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개경.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회군한 왕건은 잿더미가 된 궁궐을 허망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남은 것이 없다. 전부 불태웠다. 아니, 남아있는 것은 몇 개의 전각뿐. 사람 하나 없다.
"금강 이놈! 감히 궁궐을 불태우고 귀족과 왕족들을 모조리 잡아가!"
"폐하! 고정하셔야 합니다!"
"이게 고정할 일인가! 감히 금강이 그놈이! 왕후와 내 자식들을 잡아갔어! 이 일을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싹 다 잡아갔다. 남은 것이라고는 불에 탄 궁궐뿐이다. 이제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폐, 폐하! 저, 배, 백성들이……."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어?"
설마 아닐 것이다. 그 많은 백성들을 데려갈 시간은 없었을 텐데.
"그 반대입니다."
"무슨 말이냐? 소상히 말해보라!"
반대라니. 무슨 말인가.
어느새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혹시 궁궐을 수습하는 것을 도와주려는 걸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들의 눈에는 불신이 담겨 있었다.
왜 저런 눈을 하고 있을까? 고려의 대왕으로서 개경을 지키지 못해 저러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무릎이라도 꿇어 저들에게 사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폐하! 제 자식들을 돌려주십시오!"
"제 남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은 것입니까!"
갑자기 자식과 남편타령이다.
"이놈들! 당장 해산하지 못할까!"
장수들이 막으려 했지만 성난 군중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백성들은 계속 몰려들어 왕건에게 가족들을 내어달라 시위를 벌였다.
"백제의 왕자와 포로가 된 병사들이 모두 말했습니다! 발해에서 참패하여 살아남은 군사가 거의 없다고. 폐하! 제 남편은 어찌 된 것입니까!"
설마, 속주에서 참패한 사실을 알게 된 건가.
모든 것이 끝나면 그때 다 밝히고 백성들에게 벌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설마 하필 이때, 이렇게 알려질 줄이야.
그것도 백제의 왕자인 부여금강이 밝혔다는 점에서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배, 백제 왕자와 포로들의 말을 믿는 것이냐?"
"그렇다면 북쪽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직접 살아있는 것을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백성들이 다들 흥분하여 북쪽으로 가겠다고 외치니, 병사들이 나서서 무력으로 막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폐하, 어서 임시 행궁으로 가시지요!"
임시 행궁이라고 해봤자 개경 밖에 만들어둔 막사가 전부였다.
막사로 돌아온 왕건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야말로 악몽이 아닌가.
"이 일을 어쩐다는 말이냐. 견훤을 잡았다만 이미 금강이는 개경에서 빠져나갔고, 또 그건 어찌 알고 백성들을 선동하였어!"
"폐하, 우선은 민심을 수습해야 할 때인 줄로 압니다."
"민심이라……."
맞다. 백성들의 분위기를 보면 금방이라도 봉기를 일으킬 것만 같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어떻게든 민심을 수습하고 개경을 안정시켜야 한다.
"아닙니다, 폐하! 지금은 민심을 수습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민심이 떠나기 전에 붙잡아야 고려가 분열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수습할 시간이 없다니.
"전쟁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검의 군대와 싸우면서 아군도 상했고, 아직 백제는 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대연화도 지금 이를 갈고 국경에 대규모 기병을 모으고 있다고 하니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개경의 민심보다는 적을 대비해야 한다.
설마 개경을 함락당한 것이 이만한 파장을 몰고 올 줄이야. 어떻게 그렇게 왕족 귀족할 것 없이 전부 끌고 간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지금 인질들을 데려올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북쪽에 있는 유목민 출신의 기병들이 내려오면 상대하기 힘들어진다.
"그럼 지금 당장 적들이 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고?"
"예 지금으로서는 당장 외적부터 막아야 합니다."
"크으윽."
왕건은 백성들을 설득할 시간도 없이 백제군과 맞설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 죄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하나. 훗날 백성들이 저를 용서해줄까.
"평양으로 가시지요."
"평양?"
"지금 당장은 개경의 민심을 달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행히 금강이란 자가 한 번 쓸어버린 탓에 반란을 꿈꾸지도 못하겠지요."
그렇다. 지금 개경의 꼴을 보면 반란을 일으킬 만한 구심도 없다. 힘없는 백성들끼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은 개경을 방치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보자는 것이로군."
"예, 폐하. 우선 평양으로 천도하시고 그곳에서 군사를 모아 다시 발해의 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평양으로 천도라. 평양이라면 옛 고구려의 수도가 아닌가. 그래. 누가 뭐래도 진정한 고려는 왕건 자신이 세운 이 나라다. 북쪽의 말갈의 나라를 고려라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평양을 임시로나마 수도로 삼는 것은 자신이 세운 고려의 정통성을 더 분명히 해줄 것이다.
"음, 신검은 어쩌나?"
"신검은 당장 퇴각하려는 아군도 어쩌지 못하는 멍청한 자입니다. 오히려 피해를 입고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자는 결코 왕이 될 위인도, 우리 고려를 침범할 만한 능력이 있는 자도 아닙니다."
일리천에서 왕건의 군대를 공격한 신검은 결코 제대로 된 군사들이라고 할 수 없었다. 훈련도도 엉망이고 군사의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솔직히 그 싸움이 계속되었다면 신검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 전역은 몰라도 최소한 백제 수뇌부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을 테지. 개경이 이런 꼴인 줄 알았으면 정말 생각해봤을 일이다.
그 신검의 군대가 다시 북진해온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제 아비도 구하지 못한 놈이니 모르지. 지금까지 군주로서의 그릇도 제대로 되지 못한 인물이 신검이 아닌가.
