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거란의 새로운 황제
* * *
퍼엉! 콰직!
반 즘 열린 채 안에서 겨우 버티는 임황부의 성문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요군도 그제야 성이 공략되는 것은 막고 싶은지, 성벽위로 기어올라와 내 군대와 싸우고 충차를 공격하면서 저항을 해보았으나, 이미 승부는 났다.
“전하! 성문이 거의 부서졌습니다!”
이미 다 박살이 났다.
성벽 위에 병사가 적으니, 아마 문을 여는 순간 거란놈들이 대기타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내 병사들을 들이박을 수는 없다. 안 그래도 지금껏 피해를 감수하면서 조사온, 야율덕광도 죽였는데. 성에 진입하다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켜라 내가 가겠다!”
콰지직!
몸을 들이박자 순식간에 성문이 부수어지면서 나는 선두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임황부의 성으로 병사들이 진입했다.
성내에 진입하자 역시 요나라의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꼴에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끝까지 막아서려고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자비를 베풀 수는 없지.
“백성들은 그냥 두고,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요나라의 황성에서 피의 학살이 벌어졌다.
수많은 거란의 병사들이 내 앞에서 쓰러져 죽었다. 일부 병사들은 화살을 쏘려다 반대로 부여군의 애깃살에 죽어나갔다.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너희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윗놈들 잘 못인 걸.”
여기서 끝내서는 안 되겠지.
늙은 요괴 술율평을 찾아야 한다.
“술율평을 찾아라! 늙은 여우를 잡아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
내 명령에 병사들이 임황부를 뚫자마자 황궁으로 진입했다.
“이것이 대체 무슨 무례요! 이곳은 대요제국의 수도요! 어찌 조선왕이 이곳에 백제군을 끌고 들어오는 것인가!”
요나라의 관리들이 뛰쳐나와 우리들 앞을 막았다.
남이사 군대를 끌고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이곳은 이제 나의 땅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지역에서 군대가 올라와 봤자 얼마나 올라올까.
감히 나를 막을 수 있을까?
가만히 보니 이놈들 면상이 제법 귀티가 난다. 거란족 특유의 촌티냄새가 아니라 글 좀 깨나 배운 지식인놈들 같다.
“이놈들은 생김새를 보아하니 한족들이 아닌가?”
“그런 것 같습니다.”
참 대단도 하다. 한족관리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하긴 유목민족의 제국은 중국의 관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전투력을 제외하면 무식한 놈들이니까.
“야율배는?”
“야율덕광의 남은 잔당 소탕에, 임황부의 병력과 교전 중인 모양입니다.”
그렇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더 두고 볼 것도 없겠군.
“요에 귀부한 주제에 의리 하나는 있구나. 한족놈들은 죽이지 말고 거란의 고위직놈들만 골라 죽여라.”
“예! 전하!”
요나라를 거란족의 나라가 아닌 잡종의 나라로 만들어야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조선왕! 기어이 황궁을 범하려는 것인가!”
야율배와 합류할 무렵. 술율평이 찾아왔다.
“이 사태를 초래한 것은 태후요. 안 그렇소?”
진작에 야율배나 야율덕광 중 하나에 넘겼으면 내가 이렇게 직접 찾아올 일도 없었고 얼마나 좋아?
“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말이라고 하지 소라고 하나. 자, 어찌할 거요?”
이제 힘의 우위는 분명해졌다.
나는 승자고 술율평은 패자일 뿐이다. 그리고 태자 야율배는 나한테 의존하는 형편이니 말은 다했다.
“무엇을?”
“이대로 야율배에게 황위를 넘기겠소? 조용히 넘기면 더는 유혈사태가 없을 것이오.”
어차피 이제는 야율배말고는 달리 선택지도 없다.
야율덕광은 죽었고, 야율배는 태자이며 현재 강군을 보유한 조선왕인 내가 지지하고 있다.
그럼 다 끝난 거다.
거란의 귀족들? 이제 와 뭐 어쩔 것인가? 태자가 되어 동생의 반란을 제압했다고 천명하면 그만이다.
“이미 다 죽인 주제에!”
