 그때 불러 아무도 모르게 왕실에서만 알 수 있도록 참하시지요."

왕건을 살려둘 수는 없다. 적당할 때에 죽이는 것이 답이다. 태봉의 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왕건을 살려두는 것이 좋지만, 역시 훗날이 문제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왕건을 구심점으로 반란군이 몰려들 것이다.

"알겠다."

"항복은 수항막을 차리고 하죠. 그리고 형님께서는 황제로서 그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전쟁 탓에 신검이 황위를 잇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왕 왕건의 항복을 받게 된다면 황제로서 받는 것이 나을 것이다.

"황제로?"

"워낙 일이 다급하여 전쟁을 먼저 하였으나, 본래 형님께서 마한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신검이 황제에 오르고 태봉을 토벌하는 것이 나았는데 상황이 좋지 못했다.

"황제로서 항복을 받는다라."

"항복의식이 끝난 그다음에 태봉지역의 순시를 마치시고 완산주로 가셔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황위에 오르십시오."

신검이 황위에 올라 통일된 백제를 다스리게 만드는 것. 딱 그게 내가 신검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 * *

항복의식을 시작했다.

왕건은 신검의 앞에 소복 차림으로 걸어갔다.

"망국의 군주 왕건은 들으라."

"아국의 폐하께서는 정식으로 항복을 하셨소! 어찌 이런 굴욕을 주시는 것이오?"

아직도 장수들은 왕건이 큰마음으로 항복을 한 줄 안다.

어차피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해도 왕건이 나를 이길 방법은 없는데.

"그러게 진작에 항복을 했어야지. 우리 군대를 크게 상하게 만들고 뒤늦게 항복했으면,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항복한 주제에 설마 이 정도도 못 하겠다고 징징 짜는 것인가?"

"내 항복의식을 제대로 치를 것이니 그만해주시게."

"해주시게? 게? 왕건, 당신은 지금 자신의 처지를 모르나?"

아직도 왕으로서의 체면을 세우고 싶은 건가?

내 말에 태봉의 장수들이 나를 한참 노려봤다.

왕건은 두 손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분하기야 하겠지.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내게 패했으니까.

"……내 항복의식을 치르겠소."

그래. 그 정도만 하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 정도로 하지. 자, 아국의 태자 전하께 항복을 고하고 용서를 받으시오."

왕건은 항복의식에서 신검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견훤도 아니고, 견훤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신검에게 꿇는 모습이 불쌍했다.

항복도 격이 있는 자에게 하는 것이 낫지.

하지만, 전쟁을 질질 끌었으니 이 정도는 굴욕은 당해야 한다.

"왕건, 그대는 이미 승패가 불을 보듯 훤한데 전쟁을 끌어 이 땅에 백성의 신음이 마를 날 없게 하였으며, 대백제국의 천하질서를 무시하고 백제의 선대 마한황제를 시해하였으니 그 죄가 하늘에 닿았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잘못을 뉘우쳤으니, 이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하여 대백제국 마한황제로서 이 자리에 있는 나 부여신검은 하해와 같은 자비를 내릴 것이다."

"마한황제의 하해와 같은 자비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오."

왕건이 백제에 대한 항복을 치른 후, 신검은 개경, 평양을 비롯한 태봉의 각지를 순시하게 되였다.

하지만 왕건의 개고생은 이제 시작이었다.

"자, 그럼 이제는 중경으로 가셔야지."

"그게 무슨 말이오? 중경이라니? 우리를 발해 땅으로 유배라도 보내시겠다는 거요?"

왕건의 휘하 장수들은 어찌 이렇게도 멍청한 건가. 유배를 한 나라의 수도로 가는 일이 있을까?

"그럴 거면 요동으로 보내지 뭣 하러? 그리고 발해가 아니라 고려야."

패망한 나라의 장수 주제에 자꾸 그들을 발해라 부르려 든다.

아직도 세울 자존심이 남아있었나? 그런데 어쩌냐. 항복의식은 이게 끝이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 폐하를 왜 그리로 압송한다는 말씀이오!"

"여제 연합군이네, 신검 형님만이 아니라 내 부인인 고려의 가독부에도 항복을 해야지. 안 그래?"

"""…….""."

어디서 신검한테만 항복하려고 들어?