"음. 그렇기는 하다만."
"남쪽의 호족들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장수들은 괜찮다고 하였으나 다들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전쟁에서 남쪽의 호족들은 반드시 백제군을 막아내야만 했다.
* * *
중경 현덕부.
왕건이 평양을 임시 수도로 정할 무렵. 대씨 고려의 중경 현덕부에서는 대전에서 신하들이 목놓아 외쳤다.
"폐하! 왕건의 처자식을 모조리 참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두고 감히 고려를 칭한 왕건에게 보복을 해야 합니다!"
고구려계 귀족들은 대연화 앞에서 왕씨들을 죽이라며 악을 썼다.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이 몰락한 것은 전부 왕건 탓이었으니까. 그랬으니, 이참에 잡은 왕건의 처자식한테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다.
"지난 부여성 전투로 선왕 폐하와 태자께서 비명에 가셨음을 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을 왜 모를까.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흥분할 때가 아니다. 백제의 대동강 이남 통일이 달려있으며, 함부로 죽였다가는 태봉의 저항이 심해질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어찌 선왕의 죽음을 외면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왕족들을 보낸 대내상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 하지 않았던가."
삼국통일의 대사업이다. 하루아침에 인질이 된 왕씨들을 바로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오나……."
"그만들 하라. 오히려 지금은 저들을 잡아두는 것이 왕건을 묶어놓을 방책이 될 것이야."
그 말을 끝으로 대연화는 대전에서 일어났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또 다른 무언가를 신하들이 요구할 거 같아 진절머리가 났다.
"성왕께서도 회임하신 몸이십니다. 그런데 안색이 너무 어두우십니다."
대전에서 신하들에게 시달리다 침소로 돌아온 그녀를 반기는 것은 금강의 첫째 부인인 요시코 내친왕이었다.
이왕이면 같은 처지에서 연기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고구려계 귀족들은 복수를 부르짖고 있네. 얼른 대내상이 와야 할 터인데."
귀가 어질어질하다. 그렇다고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하자니 금강의 도움 없이는 무리다. 권력 기반도 약한데, 혼자 일을 저지르다가는 귀족들에게 휩쓸릴 게 뻔하니까.
"개경을 점령하셨다 하니 곧 다시 군사들을 인솔하러 오시지 않겠습니까?"
"그럴 테지."
하지만 가독부인 자신도 신하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왕씨들을 죽이고 싶다.
어쩌면 정말로 단순한 복수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지 신하들도 인정할 것이고자신도 만족한다.
"남편은 한다면 하는 인물입니다. 이번에 태봉을 반드시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발해의 이름도 대내외로 고려라 바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이번에 태봉이 멸망하면 반드시 왕씨에 대한 처형 권한 만큼은 받아낼 생각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금강에게 바친 것이다.
또, 그것뿐만 아니다. 금강은 후계가 될 아이의 아버지다. 혹시라도 왕건이란 자와 싸우다 죽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서는 게 당연하다.
"우리 낭군님은 강합니다. 걱정 마세요."
"알겠네."
부디 아무 일 없으면 좋으련만. 선왕부터 잘 알고 지내던 왕족들이 모두 죽는 참변을 겪은 대연화는 문득 금강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 * *
압록강을 통해 고려 땅에 들어와 서경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소식을 들었다. 왕건이 평양으로 천도한단다.
지금 평양은 별 볼 일 없을 텐데. 참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다.
"듣자 하니, 개경의 백성들이 왕에게 해명을 요구했으나 왕건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도망치듯 평양으로 가버렸다더군요."
"왕이 백성들을 버린 꼴이로군."
천하의 왕건이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가다니 말이야. 백성들 사이에서 왕건의 주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다.
"예. 심지어 북쪽으로 가겠다는 백성들을 왕건의 친위군이 팼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어쩌다 왕건이 그 지경이 되었을까.
그래.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그렇게 대패를 했는데, 군사를 다시 그리 끌어모을 수 있을 리 없지. 삼한의 백성들이 얼마나 된다고. 보통 그만큼 전쟁 말아먹었으면 민심을 수습하기 마련이 아닌가.
"전부 자업자득이지. 그러게 대체 왜 거짓을 말해서."
고개를 저었다. 나도 실망이다. 원 역사의 왕건은 그정도는 아니었는데, 현실로 나와 대적하니 그야말로 소인배가 따로 없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일까.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왕건이 나가떨어져야 그제야 좀 탱자탱자 놀 수 있다.
"우선 서경부터 박살 내지. 지금 서경은 어떤가?"
"대광현의 수하로 있던 호족이 서경에서 우리에게 저항하는 중입니다."
대광현의 수하라. 아직 그런 놈들이 남아있던가. 오흥도 잡았는데, 달리 누가 있다는 말인가?
"굳이 공격해서 피해를 보지는 않았겠지?"
"예, 전하. 포위하였을 뿐입니다. 그 탓에 병사들의 살이 통통하게 올랐습니다."
곧 신검이도 북진을 시작할 거다. 때에 맞춰 서경을 함락해야 한다.
왕건도 이제 백제보다는 내 쪽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평양을 임시수도로 삼았으니, 후백제는 남부 호족들에게 넘기려 하겠지.
"호족들 이름이 무엇인가?"
"정확히는 전 고려의 관리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만. 모두간과 박어라는 자입니다."
"모두간과 박어?"
항복을 제의해도 통하지 않을 테지. 통했으면 진작에 대광현이 죽을 때 알아서 항복했을 테니까.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나다고 한들 사람을 귀찮게 하면 그 벌은 받아야지. 모두간과 박어는 주인을 잘못 선택한 죄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