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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82화 (82/154)

82화

서경을 공격하기 전에 항복을 제안해보기로 했다. 형식적이다. 어차피 우리에게 항복은 하지 않을 테니까.

"태봉은 오래가지 않아 망할 것이다! 망할 나라를 계속 붙들 것인가? 아니면 고려, 백제와 함께하겠는가!"

내가 성 앞으로 가 항복을 논하니 병사들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중간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대뜸 나한테 활을 겨눴다.

"웃기지 마라! 화살을 쏴라!"

모두간인지 박어인지의 명령에 반군의 화살이 내 앞으로 떨어졌다.

"끝까지 태봉에 붙겠다, 그거구만. 전군 공격하라! 서경과 남경을 탈환하고 태봉을 멸망시켜 부여연방을 세울 것이다!"

회회포의 돌덩어리들이 서경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발해의 서경성은 대광현이 일시적이나마 도읍으로 삼았다. 그래서인지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당연히 왕건에게 붙은 배신자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요동의 백제군과 대씨 고려의 연합군을 버텨낼 수 없었다.

계속된 회회포와 화포 공격으로 성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진작에 항복을 했어야지."

지휘관을 잘못 만났으면 스스로 하극상이라도 벌였어야지. 서경의 군사들은 우리 군에게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전멸을 면치 못했다.

왕건의 지원도 받기 힘든 처지니 당연했겠지.

"전하, 의외로 쉽지 않습니까?"

"어차피 배신자의 말로란 늘 이런 것이지."

어느새 박어와 모두간이라는 놈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살려주시오! 충성을 다하겠소!"

"얼마 전에는 항복하지 않는다면서?"

아주 앞뒤가 다른 새끼들이네.

"그건……."

"왜, 이렇게 쉽게 함락당할 줄 몰랐나? 설마 대군이 올 줄은 몰랐겠지?"

내가 끌고 온 군대만 10만에 달한다.

말갈군과 각부의 군대. 요동에 있는 다국적 병력을 끌어모으니 이렇게 되었다.

왕건이 놈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전쟁에서 밀리기는 해도 적당한 지휘관이 없었을 뿐이지, 지금 대씨 고려의 군대는 정예화된 지 한참이다. 이제 그 군대를 전부 내가 맡고 있으니 왕건에게 지지 않는다.

"태봉의 왕은 너희를 구원해줄 리가 없지. 모두 들으라! 우리 여제연합군에 감히 반기를 든 서경의 호족들을 참살하라!"

"예! 전하!"

그렇게 호족들의 목이 떨어졌다. 떨어진 그들의 목은 평양으로 보내졌다.

수도가 함락당하고 왕건이 평양으로 거점을 옮긴 혼란을 틈타 남진을 시도하니, 서경과 오흥을 이용해 남경까지 순식간에 회복했다.

"지금쯤 왕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구만."

정말로 궁금하다. 기껏 얻은 땅덩어리를 전부 잃는다면 어떤 표정일까?

장수들을 전부 내어주고 얻은 땅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전부 빼앗겼으니. 나라면 뒷목 잡고 쓰러졌다.

심지어 내가 개경을 털면서 관리란 관리도 모조리 잡았다. 당연히 평양으로 간다고 해도 국가로서의 제 기능을 하려면 멀었지.

그것도 내가 시간을 줄 때 이야기다.

"이대로 당장 평양까지 치고 내려갈 것이다. 기병들을 동원해서 각지의 호족들을 제압하라. 그리고 평양으로 보낸 척후는 어떻게 되었나?"

나는 남진하면서 척후를 수시로 띄웠다.

"어떻게든 우리와 맞설 준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지금이면 신검 형님도 북진했을 테고."

이거 왕건의 끝이 보이는구나.

기병들을 보내 호족들을 제압하면서 본군은 그대로 평양으로 남하했다.

"살수 근처에 왕건의 대군이 있습니다."

정찰병의 보고였다.