아니, 아직 살아 남아있다. 황실이 조금 남아있으며, 소온의 친부모도 살아남았다.
이왕이면 그들은 요동성으로 부를 참이다.
“그래도 야율배가 황위를 잇는다면, 내가 봐줄 수도 있소이다.”
“봐준다고?”
내 말에 심기가 거슬리기라도 한 것인지 면상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그렇소. 요나라의 명맥은 잇게 해주지. 그저 북방의 국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국가가 되겠지만.”
원역사처럼 대제국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안 둔다. 요나라는 그냥 북방의 강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국가가 될 것이고. 나는 그 나라를 뒤에서 조종하는 비선실세가 될 것이다.
“야율덕광은?”
“죽였소이다. 조사온과 같이 나란히 목이 잘렸지.”
“네이놈! 어떻게 그런 천인공로할 짓을 저지르냐! 역사가 너를 용서할 성 싶으냐?”
당장 신이란 작자가 나를 이곳에 보냈는데. 무슨 소리일까.
오히려 지금 이 장면을 본다면 그 여신은 상당히 기뻐할 것이다.
애초에 인간의 사상이나 가치관, 법따위는 의미가 없는 계급이 신이니까.
“원래 역사란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소?”
“나도 죽일 것이냐?”
죽이다니. 아무리 그래도 죽이지 않는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죽여서 감히 나에게 대항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본보기를 보이고 싶지만. 이미 피는 충분히 봤다.
“유감스럽게도 태자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 그럴 생각이 없소이다. 태자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오.”
굳이 내가 아니라 자식이 어미를 심판하는 것도 보는 맛이 있을 것이다.
“태자! 네 정녕 이 나라를 망치고 싶은 게냐!”
“이 모든 것은 어머니가 자초한 것이 아니오? 누군 이런들 싶었겠소? 본래 내가 태자였고, 내가 황제가 되어야 했소.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기어이 야율덕광을 세우려고 하다가 스스로 권력에 취하셨소이다!”
야율배. 말 한 번 잘한다.
그렇지. 원역사와 달리 결국 야율배는 황제가 될 길을 찾았다.
술율평이 멍청한 짓을 해준 덕이다.
“그렇다고 백제인인 조선왕의 도움을 받아!”
“한족관리들도 있는 마당에 조선왕이 뭐가 중요합니까? 심지어 조선왕이 끌고 온 군사의 절반은 거란족 출신이오!”
말 잘한다. 술율평 저 여자는 지금 자기 처지도 모르고 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오? 조선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거란군이 어째서 우리 대요의 민족이란 말인가? 내 이럴 까봐 네게 황위를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핑계도 저런 핑계가 없다. 다 큰 아들이 있음에도 순장당하기 싫어서 온갖 핑계를 대며 팔하나로 뻐긴 주제에.
“아주 말은 잘해요. 이보시오. 태후. 변명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결국 측천무후가 되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오?”
“무엄하다!”
무엄하기는 무슨. 이미 딱 각이 나오는데.
“자,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할 때요. 황위를 야율배에게 넘길 것이오? 아니면 이대로 정녕 더 피를 봐야겠는가?”
“설마. 조선왕. 황실까지 건드릴 셈인가?”
못할 것도 없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이참에 야율배를 황위에 올리려면 불손한 무리는 사전에 처리해야지.”
“불손하다니!”
“자, 그럼 어찌하겠소?”
방법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여기서 더 버티다가는 요나라가 무너지는 것도 알 것이고, 차라리 야율배에게 황위를 넘기는 것이 좋다고 여기겠지.
그나마 다행이다.
술율평이 계속 요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었으면 후일 발해와의 관계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없을 것이다.
“알겠네. 그리하지.”
술율평은 굴복하고 자기 아들에게 황위를 넘겨야만 했다.
“이제 모든 일이 잘 풀렸는데. 뭔가 뒤가 찝찝하오.”
그럴 수밖에. 기껏 황위 얻겠다고 동생까지 쳐가면서 점령했더니, 눈앞에 있는 것은 신체들만 있는 황궁이니까.
그래도 나에게 따질 수는 없다. 야율배는 내가 아니었으면 결국 죽을 목숨이거나 중원으로 갔을 테니까.
