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왕건은 금강의 협박에 굴복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지. 어느 것이 더 나은지 실익을 따져보았다.
이미 충분히 피해도 입혔으나, 이대로 물러가면 전쟁이 또 장기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신검이 대군을 끌고 일리천으로 오고 있다고 하니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퇴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일부 장수는 퇴각에 손을 들었다.
"끄으응."
신검이 대군을 이끌고 온다. 그 수는 최소 왕건이 친정하기 위해 끌고 온 병력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신검이야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견훤을 상대할 때보다 더 쉬울 것이다. 다만 신검과 싸운다면 아마 왕족들의 목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폐하, 차라리 이렇게 하시지요."
보다 못한 홍유가 의견을 냈다.
"뭔가 묘수가 있는가?"
"견훤은 잡고 가시지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 견훤을 잡는 순간 왕씨가 모조리 죽는다. 그것을 알고도 그런 헛소리를 한다는 말인가.
"숙고해주십시오, 폐하. 잘 이용하면 견훤도 잡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어차피 본진과 황산은 군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황산에 있는 장수에게서 서신을 받기 전, 이미 견훤왕을 잡았다고 하는 것이……."
"금강이가 그걸 믿겠는가?"
차라리 부처가 되살아났다는 말을 믿을 것이다. 이미 가독부를 죽인 덕에 박술희가 남은 대씨들 앞에 고통을 맛보며 비명에 죽었다.
"차라리 회군하여 개경으로 가면서 금강도 잡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군은 4만입니다. 견훤왕을 잡고 기병들을 빠르게 몰아 개경으로 가 금강과 협상을 한 뒤에 놈들이 예성강의 함대를 타고 돌아갈 때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견훤도 잡고 금강도 잡는다라."
"예, 폐하. 어차피 견훤이 죽은 백제는 별 볼 일 없으며, 발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금강이 잡힌 발해는 권력 한 번 휘둘러본 적이 없는 여인이 왕일 뿐인, 그런 나라가 될 것입니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금강은 적이다. 당장 왕족들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약속도 지켜줄지 알 수 없다. 이대로 군사를 물린다면 아무런 이점도 생기지 않는다.
"그래. 제 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기병들이 몰아치는데 감히 어쩔 것인가. 좋네. 지금 황산만 총공격하고 그대로 회군하지. 견훤이 죽었다는 소식도 놈이 듣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야."
"예. 폐하!"
이렇게 그냥 돌아가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참에 두 마리의 토끼를 모조리 잡을 것이다.
* * *
황산의 견훤도 왕건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무래도 왕건이는 나를 잡으려는 모양이네. 이거 신검이 너무 늦는 모양이야. 하기야 축소한 군사력을 급하게 모으는데, 오래도 걸리겠지."
신검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너무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자식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신검이 덕에 백성들은 살기 좋아졌으니까.
금강이가 태봉만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폐하, 이곳은 소장들이 사수할 것입니다. 완산주로 가시지요."
장수들의 충심이 담긴 말에 견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곳은 내가 맡는 것이 좋을 것이네."
"예?"
"어차피 나는 얼마 가지 못해. 그렇다면 자네들보다 짐이 가는 편이 더 맞는 거지."
후백제의 황제지만 이제 더는 어쩔 도리가 없이 몸이 상했다.
등창도 등창이지만, 화살이 맞은 곳이 너무 쑤신다. 어차피 완산주로 간들 오래 살지 못한다.
괜히 이 늙고 병든 몸 조금이라도 보전하자고 장수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폐하!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내 몸은 내가 잘 아네. 언제 죽을지도 알 수 있지. 이미 등창이 깊으니, 나는 여기서 살아나가도 명줄이 얼마 안 남았어."
오래 살다 보면 자신이 언제 가는지, 앞으로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다. 견훤에게는 지금이 그때라고 할 수 있었다.
"폐하!"
"가기 전에 금강이 얼굴을 보고 싶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겠지."
신검의 얼굴은 많이 봤으니 개경에 있을 금강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 견훤에겐 그럴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신을 죽이겠다는 왕건의 의지였다.
그래. 그렇다면 상대 못 해줄 것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싸워야겠지.
"""폐하아!""."
"어서들 가게. 이건 백제의 황제로서 내리는 내 마지막 명이네. 나의 죽음으로 백제가 모두 들끓어 저 태봉의 왕 왕건에게 맞서 싸운다면 족하지 않겠는가. 나 견훤. 아니, 백제의 황제 부여훤은 결코 적들에게 굴하지 않을 것이야."
