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76화 (76/154)

76화

정당성에서 업무를 마치고 슬슬 서경과 남경을 탈환하고자 군사를 소집할 즈음, 나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전하! 왕건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를 시작하였습니다!"

뒤늦게 들어온 소식에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뭐?"

"왕건이 군대를 나누어 대야성을 공격하고 본대는 백제 본국의 완산주로 남하 중이라 합니다!"

남하하는 것뿐이 아니라, 군대를 나누어 대야성을 치고 본국 완산주라니?

"대체 걔네는 무슨 병력을 그렇게 찍어내?"

나한테 죽은 군사가 얼마인데 아직도 그만한 병력이 나온다는 말인가.

무슨 중국도 아니고. 물론 동원 가능한 규모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지금 태봉은 그만한 대군을 내기 힘들 텐데?

"저놈들이 총력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뒤 안 보고 국운을 건 도박을 하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허."

아무리 빨리 소식이 들어왔어도 지금 즈음이면 이미 대야성은 떨어졌을 것이다.

대야성이 털린다면, 그다음은 어디일까.

"이거 우리가 먼저 얻어맞았습니다."

최승우가 고개를 저었다.

"재해권은 백제와 고려가 양분하고 있고, 외국과의 교역은 힘든 데다가, 우방국 신라도 맛이 간 상황……."

왕건으로서는 도박을 해볼 때가 되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지금 누구보다도 고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딱 이 시기에 백제 하나만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여긴 것이고.

그래. 상대가 서서히 옥죄어오는데 먼저 선공을 날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왕건이 도박을 할 만합니다. 승부 패입니다."

관흔도 왕건이 승부 패를 던졌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본국에는 아버님이 계시니 괜찮겠지."

견훤이라면 왕건을 대적할 수 있다.

설마. 설마하니 견훤이 하필 지금 몸이 좋지 않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나라의 국운이 걸린 문제다.

물론 이럴 때를 대비해서 성들을 증축하고 제법 버틸 수 있게 했는데.

이렇게 되면 본국이 얻어맞는 동안 나는 요동과 고려의 힘으로 왕건의 태봉을 칠 수밖에 없다.

"어찌하실 것입니까?"

"만일 대야성이 뚫리면 그다음은 어디일까?"

"이번이 저들의 총력전일 테니, 아마 성들을 점령하면서 진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북방에는 나까지 있으니까. 좁아터진 반도 땅에서 수도 직공은 그리 어렵지도 않을 테고.

문제는 후백제의 동원력인데. 백제 본국은 지금 당장 피해를 본 것이 없으니 꽤 병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곧바로 수도 직공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한번은 맞붙지 않나?"

그간 얼마나 공들여서 성을 보수했는데, 왕건이 생각이 있으면 그리 쉽게 박을 생각은 못 할 것이다.

"일리천에서 맞붙을 수도 있습니다."

"일리천이라."

후백제의 운명이 갈리는 일리천. 그러고 보니 원 역사에서도 일리천이었지.

일리천에서 후백제가 과연 망할까? 이번에는 제법 버틸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지금 본국은 병력을 얼마나 낼 수 있지? 그래도 태봉에 맞설 만큼은 내놓지 않았을까?"

"그, 저 백제 군부에서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관흔이 우물거렸다.

"따르면?"

"2만이 최대라고 합니다."

2만? 20만이 아니라 2만? 물론 20만은 말도 안 되지만, 2만도 납득하기 힘들다.

그것도 최대란다.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뭘 무엇을 한 건가.

"뭐? 어째서 그렇게 된다는 말인가?"

"신검 태자가 전하만 믿고 군사보다는 내치와 백성의 삶에 집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건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는 않지만 그놈…… 허!"

그놈은 눈치가 없나? 그렇다고 군사를 정말 그것만 키워?

아니, 군사를 키운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군비축소에 가깝다. 군사력 약화다.

