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83화 (83/154)

83화

왕건이 생각보다 더 쉽게 물러나자 여제 연합군은 전열 정비에 들어갔다.

"여기서 주력만 잡아두는 것으로 1차 목표는 달성이니 전열을 정비해야 할 것이네. 너무 깊게 들어가면 반대로 적에게 휘둘릴 수 있지 않겠나?"

군사들이 많이 상했다. 아직 병력은 충분해도 전열을 정비하고 싸울 시간은 필요하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난번에도 큰 피해를 감수하고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이미 수차례 전하께 피해를 본 왕건입니다. 필시 뭔가 간계를 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왕건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당장 백성들을 속이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나 잡겠다고 또 개수작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남진은 전열을 정비하고 매복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하면서 남하를 시작했다.

역시 급하게 내려가지 않기를 잘했다.

탕! 탕탕! 타앙!

매복을 통해 기습을 하려던 태봉군들이 우리 군의 사격에 죽어갔다.

저들은 우리의 신무기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대, 대체 저건 또 무슨 무기란 말인가!"

"퇴, 퇴각하라!"

매복으로 기습을 실패한 태봉군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시 그냥 움직였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눈에 뻔히 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다시 내려가서 평양으로 남진할 무렵. 남쪽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전하! 신검 태자께서 홍유의 군대에 수천의 피해를 봤다 합니다!"

"수천씩이나?"

"예."

"그 미친놈은 전생에 나와 원수를 졌나?"

그러지 않고서야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렇게 나를 방해할 수가 있나?

대체 매번 그렇게 피해를 봐서야 어찌 태자라 할 수 있나.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사실 신검 태자 전하의 목적은 북진도 북진이지만 태봉군을 반토막 내는 데에 있지 않습니까."

"음. 그렇지."

놀랍게도 신검은 그 약속 하나는 지켰다.

어쨌든 홍유에게 패배를 당했다면 홍유가 아래에서 신검을 상대하고 있다는 증거. 신검이 수만의 병력을 끌고 왔으니, 수천의 피해로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홍유는 계속 발이 묶일 테고 여기는 평양성만 점령하면 된다.

"이거 참 웃긴 일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남하하는 중에 태봉군은 끊임없이 만났다.

그들은 매복해서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역시 화총수들에게는 답이 없었다.

몇 번의 습격 끝에 태봉의 전략을 꿰찬 병사들은 화총수도 있겠다 적들을 좀 더 편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이거 마치 우리가 수나라의 우중문이 된 거 같군, 그래."

"하하하!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저들은 고려를 자칭하는 도적집단이고, 우리는 여제 연합군입니다."

곧 그 연합군은 연방군이 될 것이다.

"그 말이 맞네. 나는 왕건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네."

"어찌 그러십니까? 선제의 복수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 복수는 해야지. 그런데 원래 역사를 아는 나로서는 상당히 씁쓸할 뿐이다.

외세를 빌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와 다르게 자주적으로 삼국 통일을 이룩한 인물, 왕건. 그 인물이 지금 내 앞에 무너지려고 한다.

고작 신들의 장난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에서 나 같은 놈에게 농락당한 거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신검 형님이 홍유에게 얻어맞고 있다면 여기서 싸워야지."

홍유가 마지막 전쟁이라 부를 수 있는 전투에서 신검을 상대로 주장으로 나섰다면, 역사가 바뀌면서 박술희, 유금필이 아니라 그가 유명해질 것이다.

신검도 나름대로 싸운 모양인데. 홍유한테 패배했다면 결국은 데리고 간 이들이 상당히 명장이라는 의미겠지.

"태자 전하의 휘하에 애술, 상귀 등 명장들이 쟁쟁하거늘 어찌 그리 패배만 하시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겠나. 결국 그만한 인물이기 때문이지. 애술과 상귀에게 그냥 총지휘권만 넘겼어도 그리 쉽게 패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총지휘관은 태자 전하네. 아마 수천을 잃은 것도 본래 수만일 것을 장수들의 도움으로 그정도에서 끝낸 거겠지. 자, 어서 가세. 평양성을 점령하고 왕건의 목을 베어 선제의 복수를 해야 하네."

"예, 전하!"

마침내 평양성까지 도달했다.