자식들에게는 부여씨를 붙여줬으나 정작 자신은 부여훤이라고 칭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으로 이름을 날릴 전장이 마련되었다.
마땅히 부여씨로 죽어야 할 것이다.
견훤은 무릎을 꿇은 애술 등의 장수들을 위로하여 신검에게 보냈다.
그리고 남은 결사대와 함께 왕건의 군대를 맞이했다.
"오너라, 이놈들! 어디 오늘 다 죽어보자!"
930년. 후백제의 초대 왕 부여훤은 황산 태봉군과의 싸움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 * *
예성강을 떠나고 금방 완산주에 도착했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이 빌어먹을 전쟁을 얼른 끝내야 하는데. 왕건이라는 자가 제법 귀찮게 나온다.
궁궐에 도착하자 상원부인이 나를 반겼다.
"어서 오거라. 못 본 사이 더 사내다워졌구나."
"큰어머니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별고라면 지금 네 아비가 문제가 아니더냐. 지금 네 아비가 죽을지도 모른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상원 부인.
나도 잘 알고 있다.
견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번에 왕건이 미쳐 날뛰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신검 형님이 군을 이끌고 북상하였으니, 잘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제가 개경으로 군을 물리지 않으면 왕족들을 다 벤다고 알려놓았으니, 물릴 것입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만, 왜 이리 불안한 건지 모르겠구나. 네가 당장 지원을 가주면 안 되겠느냐."
"큰어머니, 지금 제 군사들도 개경을 점령하고 전투를 치르느라 많이 지쳐있습니다. 일단은 좀 기다려 보시지요."
나도 바로 달려가고 싶다. 그런데 개경에서의 소모전도 있고, 당장에는 굳이 내가 갈 정도로 전황이 위급한 것도 아니다.
"어찌 이리도 불안한지 모르겠다. 그래. 갈 수 없다면 적어도 완산주를 단단히 지켜야 할 것이다."
"완산주에도 무슨 일이 있습니까?"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폐하와 태자가 일리천에 대군을 이끌고 가버렸으니 두려운 게지. 왕자인 네가 지켜야 해."
백성들의 동요는 내가 막아야지. 그래도 상원부인이 나름 생각은 있는 인물이다.
"그리할 것입니다."
병력을 소집한 탓인지 완산주의 수비병이 많지가 않았다.
북쪽에서 데리고 온 백제군들은 곧바로 완산주성을 지키기 위해 배치되었다. 왕건이 이곳까지 올 리는 없지만, 왕건의 대군을 생각하면 신검이 이길 수 있을지, 상원부인도 자신이 없던 모양이다.
최악의 경우 신검에게도 뭔 일이 생긴다면 기껏 모은 대군이 무너졌다는 증거고, 완산주까지 위험에 처하게 된다.
"화포를 성벽에 설치해야 한다. 화약도 충분히 챙겨라."
"예, 전하."
"부여군을 풀어 완산주 백성들의 동요를 잠재우라."
"예, 전하."
왕건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을 거다.
아마 견훤과 신검도 별문제 없겠지. 왕건이 물러난다면 전략적으로 백제군의 승리다. 그러면 나는 완산주에서 개선할 견훤과 신검을 맞이하면 될 뿐이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견훤의 시신과 함께 돌아온 신검을 보면서 생각보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 *
"폐하! 어찌 이렇게 돌아오셨습니까! 폐하!"
상원부인이 차가운 시신으로 떨어진 견훤에 달라붙어 꺼이꺼이 울었다.
"형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째서 아버님이!"
어째서 견훤이 죽었나?
"내가 너무 늦었다. 내가 갔을 때는 이미 아버님이……!"
"허!"
기가 찰 노릇이다. 견훤이 원 역사보다 더 빨리 죽었다.
내가 역사를 너무 비틀어버린 까닭인가. 아니, 왕건은 어째서 내 서신을 받고도 그런 일을 벌인 건가?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일리천까지 진격했으니 대야성과 백제 북쪽 국경의 성들로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견훤의 목이라도 얻고 싶었겠지. 그러자면 내 서신을 늦게 받았다는 핑계를 댈 테고.
이거 내가 개경에서 빨리 철군하기를 참 잘했다. 그놈은 견훤도 죽인 김에 개경까지 달려와서 나도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죽을 자신은 없지만 내 군사들은 나처럼 단단하지 않다.
"이를 어쩌면 좋다는 말이냐, 금강아!"
"……형님, 군사는 또 왜 상했습니까?"
싸우지도 않았을 신검의 군대도 꽤 피해를 보았다. 이 자식은 왕건을 견제하러 가는 와중에 어디서 쌈박질이라도 했나?