오곡이 풍성하고 나라가 잘 살면 뭐하나. 그 나라를 지킬 병력이 없으면 끝이다. 지금이 21세기라면 모를까. 당장 태봉을 뛰어넘어서 바다로 지원군을 실어나르는 것도 어려움이 생긴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짓을 벌였지?

신검 놈, 원 역사에서 동생을 죽이고 일리천 전투에 당당히 왕건과 맞서던 그놈이랑 동일 인물이 맞나?

견훤이 그걸 가만히 뒀다는 것도 놀랍다.

아마 제 자식을 믿은 모양이다. 신검이 중간에서 적당히 견훤을 속이면 될 일이었겠지. 실제로 백성들은 먹고살기 편할 테니까.

그렇다면 견훤이 누워있다는 소문이 사실일 것이다.

병에 걸려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거다.

"말갈과 거란의 기병은?"

이렇게 된다면 태봉의 진격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당장 기병을 내려보내서 태봉의 북방을 털어버리는 것이 맞다.

우리가 갈 때까지 2만으로 어떻게 되겠지.

"맹안모극제에 소속된 말갈과 거란의 기병은 모으려면 시일이 필요합니다."

"전부터 모으라고 했는데, 어째서?"

전쟁 준비를 해야 하니 소집해두라고 내가 말해뒀는데.

"혹시 모를 요에 대응해야 하니, 요동에 있는 거란의 기병을 빼기가 쉬운 편이 아닙니다."

"음."

그건 그렇겠지. 내가 생각이 없었네.

"그러면 예성강으로 가지."

"예, 전하."

발해와 백제 수군을 동원한 예성강 진입이 준비되었다.

참 힘들었다. 장해군도 앞바다에서 상륙작전 연습을 쉼 없이 했으니까.

압록강 쪽에 있는 판옥선들은 바로 그 상륙작전을 위한 것이다.

"흠, 그런데 이런 배들이 적합하겠습니까?"

"뭐 어떤가? 이 정도면 충분하지."

포를 올리기 위해 건조한 판옥선은 조선 시대에 쓰던 그것 그대로다. 아니. 그것보다 좀 더 크려나.

"그러나 아직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본래 실전이 중요한 법이네. 어차피 포병들의 훈련은 잘되어있지 않은가."

"그렇기는 하오나……."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당장 출정 준비를 하게, 효봉과 덕술은 거란과 말갈군을 이끌 테니, 두 군대가 소집되는 즉시 남하하여 서경과 남경을 치도록."

"예, 전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다.

매번 왕건을 두들기다 보니 착각했다. 어쨌든 그는 원 역사에서 삼국을 통일하는 군주다. 삼국을 통일하는 군주답게 그만큼 가진 것도 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준비는 했으나, 뭔가 불안하다. 백제가 정말로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 *

완산주.

이 무렵, 후백제는 난리가 났다.

당연했다. 금강에게 일격을 맞고 주춤하던 태봉의 왕이 대뜸 대군을 다시 모아서 내려온단다.

국가적 총력전이란 의미다. 아마, 징집 가능한 모든 사내들을 병사로 만든 것이다.

설마하니 태봉이 이런 강수를 둘 것이라 생각지 못한 백제 군부는 비상이 걸렸다.

견훤은 왕건의 태봉군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에 등창에 걸려 지친 몸을 일으켰다.

"이런 미련한 놈! 적군은 3만이 몰려오고 있는데 2만 밖에 없다니! 이걸 어쩔 것이야!"

신검을 불러 혼을 냈으나, 이 못난 자식놈도 두 눈을 굴리면서 땀을 흘리는 것이 왕건을 상대할 인물이 되지는 못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금강이가 지원을 한다면……."

답답한 소리를 한다. 이런 아들을 태자로 삼았다니. 차라리 금강이를 태자로 삼아야 했다. 당장 왕건을 격파한 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고 삼한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지금은 이미 삼한을 통일하고 발해까지 넘봤을지도 모른다.

견훤은 뒷목을 잡고는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금강이가 언제 지원을 온다는 말인가? 저 요동 땅에서 군사를 실어나르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이 말이야!"

"소, 송구합니다!"