21세기의 평양에는 예전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끽해야 문 몇 개가 전부겠지. 그래서 이렇게 보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친다.

"지금부터 저 성을 넘어야 한다는 말이지."

과연 역사적으로 오래된 성답다. 저 성이 어떤 성인가. 옛 고구려의 수도였다. 고조선 때는 왕검성이었다는 말도 있었지.

"성이 참으로 튼튼해 보입니다."

"지금부터 군을 나누어 사방에서 공격할 것이다. 어차피 왕건을 잡으면 이 전쟁은 끝이니 사방에서 포격을 퍼부어라."

평양성 전투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화포란 화포는 모조리 동원되었다. 대장군포를 비롯해서, 조선의 천자총통과 현자총통의 이름에서 딴 천자포, 현자포, 진천뢰에 회회포까지 전부 동원했다.

콰앙! 퍼엉! 콰과앙!

계속된 포격에 태봉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상대는 화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놈들이다.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기본적인 화약 무기라는 개념은 왕건도 습득했다던데. 그래도 너무 늦게 알았다. 설령 안다고 해도 유황을 각지에서 들이는 백제와는 보급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막아라! 적들을 막아라!"

적들은 그저 막으라고 외치며 결사 항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왕건의 군대는 지금까지 꽤 피해를 보았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도 최정예는 아닐 것이다. 결국 포격 앞에서 그들은 무능하였으며, 그 사이 사다리를 타고 병사들이 올라갔다.

"네 이놈들! 내가 고려의 왕 왕건이다! 내 앞에 서는 자 모조리 죽을 것이다!"

오. 최종 보스가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다.

포격으로 우왕좌왕하던 태봉군이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역시 한 시대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저쪽에 왕건이 있다면 연합군에는 내가 있다.

병사들이 왕건의 기세에 눌려 쉽게 성벽을 오르지도 못하고 화총수들도 우물쭈물하자 내가 그들의 앞에 섰다.

"성벽을 올라가라! 적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태봉군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성을 점령하라!"

나 역시 병사들을 따라서 성벽에 올랐다.

지휘관인 내가 앞서자, 병사들의 사기가 승천하기 시작했다.

화총수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목책을 방패로 삼아 성벽 위의 태봉군들을 사격해서 쓰러트렸다.

포격은 어떻게 버티는 모양이지만, 이미 퍼부은 화력이 성을 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백제 놈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뭣들 하냐! 나약해 빠진 태봉 놈들을 모조리 도륙하라!"

성벽에 오르자 유목민 출신들인 거란과 말갈족들이 활약했다. 그들이 가진 검과 특유의 전투력은 태봉군들이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거란과 말갈군이 앞장서 오르자, 그 뒤를 따라 백제군도 힘차게 성벽에 올랐다.

"연합군에게 저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처단하라!"

성벽에 한 번 오르니 연합군이 물밀 듯이 성벽에 올랐다.

그나마 우리가 오르지 않을 때는 태봉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번 성벽이 뚫리니 머릿수와 군사의 질 차이가 확연히 심했다.

유목민족들의 전투력과 태봉군은 확연히 달랐다. 몇 번의 전투에서 왕건 휘하 정예군은 몰살해서 평양을 지키는 질 떨어지는 수비군이 전부였다.

"왕건! 이 백제의 왕자가 알현하러 왔소이다!"

그러니까 제발 여기서 항복해라. 슬슬 삼국을 통일하고 싶으니까.

"금강! 네이노옴!"

"왕건! 이제 그만 항복하시오!"

여기서 제발 항복하고 그만 끝냈으면 좋겠다.

"폐하! 물러나셔야 합니다! 뒤에 점령당하지 않은 성채가 있습니다!"

어이구 뒤로 가서 숨으시려고?

"그래! 가자!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다!"

"패배를 인정치 않는 모습이 참으로 폭군 궁예와도 비슷하구나."

평양성 내에 진입한 연합군은 성내에서 버티는 태봉군과 시가전을 펼쳤다.

화총수들이 총을 쏘아대는 소리가 전장을 울리고, 밖에서는 여전히 천자포, 지자포, 현자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윽고 평양성은 점차 연합군의 손에 점령되었으나, 아직 함락당하지 않은 성채에는 왕건이 있었다.

