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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에서 살아남기-77화 (77/154)

77화

의미심장하게 웃던 견훤은 왕건에게 창을 겨눴다.

"이보게, ‘태봉의 왕’ 왕건."

"무례하오! 나는 대고려국의 대왕이오! 고려의 천자라는 말이오!"

고려의 천자. 그 단어에 견훤은 호쾌하게 웃었다.

고려의 천자라니. 고려의 천자는 며느리 대연화가 아니던가.

이거참. 이렇게 생각해 보니 며느리가 고려의 천자로 있는 격이다. 견훤은 이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결코 섭섭하지 않았다.

아들의 부인이 고려의 천자고, 다른 부인들은 일본과 거란의 황녀다.

일개 신라의 장군이었던 몸의 자식이 그렇게 출세한 것이다.

이대로 이곳에서 열심히 싸워 죽어도 될 것이다.

"아니지. 내 아들 금강의 부인이 고려의 가독부가 아닌가? 어찌 태봉이 고려라 칭할 수 있는 것인가?"

어딜 감히 태봉이 고려인 척을 하는 건가.

지금에 와서 고려는 그냥 신라 땅을 점거하고 있는 도적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뭐라!"

"잘 들어라, 태봉의 왕건아. 너는 폭군이라는 명분으로 네 주인인 궁예를 죽여 역성혁명을 저질렀다. 그런 주제에 어찌 감히 고려를 칭할 수 있느냐!"

발해와 연방을 이루려는 백제다. 그런 백제에게 왕건의 고려는 고려가 될 수 없다. 그저 태봉일 뿐이다.

하여 그들은 왕건이라는 역적이 제 주인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한 것뿐이라고 여기며 고려라는 이름을 없애고 궁예가 사용하던 태봉 시절로 국호를 돌렸다.

"그래서 항복을 하지 않겠다는 건가?"

항복은 무슨. 항복을 왜 해야 하나. 확실히 국운이 위험하지만, 군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태봉의 기병이 잘도 여기까지 왔다만 그게 다일 뿐이다.

"그렇다! 나 견훤은 백제 땅을 침범하는 그 누구에게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백제군 모두가 그러할 것이다!"

천지를 진동하는 우렁찬 목소리. 그 목소리에 백제군 진영에서 함성이 빗발쳤다.

병력이 4배나 되는데도 고려군은 그 기세에 위축되었다. 역시 이빨 빠진 호랑이라도 범은 범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기병이 주력이니, 단숨에 쓸어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금강의 지원군은 아국의 북변을 넘지 못할 것이오. 아무리 금강이라 해도 성을 틀어막고 있는 북변의 성들을 넘보진 못할 터!"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아무리 성이 철옹성이라 해도 금강이라면 가능하다. 견훤은 그런 믿음이 있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설사 금강이 넘지 못한다고 해도 여기서 아비가 되어 흔들릴 수는 없는 일이다.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후회는 태봉왕이 해야지!"

왕건이 먼저 말을 돌리자, 견훤도 진영으로 돌아왔다.

"폐하, 왕건의 꼴이 아주 우습게 되었습니다."

애술이 고려군 진영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암. 태봉왕이 아닌가? 태봉왕으로서 대해준 거니, 우스울 수밖에. 껄껄걸! 고려는 내 아들이 부마로 있는 저 북방의 대국이지!"

"이제 저들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견훤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렇겠지. 왕건은 그런 놈이다. 언제든 어떻게든 위기를 이겨내려고 든다.

그렇게 백제가 몇 번이나 낭패를 봤던가.

금강을 상대할 때는 신무기 탓에 당한 것이 클 것이다. 신무기가 없다면 아들도 고생했을 테고 왕건이 승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자신과 왕건은 서로 적을 잘 찾은 것이다.

"짐에게 방법이 있네. 지금 당장 기병들을 추리게."

"예?"

"야습을 감행할 것이다."

견훤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우리 태봉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줘야겠지."

간만에 말을 타고 적진을 쓸어버릴 생각을 하니, 견훤은 온몸이 다시 회춘이라도 한 듯 달아올랐다.

왕건은 본진으로 돌아갔으나, 내심 걱정이 들었다.