신검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정말로 답이 없다.

"그래. 백성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 아주 중요하지. 그런데 정도가 있는 법이다. 보아라! 지금 우리 백제가 지금 어떤 꼴인지 아느냐!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태평성대를 노래 부르게 하려면 나라를 지킬 군사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대놓고 빗장 빠진 문인데, 안에서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살면 무얼 하나. 나라를 지킬 힘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송구합니다."

"내가 군대를 이끌고 왕건을 맞이하겠다!"

아들 신검은 절대 왕건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야 한다.

"아니 될 일입니다! 어찌 아버님께서!"

"내가 가야 그나마 버틴다. 너는 당장 전국의 장정들을 모아라! 금강이가 오기 전까지는 버텨야 할 것 아니야!"

필시 왕건도 호족이란 호족은 싹 긁어모아 준비했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제 자식놈에게 당하고 여전히 그만한 군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겠습니다."

저런 모자란 녀석을 태자로 책봉했다니. 견훤은 후회막심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내 자식인 것을. 적어도 앞길은 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상원부인은 출전하겠다는 견훤의 결정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 몸으로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상원부인의 물음에 견훤은 등의 등창 탓에 올라오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부인. 내가 가야 하오. 내가 가지 못하면 이 백제는 끝이오. 금강이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하니, 내가 가야만 하오."

등창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그래도 금강이 올 때까지 버틸 수는 있다. 이것이 백제의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이다.

"그래도 이 몸은……."

그래. 싸울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싸워야 한다.

이미 대야성도 떨어졌다.

이 기세를 타고 신라가 무슨 짓을 해올지 모른다.

"내 죽을 자리를 찾았으니, 더는 아무 말 마시구려. 이것도 부인과 신검을,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오."

견훤은 군사 1만을 이끌고 완산주를 나섰다. 적어도 왕건의 발목을 잡을 정도라면 굳이 2만씩이나 끌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차피 막고 있으면 대규모 병력을 완산주에서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애술 장군은 들으라. 지금 왕건의 군대가 어디까지 와 있더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성이 왕건에게 항복했다.

하필이면 저 북쪽의 금강과 백제 본국과의 연락이 많이 닿지를 않으니, 호족들은 왕건의 소식을 잘 모르고, 정작 신검 역시도 전쟁에 소극적이라 다들 왕건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니 당연하다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때릴 수 있는가. 얼른 군사가 더 불기 전에 왕건을 붙들어야 한다.

"폐하, 이대로 진군한다면 왕건의 군대와 아군은 일리천에서 만날 것입니다."

일리천이라. 일리천. 알고 있다. 백제왕으로서 어쩌면 숙명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일리천이라면 그 옛날 백제가 패망하던 시절 황산벌에서 멀지 않은 곳이로구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북쪽에는 금강이 있으니 이전의 백제처럼 쉽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지금 신검이 급하게 병사를 모으고 있으나,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결국 견훤 자신이 이끌고 있는 군사는 1만.

막는다면 해볼 수 있겠지만 상대가 왕건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왕건이 기세등등하게 밀고 내려오자 왕건에게 붙는 호족들이 늘어 왕건의 군세가 금방 4만이 넘었다.

저걸 노리고 있었을까.

견훤은 왕건이 역시 삼한을 쥘 인물이라는 것이라는 걸 인정했다.

금강이 없었으면 말이다.

"예. 폐하."

"좋아, 일리천에서 왕건을 잡지."

설령 진다고 해도 최소한 결정타는 날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 신검이 버티고, 금강을 기다려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왕건의 태봉군과 견훤의 백제군이 마침내 일리천에서 맞붙게 되었다. 왕건과 견훤은 삼한의 패권을 두고 오랫동안 숙적이었다. 그저 단순히 전장에서 만났다고 하여 어찌 서로 칼을 들이대기만 할까.

왕건은 일리천, 태봉과 백제군의 진영의 중앙으로 나왔다.

견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제의 견훤왕은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만나자마자 면전에서 하는 소리가 항복 권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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