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부여연방
* * *
“전하, 고려 군부의 개혁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한참 고려의 경제를 요동에 귀속시키려고 하는데, 관흔이 그런 질문을 했다.
개혁? 하려면 하는 것이 낫다.
전쟁 탓에 고려 군부가 엉망이 되었으니 이참에 개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관흔 장군. 개혁을 따로 할 수 있겠는가.”
설마 지금 다른 것도 바쁜데 이것저것 하란 건 아니겠지.
“음, 소장 비록 군부에 몸을 담고 있어, 문관에 비해 머리가 조금 부족할지 모르지만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그래. 뭐 무신 나부랭이의 머리에서 뭐가 나올까 싶겠지만.
관흔이 두루마리를 내게 바쳤다.
“이것이 그 방안인가?”
“예. 전하 혹시 부족한 점이 있으면 소장에게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멀쩡한 거라면 가르침을 줄 필요가 없지. 일단 관흔이 지금 백제의 장수들 중, 가장 네임드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음. 어디 보자.”
“일단 이것은 말갈인들에게 적용할 것들입니다.”
일단 맹안모극제라는 것이다.
300호를 1 모극부로 하고 10모극부를 1맹안부로 한다. 이게 행정에 관한 것이며 군사에 대한 경우 100명을 1모극군. 10모극군인 1000명을 1맹안군으로 한다.
이것은 지금 요동에 귀부한 거란인과 고려의 말갈인들에 대한 통치방식이다.
발해인이나 백제인들에게는 주현제 그대로 사용하자고 적혀 있다.
어? 이거 금나라 맹안모극제 아니야?
이걸 관흔이 꺼낸다고? 대체 머리에 뭐가 있는 거야?
“혹시 글 깨나 공부하셨나?”
“아닙니다. 다만 백제의 장수가 되기 전에 신라의 문관이 되고자 했습니다.”
“흠.”
신라의 문관이라고?
이 사람 사신으로 보내도 되지 않을까?
“전하. 어찌 그러십니까?”
“이대로 하지.”
“그냥 머리를 굴렸을 뿐인데 딱히 부족한 점은 없습니까?”
부족한 점? 오히려 내가 부족하다고 해야 할 판이다.
맹안모극제라니. 나도 생각하지 못한 건데. 참 이런걸 잘도 생각했구나.
“이거 괜찮군. 관흔 장군. 앞으로 문관도 겸임하게.”
“에?”
이 정도 굴릴 머리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이대로 내 노예처럼 굴려줬으면 좋겠다.
“앞으로 백제와 고려를 위해 힘을 써주게.”
그리고 이제 고구려계 귀족들의 일도 해결할 때가 되었다.
신무기가 개발되었으니, 그놈들을 설득할 명분도 있다.
* * *
“내 그대들에게 현덕부에서 살 수 있도록 마련해주겠네.”
현덕부는 이제야 황성이 지어졌다. 기존에 궁지가 이미 있어서 그것을 증축하였다.
가독부가 지내야 할 황성이 지어졌으니 다음은 귀족들 차례다.
“그것은 당연히 해주셔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고구려계 귀족들은 사병들을 내놓게.”
너희들이 여전히 사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더 살기 힘들다는 거다.
걔네들 먹여살려야 하면 힘이 좀있어야 하니까.
부자도 망하면 3년은 사는 법. 이놈들은 그 정도 재력은 남아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들의 신뢰를 받으셔도 모자랄 판에 사병을 내놓으라니요. 그 무슨 어불성설이라는 말입니까.”
어불성설이 지금 쓸 말인가?
“그렇기에 더 달라는 것이지. 사병들을 내 밑으로 귀속시키면 요와 맞설 수 있는 강군으로 육성해주겠네.”
즉, 그렇게 되면 귀족들의 사병들이 요와 맞설 수 있는 군대로 거듭나는 것이니, 요와 싸울 힘을 얻는 것을 귀족들 스스로 볼 수 있다.
이놈들도 이제 혹할 거다. 어쨌든 일국의 대내상에게 힘을 보태는 격이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들 입맛에 맞는 대내상으로 만들 셈이다.
“그거랑 이건.”
“그리고 자네는 가독부의 부마인 내 측근이 될 수 있는 거지. 나쁜 거래는 아닐 텐데?”
무려 잘 나가는 부마의 측근이 될 기회다.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기대란 말씀.
