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졸렬한 인질협상
* * *
부여성에서 전투에서는 수비군인 박술희의 군대가 밀리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부여금강! 이제 그만하는 것이 어떠시오! 우리에게는 대씨 여인들이 있소이다! 대씨 왕통을 끊을 셈이오?”
성 위에 금색 화려한 장신구와 비단을 걸친 여자들이 올라왔다.
아마 발해의 황실의 여인들이겠지.
저놈이 아주 치졸하게 군다. 그래도 나름 고려의 맹장이라길래 조금은 기대했는데, 저렇게 소인배였다는 말인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쳐들어와서 발해의 성왕을 시해한 네놈이 감히 그 딴 말을 지껄이느냐?”
“그래서 다 죽일 셈이시오?”
“저런 치졸한 놈이.”
그래도 부여성을 공격하며 압박한 시점에서 예상은 했다.
“요왕! 우리는 죽어도 되네! 부여성을 함락해서 배신자와 고려놈들을 잡아주게!”
황후라, 황후. 흠. 그래도 발해의 황후로서 나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있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옆의 여인들도 겁을 먹은 모습이지만, 결코 살려달라고 싹싹 빌지는 않는다.
이대로 내가 버렸다면 고려로 가서 온갖 치욕을 당했겠지.
최악, 발해를 얻기 위한 명분으로 왕건은 대씨들을 첩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수야 없지.
“황후전하! 이 요왕이 구해드릴 것입니다! 박술희! 네놈은 지금 나에게 큰 소리칠 입장이 아니다!”
“무슨 소리시오?”
무슨 소리기는. 이렇게 소식이 어두워서야.
“속주에서 네놈의 왕인 왕건의 군대가 내 군대에 대패를 당했다! 왕건 그 자는 제 부하들을 버리고 단신으로 고려로 도망갔지!”
“어디서 그런 거짓을!”
하긴 나라도 믿기 힘들겠지.
그래서 준비를 했다. 왕건 밑의 신하들을 굴비처럼 두리두리 엮어서 직접 보여주었다.
“이걸 보고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아니, 장군들이 대체 그곳에 왜 있는 것이오?”
왜 이곳에 있기는. 다 나한테 잡혀서 그렇지.
“여기서 장수들과 대씨의 여인들을 인질교환 하겠는가. 아니면 황후전하께서도 저리 말씀하셨으니, 정녕 끝장을 보겠는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고려의 포로들은 재갈이 물려 있어서 박술희에게 맞서 싸우라고 말하지도 못한다.
아니, 설령 입이 풀려있어도 박술희에게 싸우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왕건을 구하라고 하겠지.
추격군은 보내뒀으나, 아마 왕건을 잡지는 못할 거다. 그러니 슬슬 저놈도 자기 처지가 궁색해지는 것을 느낄 거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 놈이 가독부를 해하였으니, 나 역시 네놈의 주인을 해하려 한 것이다. 이번에 그 나잇값 못하는 왕건의 목을 놓쳤으나, 이놈들은 너희 고려를 지키는 장수들이 아니더냐? 이놈들이 다 죽으면 너희가 우리 백제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있어도 나한테 질 것이다.
발해를 먹는 순간, 위아래로 샌드위치로 잡을 것이다.
“크으윽. 이런 비열한!”
“네놈이 할 말은 아닌 듯 싶구나! 자 어쩔 테냐! 대씨 황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조용히 부여성에서 도망치겠느냐. 아니면 내가 이 자리에서 이놈들을 다 죽여야 하겠느냐!”
내가 턱을 흔들자 부여군 소속의 병사들이 활로 고려의 포로들을 겨냥했다.
단순히 장수들만이 아니다. 잡은 병사들도 상당수다.
애초에 구포에 대응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놈들은 이 싸움은 끝났다.
“젠장!”
“네 놈이 버틴다고 한들. 고작해야 배신자들로 구성된 군대로는 백전백승의 우리 군대를 이길 수는 없다!”
박술희는 결국 내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금강왕자도 우리 뒤를 치지 말아야 할 것이오. 사내대장부의 약속이오.”
“암. 사내대장부의 약속이지. 자네는 얼른 꼴사납게 도망이나 치게.”
“이건 도망이 아니라.”
도망이 아니기는. 어디서 체면을 차리려고.