* * *

대군을 이끌고 회군하여 중경현덕부로 개선했다.

간만에 만난 대연화는 배가 홀쭉했다. 어느새 아이를 낳은 모양이다.

대전에서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머리를 숙였다.

"폐하, 백제국 부여왕이자 고려의 대내상 부여금강. 폐하의 명을 받들어 태봉을 정벌하고 남경과 서경을 수복하였나이다."

백제와 고려 양국의 신하 노릇하기 참 힘들다. 21세기에 살던 시절보다 해외여행을 더 다닌 것 같다.

"부여금강. 그대는 나의 배필로서, 이 나라의 대내상으로서 여제 연합군을 이끌어 마침내 남경과 서경을 수복한 공이 크다. 백제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얻었으니 이로써 백제와 우리 고려의 연방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예, 폐하."

"대내상께서 큰 공을 세운 것은 맞으나, 이는 백제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고작 땅을 되찾은 것이 전부입니다."

내가 세운 공을 그저 인정할 수는 없었는지 귀족들이 참견한다 그러나 그건 원래 양국이 동맹을 맺을 때 약속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애초에 선대 가독부께서는 약조한 것이 있으셨네. 이 나라가 지금 대내상 덕에 살아난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하오나 이번 전쟁에서 고려군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우리 대 씨 고려는 옛 고 씨의 고려를 계승한 국가입니다. 최소한 평양까지는 받아내셔야 합니다."

고구려계 귀족들은 조금 나라 사정이 좋아졌다고 평양까지 바라고 있었다. 말갈계 귀족들도 여럿 고구려계 귀족들과 의견을 동조하고 있다.

"원래 백제에 약조한 땅은 신라가 차지한 땅 전부네. 이제 와 말을 번복하는 것은 대국으로서의 체면이 아닐 것이다."

"폐하, 대국의 체면이라 하셨습니까? 이번 전쟁에서 우리 군의 합이 10만에 가깝습니다. 고작해야 그깟 왕건을 토벌하기 위해 많은 전비가 들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그만한……."

대연화가 내 편을 들다 한 소리를 들었다.

이번 전쟁에서 전비가 많이 들기는 했다.

문제는 그 전비의 대부분은 내가 감당했다는 거지. 심지어 그 10만 중에서도 3만은 내가 요동에서 대준 거다. 야율배로부터 얻은 거란군 용병도 있었다.

"지금 이 고려의 재정을 돌리는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바로 나네. 재정을 전부 감당하고 전비 역시 요동의 힘이 있지 않았나?"

"그건 대내상의 말이 맞네. 대내상이 요동을 통해 교역을 독점한 덕에 나라의 부가 커졌지. 귀족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대연화의 말에 귀족들이 고개를 돌렸다.

저들 대부분이 요동을 통해 돈을 번 자들이니까.

"누구 덕에 전쟁도 치르고, 서경과 남경을 회복하였는지 그새 잊었나? 그리고 평양은 백제만의 땅이 아니게 될 것인데."

"하지만 그 연방이라는 것도 어쨌든 2왕조 2체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백제에 속한 땅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지도상으로, 백제의 영토로만 따지면 평양은 백제의 땅이 될 것이다.

"아니네. 평양은 연방의 수도가 될 것이네."

대동강 이남을 통일한 백제가 다시 옛 백제의 위례성을 수도로 삼고, 중경을 중심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고려가 합의를 해서 연방의 수도를 평양에 두는 것이다.

"연방의 수도라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연방의 수도는 어떻게 돌아가게 되는 겁니까?"

"양국의 관리와 황제를 대신할 인물을 파견하게 되어, 양국의 국가정책을 비롯한 국정을 논의하게 될 것이네."

양국의 관리와 황제를 대리하는 재상을 둔다. 양국의 관리와 재상들이 국정을 돌봐 연방이 나아가야 할 국가정책을 관리한다.

그것이 연방이다.

"양국이 싸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양국의 관리가 평양에 모이는 것이 아닌가? 의견을 조율하고, 법을 새로이 정하고. 그 옛날 고구려와 백제가 싸웠던 시절과는 달리 말이네."

"그게 그리 쉽겠습니까?"

그래. 쉽지 않지. 그래도 지금은 그런 것이 답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나 된 조정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백제와 고려의 군주는 상징만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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