견훤은 절대 무시할 상대가 아니다. 저렇게 견훤이 작정하고 군사로 일리천을 틀어막겠다면 꽤 고생할 것이다.

‘당장 백제의 계백이 신라의 5만 대군을 상대로 전투에서 4번이나 승리했다.’

견훤이 계백보다 부족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1만이 넘는 군세를 가지고 있다. 아마 그 밑의 군사들은 전부 최정예겠지.

보면 알 수 있다. 사기가 드높은 견훤의 백제군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폐하, 어서 치셔야 합니다."

"예. 견훤 밑에는 애술, 상귀 박영규 등의 장수들이 있습니다. 지금 저들을 쳐 사기를 꺾어두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흐음."

홍유와 박수경 등이 어서 칠 것을 간언하였다.

확실히 지금 뚫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북쪽에서 침공해올 금강의 병력을 막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견훤을 뚫기 위해 고려군은 기병만 2만에 달했다.

"기병만 보내도 우수수 무너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백제군의 기병은 끽해야 수천입니다. 설령 그 대단하다는 신무기를 가졌다 해도 힘들 것입니다."

그래. 그놈의 신무기가 늘 문제였다.

그때도 금강의 신무기 때문에 고전했었다. 그 험난한 북방에서 겨울도 아닌데 고생했다 이 말이다.

"알겠네. 전군에 총공격을 명하게. 각 장수는 맡은 군대를 이끌어 적들을 사정없이 조여야 할 것이야."

천천히 조이면서 단숨에 제압한다. 견훤을 농락하면서 백제군의 주력군을 몰살시켜 완산주까지 진입하는 것. 고려군의 편제는 지금 기병이 중심이니 충분히 견훤의 군대를 몰살시킬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

그런데 갑자기 막사 밖에서 함성이 터졌다.

자세히 들어보니, 말들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밖에서는 이게 대체 무슨."

"폐하! 견훤이 야습을 해왔습니다! 백제의 기병들이 우리의 군을 헤집고 있습니다!"

"비열한 백제놈들!"

비열하다기보다는 견훤왕이 승부 패를 꺼내 들었다.

설마 기병으로 먼저 선공을 할 줄이야. 병력이 열세니 적군이 가늠하기 어려운 시도를 한 것이다.

심지어 잘못하면 불 속에 뛰어드는 꼴이 될 텐데도, 당당하게 일을 저질렀다.

"병력이 열세인 백제왕이 최적의 선택을 했습니다."

과연 견훤이라는 걸까. 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삼한의 패권을 쥐고 흔드는 자다웠다.

"일단 나가서 막게!"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일개 장수라면 모를까, 견훤이 왔다면 그 피해는 더 커질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이놈들아! 내가 바로 백제의 견훤이다!"

"막아라!"

견훤의 창에 수없이 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커헉!"

"이놈들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딱 너희들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오너라, 이놈들!"

견훤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가 몇 명씩 죽어 나가니, 왕건의 군대는 견훤에게 거리를 두고 경계할 뿐이었다.

"견훤왕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폐하! 태봉 놈들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슬슬 퇴각하셔야 합니다!"

어느새 태봉군이 횃불을 들고 몰려오고 있었다.

기병으로 충분히 타격은 줬다. 괜히 몸을 무리하다가 태봉군 앞에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건의 군대가 혼란을 수습하고 몰려오자 견훤은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야!"

"견훤왕을 놓치면 안 된다! 쫓아라! 화살을 쏴라!"

왕건의 군대가 쏘는 화살은 정확히 견훤의 등에 맞았다.

"크허억!"

"폐하!"

"계속 가야 하네! 어서!"

이후에도 이미 선공을 허용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보았던 태봉군과의 전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잘 싸우던 후백제군은 몇 배나 되는 왕건의 군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황산까지 퇴각했다.

"대체 금강이는 언제 올 것인가."

"슬슬 군대를 움직이고 있지 않겠습니까?"

느려도 너무 느리지 않은가.

"지금 나라가 위기인데, 대체 언제…… 크흑."

"폐하! 보고드립니다! 금강 왕자님의 군대가 예성강을 통해 고려. 아니, 태봉의 수도에 상륙했다고 합니다!"

금강의 군대가 예성강? 그렇다면 수군을 이용했다는 건가.