“도망이 아니고 무엇인가? 후딱 꺼지게. 고려놈의 면상을 보면 내 속이 쓰리거든. 죽도 안 되는 놈들이 너무 앵앵거린다는 말이야.”
“······.”
박술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면서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자기도 여기 있다가는 패배하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거래는 성립되었다.
박술희는 부여성에서 살아남은 대씨들을 두고 군대를 철군하기 시작했으며, 우리도 본진에 고려의 장수들을 뒀다.
물론 부여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들겨 팬 것은 덤이다.
부여성에 입성하자 관아에 침통한 표정의 여인들이 있었다.
“요왕. 어찌 그랬나.”
“가독부와 많은 왕자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런 마당에 황후전하와 대씨의 여인들마저 죽는다면 끝입니다.”
대씨의 핏줄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렇게 해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 대인선이 죽은 이상, 황후는 중요하다.
황후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는지 치욕을 참는 얼굴이었다.
“크흑.”
“심려를 놓으시지요.”
내 말에 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찌 놓으라는겐가. 그 고려놈들에게 폐하께서 승천하셨네! 비명에 가셨어!
자네가 내 마음을 아는가?”
“요왕! 나는 저 고려놈들에게 겁탈당할 뻔 했습니다! 부디 요왕은 바라건데.
복수를 해주십시오!”
복수는 해줄 생각이다. 당연하지. 누가 멀쩡히 보내준다고 했나?
대씨 여인들의 분통을 듣고나서 나는 장수들을 소집했다.
“전하.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박술희는 고려의 맹장입니다. 유금필을 떨어트렸으나, 저 자도 떨어트렸어야 합니다.”
“관흔 장군. 내가 그냥 보낼 거라 생각하나?”
이 사람 아직도 나를 모르네.
“예? 하오나 사내대장부의 약속이라고.”
“하하하. 이거 참. 관흔 장군도 나를 아직도 모르는군. 난 그런 약속보다 국익이 우선인 사람이야.”
고려놈들과의 약속은 지킬 가치가 없지.
고려는 적국이다. 순진하게 내 약속을 믿은 박술희가 바보인 거지.“
“공격하시는 거러군요.”
“애초에. 저놈들도 멋대로 북진하지 않았나? 심지어 대광현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버텼지.”
부여성까지 공격해서 왕도 죽이고 말이야.
“그럼. 소장을 보내주십시오.”
“아닐세. 내가 직접 가지. 박술희는 내가 직접 잡아야 해.”
그놈은 후백제의 삼국통일에 크게 방해될 놈이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번에 대인선을 죽인 것도 그렇고 확실히 해야 할 때다.
“예. 전하.”
“발빠른 기병 5천이면 충분하다. 다른 군사들은 부여성을 지키라.”
다른 병력은 쉴 때가 되었다.
“예.”
저번은 유금필. 이번에는 박술희. 전적이 좋다. 두 맹장을 잡아죽인다면 남은 고려의 장수들은 백제의 상대가 되지못할 것이다.
* * *
부여성을 떠난 박술희의 군대는 남하하고 있었다.
발해 전체가 적진인 이상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다들 괜찮으시오?”
“우리는 괜찮소. 어서. 폐하를 모셔야 하오.”
맞다. 지금 중요한 것은 주인인 왕건이 어디 있는지다.
자신들은 전부 죽어도 되지만, 왕건은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폐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다 보시오?”
“일단 남경으로 가셨을 것이오. 금강의 군대에 공격받을 때, 그러기로 약조하셨소이다.”
약조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이곳은 적진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칼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말이다.
“폐하께서 말이오? 허 이거 참. 어쩌다 고려가 이렇게 되었는지.”
“얼른 폐하를 찾아야 합니다. 이곳이 발해땅이라는 걸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끄응.”
두두두두두두!
머지 않은 곳에서 많은 수의 말들이 내달리는 소리가 고려군의 귀에 흘렀다.
뭔가 점점 가까이서 들리는 것이 고려의 장수들은 불안함을 느꼈다.
“이건 무슨 소리요? 앞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데.”
“자.장군! 저길 보시오! 배.백제의 깃발이오!”
백제의깃발이 이곳에는 대체 왜 있는것인가?