"아버님을 구원하기 위해 왕건의 뒤를 쳤지."
"허!"
정말로 왕씨들을 중경으로 보내고 귀족들은 완산주로 끌고 오기를 잘했다. 왕건이 그놈이 신검도 잡으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 놈들은 군대를 회군시켰으나."
"정말이지 답이 없군요."
더 들을 가치도 없다. 결국 결론은 견훤이 죽었고, 신검은 견훤을 구하려다가 되려 군사들만 잃은 것이다.
왕건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다행히 군대를 회군시켰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때 계속 부딪쳤다면 신검 자신은 패배했을 거라는 뜻.
진짜 후백제를 어쩐다냐. 내가 잠깐 없다고 이 꼴이라니.
"금강아, 잡아 온 태봉의 귀족들이 있다 들었다. 내 그놈들을 봐야겠다."
"형님, 그들은 왜……."
"피에는 피로 보복을 해야지. 그 귀족들을 전부 죽여야겠다."
이거 순전히 화풀이가 아닌가.
"형님, 그놈들은……!"
"인질이란 말은 하지 말거라. 어차피 왕건 그놈이 아버님을 시해한 이상 의미가 없어졌으니까!"
확실히 견훤을 살리기 위한 인질로서의 가치는 사라졌다. 하지만.
어차피 나도 이 전쟁을 끝장을 볼 생각이다. 개경을 다시 돌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북진할 예정이고, 북방의 기병대 역시 남하할 것이다. 견훤이 죽은 이상 이쪽도 더 봐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지금은 갑과 을이 분명한 상태. 우리는 견훤을 잃고 더 잃을 것도 없으나, 왕건은 왕후와 왕자를 비롯한 왕족이 싹 다 잡혀있다.
"흠, 분명히 귀족들은 다 죽여도 상관은 없을 텐데."
여기서는 신검의 기분도 조금 풀어줘야 한다. 그래야 이 전쟁에서 주도권을 나에게 주겠지. 때마침 이 귀족들은 태봉의 근간을 이루는 호족들이다. 다 죽인다면 작살낼 수 있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 살려주시오! 살려만 준다면 무엇이든 하겠소!"
"우리는 그냥 왕건의 명령을 들은 죄밖에 없소이다!"
"맞소. 우리 호족들이 어찌 왕명을 거절할 수 있겠소?"
호족들은 악을 쓰며 살려고 벌버둥쳤다. 그러나 이미 신검은 마음을 정한 상태다. 그런 마당에 봐줄 리가 없지.
신검은 직접 그 호족들의 목을 베었다.
순식간에 호족들의 머리가 떨어지고, 신검의 명령에 따라 머리가 모조리 태봉으로 보내졌다.
이거 왕족들도 끌고 왔으면 망할 뻔했다.
"설마."
잠깐, 대연화가 왕씨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아니다.
내 아내기는 하지만 복수심이 있는 여자다. 나름 대씨로서의 자부심이 있던 여자일지도 모른다. 당장 대인선을 죽게 만든 박술희를 잡아달라고 나에게 매달렸었으니.
서신을 하나 보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왕씨들을 죽이면 왕건의 목에 족쇄를 채울 수 없다고.
문제는 후백제다.
생각보다 군대가 너무 형편이 없다. 신검이 너무 망쳐놓은 까닭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내가 이끄는 것이 옳다.
"형님."
"말하거라."
호족들을 다 죽여서 조금이나마 분이 풀렸는지, 얼굴에 피를 묻힌 신검이 내 부름에 냉정하게 답했다.
"형님께서는 제가 정한 날짜에 북진을 해주십시오. 저는 북쪽으로 올라가 요동과 고려군을 규합하고 태봉으로 남진하겠습니다."
이미 준비된 군대로 태봉을 끝내지 않으면 태봉은 한반도의 암 덩어리로 전락하고 말 거다.
"끝내자는 것이냐?"
"예. 선공을 당하기는 했지만 못할 것도 없습니다."
왕건은 군대를 물리면서 점령한 성에서 군을 전부 철수시켰다. 굳이 되찾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군사만 싹 끌어모아서 북진할 계획이겠지.
게다가 신검이 복수심에 불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저 멍청한 놈이 복수심이라도 가져야 왕건 족치겠다고 악을 쓸 것이 아닌가.
"내 너만 믿을 것이다. 군사를 내겠다."
"그럼 저는 요동으로 돌아가 준비할 것입니다."
"그리하거라."
신검도 이제 작정하고 군사를 끌어모을 것이다.
이제 개경도 한참 쥐어 뜯어놨으니, 그 사이 위아래로 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