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백제에서 살아남기-67화 (67/154)

67. 가독부의 죽음

* * *

고려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발해를 내가 수습한다.

그리하여 고려가 이루지 못할 북진을 이뤄서 북방의 넓은 영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고려를 압박할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 목표는 발해를 살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고려에 의해 무너질 발해를 수습하는 것. 그렇게 백제의 품으로 이끌어 옛부 여의 강역을 얻을 것이다. 상좌평께서는 고려군에 의해 무너질 발해를 수습할 방안을 마련해주십시오.”

“신 상좌평 전하의 명을 받들 것입니다.”

장내의 장수들에게 분명히 천명했다.

이것으로 발해를 먹는데 주저함이 없어졌다.

그럼 오흥을 처리해볼까.

“네 이놈! 금강아!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오흥이 노발대발 소리를 지른다.

하늘이 두려웠으면 이짓거리는 진작에 때려쳤지.

“오흥. 살고 싶지 않은가?”

“그 무슨 헛소리를. 내가 내 주군을 잃고 살기를 바랄 것 같은가?”

그게 아니지.

신덕은 모르겠지만 나는 오흥이라는 인물을 얼굴만 보고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저 얼굴은 조금만이라도 틈을 주면 살려고 벌버둥치는 놈이다. 그러니까 내가 자존심을 조금 세워주면서 항복하라 하면 받을 것이다.

그래. 이미 대광현도 죽였다. 살려는 주마.

“살려줄 수도 있다만. 서경과 남경의 항복을 받게 해준다면 말일세.”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후. 오흥. 이미 판은 뒤집어졌네. 대광현은 끝장났어. 서경과 남경도 발해의 품으로 돌려야 하지 않겠나.”

항복할 기회를 주겠다.

“무슨 말씀이시오.”

“백성들을 생각하게. 백성들을 위해 전쟁을 끝내야 하지. 안 그런가? 대광현도 죽었고, 이제는 백성을 생각해야 할 때네.”

이런 놈에게 백성만큼 중요한 명분도 없지.

“백성들을?”

“그렇네. 백성들을 위해 살아남게.”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오?”

새끼. 이제야 튕기지 않네. 자존심을 지키면서 항복하고 싶다는 거겠지.

이런 놈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지.

* * *

부여성

부여금강의 전략대로 스스로 미끼가 되려 했던 대인선은 수레에 실려 부여성으로 돌아온 못난 자식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어쨌든 사살하라는 명을 요왕에게 내렸다고는 하나. 그래도 자식이다. 반란을 일으켰어도 자식은 자식이라는 말이다.

가슴이 아린 것은 그 때문이겠지.

“후우. 못난 아들놈이 기어이 죽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네.”

“요왕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신으로 적들을 상대해야 했으니 살릴 수 없었나 봅니다.”

폐태자가 죽어서 돌아왔으니 대문진도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도 상경에 있을 시절에는 군사적인 일로 자주 논의했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다니. 사람의 목숨이란 참으로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것으로 전쟁은 끝이다.

대광현이 죽었고, 서경의 반란은 진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왕건도 이제 명분을 잃었으니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것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만족스럽다.

전쟁은 수습될 것이고, 요나라도 함께 약해진 상태라 감히 발해를 넘볼 수 없다. 요왕은 다시 요동의 부로 발해를 도울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이제는 조금 쉴 수 있겠지.

“그럴 것입니다.”

“요왕도 전쟁을 끝내서 좋겠군. 사실 요왕이 가장 고생하지 않았나. 자네도 자네지만. 요나라의 내분도 끝내고 그리 달려왔으니까.”

전쟁이 끝나고 나니 이제 마음이 놓였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면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동맹국의 왕자 이상입니다.”

“그럼 오늘은 먹고 쉬지. 성 밖에 있는 군사들에게도 전하게. 군량고를 태웠어도 어느 정도의 식량은 남지 않았나? 오늘은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으라고 말이야.”

혹시 몰라 남은 식량들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예. 폐하.”