“서.설마 금강왕자!? 금강왕자인가!”
아직 그들의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박술희는 백제의 기병대를 맞이한 순간. 차라리 부여성에서 금강과 맞서 싸워야 했다고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
* * *
나는 내 앞에서 포박당해 무릎을 꿇고 있는 박술희를 마음껏 비웃었다.
금방 보는 얼굴인데 유난히 반갑다.
설마하니 정말 내 약속을 믿고 그리 태평하게 철군할 줄은 몰랐지.
발해를 무시해도 정도가 있다.
“참으로 불쌍하게 되었네. 박술희 장군.”
“사내대장부로서 어찌 이리 치졸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어휴. 사내대장부로서 치졸하다니. 그걸 다른 이라면 모르겠는데. 이놈이 스스로 말하니 웃길 따름이다.
“너희들은 치졸하지 않아서 남의 나라 내전에 간섭하고, 대광현이 죽었음에도 부여성을 공격하여 군주를 시해하였는가?”
이건 확실히 해야지. 정말로 실망스럽다. 원래 역사의 야율아보기조차 대인선 을ㅈ ㅤㅜㄱ이지는 않았다. 이 말이다.
“가독부를 죽인 것은 나 역시 알지 못했던 일이오! 설마 부여성에 가독부가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아, 다시 말해. 이놈도 대인선은 밖으로 나갔을 거라 생각한 것인가.
어쨌든 결론은 이놈이 부여성을 쓸어버리라고 해서 대인선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나도 자네가 이곳으로 올 거라 생각지 못했네.”
“이런 사악한!”
사악하기는. 적을 믿는 것이 바보같은 행위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조건은 ‘고려군의 부여성 철군’이지. 이후에는 아무런 조건을 걸지 않았다만? 부여부에서 벗어난 시점에서 걸릴 각오는 했어야지.
무엇보다도.”
“더 할 말이 있소?”
“국가간의 의리도 없는 놈들과 대화를 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뭐 자네를 잡았으니 도망쳤을 왕건을 대신하는 것도 좋겠지.”
박술희는 부여성에서 끝까지 대인선을 따랐던 신하들과 왕족들에게 맡겼다.
왕건은 튀었으나 결국 직접 대인선을 죽인 것은 박술희였으니까.
“승리를 하였으면 그만 욕보이고 죽일 일이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오!?”
“반대로 묻지. 승자로서 패자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이러니 무식한 놈들이란. 왜 승자가 적장에게 명예롭게 죽을 기회를 줘야 한다는 말인가?”
심지어 내가 침공해서 자비를 베푸는 것도 아니다. 먼저 쳐들어온 주제에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다.
“······.”
“뭐 시신은 고려로 돌려 보내주지. 잘 가시게.”
박술희는 죽게 될 것이고, 문제는 풀어준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사로잡힌 포로들이다.
“이것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차라리 죽이시오! 이렇게 살아남는다면 굴욕적일 것이오!”
얘네들은 학습능력이 전혀 없나.
“내가 박술희에게 모욕주는 것을 봤을 텐데. 설마하니 내가 너희들을 편히 죽게 할 거 같은가?”
“전하.”
“말씀하세요. 상좌평.”
“이 자들은 고려의 중추입니다. 따라서 인질교환을 하고자 하면 왕건은 받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호오. 그런데 인질교환할 것이 있습니까?”
인질교환할 것이 있어야 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왜 없겠습니까? 여전히 발해의 서경과 남경이 그대로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려의 땅으로 굳히기 위해 병사들을 주둔시킨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왕건은 무사히 튀었겠군. 이거 참 명줄하나는 질긴 인사다. 나중에 고려가 멸망할 때도 도망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럼 왕건도 무사히 도망쳤겠군.”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서경, 남경의 땅과 거래를 하시지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고려와의 전쟁에서 위협이 될 고려의 장수들을 모조리 제거할 수 있을 것이며 왕건이 거래를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도 남경과 서경을 굳이 힘들여 되찾지 않아도 되니 이득일 것입니다.”
오. 그럴 듯하다.
“거래를 해도, 안 해도 이득이라는 건가. 황후와 대씨들은 어떻습니까?”
“음. 조금 진정은 하였으나, 지금 거의 조정이 재기능을 못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다 갈려나갔으니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끌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