이 세계에서 나에게 붙은 것을 보면 중원에 붙기보다 나에게 붙는 것이 낫다는 현실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럼 조금은 도와줘도 되겠지.
“아무래도 이번 전투로 많은 것을 잃어서 그렇겠지.”
“잃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황궁이 너무 처참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전투 중에 저항하다 죽은 관리가 꽤되는 모양이네.”
거란족 출신의 중신들은 정말 많이도 죽었다.
남은 사람들은 한족들이 더 많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한족들이 요나라의 지배층이 될 것이다.
야율배가 싫다고 해도 그나마 머리 있는 거란족들도 다 죽어 나갔으니. 어쩌겠나.
“음, 확실히. 무슨 방법이 있소?”
“일단 한족 지식인들을 대거 등용하게.”
“이번 일로 죽은 한족도 많을 텐데?”
당연히 한족들만이 아니다. 한족들을 들인다는 것은 거란이 아닌 외부민족을 들인다는 것 그거 하나에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백제의 관리도 파견해주도록 하지.”
“그리해줄 수 있겠소?”
“나야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 그 대신 자네는 절대 요하를 넘어서 발해를 노리지 말게. 그 정도 약조는 할 수 있겠지?”
표면상으로는 절대로 요하를 넘지 않는 것. 그리고 의도치 않게 후백제의 지식인들을 요나라 조정에 넣는 것.
“이미 몇 번이나 논의된 일이 아니오? 당연히 그럴 것이오.”
“그리고 요나라가 키우는 튼튼한 군마들을 넘기게.”
이게 가장 중요하다. 전략물자라고 할 수 있는 군마.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강한 이유가 무엇인가. 필시 군마가 한몫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래도 꼴에 거란의 태자라고. 군마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쩌냐. 나는 그 군마가 필요하단다.
“못하겠나? 임황에서 죽은 내 병사들을 생각하게.”
“알겠소이다. 그리 하겠소.”
내 덕에 경쟁자를 제거하고 정적을 떨어트렸으면 기쁜 마음으로 말이란 말은다 내놓아도 부족한데.
“그리고 태후는 유배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유배라.”
“설마 황도에 내버려 둘 참인가?”
“그것은. 뭐 나한테 맡기기로 하지 않았소?”
야율배가 술율평을 잘 처리할 수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음, 알겠네. 하지만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바라겠네.”
“걱정마시오.”
야율배는 지금 조선왕인 내 덕에 황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본래 태자가 아니었다면 야율배는 아마 정통성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이참에 내 덕을 봐서 황위에 오른 탓에 나올 뒷말들도 있을 테니 요직들을 거 란족들로 채우지는 않겠지.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자 날개 떨어진 술율평은 그저 내게 씩씩거릴 뿐이었다.
“뭘 보고 싶은 얼굴이라고 또 찾아오셨습니까? 살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할 거면 자식새끼나 찾아가 보십시오.”
“자네. 결코 제명에 못 살 것이네.”
내 뒤에는 신이 있다.
“내가 제명에 살건 못살 건. 그건 당신과 상관없고,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서로 보기도 싫은 얼굴 그만 보잔 거요.”
“누가 할 소리를! 대체 우리 요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니, 발해에 대군을 보내놓고 자꾸 개소리하십니까? 댁들 때문에 삼한민족이 요동에 못나갈 뻔 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가 망해서 요동을 잃었다고 하는데. 나는 발해로 보고 있다. 당나라가 쇠퇴하자 야금야금 요동을 취한 발해다. 그런 발해가 요에 멸망했으니, 나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지.
“그게 무슨.”
“뭐 더 말해 무엇합니까. 어차피 거란의 촌년에 불과하지.”
이제 요나라는 단순히 북방의 강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나라가 되었다.
발해를 정벌할 주력군도 잃은 마당에 이번에는 임황까지 털렸으니, 야율배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어지간히도 힘든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도 중원이라면 아직 해볼 만할지도 모르지. 워낙 혼란스러운 때니까.
"이.이놈이!"
술율평은 끝에 미쳐버렸는지 나를 향해 악을 쓰다가 제풀에 못 이겨 쓰러졌다.