과연 왕건이다. 평양성 전투를 이토록 철두철미하게 준비했었나. 성채를 늘려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모습이 가련하기까지 하다.

"뭔 놈의 성이 이렇게 커서는."

과연 고구려의 성답다고 할까. 고구려 멸망 이후 상당히 낙후되었다고 해도 왕건이 회복한 후라서 그런지 성이 꽤 잘 버텼다.

이제 삼국통일이 머지않았다. 조금만 더 나가면, 왕건이 숨어 방비를 하는 저 성채만 점령하면 된다.

"이대로 적들에게 방비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홍유의 군대가 한 줌이라고 해도 왕건이라는 자는 선제께서도 고생하셨던 상대입니다."

이거 평양성에서 갇힌 고니시 꼴이 아닌가. 왕건이 저런 처지라니.

"그렇지. 지금 당장 저 성채에 진입하라. 내가 앞장서겠다."

나는 왕건이 숨은 성채의 문으로 진격하면서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왕건을 몰아붙였다.

왕건이 숨은 성채는 아직 제대로 방비가 되어있지 않아 태봉군이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성채조차도 아군에 의해 점령되어갔다.

"성채가 뚫렸다! 안으로 진입하라! 철저하게 저항하는 자들이다! 항복하더라도 절대 받아들이지 마라!"

"지금이다! 불을 붙여라! 금강을 죽여라!"

성채에 진입하는 순간, 나를 죽이라는 명령과 함께 어디서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투콰아아아앙!

순간 바로 앞에서 폭음이 들리면서 눈 앞을 가렸다.

왕건이 이제는 간계를 부리고 있다. 화약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방식이다.

아마 얼마 전에 알게 된 거겠지. 화약에 대해 진즉 알았다면 우리에게 대항할 수단도 준비했을 테니까.

"전하! 왕자님!"

관흔과 장수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었나? 갑자기 뭐가 폭발하는 것 같은데?"

"전하! 무사하십니까?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내 몸? 늘 그렇듯 멀쩡하다. 오히려 내가 갑옷을 툭툭 털고 멀쩡한 모습을 보이자 장수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내가 이 정도에 죽는 사람인가? 내가 누구인가? 마한 패왕이야. 마한 패왕. 이 정도로 죽으면 패왕 이름 떼야지."

굳이 죽은 자가 있다고 하면 나와 함께 들어오다가 폭사한 부여군들이다.

"대체 뭐 저런 괴물이!"

설마 나를 이 정도로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천만의 말씀이다.

왕건의 넋 나간 모습에, 그의 수하들을 몇 번 더 베어 넘겼다.

"자, 왕건. 슬슬 항복하는 것이 어떻소? 적당히 항복하면 내 다른 왕족들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오."

"내 처자식을 죽이려 하는 모양이지?"

"내 부인인 가독부가 어지간히 한이 맺혀서 말이지. 매일 같이 칼 들고 왕 씨들을 죽이려 하는 것을 신하들이 간신히 말리고 있소."

아마 지금도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남편이니 내가 잘 알지. 그 여자는 이번 전쟁이 끝나면 왕 씨들을 죽일 권리를 달라 할 것이다.

"크윽……!"

"어찌하시겠소? 이미 끝난 싸움인데도 계속할 것이오? 어차피 삼한은 하나가 되어야 하오. 패배를 했으면 깨끗이 승복을 할 일이지, 어찌 사내대장부답지 못하게 계속 전쟁을 질질 끄는 것이오?"

슬슬 인정도 해야지. 남자답지 못하게 뭐 하는 짓인가. 평양이 포위되자마자 나한테 항복했으면 더 큰 피해를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무례하오!"

왕건의 장수 중 한 명이 우리를 손가락질했다.

"무례한 것은 그대들이지! 역사에 죄를 짓고 있지 않소? 중원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하루빨리 통일하여 저 드넓은 대륙으로 진출해야 하는데, 패배를 인정치 못하고 계속 피해만 늘이는 형국이라니! 에잉, 쯧쯧쯧."

일본의 일은 상좌평 최승우가 맡아서 대 씨 고려와 일본을 오갔다.

그의 노력 덕에 지금 일본은 어떻게 적당히 불안한 정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늙은 사람에게 언제까지 많은 일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항복하겠네."

이미 성채까지 점령되자 왕건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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