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68화 (68/154)

68. 속주전투와 부여성

* * *

왕건과의 전투이야기가 나오자 관흔의 눈이 번뜩였다.

“관흔장군.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야. 잘 만하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니 자네를 비롯한 장수들의 어깨가 무거워.”

때에 따라서는 왕건을 죽이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왕건은 결국 고려의 왕이자, 원역사에서 삼국통일을 이루는 인물. 오래 끌어서 좋을 것이 없다.

발해를 먹고 나면 바로 삼국통일 사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일본까지 먹어서 중원이 통일되어도 함부로 못할 강국이 되어야 한다.

“예. 전하.”

“전군. 공격하라! 부여군은 나와 함께 왕건을 잡는다!”

그야말로 뇌가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공격. 그러나 승산을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왕건은 퇴각하면서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 군사들이 많이 지쳐있다.

반면에 우리는 아직 싸우지 않은 기병대다. 몰아붙이면 승산은 있다.

“역시 왕건이 이끄는 군대 답습니다.”

꽤 지쳐있을 텐데도, 우리가 쳐들어가자 상당히 질서정연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양측의 발해군이 꽤 고전하고 있습니다.”

“음.”

수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왕건이 너무 잘 대응하고 있다.

상대는 고려의 왕 왕건. 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와 내가 임시로 수습한 군대의 차이점은 명확했다.

내가 돕는다해도 사기에서 큰 차이가 나겠지.

변변한 지휘관도 없으니 발해군이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심지어 이번 원정에는 고려의 수뇌부가 상당히 있는 것 같고. 이쪽은 끽해야 요왕인 나와 백제의 장수들이다.

“흠. 너무 밀리고 있구만.”

역시 고려의 왕건답구나. 그런데 말이다. 이왕 전장에서 마주했으니 하는 말인데 나를 잊으면 안 되지.

“포격 준비는?”

“구포를 전부 설치했습니다!”

발해군이 얻어맞는 동안 이쪽은 구포를 준비했다.

사거리도 닿는데다가 고려군은 발해군과 싸우면서 밀집되어있으니, 포격을 받는 순간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좋아, 그럼 쏘게. 적들의 대오를 흔들게.”

퍼엉! 퍼버엉!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적군을 향해 떨어졌다.

“끄아아악!”

“끄어어어억!”

고려군에게 화약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니던가? 아마 대처가 안 되겠지.

발해군이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 정도 다 떠먹여 줬는데, 무너진 대열의 고려군도 못 떠먹지는 않겠지.

포격이 계속될 때마다, 고려군에게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고려군이 흔들린다.

“역시 조금씩 바뀌고 있군.”

전황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무너지는 발해군이 당시 힘을 찾고 고려군을 압박했다.

고려군은 또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고. 발해군은 그틈에 치고 들어간다.

“적들이 우리 포병들을 노리지는 못하는군.”

“그럴 것입니다. 화살을 쏘려 해도 앞을 발해군이 막으니 어쩌겠습니까?”

고려는 신무기에 대한 정보는 입수했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화약을 만드는 방법도 모르고, 설령 어떻게 안다쳐도, 이쪽은 이미 조총라인을 타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지금 써먹는 구포는 화포 중에서도 좀 떨어지는 수준이다.

왕건이 맘먹고 포병을 잡고자 하면 힘들어진다. 그래서 발해군으로 틀어막은 것이다.

“오, 병력이 더 빠졌습니다.”

“아마 포병을 대비한 것이지.”

자꾸 떨어지는 포탄 때문에 대오가 흔들리고 발해군에게 당할 처지가 될 바에는 차라리 발해군을 전력으로 잡고 백제군을 잡겠다는 소리다.

“어리석은 행위로군.”

그 왕건이라는 자가 이런 선택을 하다니.

아니, 어쩔 수 없나. 이래나 저러나 피해가 누적되는 것은 사실이니까. 차라리 얼마 되지 않는 놈들을 전면으로 뚫을 것이다.