살수라 하면 고구려의 살수대첩이 있던 청천강이 아닌가. 고구려가 수나라를 살수대첩으로 물리친 곳.

그렇다면 왕건은 그때를 재현할 참인가.

그게 그리 쉬울 거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신검 형님의 군대는?"

"이미 얼마 전에 대야성을 비롯해서 웅주, 상주를 함락, 북원까지 함락하고 송악(개경)까지 진격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내 물음에 관흔이 남쪽에서 올라온 소식을 전했다.

호오, 과연 신검이다. 그래. 그래야지. 왕건 이놈이 신검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멍청한 짓을 한 것이 오히려 왕건을 방심하게 만들었으니, 신의 한 수라 봐도 무방하다.

"왕건 입장에서는 애가 타겠군."

그런데 왕건이 밖으로 나와 싸우겠다니. 성에서 공성전을 펼칠 생각이 아니었나?

평양성에서 왕건이 작정하고 우리를 막는다면 꽤 고전했을 텐데.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설마 군사가 또 양분할 정도로 많은 건가?

아니다. 군사가 그렇게 많을 리 없다. 왕건이 백성들을 설득해서 군사를 모은다고 해도 인구가 그렇게 안 된다.

시간도 주지 않았고, 전쟁을 할 여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보게 관흔, 어째서 왕건이 밖으로 나와 있을까?"

"음. 그 속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놈이 밖에 나와 있을까. 나주에서는 호족들이 나를 우습게 봤다 쳐도 평양성의 왕건은 나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

"아니지. 평양성의 남은 군대는 신검을 막고 왕건이 직접 나를 상대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결사 항전이라는 뜻이로군.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말도 안 된다. 이대로 평양에서 전력으로 맞서는 것이 더 낫지.

"흠. 수공은 아닐 텐데 정말 강을 건너기 전에 우리를 잡겠다는 뜻인가?"

"전하, 정말 수공이 아니겠습니까."

"수공? 설마."

관흔의 얼굴에 주름살이 생겼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 시대에 정확히 우리 병력을 잡아먹기 위해서 수공을 펼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장 21세기에도 그런 수공은 힘들 텐데. 왕건이 그걸 계산한다고?

"설마, 왕건이 물을 계산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당당하게 나와 있는 것이 이상합니다. 평양성이 고구려 시대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성문을 닫아걸고 농성하면 여제연합군을 막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굶어 죽을 수도 있으나, 최소한 밖에서 야전을 치르다 한순간에 망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신검이 개경까지 올라오고 내가 청천강까지 내려왔으면 이미 다 끝난 거다. 왕건이라면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택하리라 생각했는데.

"음."

"일단 척후를 보내시지요. 지금 당장 강을 건너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척후를 보내보니 강 자체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그렇다면 물이 아니라 우리를 묶어두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닌가?"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이거 참, 그 왕건이 이 모양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신검의 군대부터 처리하겠다는 뜻이로군. 그러면 그렇지. 물을 계산할 리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척후를 다시 한번 띄워보고 부교를 만들어라."

우리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왕건은 단순히 시간을 끌 셈이었다. 그사이 양분한 군대가 그대로 신검의 군대를 격파하고 우리를 상대할 셈이었던 것이다.

생각은 그럴듯하다. 그렇지만, 방법은 좋아도 실제로 현실성은 떨어지는 계획이다.

신검이 북진시킨 군대가 3만이다. 그들을 몰살시키려면 한참이고, 지금이면 정신 차린 신검의 군대가 마냥 당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효봉 장군. 수공이 아닌 것은 확실한가?"

"예, 전하.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 확실합니다."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돌다리도 몇 번이나 두드려봤다.

"그럼 강을 건넌다. 놈들이 마름쇠를 사용했을지도 모르니, 기병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강을 건너는 순간.

"금강의 군대가 몰려온다! 화살을 쏴라!"

푸부부부부북!