대문진을 밖으로 내보낸 대인선은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무엇인가 싶어 무거운 눈을 떠 주위를 살피던 차에 밖에서 군사를 돌보던 태자 대화균이 들어왔다.

“폐하! 고려군이 부여성을 총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뭐라고? 전쟁은 끝나는 것이 아닌가!”

“2만에 달하는 대군입니다!”

2만이라니. 아직 그만한 병력이 있다고?

“이런 젠장! 고려왕 왕건이란 자는 어찌 그런 치졸한 짓을 한다는 말인가! 패배했으면 깨끗이 물러났어야지. 이 무슨! 성을 지켜야겠네. 병력을 모아라!

어서!”

“이미 밖에 주둔시킨 아군이 고려군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궤멸 위기입니다!”

“뭐. 뭐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저 전쟁이 끝났다고만 여긴 발해군은 박술희가 이끄는 군대의 기습에 의해 전멸을 면치 못했다.

부여성이 점령당하는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금강의 눈을 속이려 했을 뿐인데, 부여성이 어찌 이리도 허술하다는 말인가?”

부여성에 입성한 박술희도 허탈했다.

이게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장군! 가독부 대인선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뭐라, 발해왕이 죽었어?”

“예!”

“태자도 시신도 찾았습니다!”

왕과 태자가? 대체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왕후와 공주들도 찾았습니다!”

왕후와 공주들이라. 왕과 태자가 죽었으니, 그녀들은 이미 의미가 없다. 포로인 이상 고려에 데려가야겠지만.

“이미 가독부와 태자가 죽었다. 그들은 포로로 잡아라. 아녀자들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예! 장군!”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사실상 발해가 멸망한 격이 아닌가? 일개 장수인 내가 발해를 점령한 격이로군. 폐하께서 직접 하셨어야 할 일인데. 불충이 따로 없네.”

“폐하께서 장군께 큰 상을 내릴 것입니다!”

“큭큭큭.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네. 금강이 남아있으니까. 수시로 바깥에 정찰병을 보내보고, 하루는 쉬었다가 서경으로 내려가야겠다.”

“예. 장군!”

대인선과 태자가 죽은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고려에 있어서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박술희는 금강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 * *

“결국 부여성이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대인선과 대화균도 사이좋게 대광현을 따라갔군.”

부자가 함께 죽었군.

저승에 부자가 사이좋게 모였을 것이다. 정작 지금껏 내 손바닥 위에 놀아난 것도 모르고 있겠지.

“전하. 큰 일입니다.”

“또 무슨 일인가? 발해가 멸망직전이 된 것 말고 또 있나?”

“부여성을 점령한 것은 박술희의 군대입니다.”

부여성을 점령한 것이 박술희의 군대?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박술희가 수만의 군대를 이끌었다고?”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지 않나?

일개 장수가 수만의 군대를? 아니, 능력을 떠나 왕건이 그냥 그 군대를 그대로 맡기고 본인은 소수의 군대만 끌고 내려갔다고?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서경과 남경의 항복한 군대도 있는 모양입니다.”

“미쳤군. 제 주군을 공격하다니. 역시 서경과 남경의 군대는 충성심도 없는 족속들인가.”

어떻게 자기 나라를 공격한다는 말인가.

대광현이 없을 때,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는데.

왕건이 꽤 머리를 굴렸다. 서경과 남경의 군대를 희생시키고, 서경, 남경의 군대를 고려군으로 취할 셈이다.

허, 똑똑한 놈.

어부지리라는 건가.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작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후와 공주는 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황후와 공주들은 살아있어야 조금이라도 내가 발해를 지배하는데 도움을 줄것이다.

“방안이 있습니까?”

“대인선이 죽었으니, 우리는 왕건이라도 잡아야지요.”

딜교는 해야지. 안 그래?

“왕건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야 서로 맞지 않겠습니까?”

“음, 좋은 안입니다. 아마, 부여성을 점령하면서 가독부와 태자는 죽었어도 황후나 공주들은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래. 그들과 왕건을 교환할 셈이다.