“““······.”””
고구려계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내 제안을 받았다.
그들로서도 별다른 선택지는 없다.
어쨌든 내가 부귀영화를 장담해준 이상 그들은 나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 * *
완산주
금강의 명을 받은 상좌평은 완산주로 가 연방제에 대해 설명했다.
“상좌평, 이것이 금강의 뜻이라는 말인가?”
“예. 폐하. 이렇게 하면 고려와 백제가 싸울 일 없이 연방국가로서 천하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견훤은 아들이 상좌평을 시켜 보낸 서신을 읽으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려. 아니, 그럼 태봉은 완전히 나가 떨어지게 되겠구만.”
“예. 고려의 국내사정을 수습한 이후, 곧바로 남진을 개시하여 서경과 남경을 탈환하기로 하였습니다.”
태봉이 서경과 남경을 접수했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일단 이 연방은 나쁘지 않군.”
“예. 폐하. 심지어 왕자님이 고려의 대내상이 되셨으며 부마가 되셨으니, 연방제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백제의 왕자가 고려의 대내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연방제로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신검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평소에도 금강에 많은 의지를 하던 신검이다. 금강이 고려의 대내상이 되었다면 신검은 어찌 반응할 것인가.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리만 하면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발해. 아니, 고려와 싸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려는 대국이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려를 대적하기에는 어렵다. 동맹이기도 하니, 이참에 연방제가 좋을 것이다.
“신검도 그렇다는군.”
“그런데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신검이가 일분과의 외교를 망쳐버렸지 뭔가."
‘그래서 신검 태자가 군말않고 허락하는 것이었나.’
"달밤이 나쁘지 않으니 나는 이만 침소로 돌아가 보마.”
상좌평 최승우는 감탄했다.
지금 보라. 백제의 완산주 조정은 신검에 의해 돌아가고 있으나, 그 속이 빈 것과도 같았다.
이것이 전부 금강이 해온 일이다.
참으로 무서운 인물이다. 부여금강.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신검에게 족쇄를 채운 것이 아닌가.
넓은 의미로 보면 자의가 아니더라도 고려의 황녀 대연화를 가독부로 올리면서 그녀를 취한 것이다.
무서운인 인물이다. 아니, 어쩌면 전부 그의 손바닥이 아닐까.
“저, 상좌평.”
견훤이 간만에 흡족하게 웃으며 자리를 비키자, 신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문하시옵소서. 태자전하.”
“혹시 금강이가 언제 완산주로 오는지 알 수 있소?”
그런 걸 묻다니. 어지간히도 급하긴 한 모양이다.
“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래도 저 혼자 나라를 이끌어가기 힘이 드니 어쩐다는 말이오.”
그럴 테지. 금강왕자가 떠나기 전에 신검의 측근이 될 능환을 비롯한 형제들을 끝장냈으니까.
신검의 카리스마로 조정이 굴러가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심지어 신검은 금강과 화해하면서 금강에게 많은 의존을 해왔다.
불안할 것이다. 지금껏 자기 공까지 넘겨주던 금강이 대뜸 요동으로 가버렸으니, 이 백제를 혼자 이끌게 생겼으니까.
마치 부모가 사라지고 혼자가 된 어린 아이와도 같았다.
역시 이런 사람이 백제의 황제가 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음, 하지만, 지금 금강왕자님 역시 요동에서 고려를 경영하는데 힘이 듭니다.”
최승우의 말에 신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럴 수가. 이런 딱한 일이 있는가.”
“음 힘이 많이 드십니까?”
“어려울 건 없소이다. 다만, 아버님의 기대에 내가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
견훤이라는 인물은 전쟁의 왕이 될 수는 있어도 내치의 왕은 될 수 없다.
최승우도 그것을 알고 있고, 견훤 자신도 알고 있으니, 최승우 같은 신라삼최를 등용한 것이었다.
아마 지금 자신이 빠진 완산주 조정에서는 견훤의 불같은 성미가 그대로 국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나마 신검이 배운 것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금강왕자와 비교한다고 치면 뒤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
“음. 확실히 폐하께서 좀 불같은 성미를 지니셨지요. 폐하께서 타오르는 불꽃이라 하면 태자 전하께서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신검이 견훤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아우에게 휘둘리는 신검을 보니,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잔잔하게 흐르는 호수와도 같을 뿐이다.