부여성에도 병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쨌든 이것은 왕건의 실책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상좌평의 큰 그림에서 미리 벗어날 생각을 안 한 것이 크겠지.

“중앙이 텅 비어있지 않은가.”

계속된 전투로 인해 좌 우에 고려의 병력이 집중되자 자연스럽게 중앙이 뻥 뚫렸다.

그래.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면 기병을 보내 돌파할 수 있습니다.”

“장졸들은 나와 함께 고려군의 중앙을 돌파한다! 왕건을 잡아 대업을 이룰 것이다!”

기병을 이끌고 그대로 중앙을 돌파하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왕건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앞날이 편하다.

“끄어어억!”

“이놈들! 폐하께는 가지 못한다! 쿠헉!”

못 가기는 개뿔. 한 번에 나가 떨어지는 주제에.

앞을 막던 병사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콰지지직!

“한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아아!

“네이놈! 금강아! 내가 바로 신숭겸이다! 내 칼을 받아라!”

“귀찮은 놈.”

탕!

총을 쏴서 신숭겸을 낙마시켰다.

“부여금강을 죽여라! 폐하를 지켜라!”

“허, 저번에 화살을 처맞더니 겁을 집어먹으셨나. 아주 병사들 사이에 똘똘숨었네.”

호위병들에게 지켜지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다.

이거 어쩔까. 조총으로 잡아볼까?

“네이놈! 부여금강! 내 이름은 왕순식이다! 백제놈 따위가 폐하의 옥체를 해하려 드는 것인가!”

“아주 늙었다고 유세를 떠는구나. 시간 허비하기 싫다.”

우지직!

말을 타고 매섭게 달려드는 왕순식의 허리를 팔로 낚아채 그대로 부러뜨렸다.

아주 보기 좋게 몸이 반이 접힌 왕순식은 그대로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죽지 않았다.

“대고려국. 만세. 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만수무강이라니. 하여간 나 같으면 살기 위해 벌버둥칠 텐데. 죽을 때까지 왕건을 위하는 것을 보면 광신도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왕순식은 본래 궁예의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잘도 왕건에게 붙은 꼴이라니.

“만수무강? 여기서 잡힐 텐데. 무슨 만수무강? 어? 시발.”

불안한 기운이 엄습한다.

설마 아니겠지. 왕건이 그놈이 도망친 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 빌어먹을 왕건이라는 놈은 자기 신하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건가?

“전하! 왕건이 보이지 않습니다!”

“왕건이 보이지 않는다고?”

백제의 장수들 중 고려왕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다. 일찍이 내가 왕건의 얼굴을 그려 그들에게 돌렸으니까.

“전하! 저기 기병들이!”

진짜다. 기병들이 세 부대로 나뉘어서 각기 다른 길로 가고 있다.

그래. 저놈들이다.

“저놈들이로군. 추격하라! 왕건을 잡는다!”

왕건을 잡고 싶었다. 잡아야 고려는 무너진다.

그렇게 다짐하며 기병들을 풀어 왕건을 쫓았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추격군이 부족했다. 어떻게 이동했는지, 대부분의 고려의 기병들을 잡았으나, 왕건은 잡지 못했다.

정말 답이 없다.

“송구합니다. 전하! 소장들을 죽여주십시오!”

역시 왕은 왕이라는 건가. 빌어먹을 놈이 잘도 도망쳤다. 아무래도 원역사의 공산전투가 여기서 이뤄진 모양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장수들은 잡지 않았나. 그리고 적의 반은 잡았으니, 이것으로 만족해야겠지.”

이번 전쟁에 참여한 고려의 장수들을 많이도 잡았다.

지금은 이것으로 만족한다.

“삼한일통의 대업을 망쳤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딱히 망친 것은 아니다.

차근차근 고려를 쥐어짜고 있다. 이번에도 이 정도면 꽤 성공했고.