“발해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그 대씨의 여인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음? 그래야 합니까?”

굳이 발해 황족을?

“예. 그렇게 해야 발해와 요를 온전히 전하의 수중에 넣을 수 있고, 일본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커지면 설령 완산주에서 전하에게 불만이 많은 세력이 있더라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황녀에 요의 황녀를 얻고, 대씨의 황녀도 얻는다라.

이건 나쁘지 않구나. 그런데 양심이란 게 있지.

“으음.”

“어차피 대부인께서는 정치적인 이유라면 결혼을 해도 상관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양심이 있지.”

대인선이 죽는 것도 지켜본 마당에 그건 좀.

“이미 대인선이 죽는 것도 방관하였으니, 좋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 이왕 저지른 일이다. 어쩔 수 없지.

“막힐부와 장령부에서도 잇따라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무슨 보고?”

“왕건의 군대와 교전을 치르고 있다 합니다.”

왕건의 군대와 교전을? 그쪽은 버티기 힘들겠지.

“음, 그럼 어떻게 따라잡을 수는 있겠군. 효봉의 군대는 어찌 되었습니까?”

“일단 부여성은 빠져나온 모양입니다.”

효봉의 피해도 제법 있었겠지.

부여성은 당장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발해군이 너무 무모하게 달려들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분명 각 부에 명령을 보냈다고는 해도 굳이 왕건에게 악착같이 달려들 이유가 있을까?

잇따라 보고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뭔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야, 사실 신이 좀. 수를 썼습니다.”

수를 쓰다니. 무슨 수를 쓴 것인가.

“무슨 수를?”

“왕건이 대인선을 죽였다고 말입니다. 그랬으니, 발해군 입장에서는 화가 치밀 것입니다.”

그런 수를 쓴 것인가.

“허. 그리하셨습니까?”

“예. 전하. 그러니 왕건은 퇴각하기 힘들 것입니다.”

아주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군.

역시 이래서 내가 상조평을 싫어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해야 발해군이 작정하고 달려들 테고, 고려군의 피해는 커질 것이다.

왕건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부여부가 점령당한다 하더라도 막힐부와 장령부도 바보가 아니다.

회원부, 동평부나. 저 남쪽은 모르지만, 막힐부와 장령부도 나름 거란과의 전투로 단련된 놈들이다.

당장 지금껏 대광현을 지지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답이 나오지.

그들이 왕의 죽는다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뻔하다.

게다가 내가 지원군까지 보내왔으니, 저들은 어떻게든 왕건을 잡는데 도움을 줄 것이고.

“내가 직접 왕건을 추격하지. 기병 5천을 이끌 것이다.”

“예. 전하.”

오는 길에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전장에서 이탈해버린 병사들도 상당수였다.

나의 군대는 부상병과 패잔병들 수습했다. 어쨌든 왕이 죽은 탓에 분기탱천해서 싸운 무리들이다.

나에게 도움이 될 놈들이란 거지.

“전하. 저기 왕건의 군대입니다!”

왕건의 고려군은 속주와 중경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발해군을 상대하면서 남진하느라 상당히 지친 것 같다.

“놈들도 상당히 지쳐있군. 발해의 군사들은 좌, 우 부대로 나누어 왕건의 양측을 칠 것이다.”

여기서는 그대로 밀어붙여야 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포병대를 준비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예. 전하.”

“중앙의 부대는 나를 따라 왕건을 잡을 것이다.”

이참에 아주 끝장을 보자. 발해 백성들에 자기들 왕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해서 은혜를 입힐 절호의 기회다.

발해의 왕족들도 그것으로 우리를 따르게 될 테고 말이다.

“전면전입니까?”

관흔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전면전을 치를 때가 되었다.

서로 총력전이다. 때마침 왕건은 박술희의 군대를 부여성에 내버려뒀고, 왕건 본인도 각 부의 군대에게 충분히 괴롭힘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 끝을 봐야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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