버틴 보람이 있지 않은가. 당장 이곳에 오지 않고 태봉의 수도를 공략한다면 이 전쟁은 이제 백제에게 유리해질 것이다.

"됐구나. 기어이 해냈어!"

이제 되었다. 왕건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백제가 삼한을 통일하리라.

* * *

드디어 예성강에 도착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군사는 지금 당장 동원 가능한 1만 5천이었다.

남은 군대는 혹시라도 서경과 남경에 있는 군대가 개경을 지원 오지 못하게 틀어막았다.

놈들이 양동작전으로 나오면 우리도 그리 해줘야겠지.

나한테 당한 주제에 또다시 그 많은 군대를 낼 정도면 왕건이란 인물은 생각보다 더 거물일 것이다.

그런 놈을 계속 살려두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 당장 본국을 지원하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본국에도 여전히 장수들이 남아있고, 머릿수만 모아 버틴다면 굳이 내가 가지 않아도 된다.

이참에 빈집털이로 고려의 수도를 터트리고 왕건이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을 만들어선 위아래로 쥐어 터트리면 된다.

태봉 놈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이 수도 앞마당이다. 그간 숨어있던 태봉의 수군이 우리 함대 앞에 나타났다.

"전하! 놈들의 함대입니다!"

"하지만 남아도는 선박이 많군. 놈들이 지금 수군까지 동원해 백제 본국을 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 놈들을 잡을 것이다."

"예, 전하!"

곧바로 전투준비에 나섰다.

고작 함대에 묶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공격하라! 포구에 있는 태봉 놈들의 함대를 모조리 불태워라! 부여연방의 힘을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줘라!"

펑! 퍼벙! 퍼엉!

몇 번의 포격 끝에 태봉의 함대는 모조리 격멸하였다.

역시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였던 함대가 분명하다.

"전하! 태봉 놈들의 배를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암, 그래야지."

우리들 앞을 막는 태봉의 배가 불살라지자 마침내 상륙전을 시도했다.

"백제, 발해놈들이 기습했다! 맞서 싸워라!"

"태봉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한 줌도 안 되는 군사로 우리를 막으려고 시도하는 태봉군. 당연히 그게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성강은 모두 점령당했다.

"전하. 드디어 개경입니다."

"꽤 그럴듯하게 방비가 되어있는 모양이구나."

이곳이 태봉의 수도 개경이란 건가. 군사의 수는 많지 않을 것이나, 태봉의 수도다. 당연히 방비는 튼튼히 되어있겠지.

"예."

"군사를 나눈다. 5천의 군사는 개경 인근 지역을 모조리 불태워라. 남은 1만의 군대는 개경을 포위할 것이다. 그리고 공성 무기들을 조립하라."

공성 무기들은 아예 작정하고 개경 앞에 눌러앉아 조립하기로 했다.

"회회포와 각종 화약 무기들을 동원한다."

공성전은 빠를수록 좋다. 그래야 왕건도 위기감을 느낄 것이다.

제아무리 삼국통일을 위해 들고 일어났다고 해도 제 가족들이 잡힌다면 밀어붙일 수 있을까?

쉬이이이익 콰아앙!

회회포의 돌덩어리가 붕 떠오르더니 개경성을 공격했다.

돌이 날아가 성을 때릴 때마다 가끔씩 태봉군들이 성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개경에 있는 놈들이 꼼짝을 못 하는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 병력도 적은 마당에 밖으로 나올 수는 없을 테니. 놈들도 답답할 거야."

설령 군사가 많아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포위망을 뚫기는 힘들 것이다.

"충차와 사다리를 보내라! 회회포는 돌을 계속 날려라!"

성벽 위에서 태봉군이 막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이미 위축된 시점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뻔한 것이다.

심지어 화총수가 화살의 사정거리로 들어가는데도 화살을 날리지 못한다.

백제의 화총수들이 성벽에서 결사 항전하는 병사들을 겨냥했다.

탕! 탕탕탕!

이미 몇 번이나 훈련을 마친 화총수의 사격은 태봉군을 떨어트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끄아악!"

어우, 불쌍한 놈들. 안 그래도 이길 수 없는 전투인데, 화총수가 투입되니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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