“관흔장군.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네. 어차피 이번 전쟁의 목적은 고려군의 격퇴야. 이미 대부분의 군대를 무찔렀고, 왕건은 꼴사납게 도망쳤네. 그러니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

나는 관흔을 위로하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장수들은 여전히 공을 세우는 것보다 왕건을 잡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 모양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왕건의 어리석은 짓으로 발해는 내 손에 들어올 것이고, 부여성에 있을 저 박술희도 꽤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될 테니까.

“오히려 더 치욕스러울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병사들과 장수들을 다 죽이고 저 혼자 고려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공산전투. 아니. 이 역사에서는 속주전투가 될 것이다.

왕건은 이것으로 기껏 모은 힘이 크게 위축될 것이다.

“예. 이제 고려는 또 다시 흔들릴 것입니다.”

원역사의 고려보다 심각하다. 기껏 북진하겠다며 호족들의 힘을 얻고 기세등등하게 올라왔던 왕이 철저히 패배했다.

그런 왕을 따르고 싶은 자가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발해가 완전히 내 손에 들어오면 발해는 백제가 되는 격이다.

“장수들은 군사들을 정비하고 부여성으로 갈 것이다. 또 이번 전투에서 고려의 왕을 단신으로 도주하게 만든 너희들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니, 모두 마지막 전투에 힘을 다하라!”

전쟁의 피로가 극에 달한 군사들은 결과적으로 전장을 이탈할 수도 있다. 사기는 바닥을 치고. 특히나 지금 내 군대의 절반은 거란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본국에서부터 나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아마 더 그럴지도 모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부여성에 도착하자 아직 보수는 되지 않았지만 성벽 위에 고려군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여성의 군대가 함부로 나오지 못하고 있군.”

“막힐부와 장령부의 군대도 있지만, 더해서 설마 우리가 왕건의 군대를 잡았을 거라 여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일이 이렇게 풀려버리다니. 마치 그간 복잡하게 얽혀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풀려버리는 기분이다.

“그런가.”

박술희도 바보는 아니다.

아마 너무도 어이없이 부여성이 함락되었으니. 놈입장에서는 다른 지역의 군대를 조심할 수밖에 없다.

요하에도, 그리고 다른 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있겠지.

그리고 생각할 거다. 왕건의 대업을 위해서 가능한 발해에 더 큰 피해를 주자고.

왜? 지금 박술희는 발해 황실을 잡았으나, 발해를 직접 지배할 역량도 되지 않는다. 일개 장수이기도 하며 왕건이라도 힘들 일이다.

그럼 결국 철수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 발해를 누가 먹게 될까?

당연히 내가 된다.

박술희는 나에게 발해를 넘겨주기 싫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안과 밖이 달라졌을 뿐. 여전히 나는 금강이고, 전황도 유리하다.

부여성의 군량창고는 불에 탔고, 청야전술로 뭐 하나 가져갈 것이 없었다.

“전하, 싸울 생각이십니까?”

“한 번 공격해보지. 인질교환은 이후에 생각해도 될 문제.”

“예. 전하.”

점령할 수 있는데 인질교환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굳이 지금 당장 놈이 인질로 삼을 거 같지도 않고.

목표는 힘을 최대한 힘을 빼는 것이다.

“전군! 공격하라! 비명에 간 가독부의 복수를 하라!”

나는 장수들과 백제, 발해군들에게 가독부의 보복을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부여성의 공격을 명령했다.

쾅! 쾅! 퍼엉!

이미 한 번의 대규모 전투로 부여성은 망가져 있었다.

보수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여성은 우리 공격을 방어해야만 했다.

당연히 방어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내 군대는 부여성에 대해 잘 아는 반면. 박술희는 성을 점령하였으나, 부여성에 대해 잘 모른다.

어차피 싸울준비도 되지 않는 성이 화포 공격에 무력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성벽을 넘어라!”

“막아라! 백제놈들을 막아라!”

박술희의 저항에 무색하게도 내 군대는 성벽을 너무도 쉽게 넘어가고 있었다.

지쳤다고는 해도 어디 저놈들만 할까. 심지어 전부 고려군도 아니다.

오늘 안에 부여성을 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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