화살이 날아와 내 병사들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강을 건너기 전에 철저하게 부순다라. 나쁘지 않지. 수공을 사용할 수도 없고, 기병 전력에서 우월하지 않은 이상 왕건의 전법은 나쁘지 않아."

강을 건너기 전에 최대한 타격하고 뒤로 빠지겠다는 의미인가.

확실히 피해가 크다. 강을 건너기 전에 태봉군의 화살에 죽어간다.

괜히 강 건너편에서 대놓고 포진한 것이 아니구나. 보병, 기병할 거 없이 죽는다.

"군사피해가 너무 큽니다."

"강을 건너는 것만인데, 이 정도인가?"

강물에 백제군의 시체가 슬슬 불어나고 있었다.

왕건의 군대가 강하기는 강한 모양이다.

"실제로 왕건이 자신감이 있었던 건가 봅니다. 농성을 하기보단 강에서 충분히 타격한 이후 성으로 빠질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이곳을 틀어막은 거다.

"이것 참. 군사가 많아도 큰일이로군. 남해부를 점령한 병력을 우회시키는 것이 어떤가?"

"시일이 또 문제 아니겠습니까."

남경의 군대가 뒤를 쳐주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후우. 참 곤란하게 되었군."

지금도 건너다가 죽는 이들 탓에 피해가 불어난다. 기껏 강을 건너도 변변찮은 타격을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다."

"좋은 방책이 있으십니까?"

방책이 뭐가 있을까. 그저 항상 하던 대로 할 뿐이다.

"부여군을 이끌고 내가 궁병 부대를 휘젓지. 그사이에 진격하게."

"그리해주시겠습니까?"

관흔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흡족하게 웃었다.

"자네 요즘에는 내 몸이 걱정되지도 않나?"

"전하께서 패왕이신 걸 소장이 뻔히 아는데, 패왕의 길을 어찌 막겠습니까."

관흔은 어느새 내가 목숨 던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관흔에게 섭섭해하면서 부여군을 끌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금강이다! 금강을 죽여라!"

화살이 날아오다가 내 몸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왕건이 지시했는지, 태봉군이 나를 알아보고 창과 검이 쇄도했다.

그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부여군의 길을 열어주었다.

"내가 바로 금강이다!"

내 외침이 태봉군에게 퍼지자 적들이 순간 위축되었다. 그 틈에 나는 적들에게 진천뢰를 던졌다.

퍼엉! 펑!

굉음과 함께 대오를 갖추고, 우리 병사들을 화살로 죽이던 궁수들이 흐트러졌다.

"이놈들아! 전열을 갖춰라! 금강이 놈이 던지는 것에 겁먹지 말아라! 금강이를 죽여라! 화살을 쏴라! 쏴!"

궁수들이 애써 나를 활로 겨누지만, 그뿐이었다.

놈들이 쏘는 화살이 내 몸에 박힐 리 없다.

"병신들. 그 사이에 우리 군이 강을 건넌다는 것은 모르고 있나 보지?"

바보들이 나 하나 잡겠다고 화살을 기가 차게 쏘아대고 있다. 그 사이 우리 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나 하나로 인해 태봉의 군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뒤늦게 활을 강을 건너고 있는 우리 병사들을 겨냥했으나, 이미 강을 건넌 말갈과 거란, 백제의 기병들이 일제히 태봉군을 향해 공격했다.

"모두 죽여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왕건이 나를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다. 그도 아니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한 걸까.

왕건은 평양성에서 마주칠 경우 나를 죽이기 더 어려워질 테니 여기서 나에게 일격이라도 먹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왕건이 이끄는 태봉군의 참패였다.

"전하! 적들이 진을 물리고 있습니다!"

"계속 얻어터지지 않으려면 물려야겠지."

"평양성에 들어가기 전에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음, 평양성이라.

지금 잡아야 한다면 잡을 수는 있는데, 저번처럼 낚이면 귀찮아진다. 오히려 왕건의 노림수일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평양성까지 몰아 가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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