“금강이의 도움이 절실하오.”
“음. 그렇다면 고려에 있는 금강왕자님과 힘을 잘 합칠 수 있겠습니까?”
신검의 금강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백제는 금강왕자의 손에 들어온다.
당장 고려도 가독부가 왕자에게 의존하고 있으니 말은 다한 셈. 나아가 연방은 양국의 군주가 금강왕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부여연방’이라는 울타리 아래에 2왕조가 공존하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
“내 이 나라의 태자로서 뭔들 못하겠소? 그저 금강에게 잘 부탁한다고 해주시오.”
최승우는 신검의 진심을 보았다.
신검은 절대로 나라를 다스릴 위인이 되지 못한다. 권신에게 휘둘릴 상이지.
그것이 다행스럽게도 능환이나 형제가 아니라 금강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소신이 한 번 힘을 써보겠나이다.”
굳이 금강왕자까지 갈 필요가 없다. 일본에 갈 사신으로 자신이 가면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일어난 문제를 굳이 해결할 이유는 없다.
금강왕자가 일본에 영향을 끼칠 때까지만 시간을 벌어두면 될 것이다.
신검과 밀담을 마친 최승우는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제 삼한일통의 때가 머지 않았군.”
이제 분열되었던 삼한이 하나가 되고 북방의 드넓은 땅도 금강왕자의 것이 되겠지.
어쩌면 중원을 노리는. 삼한민족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업을 이룰지도 모른다.
* * *
930년
상좌평 최승우는 일본으로 가면서 사실상 발해의 국정을 전담하면서 많은 준비를 해왔다.
군량이 슬슬 넉넉한 지경이 되니 전쟁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태봉의 왕건탓에 불만이 많았던 고구려계 귀족들은 복수를 부르짖었다.
“성왕폐하! 태봉에 보복을 하셔야 합니다!”
“서경과 남경을 탈환해야 합니다!”
언제는 전투하기를 그리도 꺼린 주제에. 어느새 고구려계 귀족들은 모두 호승심이 넘쳐나는 족속들이 되었다.
“대내상은 어찌 생각하는가?”
“때가 무르익기는 하였습니다. 군량도 넉넉하고, 백제와 고려의 수군이 철통같이 재해권을 확보하고 있으니, 고려는 외국과의 교역도 막혀 있습니다. 끽해야 저 신라쪽으로 일본의 호족들과 교역을 하는 것 같으나.”
끽해야 그 정도라는 거지. 고려는 약해도 너무 약하다.
심지어 신라도 지금 왕건과 견훤 사이에 줄을 어디에 설까 생각하고 있다지.
들어보면 왕실은 태봉에, 귀족들은 백제에게 고개를 숙이려 한다.
“그럼 태봉을 도모할 수 있나?”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확신하기는 이르지만, 지금 협공을 가하면 사방에서 고려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짐은 대내상만 믿을 것이네. 대내상의 본국인 백제와의 연방도 이루려면 이번에 태봉을 끝내야 할 것이다.”
대연화는 나와 약속을 했다.
태봉을 백제가 대동강 이남 통일을 달성하면 연방을 맺기로. 그래서인지 태봉정벌에 대한 논의만 나오면 연방도 엮여 들어갔다.
“예. 성왕폐하.”
“후사를 위해서라도 근심거리이자 고려 최악의 원수인 태봉을 멸망시키도록.
선가독부와 태자의 복수를 하라.”
대연화는 아직은 부풀어오르지 않은 제 배를 만지며 싱긋 웃었다.
그야말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태봉의 멸망이라는 선물을 바라는 듯 했다.
설마하니, 애가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은 몰랐지.
심지어 성별 상관없이 태어나든 고려의 다음 가독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그 덕에 고려땅에서 내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예. 폐하.”
대연화는 그저 단순히 재상인 나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려는 것이 아니다.
왕건. 그 자는 대씨 황실에 있어 불구대천의 원수다. 반란자 수괴 대광현과 함께 쳐들어와 장수 박술희를 시켜 선왕인 대인선과 태자 대화균을 죽게 하였으니, 힘이 생기면 보복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연방을 맺으려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것처럼 왕씨들에게 철저한 보복을 하는 것은 대씨의 목표가 되었다.
귀족들과 대연화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나는 장수들을 소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